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 연비강 1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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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08회 작성일소설 읽기 : 신마 연비강 12화
제12화. 백건적(2)
으아아앙…….
갓난아이가 죽어 널브러진 엄마의 품에서 자지러지게 울어 젖혔다.
“아이고! 우리 집 다 타네. 우리 집 다 타!”
“어서 물을 길어 와! 불을 꺼야지!”
이십여 호 정도 되는 작은 마을은 아기들의 울음소리와 어른들의 외침 소리, 그리고 검은 연기로 가득했다.
마을 사람들에 의해 점차 불은 잡혀 갔지만 남은 것이라고는 검게 그을린 기둥들과 그 아래 널브러진 시신들뿐이었다.
“용석아!”
“막삼아!”
불이 잡히자 아낙네들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사라진 아이들의 이름을 외쳐 대며 대성통곡을 터뜨렸다.
사라진 아이들이 없는 사람들도 주변에 모여 눈물을 흘렸다.
“자…… 이제 그만 울고, 우리는 시신들을 묻어야 하니 얼른 움직이세.”
작은 마을은 전란을 겪은 것과 다를 바 없는 상황이었다.
그들이 시신들까지 전부 묻었을 때 흑견조가 마을로 들어섰다.
“도적놈들이 또 쳐들어왔어, 또…….”
병기를 휴대한 강호인들이 마을로 들어서자 마을 사람들은 두려움에 몸을 떨며 도망치기에 급급했다.
그들 눈에는 흑견조가 도적들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이놈들아! 내 아들을 어디로 데려갔느냐?”
아이를 잃어 눈이 뒤집힌 마을 사람 하나가 낫을 들고 달려들었다.
“진정하시오! 우리는 도적들이 아니오!”
모중악이 앞으로 나서며 낫을 치켜든 사내의 손을 붙잡았다.
“우리는 도적들을 잡아들이기 위해 북림에서 나온 순찰조이올시다.”
조장은 낫을 든 사내에게 정중하게 머리를 숙이더니 마을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우리는 북림에서 나온 사람들이오!”
급급히 도망을 치던 마을 사람들이 조장의 외침 소리에 발을 멈추고는 우물쭈물 몸을 돌렸다.
“그…… 그 말씀이 참말로 사실…… 입니까?”
“사실이오. 그러니 우리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소.”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마을로 발걸음을 되돌리고, 결국 살아남은 사람들 모두가 마을 한가운데로 몰려들었다.
엉엉엉…….
흑견조 앞에 다다른 마을 사람들은 바닥에 엎드려 통곡부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잠시 내려다보던 조장은 뒤쪽에서 눈물을 흘리며 서 있는 노인을 손짓해 불렀다.
“당신이 이 마을의 촌장인 것 같소만.”
“그렇…… 습니다요.”
“어떻게 된 상황인지 설명해 주시오.”
늙은 촌장은 눈물을 훔치더니 처음부터 차근차근 일을 털어놓았다.
“다들 아침을 먹고 일을 나가려고 하는데 그자들이 마을에 들이닥쳤습니다요. 머리에 하얀 띠를 두른 도적놈들이 칼과 활을 들고 쳐들어와 곡식을 약탈하고 어린아이들을 전부 잡아갔지 뭡니까요. 살기 위해 대항을 하던 사람들 모두 그 도적들의 손에 죽임을 당했고요…….”
“도적들의 숫자는 얼마나 되고 어디로 갔소?”
“스무 명 정도였고, 저기 저 산으로 올라갔습니다요.”
비강은 조장과 촌장의 대화를 들으며 마을 사람들을 살폈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이어 나가는 와중에도 갓난아기들은 여인과 사내들의 품에 안겨 계속 울어 젖히고 있었다.
지독한 놈들이다, 살아 있을 가치조차 없을 정도로.
“아버지나 어머니를 잃은 아기들은 물론이고 부모 둘 다 잃은 아기들까지 있습니다요.”
비강의 눈은 마을 사람들을 거쳐 이제 막 만들어 놓은 무덤으로 옮겨 갔다.
봉분 아홉 개가 산 밑으로 나란히 보였다.
“가자.”
촌장으로부터 상황을 전해 들은 조장은 도적들이 사라진 방향으로 조원들을 이끌었다.
도적들이 지나간 자리는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산허리를 타고 이동했습니다, 조장.”
부조장 왕준이 앞장서서 도적들의 흔적을 좇았다.
왕준의 눈에는 다리에 스쳐 늘어진 풀잎과 꺾인 나뭇가지도 보였고 가끔 발자국도 발견할 수 있었다.
조원들을 따라 한참 동안 산길을 걷던 비강은 문득 조장을 불러 세웠다.
“조장, 마을에 놓고 온 물건이 있어 다녀왔으면 합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막 화를 내려던 부조장에게 손을 들어 막은 조장이 선뜻 허락했다.
