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 연비강 52화
무료소설 신마 연비강: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07회 작성일소설 읽기 : 신마 연비강 52화
제52화. 가문의 무공
“천천히 펼쳐 보일 터이니 잘 보십시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검법이 담노의 손에 의해 펼쳐지기 시작했다.
조금 느린 속도로 움직이는 검이었지만 평범한 사람들의 눈으론 제대로 확인하지 못할 정도의 빠르기였다.
공간을 가르는 검영은 맹렬하고 매서워 살을 에는 듯했고, 온몸을 빽빽하게 감싸며 도는 검날은 그 어떤 공격도 막아 낼 만큼 단단하고 촘촘했다.
‘저 검법에서 살기를 제거한다면 바로 약철빙의 검법이야. 그 여자의 무공은 바로 우리 가문의 무공이었어.’
공간을 잔인하게 찢어발기던 검은 묵묵히 서 있는 비강의 전신을 노리며 날아들었다.
목을 스치며 지나간 검은 심장과 양팔을 가르고 허리와 양다리를 순식간에 분리해 냈다.
허어.
‘선과 점의 연결이로군.’
담노의 검은 분명 선을 그리고 있었지만 비강은 그것을 선과 점의 연결로 보았다.
우웅.
검은 내공을 담기 시작하고 묘한 진동음과 함께 떨림이 일었다.
팍.
그리고 검첨은 공간의 한 점을 노리며 날아들었다가 연기가 흩어지듯 찰나에 사라져 버렸다.
“이것이 가문의 무공입니다. 다시 한번 펼쳐 보이겠습니다.”
담노는 또다시 처음부터 검법을 펼쳤다.
두 번째 펼치는 검법은 처음과 달리 아주 빨랐다.
쉬익…… 쉭…….
땅을 미끄러지듯 스쳐 움직이는 발걸음과 온몸을 감싸고 도는 검광은 넋을 놓게 할 정도로 휘황했다.
파팍.
아아…….
또다시 검법의 마지막을 알리는 일섬과 함께 비강의 입에서 낮은 감탄이 흘러나왔다.
한 번의 시연으로도 검법의 요체는 전부 파악해 냈다.
이미 약철빙의 검법을 여러 번 관찰했기에 가문의 검법이 그리 낯설지 않은 까닭이었다.
‘마지막 검은 아저씨의 파천세와 많이 닮았어. 선이 아닌 점이었지만.’
지금 비강은 적지 않은 충격에 휩싸이고 있었다.
그렇게 찾아 헤매던 아저씨의 무공을 가문의 무공에서 엿보았다.
“다시 검법을 시연해 보이겠습니다.”
두 번을 연속해 검법을 시연한 담노의 목소리에 비강은 급히 정신을 차렸다.
“아닙니다. 그만하면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심상에 빠져 있던 비강은 머리를 숙여 고마움을 표했다.
“주인께서는 나이 차가 많은 약철빙을 귀여워해 무공까지 가르치셨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 계집 또한 원수의 혈족이니 반드시 죽이셔야 합니다.”
“……그 또한, 알고 있습니다.”
그동안 관찰했던 약철빙은 그녀 자신의 가족들을 증오하고 있었다.
증오를 넘어 죽이고 싶어 할 정도로 극렬한 반응을 보였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원수의 혈족이란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말끝을 흐리는 비강을 미심쩍은 눈으로 주시하던 담노는 머리를 숙여 물었다.
“하명하실 일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비강은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어 땅바닥에 놓아두었던 천마지병을 집어 들었다.
원래 하오문을 이용하려는 계획이었으나 이제 담노를 만났으니 그에게 맡기는 것이 훨씬 더 좋은 방법이었다.
“이것은 가짜 천마지병입니다. 이 천마지병을 악가의 손에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물론 그 사실을 강호인들이 알게 해야 합니다.”
담노는 천마지병이라는 말에 깜짝 놀라기는 했지만 단번에 말뜻을 알아들었다.
“맡겨 주십시오. 반드시 이것을 이용해 악가를 멸문시키겠습니다.”
“너무 무리하지는 마십시오.”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 * *
어둠이 짙은 거리를 걷고 있는 비강의 손에는 여전히 천으로 말아 묶은 한 자루의 도가 들려 있었다.
북림의 눈은 곳곳에 미치고 있어 저들의 의심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아저씨 외에 가족은 없을 줄 알았더니…….’
아저씨의 생사를 알지 못하기에 이 세상에 오직 혼자 남아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오래도록 자신을 찾아다닌 가족이 있었다.
