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룡기 224화
무료소설 광룡기: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11회 작성일소설 읽기 : 광룡기 224화
224화
자신의 성은 ‘호’씨가 아니라 ‘호연’씨다. 어쩌면 그래서 더 화가 나는 것일지도 몰랐다.
감히 자신의 성을 바꾸다니!
하지만 어쩌겠는가. 화를 내봐야 자신만 속 좁은 놈이 될 텐데.
‘호 씨나 호연 씨나. 속 좁게 뭐 그런 걸로 따져요?’
그렇게 말하고도 남을 놈이 광룡이었다.
“알겠네.”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대답한 호연청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맞은편에 있던 황보광이 입에서 찻잔을 떼고 말했다.
“다녀오시게나.”
‘후우, 다행히 나는 찾지 않는군.’
그도 ‘황보 영감!’이라는 말을 들었으면 호연청이나 같은 생각을 했을 텐데. 다행이었다.
덜컹.
문을 열고 들어간 호연청은 이무환을 쏘아보았다.
그러고는 곧 자신을 ‘호씨 영감’으로 불리게 한 두 원흉(?)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하, 하. 어서 오십시오. 이분들이 믿.을.만.한. 분을 보자고 하는군요.”
유난히 ‘믿을 만한’을 강조하는 이무환이다.
호연청은 얄미운 이무환의 얼굴을 한 대 후려쳐 주고 싶었지만, 친다고 맞을 사람이 아니란 것을 알기에 꾹 참았다.
대신 제갈도를 노려보며 자신의 이름을 힘주어 말했다.
“나, 호연청이네. 왜 이 친구의 말을 못 믿어서 나까지 나오게 하는가?”
제갈도가 허리를 세우고 눈에 힘을 주었다.
“성함이 호연청이라 하셨습니까?”
“맞네.”
“뉘신지…….”
“…….”
구룡성에 처박혀 산 지 이십 년 세월이다. 더구나 반쯤은 비밀에 가려진 이름이 아닌가.
모른다 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때 이무환이 고개를 모로 꼬고 물었다.
“정천무림맹의 대백검단주가 모른다는데요? 혹시… 저에게 거짓말하신 거 아뇨?”
호연청의 얼굴이 벌게졌다.
“나는 자네에게 거짓말한 적 없네.”
“그런데 모른다잖아요.”
“세월이 너무 오래되어서 그런 거겠지.”
호연청이 대답하며 칼 같은 눈빛으로 제갈도를 쏘아보았다.
그 눈빛에 제갈도의 어깨가 떨렸다.
‘어, 엄청난 고수! 대체 이자가 누군데……?’
바로 그때, 이무환이 영 못미덥다는 투로 호연청을 흘겨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정천무림맹의 단주가 정천총령주의 이름도 모른다 말입니까?”
“곧… 생각날 거네.”
그랬다.
정천총령주라는 말을 듣는 순간, 제갈도의 어질어질한 머릿속에서 오랜 세월에 묻힌 이름 하나가 툭 튀어나왔다.
“그, 그럼 귀하가… 이십 년 전 특수 임무를 띠고 맹을 떠났다는, 정천총령주 호연… 대협이란 말씀입니까?”
“왜, 안 믿어지나?”
팽무가 용감하게 나섰다.
“나는 믿을 수 없소. 정천총령주께서 왜 흑도무리와 놀아나는 악귀와 함께 있단 말이오?”
발끈한 호연청이 손을 치켜들었다.
‘이 빌어먹을 놈들이!’
굳이 많은 말이 필요 없었다. 무인은 말보다 검을 보고 상대를 더 잘 알아보는 법.
호연청의 손이 순식간에 하얗게 물들며 영롱한 빛을 발했다.
“배, 백령천존수!”
그걸 본 제갈도가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소리쳤다.
동시에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취했다.
“백검단의 단주 제갈도가 정천총령주를 뵈오이다!”
팽무도 창백한 얼굴로 털썩 무릎을 꿇었다.
“팽무가 정천총령주께 인사 올립니다!”
호연청은 이대로 두 사람의 머리에 작은 손자국을 하나 내줄까 생각했지만, 인내심을 발휘해서 분노를 가라앉혔다.
‘이게 다 저 미친놈 때문인데, 이들에게 화를 낼 이유가 없지.’
하지만 이무환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
“이상하군. 백령천존수를 본 적이 없을 텐데, 저게 진짜 백령천존수인 것은 어떻게 믿지? 그냥 흉내만 낸 것일지도 모르잖아?”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그 말에 제갈도의 눈이 흔들렸다.
팽무도 살짝 눈을 올리고 호연청을 바라보았다. 약간은 의심이 깃든 눈빛으로.
이를 으드득 간 호연청이 백령천존공이 가득 실린 손을 들어 올렸다.
“머리를 반쯤 부숴놓으면 믿겠지.”