“됐네. 빨리 다녀와. 우리는 잠시 쉬고 있을 테니.”
조장의 허락을 받은 비강은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
잠시 후, 마을에 도착한 비강은 촌장을 마을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불러냈다.
“촌장은 잠시 나 좀 봅시다.”
“왜…… 또…… 저를 찾으시는지요?”
비강의 눈에 부모를 잃은 갓난아이들이 들어왔다.
“……받으시오.”
비강은 품에서 며칠 전에 받은 전낭을 꺼내 금덩이 하나를 내밀었다.
“이것을 팔아 식량을 구해 마을 사람들과 공평하게 나누시오.”
“아, 아니…… 어떻게 이걸…….”
당황해 말조차 잇지 못하는 촌장의 손에 금덩이를 억지로 쥐여 준 비강은 다시 산 위로 달려 올라갔다.
수많은 전쟁터를 전전하며 꽤 많은 전리품을 얻었었다. 그러나 그 전리품들 대부분은 전쟁으로 굶어 죽어 가는 양민들에게 돌아갔다.
어차피 자신은 무인이다. 백파 같은 무기가 아니라 먹지도 못할 금붙이 따위, 어떤 의미도 없었다. 그러니 양민들에게 나눠 주는 일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정말…… 고맙습니다요. 정말 고맙습니다요.”
산으로 올라가는 비강의 귀로 마을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 *
쿠릉…… 쿠릉…….
세차게 쏟아지는 여름비는 말라 있던 작은 개울을 휩쓸며 산 아래로 굽이쳐 내려갔다.
“제기랄, 세 시진째 비를 퍼붓고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이는군.”
동굴 입구에서 밖을 감시하던 왕준은 안쪽으로 들어가더니 벽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는 비강의 어깨를 쳤다.
교대 시간이었다. 비강은 자세를 바로 하고 동굴 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동굴 입구에 앉아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고 있으려는데 인기척과 함께 조장 온조가 걸어와 맞은편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석아산이 가까워질수록 피해를 입은 마을들이 늘어나야 하는데 오히려 줄어들고 있어. 아무래도 자네가 그자들의 본거지를 잘못 짚은 것 같네.”
“저는 오히려 그 점 때문에 적들의 본거지가 석아산 인근에 있다는 확신이 듭니다.”
“자네는 도적들이 추격의 눈을 돌리기 위해 일부러 근처의 마을들을 내버려 뒀다고 생각하나?”
비강은 온조의 질문에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하지만 온조의 반응은 상당히 회의적이었다.
“앞뒤 가릴 것 없이 양민들을 학살하고 재물을 약탈하는 도적들에게 그런 용의주도함이 있을 것이라 보나?”
“평범한 도적들이 아닐지도 모르지요.”
“그건 또 무슨 말인가?”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대답은 얼버무렸지만 느낌만은 아니었다.
도적들은 머리에 하얀 띠를 두르고 있었다고 했었다.
때문에 백건적이라 불리게 되었을 것이나 그 머리띠에는 다른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일단은 자네 말대로 석아산 인근을 살펴볼 것이나 큰 기대는 없네. 그나저나 자네는 참으로 알면 알수록 더욱 모를 사람이로군. 자신의 수중에 들어온 재물을 털어 양민들을 위해 내놓다니.”
온조가 비강의 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낭인들은 절대로 하지 않을 짓이지. 그렇게 보면 자네는 절대로 낭인이 아니야.”
비강은 피식 미소를 지으며 동굴 밖으로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를 바라보았다.
낭인이니 강호인이니 하는 말은 애초부터 관심조차 없었다. 그냥 마음이 시키는 대로 살아갈 뿐이다.
* * *
후둑, 후두둑…….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쏟아지던 비가 갑작스럽게 잦아들었다.
“이제 비가 그치려나 보군.”
조장은 동굴 안쪽에서 잠을 자고 있는 조원들을 깨우기 위해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 밖으로 나온 비강은 하늘 저 너머로 멀어져 가는 먹구름을 바라보다가 아래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쏴아아아…….
거세게 쏟아붓던 비는 동굴 아래로 흐르고 있던 작은 개울을 거센 물결이 굽이치는 작은 강으로 만들어 놓았다.
“환장하겠군.”
조원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온 조장은 한숨을 푹푹 내쉬더니 다시 동굴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넉 장 정도 넓이의 강을 날아 건너뛰려던 비강도 조장과 조원들이 전부 동굴 안으로 되돌아 들어가자 입맛을 다시더니 따라 들어갔다.
* * *
“조장, 이제 건량도 바닥이 났습니다. 오늘 내로 적들의 본거지를 발견 못 하면 그만 내려가야 합니다.”
부조장 왕준의 앓는 소리를 흘려들으며 전방을 주시하는 조장의 눈빛에 기광이 일었다.
