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 연비강 50화
무료소설 신마 연비강: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665회 작성일소설 읽기 : 신마 연비강 50화
제50화. 무신의 선물
휘황한 검광과 치솟고 병기를 손에 쥔 강호인들은 힘없이 땅바닥에 몸을 뉘었다.
끄아악! 끄악!
“백리…… 혈…… 이…… 마귀…… 같은…….”
한동안 이어지던 비명 소리는 누군가의 저주를 끝으로 잠잠해졌다.
비강은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강호인들의 겉옷에 검신을 닦았다.
“마귀는 내가 아니라 너희들이야.”
강호의 소문은 경공보다 빠르게 퍼져 나갔다.
가는 곳마다 강호인들이 달려들어 식사는 물론이고 잠조차 제대로 자지 못했다.
포목점에서 사 입은 검은 털옷과 가죽을 덧댄 무복은 지독한 피비린내가 풍겨 나올 만큼 피에 절어 있었다.
이제 반나절만 걸어가면 서안이고, 경공으로는 반 시진도 걸리지 않았다.
비강은 이번 혈전이 마지막이기를 희망하며 경공을 펼쳤다.
휘이이이…….
땅을 한 번 차고 오를 때마다 사오 장씩 비강의 몸이 멀어져 갔다.
발길이 머문 자리에는 털옷과 무복에서 흘러내린 피가 뿌려져 쌓인 눈을 붉게 물들였다.
서안으로 들어선 비강은 추위 속에 바삐 오가는 사람들을 헤치며 포목점부터 찾아갔다.
그가 지나갈 때마다 피비린내를 맡은 사람들이 흠칫 놀라며 길을 비켜 주었다.
“어…… 어떻게 오셨는지요?”
포목점 주인도 긴장을 하며 얼른 머리를 숙여 물었다.
“털옷과 무복 한 벌을 내주시오. 모두 검은색으로 하되 무복은 가슴과 등에 가죽을 덧댄 것으로 주시오.”
“아……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안으로 들어간 주인은 급하게 털옷과 무복을 찾아 내왔다.
옷을 갈아입은 비강은 값을 치르고 북림을 향해 걸었다.
순찰을 나온 북림의 무인들은 비강이 지나갈 때마다 굳은 얼굴로 조용히 머리를 숙였다.
‘상황은 그리 나쁘지 않아. 내 짐작이 틀린 건가.’
비강이 바로 북림으로 들어가지 않은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북림 무인들이 자신을 대하는 자세를 확인해 안에서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려는 것이었다.
거리를 벗어나 북림 안으로 깊숙이 들어갔지만 분위기는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다.
“연 부관의 복귀를 축하드립니다.”
입구를 지키고 있는 무인들도 가벼운 인사로 비강을 맞이했다.
“무사복귀를 축하드립니다. 안에서 단주님이 기다리고 계시니 들어가 보십시오.”
순찰단주의 호위들인 동평지와 광이재의 환한 안색을 확인한 비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들어갔다.
“많이 늦었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약철빙이 자리에서 일어나 비강을 향해 다가왔다.
그러고는 곧 살짝 아미를 찡그렸다.
옷을 갈아입기는 했지만 은은한 피비린내는 어찌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목욕부터 해야겠어. 보고는 그다음에 받지.”
“아닙니다. 먼저 보고를 하고 오늘은 쉬고 싶습니다.”
“그럼, 그렇게 해.”
약철빙의 허락에 비강은 그동안의 일을 상세하게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 이야기 중 하오문주와 장경주가 관련된 것들은 빼 버렸다.
“악규가 퍼뜨린 헛소문 때문에 강호인들이 앞을 막아 조금 늦었습니다.”
이미 여러 곳에서 올라온 보고를 받아 저간의 사정을 짐작하고 있던 그녀였다.
악규가 형부이고 악가가 형부의 가문이라고는 하지만, 약철빙의 얼굴에는 불쾌함이나 원한이라고는 한 점 찾아볼 수 없었다.
“아까운 기회를 놓쳤어. 그런 놈은 그 자리에서 바로 죽였어야 하는 건데.”
오히려 그녀는 악규의 죽음을 바라고 있었다.
“곧 기회가 있을 겁니다.”
이번 강호행은 수많은 원한을 쌓은 여정이었다.
그리고 그 원한은 대부분 악규가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악규의 죽음만으로 그 원한을 씻기는 힘들지. 최소한 악가의 멸문 정도는 되어야지.’
* * *
몸을 씻고 방 안에 들어가 쉬려던 비강은 약철빙으로부터 림주의 부름을 전해 들었다.
“연 부관에 관한 좋지 않은 정보들이 수없이 올라왔지만 림주님께서 그 정보들을 믿지 않으셨던 모양이야. 지금 연 부관을 기다리고 계셔.”
