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 연비강 프롤로그
무료소설 신마 연비강: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65회 작성일소설 읽기 : 신마 연비강 프롤로그
서장. 이협(夷俠)
깊은 잠에 빠진 어린아이의 뺨을 어루만지며 따뜻한 눈으로 내려다보던 사내는 등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오자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조용히 허리를 굽혔다.
“오랜만에 보는구나, 서문아.”
가슴속을 스며드는 푸근한 목소리에 사내는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혀, 형님을 뵙습니다.”
어허.
“반백을 바라보는 녀석이 눈물을 흘리다니. 그만 울고 이리 와 앉아라.”
언제 방 안으로 들어와 의자에 앉아 있었는지 삼십 대 초반 정도쯤 되어 보이는 젊은 사내가 사십 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중년 사내의 인사를 받았다.
중년 사내는 급히 눈물을 훔치더니 미리 준비해 놓은 술상 앞으로 다가가 젊은 사내 앞에 놓인 술잔에 술을 채웠다.
“소제가 지난봄에 담가 놓았던 화주입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술잔을 비운 젊은 사내는 맞은편에 앉은 나이 든 사내의 잔에 술을 채워 주었다.
젊은 사내는 손가락에 폭이 넓은 은색의 반지를 끼고 있었다.
“네 얼굴을 보니 그동안 많이 힘들었던 모양이로구나. 그렇게 마음고생을 할 것이었으면 차라리 그자들의 요청을 수락하지 그랬느냐.”
“제가 어찌 형님께 맞설 수 있겠습니까. 목숨을 잃을지언정 절대로 그럴 일은 없을 것입니다.”
“바보 같은 녀석. 그럼 내가 그자들을 전부 멸절시켜 버릴까? 시간이야 조금 걸리겠지만 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해 주마.”
“형님.”
중년 사내는 슬픔이 가득한 눈으로 젊은 사내를 바라보았다.
“소제가, 소제가 형님을 청한 것은 그자들 때문이 아니라 저의 아이 때문입니다.”
젊은 사내는 방 안 침상에 누워 있는 어린아이에게 시선을 주었다.
얼굴에 붉은 반점이 가득한 두 살가량의 귀엽게 생긴 아이가 그의 눈 안에 들어왔다.
“이름은 무엇이냐?”
“‘월’이라 합니다.”
“누가 지어 준 이름이더냐?”
중년 사내가 대답 대신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이자 젊은 사내의 눈빛에 언뜻 노기가 스쳐 지나갔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젊은 사내는 어린아이가 누워 있는 침상으로 다가가 이불을 젖혔다.
이불을 젖히자 검붉은 반점이 가득한 어린아이의 알몸이 나타났다.
그 참혹한 모습을 내려다보던 젊은 사내는 아이의 심장에 오른손을 가져다 댔다.
순간 손가락 한 마디만 한 밝은 빛이 사내의 손에서 빠져나와 어린아이의 몸속으로 스며들어 갔다.
“다 되었다. 너도 이리 오너라.”
그러나 중년 사내는 고개를 저으며 환한 미소로 젊은 사내의 말을 받았다.
“들짐승조차도 자신이 죽어야 할 장소를 안다고 하였는데 하물며 사람이 죽어야 할 곳을 모르겠습니까. 형님, 제가 죽어야 할 곳은 바로 이곳입니다.”
“서문아…….”
“제 아이를 잘 부탁합니다, 형님.”
젊은 사내는 나이 든 사내의 눈을 조용히 응시하다가 침상에 누워 있는 아이를 안아 들었다.
“자유로운 삶을 살게 해 주십시오, 형님.”
“그러마. 너와 못다 한 정은 네 아이와 나누도록 하마.”
“안녕히…… 안녕히 가십시오.”
하아.
젊은 사내가 아이를 안고 밖으로 나간 후, 중년 사내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담 아저씨.”
이윽고 망연하게 의자에 앉아 있던 중년 사내의 입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방문이 열렸다.
