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 연비강 6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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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617회 작성일소설 읽기 : 신마 연비강 62화
제62화. 봄이 오다
약하림은 비강을 알아보지 못했다.
너무 황망한 상황이라 조원들을 살피지 못한 것이다.
가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비강의 얼굴을 알고 있는 자들은 전부 죽었고 공손황이 조원들을 이끌고 있기에 조원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나마 눈이 밝은 가인들도 있었으나 지금은 가주가 죽어 조원들에게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다.
장로와 일단의 가인들이 시신들을 수습하기 위해 떠나가고 공손황과 조원들은 악가의 피해 규모를 살폈다.
건물 세 채가 불에 탔고 가인들은 사십이 명이 전사했다.
“천마지병은 어디에서 구하셨습니까?”
공손황의 질문에 안내를 맡고 있던 가인은 우물쭈물 대답을 미뤘다.
“그것은…… 천마지병이 아닙니다.”
“어찌 되었든 그 천마지병은 어디에서 구한 것입니까?”
“시, 실은 우리 가문이 습격을 받고 난 후 장로님께서 가인들을 데리고 병기점을 찾아가 배후를 캐묻다가 그만…….”
“병기점의 주인을 죽였군요.”
“……예. 알아낸 것이라고는 거지꼴을 한 젊은 여인이 싼값에 그 병기를 넘기고 사라졌다는 것밖에 없습니다.”
가인은 고개를 푹 숙이며 조그만 목소리로 대답했다.
“가문을 습격한 자 중에 포로로 잡은 자들은 어찌 되었습니까?”
“다섯 명을 포로로 잡았는데 네 명은 떠돌이 낭인이라 바로 목을 베었고, 한 명은 정주에 있는 막가의 가인이었습니다. 그 일로 막가의 가주는 스스로 한 팔을 잘라 용서를 빌었습니다만…….”
“멸문시켰습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장로께서 워낙 화가 많이 나신 터라…….”
하아…….
공손황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추적의 실마리를 전부 없앴으니 어디서부터 일을 시작해야 한단 말인가.
“우선 밖으로 나가자.”
조사를 끝내고 악가를 나섰을 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다.
“연 소협, 무슨 좋은 방법이 없겠소?”
“하오문의 도움을 받는 것은 어떻겠소.”
“한번 하오문에 의지를 하게 되면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그곳을 찾게 되오. 강호 무림을 위해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니오. 결정적으로 그자들은 믿을 수 없소.”
공손황의 하오문에 대한 인식은 확고했다.
“그렇다면 외곽에 있는 객잔부터 훑어봅시다. 악가는 여느 무가와 달라 습격을 계획한 자들이 중심부까지 들어와 묵어가지는 않았을 거요.”
비강의 의견에 공손황은 고개를 끄덕이며 앞장을 섰다.
마침 그도 비강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 * *
[그자들이 북림의 본성까지 습격할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네. 우리의 결정은 잠시 미루는 것이 어떻겠나.]
풍천양은 전서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탁자 위에는 세 장의 전서와 봉한 서신 하나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각기 세 곳에서 날아온 전서였다.
전서의 도착 시간은 하루 차이로 각기 달랐으나 내용을 확인하는 시간은 동일했다.
풍천양은 두 번째 전서를 펼쳤다.
[결정을 미뤄야 하지 않겠어? 북림을 공격했으니 다음 차례는 우리가 될 거야.]
역시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풍천양은 담담한 기색으로 세 번째 전서를 펼쳤다.
[천양,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남은각에서 아홉 놈이 빠져나갔다. 석장이 놈이 왔다 갔다고 하더라. 그놈이 그러는데 사형이 우리에게 찾아오지 말라고 했다더라. 자기가 직접 찾아온다고.]
풍천양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떠올랐다.
“솔직한 놈.”
은운곡에서의 약속은 물거품처럼 스러졌다.
이곳이 공격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때부터 이미 짐작했던 결과였다.
‘내 마음을 알아주는 놈은 역시 운패 그놈뿐이런가.’
놀리기도 많이 하고 싸우기도 많이 했던 놈이었다.
화르르…….
전서를 모두 불태운 풍천양의 입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보고하라.”
회의실 뒤쪽 벽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보고를 올렸다.
“그곳은 은운곡에서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숫자는 대략 삼백 명이며 낭인 중 가리고 가려 뽑은 자들입니다.”
“멸하라. 생존자는 필요 없느니라.”
