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룡기 23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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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14회 작성일소설 읽기 : 광룡기 236화
236화
이무환은 짐짓 너스레를 떨며 걸음을 옮겼다.
“하, 하, 하. 이렇게 둘이 나란히 가니까, 남들이 보면 연인이라고 생각하겠는데요?”
연인?
겨우 추스른 순우경의 마음이 흔들렸다.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 이무환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팔자걸음으로 정문을 넘어섰다. 그리고 약간의 간격을 두고 열한 명이 장원으로 들어갔다.
삼층 전각에서 구불구불 이어진 회랑은 제법 길어서 길이가 이십 장에 가까웠다.
영호승은 회랑 끝에 있는 평범한 건물로 이무환 일행을 안내했다.
그곳까지 가는 동안 본 사람이라고는 정문을 열어준 노인과 시녀로 보이는 중년 여인이 전부였다.
이무환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영호승에게 물었다.
“오가는 사람이 왜 이렇게 없지?”
“잠시 동안만 사람의 왕래를 금해달라 했습니다.”
“주인과 잘 알아?”
“예, 단주. 오래전, 아버님 밑에 계셨던 분입니다.”
대답하는 영호승의 얼굴에 잔잔한 파장이 일었다.
그는 숨을 한번 몰아쉬고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간단하게 사정을 설명했다.
“아버님께 큰 은혜를 입은 적이 있지요.”
장원의 주인은 원자욱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영호승의 선부인 영호수민 덕분에 가족의 목숨을 구한 적이 있었다.
영호승이 만났을 때, 그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더니 오늘의 도움으로 더 이상 은혜에 연연하지 않겠다고 했다.
영호승은 그를 이해했다. 그나마 예전의 은혜를 생각해 도움을 준 것이 고맙기만 했다.
그런데도 왠지 씁쓸했다. 그래도 한때 백부처럼 따랐던 사람이거늘.
‘후우, 백부님도 그만큼 힘들었던 거겠지. 그동안 본가의 사람이었다는 것 때문에 핍박을 받았을 테니…….’
그렇게 앙금을 털어버린 영호승은 문을 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본래 영호가의 사당이었던 곳인데, 지금은 창고처럼 쓰는 듯했다.
영호승은 착잡한 표정을 억지로 펴고서 위패를 올려놓는 단을 한쪽으로 밀었다.
그 뒤쪽은 단순한 벽처럼 보였다. 그런데 영호승이 힘주어 밀자, 먼지가 우수수 떨어지면서 벽이 밀리더니 어두운 통로가 드러났다.
“출구가 있는 삼운장은 위지가의 소천장과 삼십 장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출구가 막히지 않았나 하는 것이 걱정이긴 합니다만.”
삼운장은 본래 영호가의 부속 장원이었던 곳이다. 위급 시 장원을 빠져나갈 비밀 통로를 그곳과 연결시켜 놓은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사 년이 지났다. 그곳도 주인이 바뀌었다고 했다. 출구가 막히지 않았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단 말인가.
이무환이 그 고민을 간단히 해결했다.
“막혔으면 부수고 나가지, 뭐.”
통로의 입구에는 비상시 사용하기 위한 등이 하나 매달려 있었다.
영호승은 등의 기름을 확인해 보고는, 화섭자로 불을 붙였다.
“가시죠.”
통로의 길이는 백 장 정도 되었다.
막다른 곳에 도착한 영호승이 벽을 더듬어서 고리 하나를 찾아냈다.
그런데 힘을 주어 밀어도 꿈쩍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뭔가 이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영호승의 말에 이무환이 나섰다.
“멋쟁이, 비켜봐.”
영호승이 옆으로 비켜선 순간, 이무환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더니, 냅다 벽을 향해 발을 내질렀다.
옆에서 누가 말릴 틈도 없었다. 말리려 했을 때는 이미 이무환의 발바닥이 석문을 후려 찬 후였다.
쾅!
석문이 굉음과 함께 부서지며 앞쪽으로 밀려 나갔다.
“열렸네, 뭐.”
석문은 사람이 충분히 빠져나갈 정도로 열렸다. 그래도 누구 하나 이무환에게 잘했다고 하지 않았다.
와르르르…….
석문 바깥에서 천둥소리가 난다. 얼핏 사람 몸뚱이만 한 바위들이 굴러가는 게 보인다.
“저, 단주. 소리가 너무 커서 순찰 돌던 놈들이 몰려올지 모르겠는데요.”
“제길, 아무래도 소리가 조금 컸지?”
그게 조금 큰 거냐? 천둥이 치는 것 같았는데?
뒤에 늘어선 사람들은 눈빛으로 이무환을 토막 낼 듯이 노려보았다.
하지만 이무환은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뭐 하는 거요? 놈들이 올지 모르니 빨리 나오쇼.”
그게 누구 때문인데?!
