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 연비강 29화
무료소설 신마 연비강: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64회 작성일소설 읽기 : 신마 연비강 29화
제29화. 또 다른 무신
그러나 마차는 그대로 두 사람을 지나쳐 갔다.
“방금 봤지? 나이 든 여자들도 내 얼굴만 보면 깜짝깜짝 놀란다니까.”
북궁도의 실없는 소리에 비강은 피식 미소만 지어냈다.
“얼른 가자, 늦게 도착하면 사부님께 맞아 죽어.”
“사부가 그렇게 무섭냐?”
“무섭지는 않은데 맞으면 아프잖아. 괜히 사서 매를 맞을 필요는 없지.”
두 사람은 다시 속도를 높였다.
“지칠 때까지 한번 달려 보자.”
“좋아.”
* * *
입구에서부터 스며드는 냄새는 지난날의 그리움을 떠올리게 했다.
뜨거운 김과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부엌을 아무런 걱정 없이 뛰어놀던 아이들과 지팡이를 짚고 동네 밖까지 나온 나이 든 노인들을 회상하노라면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그때는 모든 것이 조금씩 부족했어도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차가운 시선들과 심한 매질 속에서 살아온 어린아이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따뜻함이라는 것을 느꼈었다.
힘들고 고달픈 무공 수련도 이곳에서 살아가게 해 준다면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뛰어놀던 때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신후 당백요는 마을 입구를 지나 천천히 마을 안쪽으로 들어섰다.
좌우로 논밭이 펼쳐져 있고 수백 채의 초옥들이 옹기종기 산길을 따라 이어지고 있었다.
냄새는 그대로이나 피부로 스며드는 한기는 늦여름임에도 한겨울처럼 차갑기만 했다.
“오셨습니까?”
허리에 검을 찬 중년 사내가 다가와 그녀를 향해 머리를 숙였다.
마을은 예전 그대로인데 사람들은 많이 변했다.
“오랜만에 보는구나. 사형은 어디에 계시느냐?”
“곡주께서는 초옥에 계실 겁니다.”
당백요는 초옥들이 늘어서 있는 산길을 따라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길옆으로 이어진 개울 너머에는 십여 명의 무인이 모여 앉아 그녀를 향해 음험한 살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저들은 때를 기다리는 마인들이었다.
당백요의 입장에서는 하찮은 것들이기는 했으나 전해 오는 살기가 제법 매서웠다.
‘사 년 전에 못 보던 자들이었으니 또 숫자가 늘어난 게야.’
낄낄낄…….
“못 보던 계집이로구나. 나와 한번 질펀하게 놀아 보겠느냐?”
음흉한 눈빛을 발하던 사내의 음담패설에 그녀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툭! 퍼퍼퍽!
당백요의 양 허리에서 빛이 번쩍하는 순간 사내의 머리가 굴러떨어지고 온몸은 갈기갈기 갈라졌다.
꿀꺽.
음험한 살기를 드러내던 십여 명의 무인은 마른침을 삼키며 뒤로 물러섰다.
조금 전까지 함께 음담패설을 나누던 동료는 머리를 제외하고 형체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천하를 울릴 만한 무공을 던져 주었음에도 견자(犬子)들에게는 견분(犬糞)에 불과하구나. 오셨습니까? 신후.”
“오랜만이야, 종예.”
사십 대 중후반쯤 되어 보이는 여인이 당백요 앞으로 다가와 정중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여인의 등에는 커다란 대부(大斧) 한 자루를 메고 있었다.
“안내해.”
“예.”
당백요는 익숙한 길을 따라 걸어가다가 커다란 전각 앞에 멈춰 섰다.
“들어가 보시지요.”
그녀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의자에 몸을 묻고 있던 사내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하하……!
“귀염둥이 사매가 왔구나.”
비록 나이는 서너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지만 시원한 웃음소리의 사내는 자신들과 놀아 주던 사형이었다.
“어서 앉아라.”
사십 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사내가 환한 미소로 당백요를 맞이했다.
“그간 강녕하셨지요? 사형은 사 년 전에 만났을 때보다 더 젊어지셨네요.”
하하하…….
“나야 너희들과 달리 걱정 없이 살고 있으니 그런 것이 아니겠느냐.”
전각 안은 탁자와 의자만 있어 단출하기 이를 데 없었으나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했다.
조금 특이한 것이 있다면 벽마다 여러 종류의 병기가 걸려 있다는 점이었다.
당백요의 시선은 벽의 중앙에 걸려 있는 병기에 가 멈췄다.
그 병기는 한 자루의 길고 날렵한 도였는데 손잡이 끝부분에 둥그런 고리가 달려 있었다.
‘사부님.’
“작년에 악이가 귀한 것을 구했다며 내게 주고 간 것이란다. 한번 보겠느냐?”
