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 연비강 72화
무료소설 신마 연비강: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81회 작성일소설 읽기 : 신마 연비강 72화
제72화. 어느 사형제들(3)
“이게 무슨 짓이오? 북림이 어찌하여 우리 가문을 적대시한단 말이오?”
희다 못해 은은한 은빛까지 띄고 있는 머리카락과 어울려 아랫배까지 흘러내린 탐스런 하얀 수염은 노인을 현세의 신선이라 여기게 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 노인의 표정은 마귀를 연상케 할 만큼 일그러져 있었다.
“등 가주, 반란을 꾀하고 있지 않았소.”
삼백 명이 넘는 무인들을 이끌고 온 감찰단주 약추명이 노인을 향해 이죽거렸다.
“무슨…… 소리요? 우리가 반란을 꾀하고 있었다니.”
그와 맞선 노인의 대꾸는 어딘가 모르게 당당하지 못했다.
끌끌끌…….
“이미 다 끝났소, 등 가주. 허 문주가 이미 실토했소이다.”
약추명의 차디찬 목소리에 무인들은 포박한 중년 사내를 앞으로 끌어내 무릎을 꿇렸다.
“허…… 허 문주,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포승줄에 묶인 중년 사내는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이에 약추명의 입에서 일갈이 터져 나왔다.
“북림의 은혜로 미천했던 가문이 강호 무림에 우뚝 서게 되었으면 응당 보답을 해야 하거늘 어찌하여 백건적과 내통을 했단 말이더냐!”
“감찰단주. 우리 가문을 절대 그자들과 내통을 한 적이 없소이다. 정말이오.”
“백건적들의 이동과 움직임을 모른 척해 놓고 이제 와 발뺌을 한단 말이더냐! 거기다가 다른 무가와 무문들까지 부추겨 우리 북림에 맞서려 했다지?”
“오해요. 오해란 말이오. 나는 그저…….”
신선 같은 노인의 얼굴에는 절박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감찰단주 약추명의 말대로 그런 일을 벌였었다.
하지만 무력으로 북림에 맞서려 한 것은 아니었다.
북림의 본거지까지 백건적들에 의해 습격을 받은 상황이라 살길을 모색한 것뿐이었다.
만약 백건적들이 북림을 장악하기라도 한다면 가문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때를 대비해 조금이나마 백건적들의 마음을 사 두려 한 것이다.
“무엇들 하느냐! 저자를 추포하지 않고. 등가의 재물은 모두 북림으로 옮길 것이며 저항하는 자들은 죽여도 좋다!”
“존명!”
약추명의 명령이 떨어지자 뒤에 도열해 있던 무인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들은 모두 약가의 식객들과 가인들로, 그동안 약추완이 공을 들여 가문으로 받아들이고 키워 놓은 고수들이었다.
“살려 주시오. 제발 살려 주시오.”
등 가주는 약추명 앞으로 달려가 바닥에 엎드려 애걸했다.
새로운 세상을 만난 덕분에 그의 무가는 하남에서도 제법 알아주는 무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동안 다른 무가와 무문들의 눈치만 보던 위치에서 이제는 다른 무가와 무문들을 내려다보게 되었다.
이제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뻑! 크윽!
약추명은 엎드려 있는 등 가주의 얼굴을 올려 찼다.
“가주님!”
“무엄하다!”
차창!
가주가 수모를 당하자 가인들은 참지 못하고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신호로 악가의 가인들은 등가의 가인들을 향해 무차별적인 살육을 펼치기 시작했다.
크악! 아아악……!
등가의 가인들도 고수라는 소리를 듣고 있었으나 약가의 식객들과 가인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감히 하찮은 것들이 반역을 도모하다니!”
약추명은 악가의 혈사로 인한 분노를 등가를 향해 쏟아 내고 있었다.
“제발…… 그만하시오! 그만! 나를 죽이고 가인들은 살려 주시오!”
등 가주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소리를 지르며 약추명의 발아래 엎드렸다.
“가주님…….”
챙, 챙…….
가주의 그 모습에 가인들은 눈물을 머금고 병장기를 바닥에 내던졌다.
“등 가주를 북림으로 압송하라.”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악가의 가인들은 등 가주를 포박해 가문 밖으로 끌고 나갔다.
“이제 어디로 움직일 생각이신가?”
약가의 식객들을 지휘하고 있던 장로가 약추명에게 다가와 물었다.
“산서로 넘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곳에도 반역자들이 꽤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자네가 그리 말한다면 그런 것이겠지. 어서 출발하세.”
