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 연비강 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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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667회 작성일소설 읽기 : 신마 연비강 4화
제4화. 마(魔)를 넘어(2)
조금 더 이곳에 남아 이 지독한 괴물을 떨쳐 버리고 싶지만 눈치를 보아하니 일찍 떠나야 할 것 같았다.
하산 곁에 있는 신하들 일부가 자신을 모함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하산 또한 점점 경계 어린 시선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혹시나 있을지도 모르는 저들의 암수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다음에 벌어질 일이었다.
만약 하산이 그 일과 관련되어 있다면 마음이 아프더라도 죽일 것이다.
‘그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내가 먼저 떠나는 수밖에.’
비록 작별 인사조차 없이 떠나기는 하지만 그래도 떠난다는 사실은 남겨 놓아야 했다.
비강은 하산과 비파샤의 앞으로 두 장의 글을 남겼다.
글을 써 탁자 위에 올려놓은 비강은 백파와 행랑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낙타 한 마리를 골라 타고 성문으로 다가가니 성문을 지키던 병사들이 허리를 숙이며 물었다.
“라바나, 늦은 저녁에 어디로 나가십니까?”
“왕께서 내게 심부름을 시켰소.”
“알겠습니다.”
병사들은 더 이상 묻지 않고 문을 열어 주었다. 비강이 항상 하산의 옆에 붙어 있음을 아는 까닭이었다.
한편, 저녁 식사 자리에서 좋지 않은 이야기를 들은 비파샤는 비강의 방을 찾아갔다.
‘어디 산책이라도 나갔나?’
밖으로 나가 비강을 찾아보려던 그녀는 탁자 위에 놓인 서신을 발견했다.
문득 불길한 느낌을 받은 그녀는 급히 서신을 집어 들었다.
‘아, 안 돼.’
서신을 들고 있는 손이 벌벌 떨리고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황급히 밖으로 뛰어나온 비파샤는 비강을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녔으나 그림자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비강을 보지 못했나요? 혹시 비강을 봤나요?”
“비강이 누굽니까?”
“라바나, 라바나를 보지 못했나요?”
“못 봤습니다.”
성내의 순찰을 도는 병사들을 잡고 물었으나 대답은 한결같았다.
그녀는 서신을 들고 오라버니 하산을 찾아갔다.
“무슨 일이냐?”
장군들과 회의를 하고 있던 하산은 급하게 방문을 열고 들어온 비파샤의 노기 띤 얼굴과 마주하며 물었다.
“이것을 보세요, 오라버니.”
비파샤의 목소리는 냉기가 풀풀 날리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서신을 건네받아 읽어 내려가는 하산의 안색도 점점 어두워져 갔다.
하아…….
그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 나왔고, 손에 있던 서신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래도 그분을 의심하나요?”
비파샤의 차가운 추궁에 하산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비강을 언제나 옆에 두고자 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에 대한 병사들의 존경은 걷잡을 수 없이 늘어 갔다.
왕보다 더한 존경을 받는 자라니.
질투심이 들었지만 대범하게 넘기려 했다.
그때 제법 신임하고 있는 장군 하나가 계속해서 질투심을 부추겼다.
―위험합니다. 만약 라바나가 다른 마음을 먹는다면 대왕께서 일궈 놓은 모든 것이 그자의 수중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병사들도 대왕이 아닌 그자를 따를 것입니다.
한두 번은 대충 흘려들었지만 계속 옆에서 부추기니 정말로 의심이 생겼다.
그리고 그 의심은 점점 커져만 갔다.
“전에 오라버니가 제게 이런 이야기를 하셨죠. 만약 라바나가 없었다면 자신은 진즉에 전쟁터에서 죽었을 거라고.”
“내가…… 내가 속이 좁아 그를 떠나게 했구나. 나의 잘못이 크기는 하나 옆에서 부추긴 자의 잘못도 없다고 하지는 못하겠지.”
감고 있던 두 눈을 뜬 하산은 의자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옆에 기대 놓은 큰 칼을 잡았다.
“대, 대왕……?”
평소 비강을 모함했던 장군은 얼음장보다 차가운 하산의 눈빛과 마주하고는 자리에서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퍽!
어느새 하산이 휘두른 칼에 장군의 머리가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군사를 풀어 라바나를 찾으라. 그에게 내가 직접 머리를 숙여 잘못을 빌겠노라!”
* * *
성문을 나선 지 벌써 열흘째가 넘어가고 있었다.
비강은 낙타를 몰아 북동쪽으로 향했다.
그가 군을 나서며 가지고 온 것은 백파와 타고 있는 낙타 한 마리, 행낭에 들어 있는 약간의 금붙이와 마른고기가 전부였다.
백파를 얻은 후에도 육 년을 넘게 전쟁터에서 떠돌았다.
‘바보 같은 놈. 네놈이 떠나올 것이 아니라 하산 그놈을 죽여 스스로 왕이 되었어야 했어. 지금이라도 돌아가.’
