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 연비강 8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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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45회 작성일소설 읽기 : 신마 연비강 87화
제87화. 복수
“어디에 누구더냐?”
일노는 왼손으로 비강의 온몸에 침을 놓으며 넌지시 물었다.
“북림의 무인이었어요.”
순간 침을 놓던 일노의 손이 멈칫하며 멈췄다.
“고얀…….”
일노의 얼굴에는 노기가 언뜻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강호에서는 백리혈이라 불렸어요.”
호오!
그리고 그 얼굴에는 노기 대신 관심이라는 것이 자리를 잡았다.
“이놈이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뛴다던 바로 그놈이었구나. 어쩐지 온몸의 상처가 평범하지 않더라만.”
아무리 산속에 자리 잡고 있는 촌락이라지만, 백리혈에 관한 소문은 몇 번이나 귀로 전해져 왔다.
그 소문들이라는 것이 하나같이 황당하기 짝이 없어 어느 것을 믿어야 할지 모르기는 했지만, 백리혈이란 별호는 이런 촌구석의 사람들까지 들어 알고 있었다.
“구파일방과 육대세가의 후예들이 북림을 함락시켰어요.”
허허허허…….
“잘됐구나. 아주 잘됐어.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했는데 그리 쉽게 함락이 되다니…….”
관심은 또다시 즐거움으로 변해 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일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구파일방과 육대세가가 북림을 함락했다면 하오문은 진정으로 위태롭게 되었구나. 개방은 절대로 하오문을 용납하지 않을 게다.”
“알고 있어요.”
사패가 강호를 장악하고 있는 동안 개방이 하던 일을 하오문이 이어 나갔다.
개방이 있을 때에도 하오문은 정보를 사고파는 장사를 했지만 개방으로 인해 제대로 힘을 펴지 못했었다.
하지만 개방이 사라지고 난 후 하오문은 몇 배나 세력을 확장하게 되었다.
정보를 필요로 하는 곳은 여전했지만 취급하는 곳은 오직 하오문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오문은 개방에 사라진 사패의 세상에서 개방의 자리에 오르고자 했다.
그리고 그 사실은 누구보다 개방이 잘 알고 있었다.
“풍천양은 어찌 되었다더냐?”
“그것까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만약 그가 살아 있었다면 절대로 북림은 함락되지 않았을 거예요.”
“그렇겠지. 개 같은 놈이기는 했지만 무신으로까지 불렸었으니.”
침을 다 놓은 일노는 약초를 바르고 살을 꿰맸다.
“이 정도로 큰 부상을 당했으니 벌써 죽었어야 마땅하건만 아직까지 살아 있으니 죽을 것 같지는 않구나.”
방 밖으로 나온 일노는 물끄러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과거, 의술에 자신이 있었던 의원이 있었다.
의원은 하오문에 꽤 많은 도움을 받았기에 스스로 하오문의 일을 돕기를 원했다.
하지만 하오문주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한 팔을 잃고 말았다.
하오문주는 음지에서 양지로 나오고 싶어 했다.
문파를 세워 그곳에 하오문이 자리 잡기를 원했다.
그때 북림이 그것을 용납했더라면 아직까지 일노의 오른팔은 멀쩡했을 것이다.
이제는 전부 잊어야 할 일이다.
“배가 고프니 밥이나 지어라.”
“예.”
* * *
“그동안 편안하셨소?”
머리에 계인을 찍은 나이 든 중은 허연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들어서는 노년의 사내를 향해 머리를 숙였다.
“아미타불…… 광유 사제가 돌아왔구나. 부처님이 돌보셨음이야.”
크카카카카…….
백발의 사내는 앙천괴소를 터뜨리다가 사나운 눈으로 나이 든 중을 노려보았다.
“개소리하지 마라, 일해!”
일해는 소림의 방장이자 머리에 계인을 찍은 나이 든 중의 법명이었다.
“아미타불.”
방장 일해는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하며 눈을 감았다.
“변절자 놈이 뚫린 입이라고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구나! 네놈이 절간에 눌러앉아 호의호식하고 있을 때, 우리는 척박한 땅으로 쫓겨나 추위와 더위에 허덕이며 생지옥과 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고도 네놈이 나를 사제라 부를 수 있는 것이냐!”
사제 광유의 엄중한 꾸짖음에 일해는 두 눈만 감고 있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내게 있어 사형으로 불릴 만한 분은 오직 일원 사형밖에 없느니라!”
일원은 지난날 비강의 손에 목숨을 잃은 북산대마의 법명이었다.
