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 연비강 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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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47회 작성일소설 읽기 : 신마 연비강 2화
제2화. 백파
백색의 창날에는 물결무늬가 어지러웠는데 창대만 아니라면 검이라 여길 정도로 모양이 흡사했다.
“성안 비고에서 찾아낸 것이다. 네게 특별히 선물해 줄 것이 없나 해서 살피던 중에 이것이 보이더구나.”
창을 잡아 본 비강은 묵직한 느낌과 손으로 전해 오는 감각이 마음에 들었다.
“감사합니다.”
고마움을 표하는 비강의 입가에는 절로 미소가 감돌았다.
금은보화를 준다 해도 별 관심 없어 하던 비강이 미소 짓자 하산도 마주 웃었다.
“네가 마음에 들어 하니 나도 좋구나.”
술잔을 비운 하산은 뜻밖의 제안을 꺼냈다.
“장군이 싫다면 내 곁을 지키는 호위로 있었으면 좋겠는데, 어찌 생각하느냐?”
마음에 쏙 드는 병기까지 받았기에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 내일부터 장군의 곁을 지키겠습니다.”
하하하하.
“고맙다, 정말 고마워.”
하산이 어찌나 기뻐하는지 비강의 입가에도 슬며시 미소가 감돌았다.
비강은 하산과 술잔을 나누며 담소를 즐기다가 처소를 나왔다.
횃불을 밝힌 성안 이리저리로 돌아다니며 밤공기를 음미하던 비강은 사람이 없는 적당한 장소를 찾아 자리를 만들어 앉았다.
환한 보름달의 달빛이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자리에 앉은 비강은 왼손 약지에 끼인 반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반지는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굵기였고, 검은 바탕에 흉악하게 생긴 악마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다.
원래 라바나라는 별칭은 적군이 아닌 아군의 입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런 별칭이 붙게 된 이유는 바로 손가락에 끼고 있는 검은 반지로 인해서였다.
우연히 전리품으로 악마의 얼굴이 새겨진 반지를 얻게 되면서부터, 라바나라는 공포의 이름을 얻게 되었다.
자신을 키워 준 아저씨도 색은 다르지만 비슷한 반지를 끼고 있었다.
천하제일이 되어 보라면서 일수(一手)로 공간을 가른 신위를 드러냈던 아저씨의 경지에 조금씩 가까워지는 것 같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이번엔 좋은 무기까지 얻었다.
비강은 무릎 위에 창을 올려놓고 왼손으로 창날의 물결무늬를 어루만졌다.
“앞으로 너를 백파(白波)라 부르겠다.”
장창의 이름을 ‘하얀 물결’이라 지은 그는 창대를 감싼 낡은 헝겊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그것을 풀어냈다.
창대도 창날과 같은 은백색을 띠고 있었는데 같은 모양의 물결무늬가 어지러웠다.
그 모양이 더욱 마음에 들었는지 비강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어둠을 비추는 하얀 달을 향해 창을 들어 보인 그는 달빛을 반으로 가르는 선을 발견했다.
딸깍.
그 선을 잡아 비틀자 창날과 창대가 분리되었다.
창이 검과 봉으로 나눠진 것이다.
하하하하.
기쁨에 겨운 웃음소리가 한참이나 이어졌다.
* * *
전쟁은 매일같이 이어졌다.
비강은 하산의 곁에서 호위를 맡아 그를 지켰고 전황이 불리할 때는 선봉에 서서 적진을 휩쓸기도 했다.
쾅! 쾅……!
투석기에서 날아오른 사람 머리통만 한 돌덩이들이 성벽과 성문을 때렸다.
성문은 연이어 날아온 커다란 돌덩이들에 의해 돌쩌귀가 비틀리기 시작했다.
와지끈! 콰쾅!
기어이 성문이 열리고 병사들은 열린 성문 안으로 물밀듯이 밀려들어 갔다.
“약탈을 하는 자는 목을 벨 것이다! 죄 없는 백성들은 건들지 마라!”
비강의 호위를 받고 있는 하산이 성문을 향해 달리며 소리쳤다.
성을 함락시킨 하산은 장군들에게 병사들의 휴식을 명하게 했다.
사기는 드높았으나 연이은 전투로 인해 피로가 쌓였기 때문이었다.
성안의 마을은 병사들로 득실거렸고 병사들에게 웃음을 파는 여인들이 사방에서 몰려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사람들로 북적이던 큰 성은 병사들과 여인들의 웃음소리로 떠들썩했다.
“다음은 어느 곳을 공략하는 것이 좋겠느냐?”
지도를 편 하산이 곁을 지키고 있는 비강을 불러 물었다.
“왼쪽부터 공략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오른쪽으로는 넓은 강이 있어 많은 배가 준비되지 않는다면 치고 들어가기 어렵습니다.”
“적들이 먼저 이곳으로 상륙해 쳐들어오면 어찌하겠느냐?”