“다녀오죠.”
방 안에 놓아두었던 철봉을 찾아 등 뒤에 두른 그는 바로 림주를 찾아갔다.
* * *
하아!
하얀 눈이 덮인 산은 청명한 햇살을 받아 눈을 부시게 했다.
걸음을 옮기던 비강은 잠시 넋을 놓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정말 아름답구나.”
“그래서 이곳을 북림의 자리로 정했느니라.”
넋을 놓고 경치를 구경하던 비강은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살짝 허리를 숙였다.
“림주를 뵙습니다.”
“올라오너라.”
풍천양은 산 정상에 오연히 서서 아래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산 정상에 오른 비강은 눈밭에 마련이 된 탁자 위에 놓인 천마의 도와 두 개의 찻잔을 발견했다.
찻잔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누가 또 오는 겁니까?”
“너 말고 누가 있겠느냐. 앉아.”
풍천양과 비강은 탁자를 마주하고 앉았다.
“얼굴이 많이 수척해졌구나.”
“괜찮습니다.”
“괜찮기는? 며칠간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해 피곤한데 내가 불러 짜증이 났을 게야.”
“맞습니다.”
껄껄껄…….
풍천양은 고개를 끄덕이며 기분 좋게 웃었다.
“잘했구나.”
순간 비강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설마 풍천양의 입에서 잘했다는 말이 흘러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무엇이…… 무엇을 잘했단 말씀이십니까?”
“악가에 관한 일 말이다. 내게 먼저 허락을 구하고 싶었겠지. 그렇지 않느냐?”
이미 풍천양은 악가를 멸문시키고자 하는 비강의 의중까지 짐작하고 있었다.
“알고 계셨습니까.”
“그 정도도 짐작하지 못한다면 북림의 림주라 할 수 없지. 바른대로 말하자면 내가 너의 입장이라 해도 그자들을 전부 죽였을 게다.”
“하면 허락을 받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껄껄껄…….
수많은 죽음에 관한 대화가 오가는 상황이었지만 풍천양은 정말 즐거워 보였다.
“네 녀석이 좋을 대로 해라. 단 다른 자들은 너의 짓임을 몰라야 하느니라.”
“몰래 그자를 죽여야 한단 말이로군요.”
“너를 위해서 그래야 할 게야. 만약 다른 자들이 네 짓임을 알게 된다면 내가 너를 죽여야 하지 않겠느냐.”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검을 겨누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풍천양이란 사람은 자신을 믿고 기다려 준 사람이었다.
“부림주가 가져다주더구나.”
풍천양의 눈짓에 비강은 탁자 위에 놓인 천마지병을 들어 올렸다.
전에 자신과 북궁도가 파괴한 도와 모양이 똑같았다.
부숴 버리기에는 이미 늦었다.
이것이 북림 안으로 들어온 이상 어떻게 처리하든 강호인들은 절대로 믿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어찌해야 하겠느냐?”
“부숴 버리기에는 너무 늦었습니다.”
역시 이 녀석은 천마지병이 보물이 아닌 요물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호남 의창에서 남쪽 녀석과 함께 아무런 미련 없이 파괴했겠지.
그 사실을 이미 들어 알고 있는 풍천양은 자신도 모르게 씁쓸한 미소를 지어냈다.
‘운패, 그놈이 부럽기는 이번이 처음이로다.’
풍천양은 한조를 제자로 골라 키웠다.
벽사군이나 악추산도 기재들이기는 했지만 그들을 제자로 둔 것은 부림주와 총관 때문이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씁쓸했던 미소는 나타나기 무섭게 사라졌다.
“무엇이냐?”
“어찌하여 부림주를 곁에 두고 계십니까?”
껄껄껄껄…….
이 녀석과 조금 더 일찍 만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풍천양의 가슴속에는 슬픔과 함께 안타까움이 일었다.
“약추완처럼 상황 판단이 빠른 자도 드물지. 탐욕만 제거하면 능력도 뛰어난 편이고. 지금까지 북림을 평온하게 유지한 것은 온전히 그자의 공이라 할 수 있으니 어찌 쉽게 내칠 수 있겠느냐.”
“만약 북림이 위태로워지면 그자가 제일 먼저 반기를 들 겁니다.”
크하하하…….
이 녀석과 함께 있노라면 웃음이 그치지를 않는다.
“나를 걱정해 주는 것이더냐? 그만 내려가 하던 일을 계속해라. 그리고 그것은 네 것이니라.”
“감사합니다.”
가짜 천마지병이었지만 비강은 머리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천마의 도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난 비강은 산 아래로 천천히 내려갔다.
의자에 앉아 식어 버린 차를 맛보는 풍천양의 입에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제 죽음조차 두렵지 않구나.”