두 눈을 감고 있던 일해는 손을 바닥에 내리며 광유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미타불. 내 한 목숨은 거두어 가고 소림에 남아 있는 제자들은 용서해 주시게나.”
“개소리하지 마라, 일해!”
“마하반야바라밀다…….”
일해의 입에서 불경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내려다보는 광유의 눈은 원한과 복수심으로 인해 붉게 물들어 있었다.
퍽!
기어이 광유의 주먹은 일해의 머리통을 부수고, 소림의 방장은 사제의 손에 의해 생을 마감했다.
“방장!”
“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불…….”
이 끔찍한 만행에 방장의 뒤에 도열해 있던 소림의 중들은 일제히 피를 흘리며 누워 있는 방장을 향해 달려왔다.
그러나 그들이 방장에 닿기도 전에 광유의 입에서 피의 복수를 알리는 외침 소리가 터져 나왔다.
“변절자들을 전부 죽여라!”
지난날 소림의 제자였던 자들과 새로이 소림의 무공을 하사받은 자들이 병기를 빼 들고 달려들었다.
그들의 손에는 검과 도, 도끼, 창, 봉 등이 들려 있었다.
퍼퍽! 퍽……!
아악……! 끄아아악……!
은은한 향내가 풍겨야 할 소림에 진한 혈향만이 가득했다.
크카카카…….
“전부 쳐 죽여라!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 쳐 죽여라!”
* * *
“화롱(花瓏) 사제, 그동안 잘 있었느냐?”
어린아이와 같은 붉은 얼굴에 하얀 수염을 늘어뜨린 신선풍의 노인은 화산을 오른 방문객을 향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형초 사형을 뵙습니다. 사부님과 사형들을 배신했으니 백번 죽어 마땅합니다. 부디 이 어리석은 사제의 목숨만 거두시고 제자들의 죄는 묻지 말아 주십시오.”
짙은 구름에 어우러진 화산의 전경을 둘러보던 노인은 길고 긴 장탄식을 토해 냈다.
하아…….
“언제였던가. 사제와 함께 매화가 가득한 산봉우리를 거닐던 때가…… 매화나무는 그대로인데 화산은 전과 같지 않구나.”
형초는 사제의 뒤쪽에 늘어서 있는 화산의 문도들을 둘러보았다.
‘저들을 전부 죽여야 하나……. 변절자들이기는 하나 지금까지 화산을 지키고 있던 이들이 아니던가.’
화산의 초입에 들어섰을 때만 해도 변절자들을 전부 죽이리라 다짐했었다.
하지만 무릎까지 꿇고 있는 사제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분노와 복수심은 눈 녹듯 사라져 갔다.
“뭐 하고 계십니까? 사형. 변절자들을 전부 죽여야 합니다.”
등 뒤에서는 어서 저들을 죽여 없애라는 명령이 떨어지기를 재촉하고 있었다.
형초는 문득 자신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젊은 제자와 눈을 마주쳤다.
젊고 재기발랄한 젊은 제자의 눈망울은 원한과 복수로 탁해진 자신의 제자들과 달리 맑고 깨끗했다.
“아이야, 너의 이름은 무엇이더냐?”
“삼봉이라 하옵니다.”
젊은 제자의 목소리는 한 점 두려움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화산의 무공을 익혔더냐? 북림이 그것을 용납지 않았을 터인데.”
“사부님께서는 제게 화산의 기본 공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부라…… 너의 사부가 누구더냐?”
삼봉의 눈길은 무릎을 꿇고 있는 화롱에게 향했다.
오호통재라…….
형초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보기 드문 기재였다.
저만한 기재를 어디서 또다시 찾아낼 수 있단 말인가.
“사형! 무엇을 망설이십니까?”
형초의 등으로 흉흉한 기운들이 거세게 밀려들었다.
검을 꼬나 쥐고 있는 저들은 당장이라도 화산을 피바다로 만들고 싶어 한다.
“조용! 이곳이 화산임을 잊었단 말이더냐!”
형초가 분노의 일갈을 토해 내자 흉흉한 기세는 거친 역풍을 만난 듯 뒤로 밀려났다.
“장문…… 아니, 화롱이 죽는다면 너희들은 어찌할 것이냐?”
형초의 시선은 두려움에 몸을 떨고 있는 화산의 제자들을 향해 돌려졌다.
그러나 그들은 주춤주춤 눈길을 회피할 뿐 어느 누구도 나서려 하지 않았다.
그때 사십 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제자들이 젊은 제자들을 헤치며 앞으로 나섰다.
그들은 화롱의 뒤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저희들은 장문인과 함께 죽음을 받을 것입니다.”
