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 연비강 9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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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666회 작성일소설 읽기 : 신마 연비강 96화
제96화. 새로운 인연(2)
어딘가 모르게 어두워 보이는 사람들의 표정은 마을에 무슨 일이 있음을 짐작케 했다.
마을 사람들은 마을을 들어서는 비강을 겁먹은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마을의 분위기를 파악한 비강은 눈에 보이는 가장 큰집을 향해 말을 몰았다.
그래도 밥을 얻어먹으려면 없는 집보다 부잣집이 훨씬 나을 터였다.
커다란 기와집 지붕들이 보이는 대문 앞에 도착한 비강은 말에서 내려 대문을 두드렸다.
“계십니까?”
“뉘시오?”
곧바로 대문이 조금 열리며 하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머리를 빠끔 내밀었다.
그러더니 곧 검은 무복을 입고 있는 비강의 위아래를 살펴보고는 환한 미소를 짓는 것이었다.
“아이고! 드디어 오셨군요. 얼마나 많이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너무 오래 시일이 걸리기에 주인어른께서는 협사님이 오시지 않을 것으로 알고 크게 실망하고 계시는 중이었습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비강이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는 것도 잠시 하인은 대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목소리를 높였다.
“강호의 협사님께서 오셨습니다!”
‘강호의 협사? 내가? 무슨 사정이 있는 것 같은데.’
하인의 목소리가 집안에 울려 퍼지자마자 여기저기서 식솔들이 달려 나왔다.
대충 어림잡아도 스무 명이 넘어 보였다.
특히 그들 중에는 비단옷을 입고 있는 중년인과 중년 여인이 있었는데, 눈치로 보아 그들 둘이 이곳의 주인으로 보였다.
“어서 오십시오, 협사님. 하루를 십 년처럼 정말 눈이 빠지게 기다렸습니다.”
“아, 예. 오긴 왔는데.”
“어서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무엇들 하느냐? 어서 진수성찬을 마련하도록 하라.”
“예!”
비강이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중년인은 하인들에게 명을 내렸다.
주인은 비강의 손을 잡아 이끌고 방안으로 안내했다.
“어서 앉으십시오.”
비강이 순순히 의자에 자리하자 중년인과 중년 여인은 그 앞에서 넙죽 허리를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을 것입니다.”
도무지 영문을 모르는 비강으로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저 바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마주 허리를 숙일 뿐이었다.
“우리 마을의 어려움을 풀고자 하인들을 풀어 사방으로 내보냈는데, 오직 협사님께서 달려와 주셨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 네. 그런데 그 마을의 어려움이라는 것이 뭡니까?”
가만히 듣고 있던 비강이 궁금증을 참지 못해 물었다.
순간 중년 부부의 안색에 당황함이 어렸다.
“그럼, 우리 마을에 대해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찾아오셨단 말씀이십니까?”
“네.”
“이런.”
환한 기쁨으로 가득했던 중년 부부의 안색은 순식간에 굳어 버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중년 사내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협사님께서는 강호에서 어느 정도의 고수이신지요?”
“어지간해서는 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후우.
비강의 대답에 길게 한숨을 내쉰 중년 사내가 마을의 사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실은 두어 달 전부터 마을 인근에 있는 깊은 산속에 도적들의 산채가 하나 들어섰습니다. 여느 때 같으면 서패와 북림의 힘에 눌려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일이나, 북림이 망하고 난 후라 도적들이 산채를 차렸습니다.”
“그렇군.”
“우리 마을에도 작은 무관이 하나 있어, 무관의 관주가 급히 서패에 그 일을 알렸으나 서패 또한 멸망한 북림으로 인해 사정이 어려워진 모양입니다. 고수들을 보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 돌아오기는 했으나 기다리던 서패의 고수들은 오지 않고 도적들이 마을에 내려왔습니다.”
마을의 사정은 참으로 어려운 모양이었다.
마을의 위치가 북림과 서패의 경계에 있어 그동안 양쪽에서 보호를 받았는데 북림이 멸망하고 나니 도움을 받지 못한 것이다.
더군다나 도적들은 구파일방과 육대세가의 보호까지 받고 있어 서패의 고수들이 함부로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마을로 내려온 도적들은 사패의 위세가 두려워 몸을 숨기고 있던 흉적들이었다.
그런 흉적들을 마을의 무관이 어찌 감당하겠는가.
