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 연비강 8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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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640회 작성일소설 읽기 : 신마 연비강 85화
제85화. 북림의 하늘이 지다
“림주님…….”
약철빙의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천하제일이라고 여겼던 림주가 지금 죽어 가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러나 비강은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시천세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성벽에 아주 훌륭한 그림을 그려 놓았더구나.”
“그 위에 당신의 피로 새로 그림을 그리고 싶소.”
크하하하…….
시천세는 아주 시원하고 흥겹게 웃어젖혔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뭔가 기이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놈이었다.
묘하게 껄끄러우면서도 마음을 잡아끌고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그렇게 해 보아라. 허락하마.”
비강은 선뜻 그러겠다는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부딪쳐 보지 않아도 안다.
저자와 싸우면 백이면 백, 전부 패한다.
커컥…… 컥…….
“사형에게…… 부탁이 하나 있소.”
피를 토해 내고 있는 풍천양은 점점 힘을 잃어 갔다.
“말해 보아라.”
“저 아이를 이곳에서……무사히…… 내보내 주오.”
흐음…….
“약속하마. 이곳에서 무사히 내보내 주겠다.”
고민도 잠시, 시천세는 곧 풍천양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는 사제의 죽음을 외면이라도 하고 싶은지 거리를 벌려 뒤로 물러났다.
―다가오지 말고 내 말을 잘 들어라.
풍천양을 향해 다가가려던 비강은 얼른 떼려고 움직였던 발을 멈췄다.
―나는 네게 나의 사형을 보여 주고 싶었다.
비강은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풍천양의 바람대로, 비강은 오늘 천하제일인을 목격했다.
―네 아비가 이협이었겠지. 그렇지 않느냐?
세상에 나와 이렇게까지 놀란 적은 없었다.
하지만 눈동자만 흔들렸을 뿐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다.
―네가 원하는 삶을 살아가거라.
전음을 마친 풍천양은 고개를 돌려 자신의 벗들과 제자들을 쳐다보았다.
“강호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구나. 이놈들아……나 먼저 간다. 또 보자.”
“천양…….”
얼굴 한가득 미소까지 지어 보인 풍천양은 바닥에 몸을 뉘었다.
“사부님!”
한조가 달려와 그의 얼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울 것…… 없느니…… 목숨을…… 보중하라…….”
한조를 올려다보던 흐릿한 눈이 서서히 감겼다.
그렇게 북림의 지배자였던 신창 풍천양이 죽음을 맞이했다.
“사부님!”
한조는 풍천양의 시신을 부여잡고 목 놓아 울었다.
사부가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도 없었을 것이다.
또한 힘없는 무가였던 한가는 여전히 힘없는 무가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목 놓아 울던 한조는 이를 악물더니 풍천양의 가슴에 꽂혀 있는 도를 뽑았다.
“한조!”
비강의 외침 소리는 분노와 복수심에 파묻혀 버렸다.
분명히 죽을 것이다.
하지만 제자가 되어 사부의 죽음을 모른 척할 수는 없지 않은가.
사부를 죽인 자를 눈앞에 둘 수는 없지 않은가.
설령 목숨을 태우더라도.
우웅…….
도가 진동을 하며 광채 같은 서기를 만들어 냈다.
쏴아아…….
희뿌연 기운의 파도는 격랑을 일으키며 오연하게 서 있는 시천세를 향해 몰려갔다.
“어리석은…….”
무심했던 시천세의 눈빛이 슬쩍 찌푸려졌다.
콰쾅!
격랑을 일으켰던 파도는 시천세를 휩쓸었으나 그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콰직.
어느새 한조의 등 뒤를 점한 시천세의 왼손이 한조의 목줄을 움켜쥐었다.
끄르륵…….
“제법 똘똘한 놈이라 여겼거늘. 사부의 유언조차 지키지 못하는 놈이라니.”
우직! 털썩!
한조의 목을 꺾어 버린 시천세는 약추완을 돌아보았다.
언제 한조를 죽였냐는 듯 그의 얼굴에는 미소까지 어려 있었다.
“이제 너의 대답을 듣고 싶은데?”
약추완은 어떤 대답을 내놓아야 할지 몰랐다.
하늘과 같았던 풍천양이 패해 죽었다.
이제 북림은 저자의 발아래에서 움직일 것이다.
아니, 강호 무림 전체가 저자의 발아래 앙복할 것이다.
살고 싶었다.
하지만 항복을 한다고 해도 저자가 살려 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배, 백건적들은 구, 구파일방과 유, 육대세가의 후예…….”