* * *
비강이 천마지병을 들고 들어오자 약철빙은 화들짝 놀랐다.
“그걸 왜 연 부관이 가지고 있지?”
“림주가 가져가라더군요.”
아무렇지도 않게 한쪽 구석에 도를 던져 놓은 비강은 방으로 들어가 침상에 몸을 던졌다.
잠을 자기 위해 눈을 감았지만 떠오르는 것은 풍천양의 씁쓸해하는 미소였다.
림주는 참으로 괜찮은 사람이었다.
‘뭔가 큰 고민이 있는 것처럼 보였어.’
풍천양의 얼굴을 떠올리던 비강은 자신도 모르게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잠을 잤는지 모르지만 침상에서 일어나니 주변을 뒤덮고 있는 것은 어둠이었다.
문을 열고 나와 집무실의 불을 켠 비강은 문득 벽 한쪽에 던져 두었던 도를 집어 들었다.
가짜 천마지병.
스릉…….
도를 뽑자 불빛을 받아 번들거리는 도신이 얼굴을 드러냈다.
제법 잘 만들어진 병기였지만 천마의 병기라 불릴 정도는 아니었다.
도신을 이리저리 살피던 비강의 시선은 손잡이로 옮겨 갔다.
전에 북궁도와 함께 파괴한 도의 손잡이는 가느다란 어피로 여러 번 묶어 덮은 것이었는데 이것은 어피를 통째로 덮어씌워 놓은 것이었다.
‘설마…….’
혹여나 하는 마음에 어피를 묶고 있는 가는 실을 끊어 내자 손잡이를 감싸고 있던 어피가 통째로 풀려나왔다.
‘정말로 무공이 있었구나.’
오랜 세월의 흔적처럼 어피 안쪽에 빼곡하게 보이는 작은 글자들이 흐릿하기만 했다.
하지만 읽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어피의 마지막 부분에는 이제 막 써 넣은 것처럼 진한 글자가 쓰여 있었다.
‘언젠가 찾아올 나의 마지막을 네가 봐 주면 고맙겠구나.’
이게 무슨 뜻일까?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어.’
깊은 고심에 잠겼던 비강은 얼른 정신을 차리며 무공 구결에 모든 정신을 집중했다.
무공 구결 속에 숨어 있는 진정한 의미는 얼른 알아채기 힘들었으나 평범한 무공은 아니었다.
‘분명 구파일방이나 육대세가의 무공 중 하나겠지.’
가품이기는 했지만 마치 진품처럼 많은 정성을 들여 만들어 낸 물건이었다.
오초식의 무공구결을 전부 머릿속에 집어넣은 비강은 방 안을 밝히고 있는 촛불에 어피를 태워 없앴다.
그러고는 방 안으로 들어가 허름한 무복 한 벌을 찢어 도파를 감쌌다.
찢고 남은 무복으로 도신까지 감싸 동여맨 비강은 그것을 집무실 한쪽에 세워 놓았다.
‘너에게 되돌려 주마, 악규.’
* * *
약철빙은 비강을 위해 서류들을 한쪽에 분류해 놓았다.
자리를 비운 사이 오갔던 서류들을 전부 읽고 파악하다 보니 어느새 새벽이 찾아오고 있었다.
운기행공과 무공 수련을 위해 집무실을 나오자 번을 서고 있던 광이재가 인사를 건넸다.
“벌써 일어나셨습니까? 조금 더 주무시지 않고요.”
가벼운 미소로 인사를 대신한 비강은 약철빙이 사용하는 공터로 가 무공 수련을 시작했다.
우웅…….
검은 잔상을 남기며 빈 공간을 찢어발겼다.
비강의 무공 중 가장 난해한 두 번째 무공, 이원삼천이었다.
화산의 제자인 삼봉과 비무를 하고 난 후 두 번째 무공의 변형을 만들었는데 아직 제대로 된 완성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반 시진 동안 이원삼천을 수련하던 비강은 용아포 천멸후로 넘어갔다.
검신을 타고 휘돌던 아지랑이는 이리저리 꿈틀거리는 실뱀처럼 움직이다가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날아갔다.
퍼석.
작은 폭음과 함께 공터 한쪽에 나뒹굴고 있던 작은 돌멩이 하나가 부서지며 비산했다.
기는 비강의 통제 아래 생명체처럼 살아 움직였다.
투명한 눈빛으로 잘게 부서진 돌멩이를 바라보던 비강은 한쪽으로 걸어가 정좌를 하고 앉았다.
그렇게 다시 반 시진의 시간이 흘렀을 때 약철빙이 공터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먼저 와 공터 한쪽에 앉아 있는 비강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가 공터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쉬익…… 쉭…….
바람을 가르는 약철빙의 검이 사방을 점하며 뻗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