관주가 도적들에게 잡혀 죽었고 재물과 식량을 약탈당했다.
“도적들이 모두 몇 명이나 됩니까?”
“처음에는 오십여 명 정도였는데, 지금은 일백 명이 넘는 것 같습니다. 두려운 것은 그들 모두 강호의 고수들이라 어지간한 무공의 고수가 아니고서는 감당하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마을의 사정을 듣게 된 비강은 작게 고개만 끄덕일 뿐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동안 여러 곳에서 젊은 강호의 고수들이 도움을 주고자 달려왔으나 그 도적들을 당해 내지 못했습니다. 도적들은 점점 세력을 확장해 서패의 영역까지 넘어가 약탈과 살인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대충은 짐작이 갔다.
구파일방과 육대세가는 도적들을 이용해 서패의 영역까지 넘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적들은 이 중년 사내의 말대로 흔히 볼 수 있는 강호의 고수들은 아닐 것이다.
“도적들은 보름에 한 번씩 우리 마을에 들러 잔치를 벌이거나 식량을 가져갑니다. 도적들이 내려올 때는 젊은 아녀자들은 모두 숨고 나이 든 이들이 그자들의 시중을 들고 있습니다.”
아무리 강호에 고수들이 많다지만, 일백 명의 적을 감당할 고수는 흔치 않았다.
“강호 무림에도 일백 명의 적을 감당할 고수는 많지 않습니다.”
비강의 지적에 중년 부부는 고개를 푹 숙였다.
“강호 무림에 문외한이기는 하나, 그 사실을 저희들이 어찌 모르겠습니까. 실은 저희 부부에게는 이제 막 열여덟이 된 여식이 하나 있습니다. 어디서 그 소문을 듣게 되었는지 도적 중에 하나가 그 아이를 탐내고 있습니다. 그 도적이 말하기를 이십 일 후에 제 여식을 데려갈 터이니 혼례 준비를 해 놓으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시일이 팔 일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이야기를 마친 중년 사내는 비강 앞에 넙죽 엎드렸다.
“협사께서 아무리 무공이 고강한 고수라 하더라도 도적 일백 명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아비 된 자가 곱게 키운 딸아이를 도적들에게 넙죽 내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밥이나 주십시오. 배가 고픕니다.”
“예?”
중년 부부는 자신들의 귀를 의심했다.
사실 이런 사정을 알고 된다면 아무리 협의가 넘치는 강호의 고수들이라도 백이면 백, 전부 도망을 쳤을 것이다.
“당분간 이곳에 머물고 싶습니다.”
비강의 말을 허락으로 받아들인 중년 부부는 크게 기뻐하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무엇들 하느냐? 어서 밥을 내오지 않고!”
* * *
중년 부부는 지극정성으로 비강에게 대접했다.
끼니때가 되면 푸짐하게 차려 낸 밥상에 차까지 나왔다.
더군다나 저녁때면 배가 출출할까 봐 여러 가지 과일까지 준비해 내왔다.
푸짐하게 저녁 밥상을 받은 비강은 식사를 끝내고 뒷마당을 거닐었다.
조용한 뒤뜰을 거닐던 비강은 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커다란 바위 위에 정좌를 하고 앉았다.
요즘 비강이 운기행공을 하는 자리가 바로 이 자리였다.
정좌를 하고 앉은 비강은 눈을 감고 단전에 있는 기운을 전신으로 흘려 보냈다.
스으으―
비강의 무복이 부풀어 오르고, 전신에서는 희미한 빛이 흘러나왔다.
운기행공을 하던 비강은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는 누군가의 기척을 느끼곤, 전신으로 흘려 보내던 기운들을 급히 단전으로 불러들였다.
번쩍.
비강의 눈을 뜨자 시퍼런 안광이 줄기줄기 사방으로 쏟아졌다가 흩어졌다.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비강은 기척이 들리는 곳으로 슬쩍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에 사람 하나가 서 있었는데, 무엇에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아무도 없는 줄 알고.”
곧이어 어둠 속에서 차분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별말씀을, 오히려 제가 죄송합니다.”
비강은 자리에서 일어나 작게 고개를 숙였다.
여인은 그의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비강은 여인의 얼굴을 대낮같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 여인이 바로 이 집 주인의 딸이로군.’