사람들은 불만이 많았지만, 지금은 말싸움할 때가 아니었다.
멀리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 뭐야? 이게 무슨 소리지?”
“하늘도 맑은데 벼락이 떨어졌을 리도 없고…….”
“적일지 모른다! 가서 확인해 봐라!”
장원 안에서만 들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위지가의 무사들이 소란의 원인을 확인하기 위해 오는 듯했다.
밖으로 나오자 어둠 속에 흩어져 있는 수십 개의 바위가 보였다. 정원석이었다. 아마도 장원을 가꾸기 위한 정원석을 출구 앞에 모아놓았던 듯했다.
이무환은 정원석 하나를 밟고 신형을 날렸다.
“자, 한바탕 미친 짓 하러 갑시다!”
‘정말 못 말릴 사람이야.’
순우경이 입가에 미미한 웃음을 매단 채 뒤를 따라갔다. 나머지 사람들도 속으로 한숨을 쉬며 삼운장을 빠져나갔다.
담장을 넘으니 악룡처럼 웅크리고 있는 야산이 보였다. 그 야산 아래에는 거대한 장원이 군데군데 불을 밝힌 채 들어서 있었다.
거리는 삼십여 장. 영호승이 말한 소천장이었다.
이무환은 삼운장을 향해 달려오는 무사들을 상대하지 않고 그대로 날아 넘었다. 그러고는 무사들이 멈칫하는 사이, 곧바로 앞에 보이는 담장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그때 뒤따라가던 영호승이 소리쳤다.
“단주! 그 너머에는 제법 큰 연못이 있습니다! 조심하십시오!”
그의 기억대로라면 깊이도 상당히 깊었다.
‘이씨! 진작 말하지!’
화들짝 놀란 이무환은 연못을 차고 오르며 방향을 틀었다.
그러고는 곧장 소천장으로 들어간 열세 명의 고수와 합류해 중앙으로 쳐들어갔다.
2
위지창화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이게 무슨 소리지?”
방 안에 있던 여섯 사람도 눈살을 찌푸리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방문 밖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가주! 적의 공격입니다!”
“뭐야? 저 소란이 적의 공격 때문이라고?”
위지창화가 벌떡 일어섰다. 방 안의 여섯 사람도 의자를 밀치고 일어났다.
그때 방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들어왔다. 순찰당의 당주인 위지공이라는 자였다.
위지창준이 굳은 표정으로 위지공에게 물었다.
“어찌 된 일이냐?”
“저희도 당황스럽습니다. 놈들이 십 리 밖에 있다는 말을 조금 전에 들었는데, 갑자기 이곳에 나타나다니…….”
위지창화는 위지공을 노려보았다.
“순찰당의 잘못은 차후에 묻겠다. 침입한 자가 몇이나 되느냐?”
위지공이 머뭇거리며 답했다.
“십여 명… 정도입니다.”
순간 위지창화의 얼굴에 어이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겨우 그들 때문에 이 난리란 말이냐?”
“그게… 보통 고수들이 아닙니다. 양명전의 무사 삼십 명이 순식간에 무너졌습니다, 가주.”
“뭐야?”
“그게 사실인가?”
한쪽에 서 있던 오십대 초반의 흑염중년인이 급변한 얼굴로 반문했다.
그는 묵운방의 지원무사를 이끌고 온 관귀선이란 자였다.
양명전이라면 묵운방에서 지원 나온 무사들이 머물고 있는 곳.
상대가 절정고수라 해도 십여 명이라면 그들 삼십으로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순식간에 무너졌다고?
뒤늦게 심각성을 느낀 위지창준이 다급히 말했다.
“형님, 빨리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고는 위지청에게 빠르게 명을 내렸다.
“비상령을 발동하되, 외곽의 무사들은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고 전해라! 놈들이 양면 공격을 할지 모르니까!”
“예, 단주!”
“안에 있는 놈들 다 나와!”
이무환이 악을 썼다.
그를 열세 명의 고수는 방원 십 장의 원을 이룬 채 정말 미친 듯이 상대를 공격했다.
자신들을 제외한 모두가 적이다.
도검을 들고 덤비거나, 노려보며 인상 쓰는 놈은 무조건 때려잡으면 되니 공격하기도 편했다.
다만 그 와중에도 원형의 진세는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쒜에에엑! 쉬쉬쉬쉭!
이무환의 무영뢰가 어둠을 갈랐다.
헌원숭의 활이 살도 없이 튕겨졌다.
어둠을 찢는 파공성이 일 때마다 적들이 허수아비처럼 쓰러졌다.
호연청의 백색 장영이 어둠 속에 백매화처럼 피어나고, 소천득의 수강이 칼날처럼 일 장 안을 난도질했다.
황보광의 권강이 만 근 바위처럼 상대를 짓누르고, 우내혁과 무설강과 공손척의 검강이 포효를 할 때마다 적들의 허리가 태풍을 만난 수수깡처럼 꺾어진다.