여전히 몸속은 불덩이로 가득했고 머리는 깨질 듯 아팠으며 머릿속으로 계속해서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밤새 낙타를 몰아 북동쪽으로 향하는 비강의 눈앞으로 밝은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잠시 쉬었다가 가자.”
낙타의 머리를 쓰다듬고 땅으로 내려선 비강은 나무 그늘로 들어가 앉았다.
그늘 옆으로는 작은 연못이 있어 낙타가 스스로 물을 찾아 목을 축였다.
‘전쟁터로 돌아가. 이런 곳은 네가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니야.’
또다시 머릿속으로 목소리가 들려오고 깨질 것처럼 머리가 아파 왔다.
이 지독한 놈으로 인해 거의 일 년 동안 운기행공조차 하지 못했다.
운기행공을 시도할 때마다 마치 불구덩이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끔찍한 고통이 찾아왔다.
얼굴을 두 손으로 쓸며 그늘을 나온 비강은 다시 낙타를 잡아타고 북동쪽으로 향했다.
* * *
해가 머리 위로 다가오고, 멀리 시골의 작은 촌락이 나타났다.
먹을 것이라도 구하려고 작은 동네로 들어가던 비강은 눈앞으로 펼쳐지고 있는 광경에 낙타를 멈춰 세웠다.
곳곳에 널브러진 시신들과 피를 흘리며 기어 다니는 사람들, 이곳은 전쟁터나 다름이 없었다.
‘도적 떼가 이 마을을 지나갔구나.’
기나긴 전쟁은 사방에 도적 떼를 창궐하게 만들었다.
도적 떼는 군을 피해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이런 작은 마을마다 살인과 약탈을 자행하고 있었다.
비강은 낙타에서 내려 마을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여기저기 널브러진 시신 중에는 아낙네들은 물론이고 젖조차 떼지 못한 아기들도 섞여 있었다.
이 끔찍한 살육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시신들과 부상자들을 옮기다가 비강을 발견하고는 공포에 몸을 떨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아직 숨이 끊이지 않은 사람을 일으킨 비강이 몸에 난 상처를 살피며 물었다.
그나마 이 사람은 부상이 깊지 않아 살아날 가능성이 높았다.
“도적 떼가…… 도적 떼가…… 마을에 들이닥쳐 사람들을 죽이고 식량과 가축들을 모두 빼앗아 갔습니다.”
“어느 쪽으로 갔습니까?”
사내는 손을 들어 비강이 향하고 있는 북동쪽을 가리켰다.
비강은 부상당한 사내를 바닥에 뉘이고는 낙타에 걸려 있는 행랑에서 금붙이를 몇 개 꺼냈다.
“부상자들의 치료와 식량을 구입하는 데 쓰십시오.”
부상자를 돌보고 있는 마을 사람에게 금붙이를 건넨 비강은 바로 낙타 위에 올랐다.
도적 떼를 잡아 죽인다면 머릿속을 태우는 살심을 잠시나마 진정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자.”
흔적으로 보아 도적 떼는 마을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속도를 높인다면 금방 꽁무니를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다.
* * *
푸르릅, 푸릅.
낙타가 거친 숨을 토해 낼 때쯤 저 멀리 십여 대의 수레를 끌고 가는 도적 떼가 보였다.
도적 떼는 어림잡아 일백 명에 가까웠다.
“멈춰!”
비강의 외침 소리에 도적 떼는 일제히 수레를 멈추고 몸을 돌렸다.
“뭐야? 저놈은.”
낄낄낄.
“홀로 우리를 찾아와 어찌하려고?”
도적들의 비웃음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들끓는 분노는 몸속의 불덩이를 더욱 뜨겁게 달구며 머리까지 치달려 올라왔다.
‘죽여…….’
툭!
낙타의 등을 차고 날아오른 비강의 손에는 어느새 철봉이 쥐여 있었다.
철봉을 돌며 휘몰아친 거대한 소용돌이가 무저갱 같은 아가리를 벌리며 날아갔다.
콰쾅! 쾅!
끄아아아악……!
소용돌이에 휘말린 도적들의 살이 찢어지고 수레가 박살이 나며 잔해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소용돌이가 지나간 푸석푸석한 땅에는 넓고 기다란 피의 고랑이 생겼다.
몸속에서 들끓고 있는 불덩이 같은 기운이 또다시 철봉을 휘감고 돌았다.
“용아포 천멸후(龍牙砲 天滅吼)!”
콰콰쾅!
하나의 작은 소용돌이는 순식간에 넷으로 나뉘어 거센 폭풍으로 변해 도적들과 수레를 휘감았다.
땅바닥을 이리저리 휘감으며 피의 고랑을 만들어 낸 폭풍은 먼지구름과 함께 가라앉았다.
으으으…….
