광룡기 24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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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672회 작성일소설 읽기 : 광룡기 240화
240화
사마성문이 백혜 대사와 돌아온 것은 오시가 지나 미시가 다 될 무렵이었다.
그기 간단하게 상황을 보고했다.
“은자 십만 냥을 주기로 하고 모든 일을 덮기로 했다.”
은자 십만 냥.
엄청난 금액이었다. 금자로 따져도 오천 냥이나 된다.
하지만 이무환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위지창화가 깨어나면 그 돈부터 내놓으라고 해야겠군요.”
그 말을 들은 사마성문이 눈살을 찌푸리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음, 일단 얼마라도 줘야 할 것 같은데…….”
그 말에 이무환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일단 내가 주면 어떨까?’
그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급하면 제가 일단 내놓죠.”
사마성문이 놀란 눈으로 이무환을 바라보았다.
“네가?”
“이래 봬도 알부자랍니다. 하, 하, 하! 물론 공짜로 줄 마음은 없습니다. 나중에 위지창화에게 받죠, 뭐.”
이자까지 톡톡히!
‘이자 받는 거야 당연한 거 아니겠어?’
2
위지창화가 깨어난 것은 그날 저녁이었다.
남궁산산과 놀고(?) 있던 이무환은 그 소식을 받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궁산산과 알콩달콩 좀 더 놀고 싶었지만, 위지창화에게 물어봐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밖으로 나가자, 저만치 어둠 속에 서있는 순우경의 뒷모습이 보였다.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달이 떠 있는 작은 연못을 바라보는 그녀는 연못가에 세워놓은 석상처럼 움직임이 없었다.
“어? 얼음꽃이잖아?”
“뭐 해요, 언니?”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린 후에야 순우경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바람이 시원해서…….”
달빛에 비친 그녀는 같은 여자인 남궁산산이 보기에도 아름다웠다.
남궁산산은 그래서 더 걱정이 되었다. 여자의 직감이 그녀의 마음 변화를 어렴풋이 눈치챈 것이다.
‘옥이 언니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안 돼!’
남궁산산은 입술을 살짝 깨물고 순우경에게 다가갔다.
이무환은 잠시 망설이다 남궁산산의 등에 대고 물었다.
“꼬맹아, 나 먼저 갈까?”
“그래요, 오빠.”
남궁산산이 의외로 순순히 대답하자, 이무환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위지창화가 누워 있는 방으로 향했다.
위지창화의 방에는 몇 사람이 먼저 와 있었다.
천태도장, 무설강, 사마성문, 호연청, 황보광, 제갈도, 백혜대사.
“어떻습니까?”
이무환이 위지창화의 침상으로 다가가며 묻자, 천태도장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신을 차리긴 했다만, 많은 이야기를 나눌 정도는 아니다.”
이무환은 위지창화를 내려다봤다.
나직한 숨소리를 따라 가슴이 미약하게 오르내리는 게 보였다.
“정신이 들었으면 몇 가지만 대답해 주쇼.”
위지창화의 눈꺼풀이 잘게 떨리며 반쯤 열렸다.
“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
들릴 듯 말 듯 나직한 목소리가 위지창화의 바짝 마른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이무환의 입가로 조소가 떠올랐다.
“위지가의 존속보다 묵운방이 더 중요한가 보군. 정말 대단한 충성심이야.”
심장에 바늘이라도 꽂힌 듯 위지창화의 눈꺼풀이 더욱 심하게 떨렸다.
이무환은 그런 위지창화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는 인내심이 별로 없수. 남들이 왜 나를 광룡이라 부르는지 아쇼?”
사람들이 이무환을 힐끔 쳐다보았다.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아는 대로, 모르는 사람들은 모르는 대로 궁금했다.
“나는 말이오, 가끔 나 자신조차 이해하지 못할 행동을 할 때가 있수. 한마디로 말해서, 미치면 제대로 확실하게 미친다는 거유.”
호연청은 그 밑에서 답답한 세월을 몇 달이나 보낸 사람이다.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건 내가 장담하지. 저놈은 정말 완벽히 미친놈이야.’
그사이 이무환이 담담한 표정으로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말해주면 순순히 떠날 거요. 하지만! 말하지 않으면 위지가는 끝장입니다. 묵운방에 대한 충성심의 대가로 완벽히 몰락하는 거죠. 선택은 당신이 하쇼. 뭐, 말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되고. 나는 아픈 사람에게 억지 대답을 강요할 만큼 독한 사람이 아니거든요.”
마지막 말에 사람들의 가슴이 서늘해졌다.
두렵게 느껴져서? 천만에! 뻥 뚫린 가슴에 헛바람이 든 것 같은 기분이 든 것이다.
말하지 않으면 위지가를 완벽히 몰락시키겠다고 한다.
저게 아픈 사람에게 할 말인가?
살 떨리게 독한 놈!
