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 연비강 88화
무료소설 신마 연비강: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681회 작성일소설 읽기 : 신마 연비강 88화
제88화. 끈질긴 인연
후텁지근한 한낮은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땀이 흐를 정도였다.
앉았다가 일어나기를 반복하던 비강은 마당 한 바퀴를 천천히 돌았다.
“성격이 어지간히 급한 놈이로구나. 자리에서 일어난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벌써 나돌아 다니는 것이야.”
산에서 약초를 캐 집 안으로 들어오던 일노가 불편한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집 안에만 앉아 있기가 너무 심심해서 잠시 나왔습니다.”
“상처가 제대로 아물려면 움직이지 말아야 하느니. 하기는 다 큰 놈이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들을 리 없으니 마음대로 해라.”
일노는 담벼락에 세워 두었던 거적때기를 바닥에 펴고 그 위에 약초를 널었다.
“그런데 오늘 무슨 날입니까? 동네가 조금 어수선합니다.”
“이맘때쯤 상인들이 우리 마을로 약초를 사러 오니 그럴 수밖에. 아마 오늘이나 내일쯤 상인들이 마을에 들이닥칠 게야. 그러니 네놈은 방 안으로 들어가 가만히 처박혀 있어.”
“알겠습니다.”
비강은 불평 한마디 없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상인들이 두려울 리 없으나, 그들의 눈과 입은 꺼림칙했다.
행여 자신을 알아보기라도 하면 일노는 큰 화를 당할 것이었다.
방 안에 들어가 가만히 앉아 있으려니 좀이 쑤셔 왔다.
“점심 드세요. 면 요리를 했는데 입에 맞을지 모르겠어요.”
때마침 부엌에서 식사 준비를 하던 장경주가 소반을 받쳐 들고 들어왔다.
“장 소저 것은 없소?”
“저는 일노와 함께 식사하면 돼요. 먼저 드세요.”
“고맙소.”
장경주의 요리 솜씨는 그리 뛰어나지 않았지만 먹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어때요? 입맛에 맞아요?”
가만히 앉아 기다리고 있던 장경주는 기대를 하며 물었다.
이럴 때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까?
그럭저럭 괜찮은 맛이었다고 할까?
“아주 맛있었소. 장 소저는 요리 솜씨도 아주 좋은 것 같소.”
“고마워요.”
비강은 장경주가 밝은 얼굴로 소반을 가지고 나가자 대답을 아주 잘했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흘러 밖이 소란스러워지자 비강은 문틈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여러 사람들이 마당으로 들어와 일노가 묶어 놓은 약초들을 둘러보고 값을 흥정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런데 그 사람 중에 낯이 익은 자가 있었다.
용가 상단의 단주, 용중연.
그가 일노와 약초값을 흥정하고 있는 중이었다.
* * *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약초값을 흥정하던 용 단주는 잠시 머리라도 식힐 겸 뒷산을 올랐다.
이 마을은 약초의 종류가 풍부하고 질이 좋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원래 약초를 내다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마을이었으나 언제부턴가 약초의 종류가 많아지고 질도 아주 좋아졌다.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외팔이 노인이 마을에 들어오고부터 그리되었다는 것이다.
부스럭…….
그늘에 앉아 땀을 식히던 용 단주는 등 뒤에서 들리는 인기척 소리에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아, 아니……. 연 소협께서 어찌하여…… 무사하셨군요? 정말…… 정말 다행입니다.”
용 단주는 단번에 비강을 알아보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 그렇군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당황도 잠시, 용 단주는 바로 손을 모아 예를 올렸다.
“궁금한 것이 있어 무례를 범했습니다.”
“아닙니다. 무례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그런데 연 소협께서는 어떻게 이 마을에 계시는 것입니까?”
“몸이 좋지 않아 약초를 구할까 하여 들렀습니다. 몸이 어느 정도 나았으니 이제 곧 떠날 생각입니다.”
용 단주는 비강의 대답이 거짓말이란 사실을 단번에 짐작했다.
이 마을에 대해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약초가 좋다는 소문이 퍼지면 경쟁자들이 늘어나기에 일부러 소문이 퍼지는 것을 막은 것이다.
그러나 용 단주는 모르는 척하며 넘어갔다.
“그러셨군요. 궁금한 것이 무엇인지요? 아는 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북림의 사정은 어떻습니까?”
용 단주의 안색은 살짝 굳어졌다.
“이제 그곳은 북림이 아닌 중천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연 소협. 그리고 원래 북림의 무인이었던 자들은 이제 중천의 무인이 되었습니다. 또한 구파일방과 육대세가는 하남에 따로 본거지를 만들고 있는 중입니다. 맹주는 전진의 오진권이 맡았고, 부맹주는 남궁세가의 남궁휘가 맡았다고 합니다.”