사내는 벽에 걸린 검 한 자루를 내려 당백요에게 내밀었다.
스릉.
부드러운 소리와 느낌만으로도 좋은 검임을 알 수 있었다.
검첨에서부터 시작된 푸른 검광이 검신을 뒤덮고 내려와 검파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정말 좋은 검이로군요.”
당백요의 감탄에 사내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 검을 보자마자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다. 담로(湛盧). 옛날 오왕이 초나라를 치기 전에 신검 한 자루를 몰래 보내 초왕을 오만하게 만들었다지.”
그녀도 담로라는 신검에 담긴 고사를 들어 알고 있었다.
신검 담로는 주인을 스스로 찾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초왕은 항상 허리에 담로를 차고 다녔으며 다른 나라를 업신여겼다고 한다.
검을 집어넣어 벽에 걸어 놓은 당백요는 사내와 마주 앉았다.
“세 녀석들도 잘 있느냐?”
“네. 잘 지내고 있어요.”
그녀는 행랑에서 목갑 네 개를 꺼내 사내 앞에 내놓았다.
그러나 사내는 목갑을 열어 보지도 않고 옆으로 치웠다.
“결정했느냐?”
백요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이런, 아직까지 결정을 하지 않고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게야? 미련한 녀석 같으니라고.”
사내는 장난과 같은 말투로 그녀를 나무랐다.
하지만 당백요는 그 말투 속에 들어 있는 얼음장보다도 지독한 살기를 느꼈다.
사형은 이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었다.
아니, 변한 것이 있다면 사제들과 자신은 점점 늙어 가는데 사형은 이십 년의 얼굴이 지금도 그대로라는 점이었다.
“저는 아직까지 사형에게 궁금한 것이 있어요.”
“말해 봐라.”
“이십 년 전 구파일방과 육대세가의 고수들이 쳐들어왔을 때 누구보다 분노해 앞장서서 그들을 쳐 죽인 사람이 바로 사형이었어요. 그런데 왜 우리와 함께 강호로 나가지 않았나요?”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나 열린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줄 수 없구나.”
“그럼, 계속 이대로 지낼 수는 없을까요? 그래도 되잖아요.”
“욕심은 여전하구나. 나를 두려워해 내가 죽기만을 바라고 있는 녀석들이.”
사형의 말이 맞다.
네 사람은 은연중에 사형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어지간히 권력을 즐겼으면 내려놓을 줄도 알아야 하느니. 하나 네 녀석들은 죽음이 눈앞에 이르러서도 그 권력을 내려놓지 않겠지. 그것이 권력의 속성이니 탓하지 않겠다만 이제 그만 내게 넘겨줘야 하지 않겠느냐.”
“사형이 강호의 주인이 되면 예전 구파일방이나 육대세가의 시절보다 더 암울한 상황이 펼쳐지겠지요. 사형은 원래 의심과 욕심이 많았으니까.”
“인정하마. 그래도 너희들은 죽지 않을 것이야. 내게 무릎을 꿇기만 한다면 지금 그대로의 권력을 그대로 누릴 수 있을 게야.”
끌끌끌…….
“내 제안을 거절해도 상관은 없느니라. 나는 다른 사제들에게도 똑같은 제안을 했었으니 말이다.”
‘빌어먹을.’
당백요는 이를 앙다물었다.
가장 우려했던 일이 기어이 터지고 말았다.
결국 이렇게 되면 어느 누군가는 사형과 손을 잡을지도 모른다.
“일 년만…… 일 년만 시간을 더 주세요.”
“그렇게 하마. 어차피 시간은 내 편일 테니.”
* * *
당백요가 떠나가고 난 후 종예가 안으로 들어와 머리를 조아렸다.
“두 개는 곡을 위해 사용하고 나머지 두 개는 밖에 나가 있는 놈들에게 풀도록 해라.”
“예. 곡주님.”
종예는 사내가 밀어 놓은 목갑 네 개를 품에 챙겼다.
“방금 중경에서 연락이 왔는데 사련의 련주 두광생이 죽었다고 합니다.”
“두광생? 아, 네게 팔이 잘린 늙은이를 말하는 것이로구나.”
“예. 그 늙은이의 아들이 제법 뛰어납니다. 할아버지의 죽음을 알았으니 그놈도 마냥 허송세월을 보내지 않을 것입니다.”
“그 일은 벽산이 알아서 처리하게 해.”
“예.”
종예까지 내보낸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았다.
끌끌끌…….
“이십 년의 제약이 작년에 끝이 났소이다. 사제들은 당신이 죽었다고 알고 있지만 나는 아니오. 세월을 거스르는 당신이 그렇게 쉽게 죽을 리가 없지.”