방 안으로 들어온 오십 대 초중반의 장년인은 나이 든 사내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중년 사내는 침상 밑에서 커다란 나무 상자를 꺼냈다.
“그동안 모아 놓은 우리 연가의 재물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이제 가문을 떠나 자유롭게 사십시오.”
사내의 말에 담 아저씨라 불린 장년인은 눈물을 흘렸다.
“주인님과 함께 그자들을 맞이하고 싶습니다. 제발, 그런 분부는 거두어 주십시오.”
“아저씨는 제게 있어 형님이나 다름없는 분입니다. 그러니 제가 마음 편하게 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언젠가 제 생각이 나거든 제가 묻혀 있는 곳을 찾아와 얼굴이라도 보여 주십시오.”
“주인님…….”
담 아저씨는 흐르는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중년 사내는 커다란 나무 상자를 들어 억지로 그의 품에 안기며 방 밖으로 밀어냈다.
“그만 가십시오, 아저씨. 그자들이 언제 몰려올지 모릅니다.”
“주인님…….”
방 밖으로 밀려난 장년인은 젖은 눈으로 중년 사내를 바라보다가 절을 올렸다.
“언젠가 찾아올 도련님을 다시 모시겠습니다.”
절을 끝낸 사내가 나무 상자를 들고 떠나간 후 중년 사내는 방문을 닫고 의자에 가 앉았다.
쿨럭!
기침을 토해 내자 입을 가린 손가락 사이로 핏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독하오, 하림. 나는 그렇다 쳐도 어찌 그대와 나의 자식까지 죽이려 했단 말이오.”
사내는 슬픔이 가득한 눈을 들어 얼마 전까지 자신의 아들이 누워 있던 침상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 * *
“배신자, 연서문은 어서 나와 무릎을 꿇어라!”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집 밖에서 들려오자 연서문은 벽에 걸린 검을 챙겨 들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평소 연무장으로 사용하던 전각 앞마당에는 수많은 무인들이 몰려와 집에서 나오는 그를 노려보았다.
연서문은 무인들의 선두에 서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노인을 발견하고는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저었다.
“너무, 잔인한 처사가 아닙니까? 장인어른.”
“장인? 내가 어찌 네놈의 장인이란 말이냐! 우리 가문은 네놈과의 모든 인연을 끊었느니라!”
하아.
이미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건만 실제로 이런 상황을 겪게 되니 세상사가 전부 허망했다.
찰칵.
연서문의 왼손에 들려 있던 검이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벗들도…… 잘 있었는가?”
그는 장인을 중심으로 좌우에 서 있는 자들을 향해 흐릿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승복과 도복을 입은 사내들이 있었고 중년의 여인도 끼어 있었다.
“벗이라, 우린 네놈을 벗으로 여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마곡(魔谷)과 내통한 놈을 어찌 벗이라 하겠느냐.”
“……그곳은 마곡이 아니라 황곡일세. 또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가? 무공을 연마하고 있다고 하여 마의 무리라 치부한다면 강호는 마의 세상이라 불러야 하네!”
“네놈은 정녕 그자들이 천마의 후예임을 모른단 말이더냐?”
되돌아온 살기 어린 대답에 연서문은 하늘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이들은 아집에 사로잡혀 그 어느 것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천마?
천마란 별호조차 시기와 질투에 눈이 먼 강호인들이 붙여 준 것이었다.
“날이 참으로 좋군. 구름 한 점 없어…….”
스걱―!
연서문의 중얼거림이 끝나는 순간 장인이라 불렸던 노인이 그의 허리를 베며 지나갔다.
뒤이어 번뜩이는 검광에 사내의 머리가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강호의 배신자, 이협(夷俠) 연서문을 처단하였소!”
와아!
저택을 가득 메운 무인들의 함성 소리는 멀리 떨어져 있는 담을 넘어 넓디넓은 강호로 퍼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