누구 하나 고수 아닌 자가 없었다.
순우경의 천녀소수가 한겨울 한풍처럼 장내를 휩쓸었다.
제갈신걸과 모용상명과 화무결과 사마강은 비슷한 나이. 그들은 서로에게 지지 않겠다는 듯 폭풍이 되어 적을 몰아붙였다.
심지어 영호승조차 혼신을 다해서 항주에 남아 있는 동료들의 몫을 다했다.
드넓은 대연무장의 중앙에서 태풍의 눈이 천지를 뒤집을 것처럼 휘돌았다.
강기의 우박의 쏟아지고, 절대의 기운이 회오리쳤다.
콰르르릉! 콰과광! 쩌저적!
천둥벼락과 함께 휘몰아치는 광풍!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과 악다구니!
사지가 꺾여서 튕겨진 자가 나뒹굴며 피가 튀었다.
어둠이 진저리쳤다.
뇌리를 송곳으로 찌르는 공포가 소천장에 질펀하게 흘렀다.
무영뢰를 거두어들인 이무환은 묵린도를 빼 들었다. 그러더니 말 그대로 광룡이 되어 좌충우돌하기 시작했다.
“어떤 새끼든 다 덤벼 봐!”
위지창준은 눈을 부릅뜨고 대연무장을 쳐다보았다.
‘마, 맙소사!’
경충문과 위지호천, 백가위가 이구동성으로 한 말이 있었다.
-적은 짐작과 추측만으로 상대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네.
-일반적인 판단만으로 상대하면 절대 안 됩니다.
-그놈들을 제 정신으로 상대하면 안 되네.
솔직히 그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항주의 싸움에서 패한 후 겁쟁이들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결코 겁에 질린 자들의 헛소리가 아니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콰아아아아!
하늘의 수레바퀴가 대연무장의 중심에서 돌고 있었다.
소천장에 있는 어느 누구도 수레바퀴에 접근하지 못했다.
저들이 나타난 지 반의반 각, 쓰러진 자가 벌써 백수십 명에 이르렀다. 바라보고 있는 사이에도 이십여 명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과, 광룡입니다, 숙부!”
그의 뒤쪽에서 위지호천이 겁에 질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경충문도 이를 악물고 명을 내리듯 말했다.
“위지 단주, 쳐다보고 있을 때가 아니네! 전력을 쏟아부어서 저놈들을 제거해야 하네! 저놈들을 제거하지 못하면 이길 수 없어!”
전이었다면 속으로 코웃음 쳤을 것이다. 기껏 십여 명을 상대로 수백 명의 정예무사들이 달려들어야 하다니!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그의 눈이 멈춘 곳에는 백가위와 관귀선이 이를 악문 채 서 있었다.
“백 장로님과 관 장로님께서 수하들과 함께 우측을 치십시오! 저희 적운단이 좌측을 치겠습니다!”
관귀선이 눈에서 살광을 뿜어내며 잇새로 대답했다.
“알겠네!”
관귀선의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위지창준이 적운단의 무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적운단은 좌측을 친다! 가자!”
묵운방의 간부들은 물론이고, 최정예무사들이 모조리 투입되었다.
그 숫자는 무려 삼백.
그들은 세 겹, 네 겹으로 넓게 둘러싼 채 연환 공격을 펼쳤다.
한 사람당 서너 명의 합공은 보통이었다. 간혹 대여섯 명이 한꺼번에 달려들기도 했다.
한두 명이 피를 토하며 튕겨지는 사이 서너 명이 찰나간에 보인 틈을 비집고 달려들었다.
모두가 일정 경지에 오른 고수들. 게다가 상당수는 절정고수들이다.
이무환 일행은 광기에 가까운 공격을 하며 그들을 몰아붙였다.
늦추면 고립된다. 고립되면 절대지경의 고수라는 그들조차 생사를 장담할 수 없었다.
“와하하하하! 얼마든지 덤벼라! 오늘 제대로 미쳐볼 테니까!”
광룡의 광소가 천둥소리처럼 소천장을 뒤흔들었다.
다른 사람들도 그 이상으로 미친 듯이 광란을 춤을 추었다.
“가세!”
천태 도장의 일갈에 일백의 무사가 일제히 땅을 박찼다.
그들이 움직이자 나머지 삼백 무사도 소천장을 향해 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급박한 호각 소리가 소주의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삐이익! 삐익!
단 열네 명에 의해 이백에 가까운 넘는 무사가 쓰러졌다.
그것도 최고의 정예무사들이, 단 일각 만에!
한쪽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던 경충문의 턱이 잘게 떨렸다.
“말도 안 돼!”
위지창화도 믿어지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강하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외곽에서 호각 소리가 울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위지창화가 악을 쓰듯 소리쳤다.
“놈들이 온다! 비격당과 동천당은 외곽을 방어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