위지창화도 그런 마음인지 안간힘을 다해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러잖아도 파리한 입술이 잘게 떨렸다.
“너는… 대체…….”
그가 입을 열 때다. 이무환이 손을 들어 그의 말문을 막았다.
“아아, 쓸데없는 말 하느라 기력 낭비하지 마쇼. 말할 거면 고개를 끄덕이고, 하기 싫으면 고개를 저어요. 그럼 나도 그에 대한 조치를 취할 테니까. 아주 간단하죠?”
이무환은 그렇게 말하고, 뒤를 돌아다보았다.
사람들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무환이 그들에게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고개를 저으면 협상이 끝난 것으로 알고, 위지가와 관계된 모든 것을 깨끗이 정리하세요. 혹시라도 막는 사람이 있으면 사정 봐줄 필요 없습니다. 어차피 수백 명이 죽었는데, 몇 사람 더 죽었다고 표가 나겠습니까?”
어떻게 저런 말을 저리도 담담하게 할 수 있을까?
그제야 사람들은 광룡이 왜 광룡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때 위지창화의 목소리가 그르륵거리는 소리와 함께 마른 목구멍에서 흘러나왔다.
“뭘 말하라는…….”
“아하, 고개로 의사표시를 하라니까요?”
위지창화의 창백한 얼굴에 붉은 기가 돌았다.
“해, 했는데… 네놈이… 못 봐서…….”
3
사흘째 되던 날, 천목검제(天目劍帝) 장천립이 천목산장의 무사 일백 함께 도착했다.
그리고 사흘 후, 황산검문의 제자 팔십이 명이 소주에 도착했다.
소천장에 집결한 무사들이 육백에 다다른 상황.
더 이상 묵운방의 역공을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자, 이무환은 주요 간부 몇 명을 불러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저와 몇 사람이 몰래 양주로 가서 저들의 동향을 파악해 볼 생각입니다.”
천태도장이 염려스런 표정을 지었다.
“꼭 네가 갈 필요가 있느냐?”
“단순히 정보만 얻고 동향을 파악하는 거라면 다른 사람을 보내도 충분해요.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고요. 하지만 그들만으로는 핵심정보를 얻을 수 없어요.”
묵운방의 실체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기대했던 위지창화도 단편적인 것만 알고 있었을 뿐. 아니, 오히려 위지창화의 말을 듣고 묵운방의 실체가 더 모호해졌다.
적을 알지 못한 채 싸울 수는 없는 일.
구룡성과 천마교의 일을 겪은 이무환은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묵운방주 우문적태, 그를 정확히 알지 않고는 아무것도 확실한 것이 없어.’
“그럼 고수 몇 사람을 보내서 알아보면 되지 않겠느냐?”
자신도 그러면 편했다.
문제는, 그의 모든 것을 알아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이 자신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저도 그러고 싶은데, 자칫하면 쓸데없는 희생만 생길 뿐이에요. 너무 걱정 마세요, 도장님. 그들이 아무리 사납다 해도 제 한 몸 지킬 정도는 되니까요.”
천하에서 광룡을 어찌할 사람이 없다는 걸 이곳에 있는 모두가 안다. 그러나 그것은 일대일일 경우의 이야기였다.
“으음, 네 생각이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만…….”
이무환은 가볍게 웃으며 천태 도장을 안심시켰다.
“하, 하. 너무 걱정 마세요. 혼자 가지는 않을 거니까요. 그리고 정 안 되겠으면 도망치죠, 뭐.”
그때 우내혁이 이무환을 째려보며 물었다.
“놈들이 철저히 감시하고 있을 텐데, 가능하겠나?”
“소수라면 저들의 감시망을 피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거요.”
호연청 등 몇 사람은, 불문곡직하고 광룡과 멀리 떨어진다는 것만으로도 반가웠다.
말투에도 그 기분이 그대로 묻어 나왔다.
“그래, 몇 명이나 데려갈 생각인가?”
이무환은 호연청을 향해 씩 웃으며 대답했다.
“다섯 명 정도면 적당할 것 같은데요.”
“누구를… 데려갈 생각이지?”
호연청이 약간 불안해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자신의 이름이 그 안에 들어가면 좋던 기분이 싹 달아나고 짜증만 탑처럼 쌓일지 몰랐다.
다행히(?) 이무환이 꼽은 다섯 사람의 이름에 그는 들어가지 않았다.
그가 꼽은 다섯 사람은 영호승, 제갈신걸, 모용상명, 순우경, 그리고 남궁산산이었다.
영호승은 지리를 잘 안다는 점 때문에, 제갈신걸과 모용상명은 호위로, 순우경은 좀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어서, 남궁산산은 여우같은 머리가 필요할지 몰라서 뽑은 것이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었지만, 그것은 말하지 않았다.
호연청은 내심 안도하면서도 모두가 젊은 사람인 것을 알고 지나가듯이 중얼거렸다.