“그자들이 나를 거역할 수 있을 거라 보는 것이냐?”
이 말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자들은 절대로 이자의 말을 거역하지 못한다.
“목숨을 바쳐 충심으로 모시겠습니다.”
약추완은 지난날 풍천양에게 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시천세에게 무릎을 꿇었다.
“부림주!”
비강의 등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약철빙은 치를 떨며 소리를 질렀다.
어찌 사람이 저럴 수가 있단 말인가.
‘차라리…… 저 사람이 내 아버지가 아니었더라면…….’
온몸에 힘이 다 빠져나간 듯 그녀는 그대로 허물어지며 주저앉았다.
그러나 시천세에게 있어 약철빙은 관심 밖이었다.
끌끌끌…….
“말 잘 듣는 개에게 목숨까지 요구한다면 주인으로서 자격이 없지. 너는 나를 위해 열심히 짖어 주기만 하면 돼.”
치욕도 이런 치욕이 없었다.
하지만 약추완은 그 치욕을 묵묵히 받아들였다.
한 번 굽힌 허리를 두 번, 세 번이고 못 굽히겠는가.
“먼저 첫 번째 명령을 내리지. 당장 내려가 싸움을 멈추게 하고 북림의 모든 무인으로부터 항복을 받아 와. 아, 그리고 종예와 백산, 오진권을 찾아 불러오도록.”
“존명.”
약추완을 내려보낸 시천세는 벽사군과 악추산을 돌아보았다.
“너희들은 어찌하겠느냐?”
악추산은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 바로 무릎을 꿇었다.
벽사군 또한 잠시 머뭇거리다가 악추산 옆에 나란히 무릎을 꿇었다.
크하하하…….
시천세는 기분 좋게 웃었다.
그러나 벽사군과 악추산을 바라보는 눈빛만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너희들도 그만 내려가라.”
“존명.”
이제 정상에 남은 사람들은 삼천존과 제자들, 그리고 비강과 약철빙뿐이었다.
“장례를 치러야 하지 않겠느냐. 나는 이 정상에 천양의 무덤을 만들어 주었으면 한다만.”
“천양은 이곳에 서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것을 즐겼으니, 이보다 더한 자리는 없을 겁니다. 또한 천양의 제자까지 이곳에 묻어 주고 싶습니다.”
도운패가 나서서 시천세의 말을 받았다.
“그렇게 해라. 한데, 잊은 것이 있지 않느냐? 운패.”
도신 도운패의 전신에서 서서히 기운이 퍼져 나갔다.
삼천존은 전날 밤 한 가지 약속을 했었다.
시천세와 풍천양의 일전 후에 셋이 동시에 시천세를 치기로 한 것이다.
“어찌 아셨습니까? 사형.”
“백요가 전음으로 전해주더구나.”
“백요, 네가……?”
도운패는 도무지 시천세의 말을 믿지 못했다.
비록 넷이 서로 경쟁을 하기는 했지만 공통의 적은 사형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미안. 나도 어쩔 수 없었어.”
당백요는 머리를 푹 숙인 채 도운패와 거리를 벌렸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사형과 일전을 벌이던 풍천양은 자신보다 무공이 조금 더 강했다.
그런 천양을 사형이 꺾었다.
“악, 너는 어찌하겠느냐?”
“나는 사형과의 싸움을 뒤로 미루고 싶습니다.”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전날 밤의 약속은 도대체 무엇이었단 말인가?
아무리 사형의 무공이 하늘에 닿았더라도 셋이 합공을 한다면 승산은 충분할 것이다.
“너희들은…… 그 옛날의 벗들이 아니로구나.”
크크크…….
남궁악과 당백요에게 절망한 도운패는 음울한 웃음을 지어냈다.
그리고 그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서 도를 빼 들었다.
“사형, 이번에는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시천세는 회한과 분노를 담고 있는 도운패와 눈빛을 교환했다.
한 점 흔들림 없는 눈으로 도운패를 주시하던 시천세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다음에 하자꾸나.”
“설마 사형이 내게 겁을 먹은 것이오니까?”
“그래…… 겁이 난단다, 운패야. 오늘은 더 이상 사제들의 죽음을 보고 싶지 않구나.”
도운패가 들고 있는 칼끝이 가늘게 흔들렸다.
시천세는 도운패에게 등을 보이며 몸을 돌렸다.
그러나 도운패는 시천세의 뒷모습만 노려볼 뿐 그의 등을 찌르지 못했다.
스으으…….
시천세가 손을 뻗자 땅바닥에 떨어져 있던 도가 떠올라 그의 손안으로 날아 들어갔다.