비강의 말이 옳았다.
사람들이 지나다닌 흔적은 다른 산과 다를 바 없었으나 이 석아산엔 다른 것들이 있었다.
깨끗하게 사선으로 잘린 굵은 나무줄기와 깊지 않은 발자국은 분명 심후한 내공을 소유한 강호인의 것이었다.
“오는군.”
조장의 말에 부조장은 얼른 고개를 들어 숲을 살폈다.
정찰을 내보냈던 모중악이 조심스럽게 숲을 헤치며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보고를 올렸다.
“이삼 리 앞에 적들의 본거지가 있습니다, 조장.”
“연 조원은?”
“근처에 숨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좋아. 그럼 부조장은 지금 당장 악양 지부로 돌아가 이곳의 상황을 보고하게. 나와 조원들은 조금 더 자세한 상황을 살핀 후에 복귀할 것이니.”
“예. 알겠습니다.”
조장의 명령을 받은 부조장은 황급하게 산을 내려갔고 모중악은 신형을 되돌렸다.
“따라오십시오.”
조장과 조원들은 모중악의 뒤를 좇아 길조차 없는 숲으로 들어갔다.
모중악의 말대로 이삼 리를 이동한 조원들은 바위 뒤에 숨어 있는 비강과 마주할 수 있었다.
“어떤가?”
“직접 보십시오.”
바위 위로 살짝 고개를 내민 조장은 흐릿하게 보이는 여러 채의 초옥과 그 앞을 오가는 사람들의 형체를 발견했다.
“제가 대충 도적들의 숫자를 세어 보니 약 팔십여 명 정도 되더군요. 절벽 중턱과 입구 아래쪽으로는 초병들까지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 거리에서 저들을 어떻게 확인했나?”
“조금 더 가까이 접근해 확인했습니다.”
비강은 자신의 안력을 적당히 숨기기로 했다. 사실 이 정도 거리에서 도적의 수를 세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숫자뿐 아니라 오가는 자들의 얼굴에 있는 점 하나까지도 확인할 수 있었다.
“고수로 보이는 자들은 대부분 젊었는데, 이십 명이 넘지 않습니다. 나머지는 겉모습만 사나워 보일 뿐 무공은 그리 깊지 않아 보였습니다.”
“수고했네. 그럼, 이제 돌아가도록 하지.”
비강도 굳이 조장의 말을 반대하고 싶지 않았다.
적의 본거지를 알아내는 것이 목적이니 그 일만 완수하면 되는 것이다.
‘공을 세우려면 다음 기회를 노려야겠어.’
북림을 위해 공을 세우려는 것이 아니었다.
사천존을 만나 그들의 무공을 견식하기 위함일 뿐이었다.
강호가 인정하는 천하제일을 눈으로 확인하고 겪어 보고 싶었다.
그렇게 비강이 막 숨어 있던 곳을 빠져나가려던 순간, 아이들의 흐느끼는 소리가 바위 너머에서 들려왔다.
흐흑…… 흑…….
“엄마…….”
십여 명의 아이가 도적들의 손에 의해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었다.
비강의 표정이 굳었다.
“조장, 아이가 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아이들이 다른 곳으로 끌려가고 있습니다.”
허어…….
그제야 조장은 비강의 무공이 자신의 짐작을 훨씬 뛰어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의 눈으로는 도적들의 흐릿한 형체만 보일 뿐 아이들의 모습은 조금도 알아보지 못했다.
“그렇다면 도적들의 뒤를 쫓아가다가 적당한 장소에서…… 아니, 안 되겠군. 절벽이 막고 있어 산을 돌아 움직이기도 힘들어.”
“여기 그냥 계십시오.”
비강은 숨어 있는 곳에서 몸을 일으켜 초옥이 있는 곳을 향해 걸었다.
“이봐, 연 조원!”
“연 조원!”
뒤에서 조장과 조원들이 다급한 목소리로 그를 잡았다.
하지만 비강은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태연하게 도적들을 향해 걸었다.
저곳에 아이가 있다. 아직 얼마 살아 보지도 못한 핏덩이들이.
휘이이…….
그리고 다음 순간 그의 신형은 연기가 꺼지듯 사라지고 주변으로 바람이 일었다.
퍽!
철봉 뒷부분을 감싼 가죽의 감촉이 느껴지자마자 눈앞에 있던 도적의 머리가 터져 나갔다.
퍼퍽! 퍽!
연이어 또 다른 도적들의 목뼈가 철봉에 맞아 부서지고 가슴이 함몰되었다.
“적이……!”
스걱―
적의 침입을 알리려던 놈의 목이 검에 베어지며 머리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오른손에 철봉을, 왼손에는 검을 쥔 비강은 놀라 부릅뜬 도적들의 눈을 바라보며 하얀 미소를 지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