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 연비강 58화
무료소설 신마 연비강: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95회 작성일소설 읽기 : 신마 연비강 58화
제58화. 복수(1)
채비를 마친 두 사람은 북림을 나섰다.
수많은 수레에 목재를 실은 사람과 목수들이 북림을 드나들고 있었고, 일부는 입구에 서서 왼쪽 성벽을 올라타고 있었다.
밖으로 나온 약철빙도 자리에 멈춰 서서 성벽에 그려진 용틀임을 구경했다.
앞을 가로막는 적들을 걸레 조각처럼 찢어 버리는 무공.
저 무공은 적들뿐만 아니라 아군에게까지 공포를 심어 주었다.
“굉장하구먼. 사람이 어찌 돌로 지어진 벽에 이런 흔적을 남길 수 있단 말인가.”
“듣기로 백리혈이라는 무인이 일검에 이렇게 만들어 놓았다더군.”
쓴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가는 비강의 뒤를 약철빙이 급히 쫓았다.
“저 무공의 이름이 어떻게 되지?”
“용아포 천멸후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무공과 정말 잘 어울리는 무공명이었다.
약철빙은 길을 걸으며 비강의 옆모습을 흘깃 살폈다.
곁에 두고 있지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른다.
수하로 두고 있지만 수하로 대하기에는 너무 버거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넓게 뚫어 놓은 산길을 나온 두 사람은 북적거리는 저잣거리로 들어섰다.
비강은 으슥한 골목 안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가 사라지는 그림자를 확인했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하오문을 자주 접하다 보니 저들의 움직임이 가끔 눈에 잡혔다.
* * *
“어서 오십시오, 단주님.”
담노는 대문을 활짝 열어 약철빙과 비강을 맞이했다.
“오랜만이에요. 좋은 집을 구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인사차 들렀어요.”
“단주님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약철빙은 방 안으로 안내되어 들어가면서 저택의 내부를 살폈다.
“규모에 비해 가솔들이 너무 없군요.”
허허…….
“번거로운 것을 싫어해 일손을 많이 들이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을 방안으로 안내한 담노는 차를 내오게 했다.
일보는 중년 여인이 차를 내오고 담노는 두 사람에게 차를 권했다.
“어서 드십시오.”
찻잔을 입게 가져갔다가 내려놓은 약철빙이 먼저 감탄의 말을 꺼냈다.
“차 맛이 정말 좋군요.”
“감사합니다. 여러 곳을 떠돌며 조금씩 사 모아 둔 것인데 입에 맞으신다니 다행입니다.”
“강호를 떠돌던 분이 갑자기 북림에 자리를 잡으려는 이유가 무엇인지요?”
허허허…….
“구파일방과 육대세가의 폭정을 경멸해 은거하고 있다가 이제야 은거를 풀고 세상에 자리를 잡으려는 것뿐입니다.”
담노는 넉넉한 웃음으로 의심 많은 약철빙의 질문을 받아넘겼다.
“원래 성씨가 담인가요?”
“그렇습니다.”
약철빙은 잠시 말없이 차를 마셨다.
“혹시 연서문이라는 분을 아나요?”
“은거를 하기 전에 강호에 이협이란 별호의 고수가 있다는 소문은 들었습니다. 한데 왜 그 사람의 일을 물으시는지요?”
“제가 어릴 때 그분의 집에 자주 놀러 갔었는데, 그곳에 담 아저씨라 불리는 분이 계셨었어요. 혹시 괜히 그분 생각이 나서요.”
어허…… 허허허허허…….
담노는 어이없어하며 크게 웃었다.
곁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비강의 입가에도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저는 담 아저씨라는 사람이 아닙니다.”
약철빙의 기억에도 담노와 담 아저씨는 많이 달랐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계속 신경이 쓰여 이곳까지 찾아오게 된 것이다.
“그…… 렇군요.”
담노는 약철빙이 여전히 미심쩍어하자 질문을 던졌다.
“혹시 담 아저씨라는 분은 무공을 연마한 강호의 고수였는지요?”
“그건…… 아니에요.”
아무리 기억을 뒤져 보아도 담 아저씨가 무공을 연마하거나 병기를 휴대하고 다니는 모습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만약 담 아저씨가 병기를 휴대하고 다녔다면 쫓아다니며 무공을 가르쳐 달라고 졸랐을 것이다.
‘역시, 이 노인은 담 아저씨가 아니었어.’