순간, 가공할 기운이 제갈도와 팽무를 내리눌렀다.
몸을 통째로 터뜨릴 듯한 압력!
대경한 제갈도와 팽무가 다급히 소리쳤다.
“제가 어찌 총령주를 의심하겠습니까?”
“믿습니다! 총령주!”
잠시 후, 방 안의 분위기가 가라앉자 이무환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약속한 것 잊지 않으셨죠?”
제갈도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호연청과 이무환을 번갈아 보았다.
이무환이 부하취급하기 전에 호연청이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지키게나.”
호연청까지 나서서 그러니 제갈도로선 다른 방도가 없었다.
하지만 무조건 따르기엔 호연청의 태도가 마음에 걸렸다. 그는 전음으로 호연청의 뜻을 확인해 보았다.
<정말 그래도 되겠습니까?>
<지금은 그게 최선이네. 우리의 존재가 밝혀지면 어떤 식으로든 적의 귀에 들어갈 것이네. 적이 우리의 존재를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게 낫지 않겠나?>
제갈도는 우매한 자가 아니었다. 그 말만으로도 상황을 눈치채고, 호연청의 계획(?)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아! 그래서… 그런데 우리라 하시면, 몇 분이나 계십니까?>
<나까지 일곱 명이네.>
호연청은 이무환이 눈치채기 전에 빠른 말투로 밀천회 사람들의 이름을 말해주었다.
제갈도의 눈이 점점 커지더니, 나중에는 튀어나올 것처럼 불거졌다.
<우리만 있는 게 아니네…….>
호연청이 광룡에 대해 말하려 한 순간, 전음을 보내던 호연청의 몸이 급살이라도 맞은 듯 딱딱하게 굳었다.
머릿속에서 이무환의 목소리가 울린 것이다.
<아직 나나 구룡성 사람들에 대해선 말하지 마쇼. 구룡성이 끼어들었다는 걸 알면 일이 더 복잡해질지 모르거든요.>
‘헉! 뭐, 뭐야? 서, 설마 전음을……?’
남궁산산과 함께 음양구전공을 부단히(?) 펼친 결과 내력도 회복하고 무위도 한 단계 올라섰다. 그때부터 마음만 먹으면, 상대의 전음마저 엿들을 수 있었다.
이무환은 경악한 호연청에게 눈을 찡긋하고는, 제갈도를 향해 입을 열었다.
“자, 그럼 그렇게 하기로 하고…… 가시거든 이거 하나만 분명히 말해주쇼.”
“뭘… 말인가?”
“검운장을 무시하면 꿈자리가 사나워질 거라고 말이오.”
“……?”
제갈도는 잠시 이무환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호연청은 즉시 그 말을 알아들었다.
‘꿈속에서까지 광룡이 나타나면 미칠 일이지…….’
3
유철상과 신기영과 덩치, 대웅은 특별히 배려한 말을 타고 부양으로 달려갔다.
칠십 리 길을 달려 두 줄기 산맥이 시작되는 초입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어둠이 세상을 집어삼킨 후였다.
세 사람은 산맥 초입에 말을 놔두고, 소롯길을 따라서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그렇게 이십 리를 가자 삼십여 호의 촌락이 보였다.
세 사람은 멀리서 조심스럽게 마을을 살폈다.
한참 만에야 유철상이 고개를 저었다.
“여긴 없군.”
대웅이 어둠에 잠긴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십 리쯤 더 들어가면 훨씬 큰 마을이 있습죠. 천 명이라면 그곳에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요.”
마을은 대웅의 말대로 십 리쯤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오 리도 가기 전, 유철상이 재빨리 몸을 낮추고 손을 들어서 두 사람을 멈추게 했다.
신기영과 대웅이 뒤따라 몸을 낮추자, 유철상이 대웅에게 나직이 물었다.
“근처에 몸을 숨길만한 곳이 있느냐?”
대웅은 고개를 끄덕이며 속삭이듯이 말했다.
“저쪽에 동굴이 하나 있습니다요.”
“그럼 너희 둘은 그곳에 숨어 있어라. 아무래도 앞쪽에 무사들이 있는 것 같다.”
유철상은 그 말만 남기고 앞으로 나아갔다.
밤에 산길을 많이 다녀본 듯 소리 없이 숲을 헤집고 가는 그는 한 마리 호랑이 같았다.
대웅은 신기영의 옷깃을 잡아당겨 동굴로 인도했다.
그사이 유철상은 이백여 장을 더 간 후 걸음을 멈추었다.
역시 느낌이 옳았다.
세 사람이 잡담을 나누며 서 있는데, 멀리서 봐도 무사임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대웅의 말대로라면 마을까지는 아직도 삼 리는 더 가야 한다.
그전에 경비무사가 배치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적의 경계가 삼엄하다는 뜻.
‘마을까지 가려면 위험을 감수해야겠군.’