등 뒤에 자신을 지지해 줄 가족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괜스레 가슴이 뿌듯해지고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북림으로 되돌아온 비강은 순찰단의 순찰조들이 사용하고 있는 연무장을 찾아갔다.
날이 쌀쌀하고 어두운 밤이었지만 여기저기 횃불을 밝힌 연무장 안에서는 여러 명의 조원이 무공을 연마하고 있었다.
연무장 한쪽으로 걸어간 비강은 공중으로 천에 싸인 가짜 천마지병을 던져 올렸다.
파팍, 퍼퍼퍽……!
천마지병은 공중으로 떠오르자마자 검에 의해 산산이 부서져 나갔다.
무공을 연마하던 조원들이 깜짝 놀라 비강을 쳐다보았다.
“무슨 일입니까? 연 부관.”
“아무것도 아니오. 없애 버려야 할 물건을 없앤 것뿐이오.”
굳이 자신이 파괴한 물건이 천마지병이라 말할 필요는 없었다.
순찰단 집무실로 되돌아온 비강은 손에 들고 있던 산산조각이 난 도를 내려놓고 보고를 올렸다.
“담노는 백건적과 관련이 없는 은거고인이었습니다. 손녀 하나와 집을 지키고 있는 호위무사 셋, 그리고 집안일을 돌보는 여인들 셋이 더 있었습니다. 그들 또한 백건적과는 관련이 없어 보였습니다.”
“수상한 노인이야. 조금 더 조사해 봐. 굳이 서안에 자리를 잡으려는 이유도 의심스럽고.”
“그러죠.”
이 또한 마찬가지였다.
저들의 의심을 받지 않으려면 오히려 담노가 백건적이 아니란 사실을 강조하지 않는 것이 더 옳았다.
“일찍 들어가 쉬어.”
“예.”
짧은 대답으로 용무를 마친 비강은 밖으로 나와 무공을 연마하는 공터로 향했다.
* * *
낮에 경험했던 무공의 강렬함은 아직까지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차창! 끼릭.
검과 봉을 결합한 비강의 창에 막강한 기운이 몰려들었다.
우웅…….
진동을 일으키던 창날은 빈 공간을 가르며 길게 뻗어 나갔다.
쿵.
희뿌연 기운에 휩싸인 창날이 빈 공간의 한 점을 파고들자 공간이 일렁이며 기이한 진동음이 일었다.
삼 장 가까이 늘어났던 창날은 순식간에 칠 척의 창으로 줄어들었다.
“처음부터 마음먹은 대로 될 리가 없지.”
방금 비강이 시전한 무공은 담노가 시전한 검법과 조금의 차이도 없었다.
머릿속은 무공으로 가득하니 피로를 느끼거나 잠이 오지도 않았다.
쉬익…… 쉭.
비강은 창으로 담노가 펼쳤던 가문의 무공을 처음부터 느리게 펼치기 시작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창법을 펼치면 펼칠수록 속도는 빨라졌고, 반 시진이 지난 후의 공터는 온통 창의 그림자로 뒤덮였다.
“이제는 내 무공까지 훔친 건가?”
후우!
비강은 길게 숨을 내쉬며 창을 거둬들였다.
“흉내를 내 본 것뿐입니다.”
약철빙이 공터로 다가오고 있다는 느낌을 이미 받고 있었으나 펼치던 창법을 거둬들일 수는 없었다.
“흉내를 내 본 정도를 넘어 변초까지 만들어 낸 것 같은데?”
약철빙의 목소리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돋아 있었다.
저 무공은 마음속 깊이 존경해 마지않은 그분의 무공이었다.
남들이 함부로 흉내 내서도 안 되고, 그 누구에게 전수할 생각도 없었다.
“어쩐 일로 나오셨습니까?”
“잠이 오지 않아 검법이나 연마하려고 나왔어.”
“그럼, 저는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공터를 벗어나는 비강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약철빙은 곧 검을 빼 들었다.
조금 전에는 너무 화가 나 목소리를 높였으나 눈으로 확인한 초식은 너무나 매끄럽고 자연스러워 원래의 무공처럼 보일 정도였다.
‘이렇게 했던가?’
팔목을 안으로 꺾어 온몸을 감싸던 검날은 땅을 스치며 뻗어 나갔다가 위로 치솟아 올랐다.
‘이…… 럴 수가…… 초식에 전혀 무리가 없어.’
약철빙은 놀라 마지않았다.
그녀는 입을 벌린 채 비강이 사라져 간 어둠 속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어쩌면 저 사람은 장차 강호 무림의 일대종사가 될지도 몰라.’