이미 이런 결과가 나올 것이라는 예상은 하고 있었던 약철빙은 미련을 떨쳐 버리기라도 하듯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저는 이만 가 봐야겠어요.”
“조금 더 계시다가 저녁 식사라도…….”
“아니에요. 백건적의 기습으로 인해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요. 연 부관은 어떻게 할 거지?”
“저는 이곳에서 조금 더 있다가 가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해. 되도록 빨리 돌아와.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으니까.”
그렇게 약철빙은 담노의 저택을 떠났다.
그녀를 배웅하고 돌아온 담노는 방 안에 앉아 있는 비강에게 머리를 숙였다.
“이 정도면 순찰단주의 의심은 완전히 사라졌을 것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담노.”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담노는 적잖이 긴장을 하고 있었다.
비강도 한숨을 내쉬곤 천마지병에 관한 일을 물었다.
“악가에 관한 일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주인께서는 조금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금쯤이면 하남에 소문이 퍼져 나가고 있을 것입니다.”
“일을 꾸미는 데는 하늘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더니, 그 옛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담노는 비강의 안색이 지나치게 밝은 것을 의아해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백건적의 습격으로 악규와 가인들 일부가 북림으로 들어왔습니다.”
허어…….
담노의 입에서도 경탄이 흘러나왔다.
“어쩌면 이번에 악규를 죽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최대한 악가의 피해를 키워야 합니다.”
“제가 직접 그곳으로 달려갈 것입니다. 그런데 걱정이 하나 있습니다, 주인. 악가의 그…… 여자는 어찌 처리해야 할지…….”
악가의 그 여자.
비강도 알고 있고 담노도 알고 있는 여자였다.
“너무 가벼운 죽음은 원하지 않습니다.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알겠습니다. 주인의 뜻대로 하십시오.”
* * *
담노의 저택을 나온 비강은 일미고라는 요리점으로 방향을 잡았다.
장경주와의 저녁 약속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먼저 도착하신 손님이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언제부터 기다리고 있었소?”
“반 시진이 조금 안 됐습니다.”
일미고의 종업원은 마당 앞쪽의 입구까지 나와 안쪽에 있는 깊숙한 별채로 안내했다.
“많이 기다렸소?”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서는 비강이 물었다.
“아니요. 저도 방금 전에 왔어요.”
장경주는 반 시진 가까이 기다렸으면서도 비강이 불편해할까 봐 거짓말을 했다.
“미안하오. 갑자기 일이 발생해 조금 늦었소.”
“아니에요. 정말 방금 도착했어요.”
비강은 그에 대해 더 이상 말은 않고 종업원을 불렀다.
“일미고에서 가장 잘하는 요리와 술을 내오시오.”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종업원이 나가고 난 후 두 사람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바깥에서 사적으로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온 조장의 일은 안타깝게 되었소.”
결국 입에서 제일 먼저 나온 말은 일에 관한 것이었다.
“역시, 연 소협께서는 온 조장이 우리 쪽 사람이라는 사실을 벌써부터 알고 계셨군요.”
“대충 눈치는 채고 있었소.”
“고마워요, 연 소협.”
장경주는 비강을 향해 머리까지 조아리며 고마움을 표했다.
“장 소저에게 받은 도움에 비하면 그런 인사까지 받을 정도는 아니오.”
온조가 하오문의 간자인 줄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는 것은 어느 조직에나 있어 죽음에 해당하는 아주 큰 죄였다.
하지만 비강은 북림에 대한 충성심이 없었기에 별로 마음에 두지 않았었다.
만약 온조가 백건적의 간자였다면 대응은 전혀 달랐겠지만.
“백건적에 관한 정보는 없소?”
“북림의 대대적인 습격이 있은 후로 하오문에서는 백건적에 대한 추적을 피하고 있어요. 아무래도 백건적이 두려워 몸을 사라고 있는 것 같아요.”
“이번 일로 백건적은 많은 것을 얻어 갔군.”
북림에 대한 습격으로 강호 무림은 크게 요동을 치고 있었다.
이제 강호인이라면 어느 누구도 백건적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백건적은 아니, 무신들의 사형은 아주 영리한 자였다.
그자는 강호 무림의 정보를 한 손에 쥐고 있는 하오문은 안중에도 없었다.
하오문의 본성을 알기에 그냥 내버려 둬도 괜찮을 것이라는 판단을 한 것이다.
“백건적에 관한 일이 아닌 다른 일이라면 연 소협도 알아야 할 정보가 들어왔어요.”
“말해 보시오.”
