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 연비강 57화
무료소설 신마 연비강: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16회 작성일소설 읽기 : 신마 연비강 57화
제57화. 대면(2)
“내 무공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지 중요하지 않은지는 내가 판단해.”
“나에 관한 모든 것을 단주님이 알아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건조한 목소리로 대답을 끝낸 비강은 집무실을 나와 의원을 찾아갔다.
북림에 들어와 단 한 번도 의원을 찾은 적은 없었지만 어디에 있는지는 알고 있었다.
으으…… 으아악……!
의원 입구 바깥에까지 부상자들의 신음 소리와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북림은 커다란 전각 한 채와 작은 건물 두 채를 의원으로 두고 있었다.
하지만 워낙 부상자가 많은 탓인지 넓은 마당에까지 부상자들이 누워 진료를 받고 있는 중이었다.
찬 바닥에 짚을 깔고 그 위에 이불을 덮은 임시 침상이 마당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진료를 받으러 찾아왔습니다.”
바쁘게 오가는 중년 여인을 붙잡고 볼일을 말하니 그 여인은 마당 한쪽을 가리켰다.
“저기 누워 기다려요.”
“고맙습니다.”
얼마나 바쁜지 여인은 비강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비강은 마당 한쪽으로 걸어가 이불 위에 엎드렸다.
찬 바람이 등을 스치며 지나갔지만 피곤한 나머지 눈은 벌써 감기고 있었다.
산 너머로 떠오른 햇살은 검은 구름이 가리고 철 늦은 하얀 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눈이 오기 시작하니 임시로 저쪽 건물로 옮기게.”
나이 든 의원이 가리킨 곳은 약재를 쌓아 놓은 건물과 창고였다.
상처가 크지 않은 무인들은 스스로 일어나 창고로 들어갔고 일보는 이들은 안에 쌓여 있는 약재를 치우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렇게 반 시진 가까이 난리를 치르다 보니 어느새 마당은 쌓인 눈과 이불밖에 남지 않았다.
“어이구, 허리야.”
잠시 허리라도 펴기 위해 밖으로 나온 늙은 의원 허증은 마당 한쪽에 누워 있는 사람의 형체를 발견했다.
“저 사람은 어찌하여 옮기지 않은 것인가?”
허증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묻자 옆에 따라붙은 젊은 의원이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숨이 느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미 죽은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허증은 마당을 가로질러 눈이 쌓인 시신을 살펴보았다.
들숨과 날숨을 살피고 손목을 진맥해 본 그는 깜짝 놀랐다.
‘어찌 사람의 숨이 이렇게나 길단 말인가. 정말 죽은 사람 같지 않은가.’
“어서 창고 안으로…… 아니 병실에 따로 병상을 마련해 그리로 옮기게.”
“알겠습니다. 각주님.”
젊은 의원들은 급하게 눈에 싸인 사람을 안으로 옮기려 했다.
하지만 바로 그때 눈이 들썩이며 엎어져 있던 사람이 몸을 일으켰다.
“피곤해서 잠시 잠에 빠졌던 것뿐입니다.”
허증과 젊은 의원들은 너무 놀란 나머지 입만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디를 다치셨습니까?”
그래도 경험이 많은 허증은 얼른 정신을 차리며 조용히 물었다.
“허리와 등에 부상을 입었습니다.”
“어서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허증은 직접 비강을 병실로 안내했다.
처음 보는 특이한 환자라 손수 진찰을 하기 위함이었다.
병실 안으로 들어간 비강은 윗옷을 벗고 침상에 엎드렸다.
허어…….
허증은 비강의 상처를 살펴보고는 다시 한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암기와 검에 의한 상처는 꽤 깊었다.
특히 암기에는 독까지 발라져 있었는지 상처 부위가 퍼렇게 죽어 있었다.
‘상처 부위가 스스로 아물어 가고 있어. 독이 몸으로 퍼지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스스로 해독을 하고 있는 것 같고.’
침을 놓고 약을 바른 허증은 깨끗한 천으로 상처 부위를 감쌌다.
“존함이 어찌 되십니까?”
“연비강입니다.”
“소협이 바로…… 그 사람이군요.”
허증은 다시 한번 크게 놀라 비강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환자들을 치료하며 가장 많이 들었던 이름이 바로 백리혈 연비강이었다.
홀로 과반수의 적들을 막아 낸 자.
무인들은 백리혈이 없었다면 북림이 함락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조심스럽게 입에 올리기도 했다.
“감사합니다. 일이 바빠 그만 가 보겠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허증에게 감사를 표한 비강은 병실을 나서다 말고 몸을 돌렸다.
“존함이 어찌 되십니까?”
“허증입니다.”
허증이라는 이름은 들어 알고 있었다.
의각 각주의 이름이 허증이라고 했었다.
“또 뵙겠습니다.”