“다 젊은 사람들이군.”
이무환이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나이 든 사람이 섞인 것보다 보기가 좋잖수.”
이무환에게 그동안 ‘영감’으로 불린 사람들은 속으로 콧방귀를 뀌고는, ‘흥, 너는 안 늙을 줄 아냐?’ 그런 표정을 지은 채 이무환을 노려보았다.
그러면서도 악귀, 광룡과 잠시 헤어진다는 것으로 쓰린 속을 달랬다.
다음 날 아침, 이무환은 다섯 사람과 함께 남쪽 문을 통해 소천장을 나왔다.
오랜만에 소천장을 떠나 밖으로 나오니 공기부터 다르게 느껴졌다.
“으아! 날 좋다! 자, 가자고!”
4
이무환 일행은 배를 타고 강남운하를 따라 북행해서 무석(无錫)까지 갔다.
소주에서 무석까지 백 리 길. 육로로 가는 게 더 빠를 수도 있지만, 혹시 모를 감시자의 눈을 피하기에는 배를 이용하는 게 더 나았다.
미시 무렵, 무석에서 내린 일행은 뒤늦은 식사를 마친 후 곧바로 강음(江陰)으로 향했다.
강음까지도 운하가 만들어져 있었지만 이번에는 배를 이용하지 않았다.
배를 타면 시간이 너무 걸렸다. 여차하면 강음에서 발이 묶여 다음 날 아침까지 기다려야 할지도 몰랐다.
게다가 사월의 날씨가 너무 좋아서 배에만 있기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운하의 둑을 따라 강음으로 향한 지 두 시진.
황혼이 장강을 황금빛으로 물들이기 직전, 마침내 일행의 눈에 바다나 다름없는 거대한 물줄기가 보였다. 장강이었다.
드넓은 장강에 감탄한 일행은 도강하기 위해서 강음으로 들어갔다.
장강이 워낙 넓다 보니 상시적으로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배가 성업했다. 강음처럼 큰 마을에는 당연히 더 많았다. 다만 한 가지 문제는 시간이 너무 늦었다는 것이었다.
물론 도강하는 배가 끊겼으면 배를 세내어 건널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칫 적의 감시망에 걸릴 확률이 높았다.
“일단 선착장으로 가보자고.”
“예, 단주.”
영호승이 서둘러 일행을 선착장으로 안내했다.
금빛으로 물든 선착장에는 수백 척의 크고 작은 어선이 정박해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영호승이 손을 들어 한곳을 가리켰다.
“저기 있습니다.”
상당히 많은 사람이 탄 배가 보였다. 모두 양민들인 걸로 봐서 도선(渡船)인 듯했다.
그런데 일행이 배로 다가갈 때였다. 배 근처에 있던 장한들이 예리한 눈빛을 빛내며 이무환 일행을 바라보았다.
뭔가 탐색하는 눈빛.
‘묵운방의 정보원들인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이무환은 두 장한과 가까워지자 갑자기 버럭 소리쳤다. 인상까지 써가며.
“뭘 봐! 꼬맹아, 이리 와라! 저 늑대 같은 놈들이 너를 노리는갑다!”
“뭐, 뭐라고?”
두 장한은 뭐 저런 놈이 있나, 하는 눈빛으로 이무환을 바라보며 입을 반쯤 벌렸다.
“어디서 허튼수작을 부리려고? 확! 그냥! 본 공자가 오늘은 바빠서 그냥 간다만, 다음에 만나면 가만 안 둬!”
눈을 부릅뜬 이무환은 그들을 도둑놈 쳐다보듯 하며 스쳐 지나갔다. 남궁산산은 아예 이무환의 팔을 잡고 두려워하는 표정을 한 채 종종걸음을 옮겼고.
영호승이 재빨리 말을 맞췄다.
“공자. 저놈들, 아무래도 강도들 같은데, 목을 부러뜨려 버릴까요?”
“놔둬, 배 타야 되는데, 부정 타면 가라앉을지 모르잖아.”
제갈신걸과 모용상명도 상황을 눈치채고, 천당객잔에서 봤던 건달처럼 눈을 위아래로 흘기며 뒤를 따라갔다.
두 장한은 똥 밟은 표정을 지은 채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퉤!”
“지미, 어째 일진이 안 좋더라니…….”
저런 미친놈이 정천무림맹의 무사일 리가 없었다. 더구나 전시나 다름없는 지금, 여자들을 데리고 놀러 다닌다는 것은 더욱 말도 안 되었다.
순우경은 그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렸다.
‘좌우간 재미있는 사람이야.’
그렇게 감시를 따돌린 일행이 강 건너편 정강에 도착할 즈음, 석양이 검게 타들어가며 어스름이 지기 시작했다.
배에서 내린 이무환은 더 이상 감시의 눈길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북쪽으로 방향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