“존명.”
“또한 이 서신은 정주의 연비강에게 전하도록 하라.”
“존명.”
“아…… 서신의 적임자로는 이연을 보내도록.”
탁자 위에 놓여 있던 봉서는 그대로 날아올라 회의실 뒷벽으로 사라졌다.
모든 일을 처리한 풍천양은 투명한 기막을 거둬들였다.
“림주님, 서역의 사신 행렬이 서안에 들어섰습니다.”
“영접할 채비를 서두르라 전하라.”
* * *
길고 긴 사신 행렬이 서안으로 들어섰다.
말을 탄 이들이 오십 명이 넘었고 마차와 수레는 일백 대가 넘었으며 호위를 하는 군사들 또한 오백 명을 넘고 있었다.
서안에 살고 있는 수많은 양민들이 몰려나와 사신 행렬을 구경했다.
사신 행렬을 구경하는 사람 중에는 하오문의 장경주도 끼어 있었다.
그녀는 눈앞을 지나가는 사신 행렬 속에서 유독 마차 안의 여인을 주목했다.
‘정말 아름다운 분이야.’
마차의 창문으로 드러난 젊은 서역의 여인은 장경주의 눈에 아주 아름다워 보였다.
사신 행렬은 거리를 지나 북림으로 향했다.
길고 긴 숲길을 지난 사신 행렬은 거대한 성문 앞에 멈춰 섰다.
드드드드…….
삼 장 높이의 대문이 활짝 열리고 말과 사람들은 멈춰 섰던 발걸음을 옮겼다.
삘리리리…… 둥둥둥…….
피리 소리와 북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마차 안에서 노란빛의 화려한 옷을 입은 여인이 걸어 내렸다.
“북림은 공주님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부림주 약추완은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숙여 맞이했다.
그의 뒤로는 북림의 수많이 무인들이 도열해 있었다.
“환대해 주셔서 고마워요.”
비강의 옛 인연, 비파샤였다.
공주 비파샤의 말을 통역관이 대신해 전해 주었다.
“누추하지만 위에 자리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약추완은 몸소 공주와 일행들을 자신의 전각으로 안내했다.
“얼마 전에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해 자리가 마땅치 않습니다. 공주님께 용서를 구합니다.”
“이미 그에 관한 소식은 전해 들어 알고 있으니 개의치 마세요.”
비파샤는 높은 산을 거침없이 오르고 있어 앞에서 안내하고 있는 약추완이 내심 놀랄 정도였다.
약추완은 공주를 림주의 거처로 안내했다.
“어서 오십시오. 북림의 주인 풍천양이 공주님을 뵙습니다.”
전각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풍천양은 공주를 향해 정중히 머리를 조아렸다.
“드디어 당신을 만나게 되는군요. 반가워요.”
비파샤는 풍천양의 무례를 탓하지 않았다.
강호와 관은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었기에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햇볕이 좋아 밖에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풍천양은 햇볕이 따뜻한 자리로 비파샤를 이끌었다.
“그대들은 이곳에 남아 있어요.”
비파샤는 통역관만 자신을 따르게 하고 호위 무장들과 시종들은 그 자리에 남겨 두었다.
풍천양과 비파샤는 탁자를 마주하고 앉았다.
따뜻한 차가 나오고 풍천양과 비파샤는 거의 동시에 찻잔을 들었다.
“미천한 강호의 무부를 찾아오신 까닭을 묻고 싶습니다.”
먼저 풍천양이 입을 열어 대화를 시작했다.
“이곳에 저와 혼인을 약속한 분이 머물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그분을 모셔 가려 합니다.”
“그분이 누구십니까?”
“연비강, 우리나라에서는 ‘라바나’로 불렸어요.”
풍천양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더니 산 아래쪽으로 보이는 경치를 구경했다.
“비강은 가지 않을 것입니다, 공주님.”
통역관으로부터 풍천양의 말을 전해 들은 비파샤의 눈빛이 매섭게 돌변했다.
“그분께 직접 물어보겠어요.”
“그 녀석은 이곳에 없습니다. 강호 무림에 나가 언제 돌아올지 기약도 없는 형편입니다.”
비파샤는 풍천양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래요? 그렇다면 제가 이곳에 머물며 그분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도 되죠?”
“그리하십시오. 북림은 공주님께 모든 편의를 제공할 것입니다.”