“시천세는 어찌하고 있답니까?”
“시천세라는 이름은 알지 못합니다, 연 소협.”
“북림의 림주 풍천양을 죽음에 이르게 한 자입니다.”
“그렇…… 군요.”
비강이 그의 이름을 말해 주지 않았다면 용 단주는 중천의 주인이 시천세라는 것조차 알지 못했을 터였다.
꿀꺽.
용 단주는 무신 풍천양을 죽인 인물에 대해 듣게 되자 마른침까지 삼켰다.
북림에서 큰 싸움이 일어나 주인이 바뀌었고 그 가운데 백리혈이라는 고수가 홀로 수많은 적들과 맞서 싸우며 안으로 들어갔다가 실종이 되었다는 소문만이 강호 무림에 널리 퍼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 사람에 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하나 북림의 주인이 바뀌고 난 후 많이 것이 변했습니다. 북림의 영역에서 수많은 산적과 수적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사파들까지 하나둘 은둔 생활을 깨고 강호에 나오고 있습니다.”
강호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풍천양이 죽기 직전에 했던 말이 바로 이 상황을 의미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듣고 싶은 것들은 대부분 들었다.
비강이 신형을 돌리려 하자 용 단주가 급히 불러 세웠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연 소협.”
“무슨 할 얘기가 남았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저…… 실례가 안 된다면 연 소협이 끼고 있는 반지를 볼 수 있겠습니까?”
“그러십시오.”
비강은 스스럼없이 반지를 빼 건네주었다.
“요녕에 다녀온 후부터 연 소협이 끼고 있는 반지의 문양이 계속 눈에 밟혔었습니다. 그곳에서 이 문양을 본 적 있었던 것 같아서 말입니다.”
용 단주는 반지의 문양을 자세히 살피며 말을 이었다.
“얼마 전에 제가 요녕성 심양에 상행을 갔을 때 이 문양을 보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확연하게 기억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오래된 숲을 거닐다가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길바닥 위에 누워 있더군요.”
얼른 알아듣지 못할 혼란스런 이야기였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러니까…… 제가…… 꿈에서 그 문양을 보았던 것 같습니다.”
용 단주는 조금 민망한 듯 얼굴을 붉히며 말을 얼버무렸다.
그러나 비강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더 이상 그 일에 대해 묻지 않았다.
“그렇습니까.”
별다른 의미가 없는 반지였다.
그저 오래전 기억의 부스러기일 뿐이었다.
아저씨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좋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용 단주에게서 반지를 돌려받은 비강은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전하고 신형을 돌렸다.
“또 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연 소협.”
“그렇게 될 겁니다.”
비강이 산허리 어름으로 사라지고 난 후, 단주 용중연은 답답하기만 했던 가슴을 쓸었다.
이십 년간의 강호 무림은 태평성대였다.
크고 작은 사건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기는 했으나 지난날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제 강호 무림은 원래의 약육강식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게 되면 상행에도 어려움이 많을 것이고 무고한 양민들의 피해도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좋은 날은 다 지나갔어. 다시 좋은 날이 도래하기는 할까.’
* * *
후욱…… 훅…….
거친 숨을 가다듬으며 산을 달려 내려오는 비강은 어깨에 커다란 멧돼지 한 마리를 들쳐 업고 있었다.
아직 상처가 전부 아문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몸을 움직이기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마을 사람들과 잔치나 하십시오.”
들쳐 업은 멧돼지를 앞에 내려놓은 비강의 모습을 응시하던 일노가 피식 웃었다.
“내 생전에 너처럼 튼튼한 놈은 처음 보는구나. 어찌 되었든 고맙다, 이놈아.”
“저는 내일 떠날까 합니다.”
약초를 손질하던 일노의 손길이 멈칫했다.
“아직 몸이 다 낫지 않았으니 조금 더 있다가 가는 것이 어떻겠느냐?”
“얼른 사라지라고 한 건 일노 아니셨습니까?”
일노는 멀리 보이는 부엌 쪽으로 흘깃 눈을 돌렸다.
“경주를 어찌 생각하느냐?”
“좋은 여자입니다.”
“또?”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또?”
비강의 입에서는 더 이상 다른 말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후우…….
“나는 꽤 오랫동안 저 아이를 보아 왔었다. 한데 요즘처럼 밝은 얼굴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저는 강호인입니다.”
“싸가지 없는 놈. 그래, 강호로 나가면 무엇을 하려느냐?”