“하남의 정주에서부터 올라온 정보인데, 악가가 며칠 전에 천마지병을 얻었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요.”
“천마지병이 또 나타났단 말이오?”
그 일은 비강이 꾸몄지만 일부러 겉으로는 놀란 척이라도 해 주어야 했다.
“예. 거의 확실한 정보예요. 소문이 돌자마자 정주 근방의 강호인들이 은밀하게 몰려들고 있다고 해요.”
장경주의 대답이 끝나고 방문이 열렸다.
수많은 요리가 연이어 안으로 들어오고 좋은 술과 은으로 만든 술잔까지 나왔다.
“좋은 시간 되십시오.”
종업원이 인사를 마치고 나가자 비강과 장경주는 식사를 시작했다.
비강은 장경주의 잔에 술을 채워 주고 자신의 잔에도 술을 채웠다.
어느 정도 요리로 배를 채우고 술잔을 비워 냈을 때 장경주는 비강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중요한 정보가 또 하나 있어요.”
“말해 보시오.”
“서역에서 사신 일행이 방문했었는데 그 일행들이 서안으로 오고 있다고 해요.”
하아…….
비강은 단번에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긴 탄식을 쏟아 냈다.
가끔 생각나던 그곳의 사람들이 이곳으로 자신을 찾아오고 있었다.
“알려 주어 고맙소.”
“서역 왕의 누이는 연 소협을 애타게 찾고 있는 것 같아요.”
“어차피 이제는 끝난 일이오.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곳이고 돌아가서도 안 되는 곳이오.”
장경주는 적잖이 안심이 되어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그것보다 혹시 장 소저가 흑견조의 조장으로 추천할 만한 인물이 있소?”
“……네?”
장경주는 너무 뜻밖의 말을 들었는지 식사를 하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비강을 쳐다보았다.
“추천할 만한 인물이 있으면 말해 주시오. 대신 온 조장처럼 무공이 뛰어나고 헤아림이 깊은 사람이라야 하오.”
하오문을 돕고자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어차피 하오문은 온조 외에도 하오문의 사람을 북림에 더 심어 놓고 있을 것이다.
그자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보다 차라리 이런 식으로라도 아는 것이 훨씬 더 편했다.
“수비대 부조장으로 있는 마철이라는 사람이 있어요.”
“알겠소.”
식사는 거의 반 시진 가까이 이어졌다.
이윽고 식사와 차까지 끝낸 두 사람은 나란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은자 여섯 냥을 식대로 지불하고 일미고를 나온 비강은 저잣거리가 가까워지자 장경주에게 작별을 고했다.
“집까지 바래다주고 싶지만 남들 눈이 있어 이곳에서 헤어져야 할 것 같소. 다음에 또 봅시다.”
“네. 다음에 또 뵈어요.”
“먼저 가시오.”
장경주를 먼저 보낸 비강은 북림을 향해 느긋한 걸음을 걸었다.
‘우선 복수의 맛만 보여 주지.’
어느새 비강의 얼굴에는 하얀 미소가 떠올랐다.
* * *
꿈에서도 그리워하던 곳을 이십 년 만에 돌아왔다.
이곳에서 여러 벗들을 만났고 동생들도 만났으며 평생 형으로 모실 분을 만났었다.
가슴 벅찬 나날이었고 웃음이 떠나지 않는 나날이었다.
하지만 마을은 전과 다름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전과 달랐다.
흉흉한 눈빛을 하고 있는 자들이 도처에 있었고 마을은 웃음소리 한 번 들려오지 않았다.
“그분들과 이곳에서 지낼 때는 하루하루가 즐거웠어. 너와도 형제처럼 지냈었고.”
“다 지나간 일이다, 묵곤.”
“그래. 다 지나간 일이지. 곡주는 어디에 계시느냐?”
“언제나 계시던 곳에 머물고 있으시다. 올라가 봐.”
묵곤은 백산을 뒤로하고 마을 안으로 들어섰다.
좌우로 펼쳐진 논밭과 옹기종기 이어진 초옥들을 보고 있노라면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저곳이었지. 그분을 주인이자 형님으로 모시고자 맹세했던 곳이.’
묵곤은 펼쳐진 밭 너머의 커다란 바위를 눈에 담았다.
‘묵곤, 너와 어울리는 병기 하나를 구했는데 한번 볼 테냐? 너를 닮아 아주 날카롭고 묵직한 녀석이다.’
하하하하…….
그때 그분의 웃음소리가 얼마나 듣기 좋은지 저 웃음소리를 위해서는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