언제나 당당한 비파샤였지만 풍천양 앞에서는 왠지 모르게 위축되었다.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눈빛과 위엄 가득한 분위기는 오라버니조차 미치지 못했다.
“그 녀석이 그곳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아아…….
비파샤는 풍천양의 그 한마디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 사람은…… 그분을 가족으로 여기고 있구나.’
이런 사람이 곁에 있으니 그분도 조금이나마 행복했을지 모르겠다.
눈시울까지 뜨거워진 그녀는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키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분을 만난 곳은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인…….”
풍천양은 눈까지 감으며 그녀와 통역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불쌍한 녀석.’
* * *
공주를 림주에게 안내하고 내려온 약추완은 급전으로 올라온 보고에 어쩔 줄 몰라 했다.
‘내 사위가 죽었다고?…… 내 사위가?…….’
그럴 리 없었다.
사위는 회운창이라는 별호에 걸맞게 강호에서 적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강자였다.
전서를 받아 든 약추완은 두 손이 덜덜 떨릴 정도로 큰 충격을 받고 있었다.
‘생존자 무(無).’
사위와 함께 움직였던 가인들까지 전부 전사했다는 소리였다.
“감히…… 감히…….”
분노로 인해 혈광까지 번뜩였던 두 눈에 차가운 살얼음이 내려앉았다.
북림의 습격이 있을 때 어둠 속에서 전음 한 줄기가 들려왔었다.
‘북은각은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그 전음을 믿은 것은 아니었으나 전투가 끝날 때까지 북은각 고수들의 도움은 없었다.
그때부터 백건적들이 보통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아니. 어쩌면 이번 일에는 백건적뿐 아니라 다른 세력이 끼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황곡에서 마주쳤던 사천존의 사형이라는 자.
그자는 강호에 나오지도 않았고 그곳에 남아 있는 세력도 미미했다.
하지만 북림이 습격을 받고 난 후부터는 이상하게 그자가 마음에 걸렸었다.
만약 그자가 이 일에 끼어들었다면 북은각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원래부터 한 가족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세상이 다시 바뀌어도 자신과 가문은 살아날 방법이 있었다.
배를 갈아타고 백건적과는 거래를 하면 가능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생각은 완전한 오판이었다.
‘사위까지 죽였는데 나를 살려 둘 리 없지.’
분노한 와중에도 머리를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던 약추완은 문득 비강이 악가에 관한 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정주로 떠났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연비강은 북림 안에서 림주의 제자는 물론이고 총관에게까지 검을 겨누던 놈이었다.
‘혹시 그놈이……. 아니야. 그놈은 세력이 없어. 아무리 그놈의 무공이 고강해도 악규가 함께하고 있었으니 가인들 중 몇 명은 살아 도망쳤을 것이야.’
후우!
약추완은 너무도 답답한 나머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까지 풍전등화의 위기 때마다 특출한 처세술을 발휘해 헤쳐 나왔다.
‘사위의 죽음은 안타깝지만 악가가 멸문한 것은 아니야. 손자가 가문을 이어받으면 되는 것이니. 하지만 가문의 위세를 유지하려면 이번 일에 관련된 자들은 모조리 잡아들여야겠지.’
“감찰단주를 불러오라.”
약가는 이십 년 전보다 훨씬 더 규모가 커지고 강해졌다.
사패를 제외한다면 가히 천하제일 가문이라 불러도 될 정도였다.
이제 가문의 힘을 강호에 드러낼 차례였다.
* * *
“결국 이번에도 헛물만 켰군.”
정주를 벗어나 호북의 경계까지 추격에 나섰던 옥돈조는 아무런 수확도 거두지 못한 채 걸음을 돌려야 했다.
백건적이라 의심했던 자들은 작은 무가의 가인들이었다.
거기다가 그들은 그 싸움에 끼어들지도 않았다.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 것 같소?”
공손황은 비강에게 앞으로의 일을 물었다.
“일단 정주에 돌아가 뒷일을 의논합시다. 조원들도 많이 지쳤으니 좀 쉬어야 할 것 같소.”
“그럽시다.”
공손황도 다른 뾰족한 방법이 없는지 비강의 뜻을 따랐다.
옥돈조는 하루 만에 정주로 되돌아 들어왔다.
“날씨가 따뜻해지니 사람들의 통행이 점점 늘어나는 것 같소.”
비강은 공손황의 말을 귓전으로 흘리며 저잣거리 가장자리에서 서서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는 여인을 주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