유철상은 세 명의 경비무사가 서 있는 곳을 빙 돌아 마을 쪽으로 접근했다.
곧 별이 땅에 떨어진 것처럼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불빛이 보였다.
대웅의 말처럼 상당히 큰 마을이었다.
이런 산맥 속에 저렇게 큰 마을이 있다니.
유철상은 마을 외곽에서 오십여 장 떨어진 곳까지 접근하고는 조심스럽게 마을을 살펴보았다.
일반적인 사합식의 집이 있는가 하면, 처음 보는 괴상한 집도 있었다. 아니, 집이라기보다는 성채에 가까운 건물이었다.
괴상한 그 건물은 흙을 쌓아 성채처럼 둥글게 만들어져 있었다.
직경은 무려 십오 장 정도. 높이는 대충 봐도 사오 장은 되어 보였다. 거대한 건물이 사오 층으로 이루어졌다는 말이다.
‘꼭 작은 성 같군.’
본래 복건성 쪽의 산지에 많이 지어지는 토루(土樓)였는데, 밤에 산에서 내려오는 짐승들이나 외적을 막기에는 효율적인 건물이었다.
‘저 정도면 한 채에 이삼백 명도 기거할 수 있겠군.’
그러한 토루가 네 채다. 거기에 일반 집도 상당수고, 제법 큰 장원도 있었다. 천 명이 아니라 그 이상도 너끈히 생활할 수 있을 듯했다.
유철상은 바짝 긴장한 채 오가는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길은 건물과 건물 사이로 복잡하게 얽혀 있었는데, 오가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다.
‘엄청나군. 들었던 것보다 더 많은 것 같은데?’
유철상은 일각가량 살펴보고는, 이를 지그시 악물고 마을로 다가갔다.
무사들의 복장이 각양각색이었다.
하나의 문파에 속한 자들이 아니라는 말. 적어도 삼 개 문파 이상이 뭉쳐 있는 듯했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유철상에게는 커다란 틈으로 느껴졌다.
마을과 가까워지자 오가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듯했다.
그렇게 삼십여 장 나아갔을 때다.
“이봐, 어디 갔다 오는가?”
저만치 지나가던 자가 유철상을 보고 물었다.
유철상은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뒤 좀 보고 왔소.”
“너무 멀리 가지는 말게. 내일 아침에 출동한다고 하니 일행들과 함께 있도록 하고.”
“알겠소이다.”
내일 아침 출동한다고?
목표야 물을 필요도 없었다.
‘젠장, 시간이 없군.’
그렇다고 이대로 돌아서 떠날 수도 없었다. 들어온 김에 좀 더 많은 것을 알아내야 했다.
저들은 자신이 적인 줄도 모르고 있지 않은가.
마을 안쪽의 경비는 그리 심하지 않았다. 촌장의 집으로 보이는 장원 근처만 삼엄할 뿐, 다른 곳은 따로 경비무사가 없는 듯했다.
하긴 적의 침입만 없다면 따로 경비를 설 것도 없을 것이었다.
‘저곳에 수뇌들이 머무는 것 같군.’
유철상은 일단 장원으로 접근하지 않고, 괴상하게 생긴 건물, 토루의 옆을 지나가며 곁눈질로 안쪽을 살펴보았다.
건물은 사층이나 되었고, 안쪽에는 또 다른 원형 건물이 지어져 있었다. 적어도 사오십 가구가 생활할 수 있을 듯했는데, 지금은 온통 무사들뿐이었다.
한데 그가 세 번째 토루를 살필 때였다.
토루 안에서 서너 사람이 나오는 게 보였다. 그들과 눈이 마주친 순간, 그는 자연스럽게 돌아서며 옆길로 걸어갔다.
갑자기 심장이 고동쳤다.
긴장해서가 아니다. 토루에서 나온 자들, 눈에 익은 복장과 기세였다.
유철상이 기억을 떠올린 것은, 골목길의 어둠 속으로 들어간 직후였다.
‘설마… 잠풍련 놈들?’
그는 다급히 골목길을 통과했다. 순간 앞쪽이 트이며 저만치 화톳불이 보였다. 장원 앞이었다.
장원 앞의 화톳불 옆에는 모두 다섯 명의 무사가 있었는데, 지위가 높은 자인 듯 보이는 자가 네 명의 무사에게 뭔가를 지시하던 중이었다.
그를 발견했는지 경비무사에게 뭔가를 지시하던 자가 고개를 돌렸다.
다시 골목 안으로 되돌아갈 틈도 없었다.
돌아서 골목으로 들어가면 오히려 의심만 더 살 터. 유철상은 최대한 태연한 표정을 지은 채 건너편 골목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 경비무사들에게 지시를 내리던 자, 묵운방의 전운당주 반호조가 턱을 쳐들고 물었다.
“거기! 잠깐 거기 서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