“예. 그전에 등가에서 나온 재물 일부는 가문으로 옮겨 주십시오.”
“그런 일은 자네가 말하지 않아도 우리가 다 알아서 처리할 것일세.”
장로와 의논을 마친 약추명은 무릎을 꿇고 있는 등가의 가인들을 둘러보았다.
“앞으로 이 년간 봉문하라! 만약 북림의 영을 어기고 무림 활동을 이어 간다면 그땐 멸문을 면치 못할 것이다!”
말을 마친 약추명이 등가를 빠져나가고 뒤이어 가인들도 밖으로 나오며 대문에 봉(封)이라는 커다란 글자가 쓰여 있는 종이를 붙였다.
약가는 섬서와 하남을 시작으로 강호의 혼란을 빠르게 정리해 나갔다.
* * *
약철빙은 조금은 개운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짐작대로 비강은 북림을 배신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양양 곡성에 옥돈조를 파견해 사건을 재조사하게 했다.
그리고 방금 양양 지부에서 보내온 공손황의 전서가 도착했다.
전서에는 곡성 유가가 모종의 세력에게 식량과 생필품을 조달하는 일을 맡았었고 그 세력은 이미 하나도 남김없이 죽임을 당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전부 림주님의 계획이었어.’
백건적의 습격으로 인한 북림의 혼란은 빠른 속도로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감찰단주는 백건적들에게 동조한 북림의 무가와 무문들을 찾아내 죄를 묻고 있었고 백건적들은 다시 어둠 속으로 숨어든 상황이었다.
양양에서 올라온 소식을 보고하기 위해 집무실을 나서던 약철빙의 시선은 잠시 비강이 앉아 일을 보던 탁자에 머물렀다.
비강은 언제나 탁자를 깔끔하게 정리했다.
서류는 탁자 오른쪽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붓과 먹, 벼루는 탁자 왼쪽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빨리 돌아와.’
예전에는 느끼지 못했는데 비강이 없는 집무실은 너무 크고 허전했다.
꽤 여러 날 동안 주인이 없는 자리라 그런지 탁자 위에는 먼지까지 쌓여 있었다.
그 모습이 보기 싫어 먼지를 털어 내던 그녀는 서류 뭉치 밑에 들어 있는 봉서 하나를 발견했다.
‘이게 뭐지?’
문득 불길한 느낌을 받은 약철빙은 급히 봉서를 열었다.
봉서 안에는 서신이 한 장 들어 있었는데 그녀로서는 처음 대하는 낯선 글자였다.
멍하게 서신을 내려다보던 약철빙의 입에서 억눌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런 여우 같은…….”
비강은 비파샤가 이곳 북림으로 자신을 찾아올 것이란 예상을 하고 이런 서신까지 남겨 놓은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정보를 어디서 전해 들었을까?
확인해 보나 마나 하오문일 것이다.
약철빙은 비강이 비파샤를 위해 남겨 놓은 서신의 내용이 너무 궁금했다.
그러나 당장 확인해 볼 방법이 없었다.
과연 이국의 공주는 이 서신을 받고 어떤 반응을 보일까?
‘어떻게 해야 하나?’
그녀는 망설이고 있었다.
만약 서신에 기다리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면 공주는 이곳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집무실 안을 서성이던 약철빙은 마음을 정했는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 * *
[언제 이곳을 떠날지 기약이 없습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꿈이 있었습니다.
그 꿈을 이루기 전에는 이곳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도 평생이 걸리겠지요.
우연히 당신을 발견하더라도 나는 당신을 못 본 척 지나칠 것입니다.
그러니 당신은 당신의 삶을 사십시오.]
서신을 읽어 내려가는 비파샤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 글씨는 그분의 것이 맞다.
하지만 무정하게도 그분은 자신을 잊어 가고 있었다.
하아…….
숨을 진정시키며 눈물을 훔친 그녀는 서신을 곱게 접어 품에 넣었다.
이미 마음속 한구석에서는 이런 결말을 예측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막상 그 상황과 맞닥뜨리니 아득한 절망감이 찾아왔다.
“이제…… 그만 떠나야겠어요.”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공주님.”
시중을 들던 시녀가 밖으로 나가 공주의 영을 전달했다.
* * *
군사들이 천막을 철거하고 짐을 수레에 싣는 동안, 공주는 림주 풍천양을 만나 떠날 것임을 말했다.
비파샤는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분을 부탁해요.”
“또 들려 주십시오. 공주님은 언제든 환영합니다.”
“저도 그러고 싶지만 아마도 힘들 거예요.”