* * *
어둠이 짙게 깔린 북림의 입구를 향해 장대한 체구의 사내가 걸음을 옮겼다.
아직 지워지지 않은 피 냄새가 코끝을 진동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성벽을 올려다보던 사내의 입에서 탄식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녀석이 꽤 고생을 한 모양이로구나.”
충성심이라고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녀석이 이렇게까지 나서서 북림을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해 주었다.
‘고맙다.’
사내의 정체는 바로 북림의 림주, 무신 풍천양이었다.
용 네 마리가 서로의 몸을 휘어 감으며 성벽 위까지 뻗어 있는 깊은 음각은 한 폭의 멋진 그림처럼 보였다.
풍천양은 백건적의 기습을 별로 놀라워하지 않았다.
멀리 보이는 성벽을 따라 어둠 속을 걷던 풍천양의 신형은 어둠에 동화가 되듯 사라졌다.
* * *
백건적의 급습으로 인해 바쁜 하루를 보낸 약추완은 잠시 눈을 붙이려고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적들의 갑작스런 급습이었지만 아군의 사상자보다 적군의 사상자가 훨씬 더 많았다.
불탄 전각들이야 다시 세우면 되는 것이고 줄어든 북림의 무인들은 보충하면 된다.
지금 바깥에서는 벽 총관이 동분서주하며 뒷수습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림주…… 님.”
불조차 켜 놓지 않은 회의실에 앉아 있는 사람을 발견한 약추완은 화들짝 놀라 얼른 머리를 숙였다.
“언제 오셨습니까?”
“지금 막 도착했소. 수고가 많았소, 부림주.”
약추완은 복도에 있는 촛불을 가져와 회의실에 불을 밝혔다.
“백건적들이 오늘 자시와 축시 사이에 기습을 감행했습니다. 적들의 수는 대략 칠백에서 팔백여 명쯤…….”
“되었소. 나중에 보고는 따로 받을 터이니 부림주는 그만 쉬시오. 그리고 사람을 보내 연비강을 불러오시오.”
“아…… 알겠습니다.”
부림주가 영을 받고 밖으로 나간 후 회의실 뒤쪽의 벽이 열렸다.
벽 안에서 사십 대 중반쯤 되는 사내가 나와 풍천양을 향해 부복했다.
“묵곤이 림주님을 배신하고 백산을 따라갔습니다.”
“몇 명이나 떠났느냐?”
“묵곤을 포함해 열네 명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백산이 림주님께 전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사내는 두 손으로 봉서 하나를 바쳐 올렸다.
“그만 가 보아라.”
“예.”
사내는 회의실의 벽 안으로 사라졌다.
봉서를 열어 서신을 살핀 풍천양의 입에서 대소가 터져 나왔다.
크하핫…….
[안타깝구나, 천양. 네가 이 사형을 죽이려 하니 내가 먼저 너를 죽일밖에. 그곳에서 기다려라.]
서신에는 그런 짤막한 글귀가 쓰여 있었다.
벗들과 만나 결정을 본 것이 이틀 전이었다.
아무리 빨라도 그 결정이 벌써 사형의 귀에 들어갈 리 없었다.
그렇다면 사형은 벌써 자신들이 모일 것을 알고 있었으며 어떠한 결정을 내릴 것인지 짐작하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우리 넷 중에 하나가 배신을 했다는 뜻이기도 하고.’
씁쓸한 미소를 머금던 풍천양은 목소리를 높여 바깥에 있는 호위들을 불렀다.
“술상을 차려오라!”
호위들이 영을 받들어 술상을 차려 내왔을 때 비강도 막 회의실에 도착하고 있었다.
“어서 오너라.”
“림주님을 뵙습니다.”
늦은 밤에 호출을 받았음에도 비강의 모습은 깔끔했다.
“이리 와 앉아.”
비강은 풍천양과 약간 거리를 벌려 앉았다.
풍천양은 자신의 잔과 비강의 잔에 술을 채우고는 말없이 잔을 비웠다.
비강도 잔을 비우자 그는 다시 술을 채워 주었다.
그렇게 석 잔의 술을 비웠을 때 풍천양의 입이 열렸다.
“묻고 싶은 것이 많을 테지. 그렇지 않느냐?”
“사패 외에 또 다른 세력이 강호 무림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또 어떤 것을 알아냈느냐?”
기꺼운 미소를 머금고 있는 풍천양을 주시하며 비강은 말을 이어 나갔다.
“그곳은 아마도 황곡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습니다. 적들과 싸움을 벌이던 중 묵곤이라는 사내를 만났습니다. 무공이 아주 강하더군요. 그 사내 외에 백산이라는 사내도 함께하고 있었는데 둘은 서로 잘 아는 사이처럼 보였습니다. 그 묵곤이라는 사내, 북은각의 무인이 아니었습니까?”
“묵곤은 나의 오른팔이라 불린 녀석이지. 지금까지 북은각을 관리하고 있었던 녀석이기도 하고.”