살아남은 도적들은 채 열 명도 되지 않았다.
그들은 두려움에 몸을 덜덜 떨며 몸조차 가누지 못했다.
“다행이구나, 너희 같은 놈들도 쓸모가 있으니.”
크아아앙!
악마의 포효가 비강의 입에서 터져 나오고, 도적들을 사이로 바람이 휘몰아쳤다.
퍼퍽! 퍽! 스각!
목을 잃은 머리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붉은 안개를 만들어 냈다.
투툭. 털썩.
머리를 잃은 적들의 몸뚱이가 힘없이 바닥으로 널브러졌다.
커억!
적들을 모두 죽여 없앤 비강의 입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용아포 천멸후는 아직 완성하지 못한 무공이었으나 넘치는 내공에 의지해 억지로 발현했다.
눈앞은 어질어질하고 얼굴과 몸은 달궈진 불덩이로 인해 시뻘겋게 변해 버렸다.
풀썩.
비강은 도적들의 살점과 피가 흐르는 땅바닥에 고꾸라지듯 몸을 뉘었다.
‘너무 힘들어.’
후둑, 후두둑.
눈을 뜬 채 기절한 비강의 몸을 적시며 소나기가 쏟아진다.
세상이 고요해졌다.
머릿속에 떠돌던 마(魔)의 목소리마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마치 세상 모든 번뇌에서 벗어난 느낌이었다.
이토록 무리하며 울분을 토해 내듯 모든 내공을 쏟아 낸 경험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완전하게 비어 버린 하단전. 그곳을 불덩이가 가득 채우며 온몸을 휘돌다가 상단전을 향해 치달았다.
머릿속을 휘저으며 날뛰는 불기둥은 더욱 강하고 거세졌다.
쾅! 쾅!!
어느 순간 불기둥은 비강의 백회혈을 때리고 있었다.
휘이이―
정신을 잃은 비강의 머리 위로 서기(暑氣)가 끼기 시작하고 바람이 휘몰아쳤다.
쾅!
백회혈에서 뿜어져 나온 서기는 하늘 위로 치솟다가 다시 머릿속으로 되돌아 들어갔다.
쏴아아.
휘몰아치던 바람도 사방으로 퍼져 나갔고, 곧 정적이 찾아들었다.
* * *
“세상에……저기 좀 봐!”
길을 가던 일단의 사람들이 지옥도로 변한 현장으로 몰려들었다.
찢기고 짓이긴 살점들과 여기저기 걸레 쪼가리처럼 굴러다니는 시신들은 이곳에서 뭔가 큰일이 일어났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이 고랑들은 뭐야……? 괴수라도 나타난 건가?”
직선으로 뻗은 깊고 넓은 고랑과 구렁이처럼 뒤틀린 고랑들 속에는 채 굳지 않은 핏물이 고여 있었다.
넋을 잃고 참혹한 전경을 구경하던 그들의 눈에 흩어진 곡식들과 가축들이 들어왔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붉게 변한 땅바닥을 헤집으며 곡식과 가축들을 챙겼다.
뿐만 아니라 시신들의 품을 뒤지고 도적들의 병기까지 끌어모았다.
“여기, 멀쩡하게 죽은 사람도 있는데?”
그들 중에 누군가가 비강의 검과 철봉을 챙기기 위해 손을 뻗었다.
턱. 으헉!
병기에 손을 가져가던 사람은 갑자기 비강이 눈을 번쩍 뜨며 손목을 움켜쥐자 화들짝 놀라 엉덩방아를 찌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편안한 잠을 잔 것 같았다.
땅바닥에서 몸을 일으킨 비강은 놀라 자신을 주시하는 사람들을 둘러보다가 먼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머리는 맑았고 몸은 가뿐했으며 백 리 밖의 벌레들까지 보일 정도로 눈이 밝아졌다.
아저씨의 말이 맞았다.
마(魔)를 이겨 내면 또 다른 세상에 들 것이라더니 전에 보던 세상과 지금 보는 세상은 확실히 다르게 느껴졌다.
이대로 공중으로 몸을 띄운다면 저 하얀 구름 속까지 치솟아 오를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저 낙타는 내 것이니 돌려받아야겠소. 나머지는 알아서 처리하시오.”
“에…… 예, 예.”
얼마나 놀랐는지 대답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뒤로한 비강이 낙타를 향해 걸어갔다.
사람들이 실어 놓은 식량들과 병기들을 내려놓고 그대로 낙타 등에 오른 그는 북동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가자.”
사람들은 낙타의 머리를 쓰다듬고 멀어져 가는 비강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우두커니 쳐다보았다.
“뭐, 뭐 해? 얼른 챙겨야지.”
“얼른얼른 움직이자고. 이런 곳에 오래 있다가는 무슨 변을 당할지 모르니까 말이야.”
먼저 정신을 차린 사람의 재촉에 다른 사람들도 뒤따라 급하게 몸을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