비강은 여인과 얼굴을 마주하다가 문득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여인은 열여덟이라는 나이보다 훨씬 성숙해 보였는데, 얼굴이 갸름한 것이 아주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비강의 주관적인 생각이었고, 여느 사람들이 좋아하는 보름달같이 환한 얼굴이 아니었다.
“저를 지키러. 아니, 마을을 지키러 오신 협사님이시로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송은반이라고 합니다.”
“독고일입니다.”
비강은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아저씨의 이름을 가져다 썼다.
‘아저씨는 지금 무얼 하고 계실까?’
갑자기 아저씨의 이름을 입에 올리고 나니 문득 아저씨의 얼굴이 떠올랐다.
‘떠날 때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해 드릴 것을.’
아무리 좋지 않게 헤어졌다고는 하지만, 아저씨는 생명의 은인이자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분이었다.
“그럼, 다음에 또 뵙지요.”
여인에게 먼저 인사를 건넨 비강은 방으로 들어갔다.
‘앞으로 운기행공은 방에서 해야겠군.’
* * *
새벽에 무공 연마와 세안을 끝냈을 때, 하인들이 일어나 밥을 짓기 시작했다.
비강은 검 하나만 차고 대문 밖으로 나섰다.
참으로 경치가 좋은 마을이었다.
멀리 깎아지른 듯 높게 솟아 있는 바위산들과 시원하게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가 보였고, 사방은 누렇게 익어 가는 벼들로 가득한 논이 펼쳐졌다.
언젠가 강호를 떠나 살게 된다면 이런 마을에 자리를 잡아 살고 싶을 정도였다.
검을 차고 마을을 돌던 비강은 마을 사람들의 인사를 받았다.
그러나 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두려움과 동정이 가득했다.
‘내가 도적들에게 죽을 것이라 생각하는 모양이로군.’
마을 한 바퀴 돌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주인 부부가 문 앞에서 서성이다가 반갑게 비강을 맞이했다.
“어디 갔다가 오시는 길이신지요?”
“조금 심심하여 마을을 한 바퀴 돌고 왔습니다.”
“그렇군요. 어서 들어가시지요. 식사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주인 부부는 비강이 도망을 친 것이라 여기고 있던 모양이었다.
방 안으로 들어간 비강은 주인 부부와 마주 앉았다.
“어서 드십시오.”
아침상으로 받기 거북할 정도로 푸짐한 밥상을 받은 비강은 천천히 식사를 시작했다.
막 젓가락으로 밥을 떠 넣으려던 비강은 밖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손을 멈췄다.
발소리는 바로 이곳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곧 문이 열리며 전날 밤에 마주했던 주인 부부의 여식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너라, 은반아.”
주인 부부는 여인을 반갑게 맞이해 비강에게 인사를 시켰다.
“어서 인사 올리지 않고 무얼 하느냐? 너를 지켜 주기 위해 오신 협사님이시다. 제 여식입니다, 협사님.”
“송은반이라고 합니다.”
“독고일입니다.”
비강과 여인은 처음 대하는 것처럼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며 이름을 밝혔다.
주인 부부는 비강의 이름을 처음 들었다.
“식전이라면 함께 드십시오.”
비강이 예의상 하는 말에 여인은 한쪽에 다소곳이 앉았다.
주인 부부는 그런 여식의 모습에 놀라 잠시 당황해하다가, 얼른 밖에 시켜 밥과 수저를 가져오게 했다.
그렇게 아침 식사가 다시 시작되고, 눈치를 살피던 주인 사내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다른 가문의 여식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곱게 키운 하나밖에 없는 딸아이입니다.”
“그러시군요.”
“한데 혹시 협사님께서는 혼인을 하셨는지요?”
“아직 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협사님 같은 고수분이 어찌하여 아직 혼인을 하지 못하셨단 말씀이십니까?”
비강의 무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주인 사내의 질문이었다.
“칼끝에 목숨을 걸고 사는 강호인이 어찌 함부로 혼인을 할 수 있겠습니까.”
주인 부부는 비강의 대답에 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아침 식사가 끝이 나자 하인들이 차를 내왔다.
차를 마시는 동안에도 주인 사내는 비강이 심심하지 않게 하기 위해 말을 걸었다.
“협사님께서 강호에 여러 해 계셨을 터인데 젊은 고수분 중에 어떤 분들과 교분을 나눠 보셨습니까?”
하하.
“글쎄요. 워낙 말주변이 없어 젊은 고수들을 별로 사귀어 보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