“예. 아마도 그렇게 흘러갈 것입니다. 하지만 적들의 상륙을 한 번만 막아 낸다면 다시는 적들의 기습은 없을 것입니다. 그때를 기해 왼쪽에 남아 있는 성들을 함락시키면 됩니다. 지도를 살펴보건대 적들이 상륙하기 좋은 곳은 아마도 이곳일 것입니다.”
비강은 손으로 지도의 한 곳을 짚은 뒤 말을 이었다.
“이 근처에 병사들을 매복시키고 있다가 적들이 상륙하자마자 들이친다면 충분히 승리할 수 있습니다.”
“좋다. 네 계책대로 따르마.”
지도에서 눈을 뗀 하산은 성벽 끝으로 걸어가 오른쪽으로 멀리 보이는 강을 바라보았다.
“나는 이곳에 나의 왕궁을 짓고자 한다. 해서 나의 가족들을 이곳으로 불러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아직 이곳은 위험합니다. 주변을 어느 정도 안정시킨 후에 가족들을 불러들이는 것이 옳습니다.”
“조금 위험하기는 하겠지만 가족들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항상 불안하구나. 비강, 네가 옆에 있으니 안심이 되어 그런 명령을 내렸다.”
자신을 믿는다는 상관의 고집을 억지로 꺾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도 왕이 되려는 상관의 고집이니 물러서는 편이 옳았다.
무엇보다 비강이 이곳에 있는 이유는 하산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실전을 통해 무공을 완성하기 위함이었다.
병사들이 휴식을 취하기 시작한 지 이십여 일이 지나갔다.
그리고 비강의 예상처럼 야밤을 기해 적들이 배를 타고 기습을 감행해 왔다.
“쳐라!”
“죽여라!”
나무들이 들어찬 숲과 모래 언덕에 숨어 있던 아군은 적들이 뭍에 발을 들이자마자 역습을 시작했다.
아악! 크아악……!
배에 다시 올라타려는 자들과 화살에 맞아 나뒹굴며 비명을 질러 대는 자들로 인해 적진은 금세 혼란에 휩싸였다.
“그대로 상륙하라!”
“모래 언덕을 넘어라!”
적진에서 울려 퍼지는 고함 소리와 함께 갑옷을 잘 차려입은 적장이 앞장서 모래 언덕을 향해 달렸다.
스걱―!
모래 언덕을 달려 올라오던 적장의 곁으로 바람이 스쳐 지나가더니, 곧 그의 머리가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털썩.
뒤이어 머리 없는 시신이 무릎을 꿇으며 힘없이 앞으로 엎어지고, 모래 언덕 위에서 하산의 외침 소리가 울려 퍼졌다.
“라바나의 손에 적장이 목숨을 잃었다! 공격하라!”
와아아!
대낮같이 밝힌 수많은 횃불이 천지를 뒤흔드는 함성과 함께 언덕 위에서 모습을 드러내자 겁에 질린 적들은 더욱 어지러워졌다.
낙타를 탄 기병대가 먼저 달려 내려가고 뒤이어 긴 창을 든 보병대가 적들을 향해 달렸다.
“후퇴하라!”
“도망쳐!”
거의 일방적이라 할 수 있는 학살이 날이 밝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 * *
“이쪽은 비파샤, 내 여동생이다.”
가족들이 성 안으로 들어온 날, 하산은 아주 젊은 여인을 비강에게 소개시켰다.
노란색 천을 머리에 두른 여인은 오빠와는 달리 피부색이 하얀 대단한 미녀였다.
“비강입니다.”
비강이 정중하게 머리를 숙이자 여인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반가워했다.
여인이 미소를 짓자 주변까지 전부 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당신이 라바나라 불리는 분이군요. 소문은 많이 들었어요.”
씨익.
“앞으로 친하게 지내거라.”
하산은 여동생을 소개시켜 주고는 가족들과 만나야 하니 둘이 이야기나 나누라며 방을 나가 버렸다.
‘너무 노골적이군.’
비강은 하산의 의도를 단번에 간파해 냈다.
여동생과 인연을 맺게 해 자신을 잡아 두려는 것이다.
“우리도 나갈까요?”
비파샤는 비강의 대답도 듣지 않고 몸을 돌렸다.
‘그 오라비의 그 여동생이로구나.’
그녀의 뒤를 따라나선 비강은 사람과 병사로 북적이는 거리를 나란히 걸었다.
비파샤의 미모에 사람들 시선이 일제히 쏠렸으나 함부로 나서서 말을 거는 이는 없었다.
그녀의 곁에는 악마의 문양이 새겨진 반지를 낀 비강이 함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당신을 존경하는군요.”
“두려워하는 겁니다.”
“제 눈에는 존경하는 모습으로 보이네요.”
사람들로 붐비는 거리에서 빠져나온 두 사람은 나무들이 우거진 숲길을 거닐었다.
“전쟁이 끝나면 무엇을 하고 싶으세요?”
떠날 것이다. 사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하산의 곁에 남아 있을지도 모르겠다.