“나를 죽일 수 있다면 사부의 이 병기는 운패, 너의 것이다. 하나 오늘은 아니야.”
“좋습니다. 사형의 부름이 있기를 기다리겠습니다.”
도운패는 손에 쥐고 있던 도를 허리의 도집으로 집어넣었다.
“가자.”
그러고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사부님…… 비강이는…….”
피를 흘리며 가만히 서 있는 비강을 바라보던 북궁도는 어찌할 줄 몰랐다.
하지만 곧 슬픔이 묻어나고 있는 사부의 눈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사형, 천양이를 잘 부탁합니다.”
도운패와 북궁도는 그렇게 북림을 떠나갔다.
―또 보자. 비강아.
비강은 희미한 미소로 북궁도와의 작별 인사를 대신했다.
* * *
도신이 떠나가고 난 후 산 정상으로 약추완과 종예, 백산, 오진권이 올라왔다.
오진권은 서늘한 눈으로 풍천양의 시신을 응시하다가 아직까지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비강을 노려보았다.
“강호는 원래대로 돌아갈 것이다. 구파일방과 육대세가가 북림의 영역 안에 자리를 잡는 것을 허락한다. 또한 녹림과 수채를 비롯한 사파의 활동도 허락한다. 단, 약가와 악가는 그대로 두거라.”
종예와 백산은 말없이 머리를 숙여 시천세의 명령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오진권은 아니었다.
“약추완과 약가를 살려 둘 수 없습니다. 구파일방과 육대세가는 승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끌끌…….
“원한다면 그렇게 해 보든지.”
그것은 철저한 조롱과 비웃음이었다.
으득…….
원한과 분노는 가슴을 일순간에 불태워 재로 만들어 놓을 정도로 가득했으나 지금은 참아야 했다.
“구파일방과…… 육대세가를 설득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앞으로 이 북림, 아니 중천(中天) 안에서의 싸움은 금할 것이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따르겠습니다.”
모든 것이 시천세의 뜻대로였다.
방금 이 말은 풍천양이 거느리고 있던 북림의 무인들을 시천세가 거두겠다는 뜻이었다.
핍박받았던 구파일방과 육대세가가 받아야 할 혈채를, 가슴에 담아 두고만 있으라는 뜻.
‘기필코…… 네놈을 찢어 죽이리라.’
오진권은 흐르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떨리는 몸과 바닥으로 떨어지는 눈물은 지금 그의 심정이 어떠한지를 충분히 대변해 주고 있었다.
시천세는 눈물을 흘리고 있는 오진권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사제의 장례를 치러야 하니 모두 이곳에서 내려가라.”
“존명.”
약추완의 비굴한 대답 소리에 이어 종예, 백산, 오진권도 산 아래로 몸을 돌렸다.
“아직 내게 할 말이 남았느냐?”
“아니.”
비강 또한 산 아래로 몸을 돌렸다.
막 산을 내려가려던 비강은 고개를 돌려 남궁악과 당백요, 그리고 그들의 제자들을 눈에 담았다.
어쩌면 저들은 다음에 적으로 마주칠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시천세를 눈에 담은 비강은 잠깐 동안 머물렀던 걸음을 옮겼다.
“내 밑에 있고 싶다면 언제든 찾아오너라.”
“언젠가, 림주의 복수를 하러 찾아가겠소.”
끌끌…….
산 아래로 사라져가는 비강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시천세의 입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곁에 두고 제자로 삼고 싶을 정도로 정말 마음에 드는 놈이었다.
하나 저놈이 이곳에 남고 싶어 했다면 가차 없이 목을 쳤을 것이다.
‘오진권이 저놈을 가만둘까? 그럴 리 없지.’
* * *
비강은 번들거리는 살기를 온몸으로 맞이하며 태연하게 길을 걸었다.
구파일방과 육대세가의 후예들은 저마다 병기를 꼬나 쥔 채 산길을 걸어 내려오고 있는 비강을 노려보았다.
“이제 어디로 갈 거야?”
살기를 맞으며 나란히 걸어 내려오던 약철빙이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직 정한 곳은 없습니다.”
“그럼, 나와 함께 가.”
이 여자는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걸까?
분명 저 아래 정문을 나서자마자 적들의 공격이 시작될 것이다.
풍천양과 시천세의 약속은 북림 안에서만 허용될 뿐.
“또 보자, 백리혈.”
오진권은 담백한 인사로 작별을 고했다.
그의 흉중을 짐작하고 있는 비강도 별다른 내색 없이 인사를 받았다.
“그러지. 그때까지 살아 있다면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