“세상을 한번 돌아볼까 합니다. 친구도 만나고요.”
“작별 인사는 필요 없으니 내일 새벽에 조용히 떠나거라.”
일노는 멈췄던 손을 다시 움직여 약초를 손질했다.
* * *
그날 밤 마을에 잔치가 벌어졌다.
집집마다 담가 두었던 화주를 꺼내 멧돼지 고기와 함께 소박한 잔치를 즐겼다.
일노와 함께 술 몇 잔을 걸친 장경주는 구운 고기 한 덩이와 함께 화주 한 병을 들고 비강의 방을 찾았다.
그러나 비강이 있어야 할 방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어디 바람이라도 쐬러 나가셨나?’
방 안을 둘러보던 그녀는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서신을 발견하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충격을 느꼈다.
“설마…….”
그녀는 급히 고기와 술을 내려놓고 떨리는 손으로 서신을 집었다.
[장 소저, 보시오.
그동안 나를 간호하느라 고생하셨소.
나는 이제 강호로 나가 세상을 한 바퀴 돌고 올 것이오.
그때 다시 장 소저를 찾아 은혜를 갚겠소.
인사조차 없이 떠나는 나를 용서해 주시오.]
서신을 읽어 내려가는 장경주의 두 눈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정말 행복한 나날이었다.
앞으로도 계속 이런 날들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닦은 그녀는 비강이 누워 있던 침상에 앉았다.
그리고 홀로 술잔에 술을 채웠다.
‘연 소협이 떠났으니 나도 이곳을 떠나야겠네요.’
* * *
오진권과 남궁휘는 건물을 증축하고 있는 현장을 둘러보다가 그곳을 빠져나왔다.
이곳은 원래 지난날 정파와 뜻을 같이했던 하남 목가의 장원이었다.
사패에 의해 하남 목가가 풍비박산이 난 후, 이곳은 다른 무가인 소가의 차지가 되었었다.
북림에 충성을 바쳤던 소가는 구파일방과 육대세가의 공격에 전멸을 당해야 했다.
구파일방과 육대세가는 소가의 어린아이조차 살려 두지 않았다.
“땅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은데, 건물이 별로 없어 너무 휑한 느낌이오.”
“어차피 이곳은 임시로 사용할 곳이 아니겠소. 우리가 원래의 자리를 찾고 나면 이곳은 목가의 후예들에게 돌려주어야 하오.”
“그렇기는 하지만 시일이 만만치 않게 많이 걸릴 것이오.”
“절대 그렇지 않소. 시천세는 분명 남은 삼천존을 빠른 시간 안에 처리할 거요.”
다른 것은 몰라도 시천세의 욕심은 능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중천.
북림을 중천이라 칭한 것은 강호 무림 전체를 발아래 두려는 야심을 스스럼없이 내보인 것이다.
“부맹주는 얼마 동안의 시간이면 시천세를 뛰어넘을 수 있겠소?”
흐음…….
“앞으로 십오 년이면 가능할 것 같소만.”
남궁휘의 대답에 오진권의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가 지어졌다.
십오 년.
자신은 십 년이면 충분히 시천세를 뛰어넘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시간이 남궁휘와 자신의 차이였다.
“맹주의 생각은 어떻소?”
이번에는 남궁휘가 물었다.
“나도 십오 년 정도는 있어야 할 것 같소. 이십 년이 걸릴지도 모르고.”
앞으로 이십 년 후라 해도 자신들의 나이는 사십 대 중반이었다.
사십 대 중반에 천하제일인의 자리에 올라 세상을 내려다본다.
상상만으로도 가슴 벅찬 일이었다.
구파일방과 육대세가의 주인들이 정문을 통해 들어오는 모습을 발견한 두 사람은 서둘러 그들에게 다가갔다.
“오셨습니까?”
오진권과 남궁휘의 예는 정중하기 그지없었다.
허허허…….
“맹주와 부맹주의 헌앙한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우리 정파의 미래가 아주 밝은 것 같소이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어서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 * *
하하하…….
시천세가 웃음을 터뜨리자 종예와 백산도 피식 미소를 지었다.
회의실에는 종예와 백산을 제외하고도 약추완과 벽하원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북림의 총관이었던 벽하원은 풍천양이 전사하자마자 바로 시천세에게 항복했다.
시천세는 벽하원의 항복을 받아들여 그대로 총관의 자리를 유지시켰다.
영내의 대소사를 관리하는 자리라 반드시 필요한 인재였기 때문이었다.
“방금 총관은 구파일방과 육대세가가 걱정스럽다고 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