* * *
무공 연마를 끝내고 방 안으로 들어온 약철빙은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계속해서 몸을 뒤척이며 눈을 감은 그녀에게 떠오르는 것은 휘황한 창광에 휩싸인 비강의 모습이었다.
‘모르겠어. 정말 모르겠어.’
뜬눈으로 밤을 세던 그녀는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자마자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머리카락을 가다듬은 약철빙은 검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공터에 도착해 보니 이미 비강은 무공을 수련하고 있었다.
“어제 펼쳤던 무공을 다시 보여 줄 수 있겠어?”
창을 거둔 비강은 약철빙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되물었다.
“제가 그 무공을 사용해도 되겠습니까?”
“그건 연 부관의 무공을 보고 판단할게.”
“제 생각대로 만들어 본 초식이라 원래의 무공과는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괜찮아. 얼른 해 봐.”
비강은 창을 분리해 검으로 되돌린 후 천천히 초식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약철빙이 가문의 무공을 사용하는 것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결정이었으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나중에 담노와 부딪쳤을 때를 생각해 미리 알려 주는 것이 좋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검법을 풀어낸 비강은 검을 멈추며 약철빙을 돌아보았다.
그녀에게 대부분의 초식을 보여 주었으나 마지막의 일섬은 마음속에 남겨 두었다.
“이것이 끝입니다.”
“처음부터 다시 한번 부탁해.”
“그러죠.”
* * *
산 위에서 내려다보는 산 아래의 풍경은 전과 다름없이 아름다웠다.
“오셨는지요.”
은운곡의 곡주는 풍천양을 향해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뜻하지 않은 일로 인해 일찍 찾아오게 되어 폐를 끼치게 되었소.”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다른 친구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구려.”
“예. 하지만 곧 도착하실 겁니다.”
고개를 끄덕인 풍천양은 곡주의 안내를 받아 전각으로 걸음을 옮기다가 문득 발을 멈췄다.
“어찌하여 그러시는지요?”
“곡주는 전진의 부활을 어찌 생각하오?”
“그것을…… 아무런 관련이 없는 제게 어찌하여 물으시는지요?”
곡주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정도로 크게 놀랐으나 가까스로 태연을 유지하며 말을 받았다.
껄껄껄…….
“아니외다. 잠깐 농지거리를 한 것이니 마음에 담지 마시오.”
“알겠습니다. 어서 들어가십시오.”
방 안으로 안내되어 들어온 풍천양은 출입문을 향해 있는 의자 쪽으로 정해 앉았다.
“이번에도 네놈이 제일 먼저 도착한 모양이로군.”
곧이어 묵직한 목소리와 함께 남선의 도운패가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와.”
풍천양은 환한 미소로 도운패를 맞이했다.
크흠…….
못마땅한 기색으로 풍천양을 흘겨본 도운패는 출입문을 등지고 앉았다.
“멍청하게 가짜 천마지병을 북림 안으로 들였다면서?”
도운패의 타박에도 풍천양은 온화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멍청한 놈이 우두머리로 있으니 밑에 있는 것들도 멍청한 병이 옮는 모양이야.”
“어허…… 이놈이 이거 오늘따라 왜 이래? 약이라도 잘못 먹은 거냐?”
하하하하…….
풍천양은 대소를 터뜨리며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벗들 중에서도 도운패는 아주 특별했다.
남들에게 지기 싫어하는 성정은 다른 벗들과 마찬가지였지만 정이 많고 욕심은 크지 않았다.
신뢰를 드러내고 불신을 숨기는 것은 상인들의 거래에나 있을 법한 말이었지만 양민들이나 친한 친구들과의 관계에도 통용되는 말이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도운패는 신뢰와 불신을 마음 편히 털어놓을 수 있는 벗이었다.
“부러워서 그런다, 이놈아.”
“뭐가 부러운데?”
“네놈의 제자.”
“에잉! 난 또 뭐라고.”
뭔가 크게 못마땅한지 잔뜩 인상을 찌푸린 도운패는 바로 정색을 했다.
“네 녀석에게도 제자가 있잖아.”
“한조는…….”
“그 녀석 말고.”
풍천양은 의아한 눈으로 도운패의 눈을 마주했다.
“벽사군은 한조에 비해 조금 떨어지고 악추산은 한조에 비할 바가 아니야.”
“다른 어느 누구보다 생각이 깊고 머리 회전도 빠른 놈이 제 마음속의 울림은 읽지 못하는구나.”
“무슨…… 말을 하는 거냐?”
풍천양의 목소리는 묘한 떨림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