“과연…….”
죽음까지 당당하게 받아들이는 자들을 보고 있노라니 절로 감탄이 흘러나왔다.
저들은 형초가 화산을 등지고 떠날 때 화롱과 함께 남아 있던 젊은 제자들이었다.
“화산을 위해 자결을 명하노라.”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사형. 부디 이 화산을 강호에 우뚝 서게 해 주십시오.”
스릉…….
형초를 향해 머리를 한 번 조아린 화롱은 망설임 없이 검을 빼 들었다.
스악!
서슬 퍼런 검날은 목을 베며 지나갔다.
털썩.
화롱이 스스로 목을 베어 땅바닥에 몸을 누이자 삼봉은 그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스악…….
연이어 다른 제자들도 스스로 목을 베어 냈다.
피를 쏟아 내며 죽어 널브러진 제자들을 둘러보던 형초가 몸을 돌렸다.
“이것으로 원한과 복수는 모두 잊어야 할 것이다! 앞으로 이 일에 대하여 입에 올리는 자가 있다면 그 또한 죽음에 상응하는 벌을 받게 될 것이다!”
“사형, 영을 거둬 주십시오. 이십 년의 그 치욕과 고난을 이렇게 쉽게 잊을 수 있단 말씀이십니까.”
오직 복수만을 갈구했던 제자들은 형초의 이 말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화산을 위해서 그리해야 하느니라.”
“제기랄!”
쨍강! 쨍! 챙……!
손에 들고 있던 검들이 일제히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형초는 그들을 나무라지 않았다.
자신 또한 단번에 원한을 잊을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화산을 위해서는 잊어야 했다.
아직 강호 무림을 온전히 되찾은 것은 아니었다.
풍천양이 죽었다고는 하지만 삼천존은 아직 그대로 남아 있고, 그보다 더한 악마가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너는 어찌할 것이냐?”
형초의 물음에 무릎을 꿇고 있던 삼봉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삼봉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화산을 떠나고 싶습니다.”
“복수를 위해서이냐?”
“아닙니다. 사부님께서는 절대로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실 겁니다. 하나 더 이상 이 화산에 머물고 싶지 않습니다.”
형초는 망설였다.
이 삼봉이라는 젊은 기재를 잡아 두고 싶었다.
직접 화산의 절기들을 가르치고 싶었다.
“허락…… 하마.”
어렵게 형초의 말문이 열렸다.
“사부님의 존체를 제가 직접 수습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그 또한 허락하마.”
* * *
눈을 뜬 비강의 시선에 잡힌 것은 뒤틀린 대들보였다.
본능적으로 손에 힘을 주자 검병이 느껴졌다.
‘아직 살아 있구나.’
끄으…….
몸을 일으키려 하니 입에서는 절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가 날 이곳으로 데려왔지?’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은 검은 복면을 한 인물이 자신을 향해 달려오던 모습밖에 없었다.
장경주.
아마도 복면을 쓴 인물은 장경주일 것이다.
삐걱…….
잠시 후 문이 열리며 비강의 짐작대로 장경주가 안으로 들어왔다.
“어머, 눈을 뜨셨네요?”
그녀는 비강이 눈을 뜨고 자리에 일어나 앉아 있는 모습을 무척이나 기뻐했다.
“고맙소.”
장경주의 뺨에 엷은 홍조가 어렸다.
“이곳은 어디요?”
“저만 알고 있는 의원이 있어 이곳으로 연 소협을 모셨어요.”
“이제야 눈을 떴군.”
뒤이어 오른팔이 없는 늙은 노인이 방 안으로 들어와 비강을 내려다보았다.
“뉘신지는 모르나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흥!
“걸을 만해지면 서둘러 이곳을 떠나게.”
늙은 노인을 그 말을 남기고 밖으로 나갔다.
“말투가 조금 쌀쌀맞기는 하지만 아주 좋은 분이세요.”
“그렇게 보이오.”
비강과 눈을 맞추던 장경주는 갑자기 화들짝 놀라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내 정신 좀 봐. 잠시만 기다리세요. 미음을 차려 올 테니.”
장경주까지 밖으로 나가고 난 후 비강은 길게 심호흡을 했다.
후우…….
진한 약초 냄새가 콧속으로 스며들어 왔다.
‘담노…… 무사하십시오.’
담노는 산서로 자신을 찾아오라 했지만 그곳으로 가고 싶지는 않았다.
평생 가문과 자신을 위해 애써 온 사람이니 남은 삶이라도 스스로를 위해 살게 해 주고 싶었다.
‘어찌 되었든 몸부터 추스르는 게 순서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