* * *
먹고 자는 일을 제외하고는 오직 경공으로 달리기만 했다.
사람들이 보일 때는 경공을 멈추고 걷다가 사람들이 지나가면 다시 경공으로 달렸다.
그렇게 나흘을 지나자 두 사람은 광서에 다다르게 되었다.
“육지를 통해 돌아가는 것보다 배 타고 가는 게 빨라.”
북궁도는 비강을 포구로 이끌었다.
“남선북마(南船北馬)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남쪽에는 물이 많아.”
“남선맹까지 가야 하는 거냐?”
“정주 지부에 들러 그놈이 어디로 움직이고 있는지 확인부터 해야 해.”
두 사람은 뱃사공에게 철전 두 닢을 쥐여 주고 배에 올랐다.
상인들과 행인들을 실어 나르는 배는 포구를 떠나 멀리 보이는 육지를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
“저기 좀 봐.”
뱃전에 앉아 흘러가는 물을 내려다보던 비강의 옆구리를 북궁도가 손으로 쿡쿡 찔렀다.
북궁도의 시선이 머물고 있는 곳에는 곧게 뻗은 나무 지팡이를 쥐고 있는 젊은 도인이 앉아 있었다.
“행자(行者)인 것 같은데?”
“맞아. 몸이 단단해 보이는 것으로 보아 무공을 익혔을 거야.”
“사찰과 도관은 망했다고 들었는데 내가 잘못 알고 있었던 건가?”
“세상에 사찰과 도관이 얼마나 많은데. 그리고 망해 버린 소림이나 도관에도 무승과 무선들은 있어. 사찰이나 도관에 힘없는 중과 도인들만 있다면 벌써 도적들의 소굴이 됐을 거야. 적은 숫자이기는 하지만 사패에서 인정하는 한도 내에서 무공을 수련하고 있어.”
바닥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던 젊은 도인도 두 사람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렸다.
“원시천존.”
담담한 기색으로 반장을 하며 먼저 인사를 하는 젊은 도인을 향해 두 사람도 살짝 머리를 숙였다.
배가 육지에 다다르자 북궁도는 강 한쪽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위로 올라갔다.
그렇게 한참을 가다 보니 여러 채의 목조 건물과 입구를 지키고 있는 무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지 무인들은 매우 부산해 보였다.
“어서 오십시오.”
입구를 지키고 있던 무인들은 북궁도와 안면이 있는지 별다른 조치 없이 바로 안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어서 오시게, 북궁 조장.”
전각 안에서 일을 보고 있던 중년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반겨 맞이했다.
“이쪽은 북림의 연비강 소협입니다.”
북궁도의 소개에 지부장은 크게 놀라며 비강과 인사를 나누었다.
“연비강 소협이라면 요즘 강호에 위명이 쟁쟁한 분이 아니십니까.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정주의 지부장인 곽상인이라 합니다.”
“곽 지부장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인사가 끝이 나고 지부장은 아랫사람에게 지시해 차를 내오게 했다.
“아닙니다. 우리들이 이곳에 들른 이유는 혈저귀(血猪鬼)의 행방을 알고자 함입니다.”
차를 사양한 북궁도는 바로 본론부터 꺼냈다.
“닷새 전 광서 하월 인근에서 우리 남선의 무인들과 한바탕 혈전을 벌였네. 그때 우리 측 무인 이십이 명이 전사하고 또다시 모습을 감췄다가 이틀 전 원평 인근에 출현했다네.”
원평이라면 정주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제법 큰 고을이었다.
“감사합니다. 저희들은 바로 원평을 향해 출발하겠습니다.”
“잠시…….”
북궁도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는데 곽상인은 비강의 눈치를 살피며 말끝을 흐렸다.
“나는 밖에서 기다릴게.”
“괜찮아. 우리 사이에 무슨 비밀이 있다고.”
북궁도의 만류를 미소로 뿌리친 비강이 밖으로 나가자 곽상인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본 맹의 금지에서 고수 셋이 나왔다는 전언을 받았네.”
“알겠습니다.”
지부장과 인사를 나누고 방을 나온 북궁도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비강과 함께 원평으로 출발했다.
“원평은 광서 북쪽에 있는데 이곳과는 거의 하루 반나절 거리야. 경공으로 달리면 저녁때쯤 도착할 수 있을 거야.”
경공을 사용해 달린 두 사람은 저녁때가 되어 원평 안으로 들어섰다.
“저기, 우리 쪽 은계조가 보인다. 다른 데로 가자.”
마을로 들어선 북궁도는 거리를 수색하며 돌아다니는 은계조를 발견하자 급히 골목 안으로 숨어들었다.
“맹의 동료인데 왜 피해 다니는 거지?”
“조장이 입이 싸. 되도록 마주치지 않는 게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