풍천양은 비강의 짐작을 부정하지 않았다.
비강은 묵곤과 백산이라는 자를 만나고 난 후 도운패의 이야기를 떠올렸었다.
강호 무림의 상황을 닭구이로 비유한 그의 이야기는 사패 외에 다른 세력이 있음을 말하고 있었다.
“우리는 원래 넷이 아니라 다섯이었다.”
서두를 뗀 풍천양은 목이 마른지 술로 목을 축였다.
“우리에게는 사형이 한 사람 있었다. 가족처럼 우리 네 사람을 보살펴 준 분이고, 사부님께서 가장 처음 받아들인 제자이기도 했어. 우리 중에 무공도 가장 뛰어났고.”
“…….”
“사형은 무공이 강해질수록 야망도 함께 키워 갔지. 하지만 우리들이 황곡에서 나올 때 사형은 그곳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어.”
풍천양은 비강에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없는 곳에서 홀로 중얼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강호 무림을 제패하고 난 후에 우리 넷은 그분을 찾아갔었다. 그때 그분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더구나. ‘강호 무림을 잠시 너희들에게 맡겨 놓은 것뿐이다’라고. 우리는 불안했다. 사형은 자신에게 반대하는 자라면 상대가 우리라 해도 살려 두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 그 불안을 제거하지 않으셨습니까?”
껄껄껄…….
“너라면 어릴 때부터 모든 것을 함께한 사람을 그리 쉽게 죽일 수 있었겠느냐. 우리에게 사부님은 전부였고, 그다음이 바로 사형이었다. 한 해 두 해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미룰 수밖에 없었구나.”
“그자의 이름을 알고 싶습니다.”
“사형의 이름은 시천세이니라.”
이제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왜 밤늦게 자신을 불러 이런 이야기까지 해 주고 있는 것일까?
“이곳을 지켜 주어 고맙구나.”
“북림을 지킨 것이 아니라 저를 지킨 겁니다.”
풍천양의 얼굴에 푸근한 미소가 감돌았다.
“쉬십시오.”
림주의 미소가 부담스러워진 비강은 몸을 일으키려 했다.
“서역의 공주가 이곳을 찾아오고 있다고 하더구나. 공주의 목적은 아마도 네 녀석이겠지. 그렇지 않느냐?”
“이미…… 이미 끝난 일입니다. 저는 그녀를 만날 생각이 없습니다.”
“그렇구나. 이제 가 보아라.”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비강은 회의실을 나서려 했다.
“혹시 림주께선 이번 일을 미리 예상하고 계셨습니까?”
문득 걸음을 멈춘 비강의 질문에 풍천양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예상하고 계셨군요.”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비강은 멈췄던 발걸음을 옮겨 회의실을 나갔다.
* * *
백건적의 습격이 있었던 날로부터 나흘이 지나갔다.
수많은 목수들이 북림으로 몰려들어 불탄 전각과 건물들을 새로 짓기 시작했고 북림의 영역 안에 있는 무가와 무문에도 무인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순찰단은 다른 곳들과는 달리 불탄 곳이 없어 여느 때와 다름없이 조용했다.
그러나 순찰단의 수뇌부인 순찰단주와 비강은 집무실에 앉아 새로 선발할 조원들에 관한 서류를 살펴보느라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수비대는 성 밖 이삼 리까지 순찰을 강화했는데 아직 인원이 부족해 무력대의 도움을 받고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두 사람과 함께 일을 보다가 밖으로 나갔던 부단주 엄숭하가 돌아와 보고를 올렸다.
“수고했어요. 부단주는 내일 은운곡으로 출발해야 하니 일찍 쉬어요.”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관내를 둘러보다 보니 악 대협과 가인들이 들어오고 있더군요. 아무래도 부림주께서 악가에 도움을 요청하신 모양입니다.”
조용히 서류를 살펴보고 있던 비강은 엄숭하의 말에 놀랐지만 별다른 기색은 내비치지 않았다.
“조원들의 선발은 대충 끝나 가는데 조장이 문제야. 연 부관은 누가 좋겠어?”
비강의 눈치를 살피던 약철빙이 슬쩍 말을 걸었다.
“저보다는 단주님이 더 자세히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 그럼 악규는 어떻게 할 생각이지?”
“아직 그에 대한 생각은 해 보지 않았습니다. 잠시 밖에 나갔다가 돌아오겠습니다.”
건성으로 말을 받은 비강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하오문에 가는 건가?”
“담노의 저택에 갑니다.”
“같이 가. 나도 그 노인에게 물어볼 말이 있으니까.”
약철빙이 따라나서자 비강은 조금 당황했다.
사실 담노를 만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장경주와의 약속 때문에 나가려고 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궁금한 것이 있다면 제가 대신 알아 오겠습니다.”
“아니. 개인적인 일이라 내가 가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