비강이 이곳에 남아 있는 이유는 실전을 통해 무공을 완성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미 네 개의 무공과 그 변형까지 만들었기에 떠날 시기만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때문에 비강은 다디단 목소리로 그를 유혹하는 비파샤에게 마음에 없는 말을 입에 올렸다.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길을 걷던 그녀는 푸른 잎이 무성한 커다란 나무를 가리켰다.
“오래 걸었더니 조금 힘들어요. 저기 그늘에서 잠시 쉬었다가 가요.”
이번에도 그녀는 비강의 대답조차 듣지 않고 나무 그늘로 들어가 앉았다.
“뭐 하고 있어요? 어서 들어오지 않고.”
‘제멋대로군.’
비파샤의 재촉에 비강도 나무 그늘로 들어가 그녀와 조금 떨어져 앉았다.
“싸움터에서는 누구보다 용맹한 분이 부끄러움을 많이 타시네요? 말수도 지나치게 적으시고요.”
그녀는 비강의 행동 하나하나가 무척 재미있는지 얼굴에 미소를 지우지 못했다.
“집에 혼담을 넣는 남자들이 많았어요. 하지만 오라버니의 서신을 받은 아버님은 모든 혼담을 거절했어요.”
비강은 이 자리가 거북스럽기만 했다.
그저 귀찮을 뿐이었다. 게다가 자신은 곧 떠날 사람이기에 더더욱 비파샤와 친해지고 싶지 않았다.
뿌우우―
때마침 희미하게 위험을 알리는 뿔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일이 터진 것 같습니다. 가 봐야겠습니다.”
“그걸 어떻게 아세요?”
뿔피리 소리를 듣지 못한 비파샤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제 귀가 조금 예민합니다.”
비강이 먼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자 비파샤도 어쩔 수 없이 따라 일어섰다.
두 사람은 느린 걸음으로 걸어왔던 길을 되짚어 걸었다.
“저녁에 가족들이 다 같이 모여 식사를 하기로 했어요. 그때 당신도 그 자리에 초대될 거예요.”
한가로운 그녀의 이야기와는 달리 뒤이어 희미하게 들려오는 소리는 급박한 상황을 알리고 있었다.
쿠웅, 쿠웅―
비강은 단번에 그 소리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이 소리는 분명 투석기로 날려 보낸 돌덩이가 성벽을 때리는 소리였다.
‘도대체 정찰병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기에.’
투석기까지 동원되었다면 대군이 몰려온 것이 분명했다.
아마도 정찰병들은 모두 목숨을 잃었거나 포로가 되었을 것이다.
“빨리 가야겠습니다.”
“무슨 일이죠?”
비강의 안색이 변하자 비파샤가 놀라 물었다.
그러나 지금은 설명할 시간조차 없었다.
바로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은 비강은 성벽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휘이이―
바람이 귀밑을 스치며 눈앞의 경관이 빠르게 다가왔다가 뒤쪽으로 지나갔다.
비파샤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성벽이 가까워지자 굉음은 더욱 크게 들려왔다.
사람들도 그 소리를 들었는지 놀라 집으로 숨어들고 병사들은 성벽을 향해 몰려가고 있었다.
“적이다!”
“적의 공격이다! 성을 수비하라!”
단숨에 성벽으로 올라선 비강은 안고 있던 비파샤를 내려놓으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새까맣게 몰려든 적군이 수십 대의 투석기를 앞세운 채 성을 향해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적들이 선수를 쳤구나.’
쾅! 쾅……!
사람 머리만 한 돌덩이들이 성벽을 때리고, 성벽을 넘어 몰려드는 병사들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크아악……! 아악……!
커다란 돌에 맞은 병사들이 머리가 깨져 바닥을 나뒹굴었다.
“비강!”
마침 근처에서 병사들을 지휘하고 있던 하산이 옆으로 뛰어왔다.
그때 커다란 돌덩이 하나가 달려오고 있는 하산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순간 비파샤 옆에 있던 비강의 신형이 사라졌다가 달려오는 하산의 옆에서 모습을 보였다.
스악!
비강의 발검(拔劍)하자 공간을 가르며 날아간 빛 한 줄기가 포물선을 그리며 공중에서 떨어져 내리는 커다란 돌덩이의 중앙을 관통했다.
쩍!
돌덩이는 비강과 하산의 머리 위에서 양옆으로 갈라져 뒤쪽으로 날아갔다.
크악! 아악!
성벽 아래에서 반으로 갈라진 돌에 맞은 병사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쏴아아―
하산이 미처 놀랄 겨를도 없이 화살비가 하늘을 가득 메우며 쏟아져 내렸다.
순간 비강의 신형은 비파샤의 곁으로 나타났다가 그녀와 함께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따다다다당……!
하산과 비파샤를 막아선 비강의 검이 검광을 뿜어내며 전면을 환하게 수놓았다.
화살들이 사방으로 튕겨지고 잘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