풍천양은 공주의 미소 속에 깃든 서글픔을 알아보았다.
‘참으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이 되었을 터인데 안타깝구나.’
비파샤는 애써 당당함을 내보이며 산을 내려갔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풍천양은 한쪽에 시립해 있는 약추완을 돌아보았다.
“십 리 밖까지 배웅을 해 주시오.”
“알겠습니다. 림주님.”
약추완을 보낸 풍천양은 정상에서 북림을 내려다보았다.
‘나와 사형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천하제일인을 꿈꿨었다.
그러나 자신과 같은 꿈을 꾸고 있는 자들이 넷이나 더 있었다.
그들 중에 셋은 벗이었고 하나는 사형이었다.
‘나는 아직 그 꿈을 버리지 못했소, 사형.’
* * *
“수고하셨소.”
“별말씀을 다하십니다요.”
요리 재료들을 건네받은 북궁도는 뱃사공에게 품삯과 음식 재료값을 후하게 계산해 건넸다.
“거…… 저쪽 애들 할아버지는 어찌 되었소?”
“한 달포가량은 의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한답니다요.”
“알겠소. 의원에게 잘 돌봐 주라 전하시오.”
북궁도는 전낭에서 은자를 더 꺼내 내주었다.
“고맙습니다요. 그럼 이틀 후에 또 뵙겠습니다요.”
“다음에는 구운 통돼지 두 마리를 구해 오시오.”
“통돼지를 말입니까요?”
“아주 큰 놈으로 구해 주시오.”
“알겠습니다요.”
은자를 받아 챙긴 젊은 뱃사공이 배를 저어 떠나자 북궁도는 음식 재료를 챙겨 강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촌락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른 풀과 나무로 엮어 지은 집 여섯 채가 모여 있는 촌락은 비강과 북궁도의 거처였다.
집은 여섯 채였지만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은 단 두 곳밖에 없었다.
집을 향해 바쁘게 걸어가던 북궁도는 집밖으로 나와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는 비강을 발견했다.
“거기서 뭐 해?”
“응?”
어디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는지 비강은 북궁도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 같았다.
“너 오늘따라 이상하다. 뭔 일 있냐?”
“아니. 아무 일도 없어.”
흐음…….
게슴츠레한 눈으로 비강을 살피던 북궁도의 입가에 짓궂은 웃음이 떠올랐다.
“여자 생각하는구나?”
비강은 대답 대신 피식 미소를 지었다.
“어? 진짜인가 보네? 도대체 그 여자가 누구냐?”
“다시는 만나지 못할 사람이야.”
“아…… 미안하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모양이구나.”
하하하…….
엉뚱한 상상을 하는 북궁도가 재미있어 비강은 큰 웃음을 지었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저녁 먹고 그 여자와 있었던 일을 전부 털어놔.”
집 안으로 들어온 두 사람은 솥에 쌀을 씻어 안쳐 놓고 또 다른 솥에 돼지고기와 여러 가지 채소들을 썰어 넣었다.
시간이 지나 솥에 김이 올라올 무렵 대여섯 명의 아이가 집 안을 기웃거렸다.
가장 어린아이는 일곱 살쯤 되어 보였고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아이는 열 살에서 열한 살쯤이었다.
아이들은 저마다 손에 대나무로 만든 작은 낚싯대를 들고 있었다.
“얼른 들어와.”
북궁도가 손짓을 하자 아이들은 주춤거리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오늘은 몇 마리나 잡았어?”
북궁도의 물음에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아이가 나뭇가지에 꿴 물고기를 내보였다.
손바닥만 한 물고기 네 마리를 빼앗듯 낚아챈 북궁도는 큰 그릇에 밥을 가득 푸고 다른 그릇에는 탕을 펐다.
“가서 같이 나눠 먹어.”
밥과 탕을 받아 든 아이들은 우물쭈물하다가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우리 할아버지는 어떻게 되셨어요?”
“달포가량 치료를 받으면 된다고 했으니 걱정하지 마라.”
아이들은 그제야 환해진 얼굴로 허리를 넙죽 숙였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내일 또 와. 빈 그릇은 물고기 잡으러 갈 때 집 앞에 놓아두고.”
“예.”
밥과 탕을 받아 든 아이들이 전부 집을 나가고 난 후 북궁도는 손바닥만 한 물고기들을 손질해 아궁이에 넣었다.
“아무래도 수적 놈들을 찾아 나서야 할 것 같아.”
“기다려 봐. 이곳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알아서 찾아올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