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 연비강 94화
무료소설 신마 연비강: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676회 작성일소설 읽기 : 신마 연비강 94화
제94화. 천하제일인
강호 무림은 탐욕을 먹고 사는 괴물이었다.
힘 있는 자들이 드러내 놓고 약한 자들을 죽이고 굴복시켜 영웅이 되어 이름을 드높인다.
그리고 그런 자들 중에 비강도 있었다.
“탐욕스런 곳에 가장 잘 어울리는 자가 천하제일인이로군.”
협객이나 마인이라는 말은 애초부터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탐욕스런 자들을 제압하는 더욱더 탐욕스런 자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아저씨는 내가 강호에서 어떤 사람이 되기를 바랐을까.’
아저씨의 모습은 충격이었다.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아저씨는 저런 사람이 아니었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마음이 따뜻하고 협의를 가진 사람이었다.
단 한 번이라도 좋았다.
아저씨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가족이 되어 주어 고마웠노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아저씨를 만나게 되니 선뜻 그런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던 비강이 새벽에 밖으로 나왔을 때, 신선 노인은 이미 일어나 분주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노인은 다리를 끌며 부엌에서 밥을 짓는 중이었다.
“기침하셨습니까?”
신선과 다름없는 모습의 노인이 비강을 발견하자마자 머리를 넙죽 숙였다.
하하, 하하하.
비강은 하도 어이가 없어 그만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신선처럼 생긴 노인이 마치 하인이라도 된 양 일을 하며 아침 인사까지 올리니 기가 막힌 것이다.
“내 정체를 아는 거요?”
“물론입니다. 제가 바보가 아닌데 그만한 무공을 견식하고 어찌 대협의 정체를 모를 수 있겠습니까.”
비강은 온화한 미소까지 짓고 있는 신선 노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신선과 어울리는 미소였으나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은 신선과는 거리가 멀었다.
“안으로 들어가 계십시오. 곧 세숫물을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나는 신경 쓰지 마시오.”
두 사람이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문이 열리며 아저씨가 밖으로 나왔다.
비강이 정중히 머리를 조아리자 신선 노인도 얼결에 머리를 숙였다.
신선 노인은 머리를 숙이면서도 삼십 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사내를 유심히 살폈다.
‘천하의 백리혈에게 인사를 받는 사람이라.’
아저씨는 신선 노인을 지나가듯 흘깃 바라보았다.
“마동번이 제자 하나는 잘 들였군.”
신선 노인, 아니 도둑 무진도는 너무 놀라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사부의 이름이 바로 마동번이었다.
또한 사부는 도둑이었으며, 자신 외에는 아무도 본명을 알지 못했다.
“당신은…… 당신의 정체가?”
정체를 묻던 무진도는 아주 오래전 사부의 이야기 하나를 떠올리고는 풀썩 엉덩방아를 찌었다.
‘이 세상에 나보다 빠른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을 게다. 하지만 그분은 사람이 아니라 신이니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발이 빠른 사람이지.’
사부는 그때 분명히 사람이 아닌 신이라고 했었다.
아저씨는 그런 무진도를 내버려 둔 채 어디론가 걸음을 옮겼다.
비강도 조용히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문밖으로 나온 아저씨는 비강이 들어섰던 죽림의 초입으로 향했다.
유유자적한 느린 걸음임에도 비강은 아저씨의 등 뒤를 쫓아 움직이기에도 힘이 부쳤다.
아저씨는 걸음을 걷는 것이 아니라 땅을 좁혀 건너뛰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바람 한 점 일으키지 않았다.
단숨에 초입에 도착한 아저씨는 반으로 쪼개진 대나무를 한쪽으로 걷어 냈다.
뒤늦게 도착한 비강이 손을 거들려 하자 아저씨는 고개를 저었다.
“두어라. 내가 할 터이니.”
대나무를 전부 걷어 낸 아저씨는 이제 막 땅을 비집고 올라온 죽순 봉우리에 손을 얹었다.
아저씨의 손에서 희미한 빛이 쏟아졌다.
후우우.
아저씨가 손을 떼자마자 죽순은 대나무가 되어 순식간에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비강은 그 광경을 보고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아저씨는 신이 아니라 하지만 비강의 눈에는 신이었다.
여러 개의 죽순을 대나무로 키워 내고 있는 아저씨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기(氣)라는 것은 사람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니라. 모든 살아 숨 쉬는 것들은 물론이고, 네가 밟고 선 땅에도 기가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아저씨.”
아저씨의 말이 아니더라도 요즘 점점 그 사실을 느껴 가고 있는 중이었다.
아저씨가 키워 낸 대나무들이 입구를 막았으나, 신기하게도 안쪽에서는 바깥쪽이 잘 보였다.
“나는 오랜 세월 강호를 떠돌아다녔느니라. 어떤 때에는 삼류무사로, 또 어떤 때에는 천하의 마인이나 천하의 고수로. 그렇게 떠돌다 보니 생(生)의 이치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게 되었다. 그 후부터 죽음이라는 것을 건너뛰게 되었고…… 아니지, 죽음이라는 것을 늦출 수 있게 되었다고 해야 맞는 말이겠지.”
아저씨는 집을 향해 걸으며 말을 이었다.
“원래 너는 나의 계획에 없었느니. 네 아비와의 인연으로 너는 계획에도 없는 제자가 된 것이다.”
아저씨는 집 앞을 막고 있는 죽림까지 원래대로 되돌렸다.
“강호처럼 잔인한 곳도 세상에 없을 것이다, 또한 그처럼 아름다운 곳도 없을 것이고. 천양이나 운패, 백요가 강호 무림의 주인이 된다면 강호는 조금 더 좋은 곳이 되겠지. 천세가 주인이 되면 전보다 더 많은 자들이 죽어 나갈 것이고. 나는 그놈들이 만들어 가는 세상에 관여하지 않을 것이다.”
왜 아저씨는 자신의 제자들로 하여금 강호를 지배하게 하려는 것일까.
굳이 제자들이 아니더라도 강호 무림은 여전한 강호 무림일 것이다.
“아저씨의 제자들이 아니더라도 어차피 강호는 스스로 움직일 것입니다.”
집으로 들어서던 아저씨가 문득 걸음을 멈추며 비강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비강도 아저씨의 눈을 응시했다.
사내답게 잘생긴 아저씨의 얼굴에서는 어떠한 감정도 묻어나지 않았다.
“너는 대대로 내려오던 구파일방과 육대세가의 강호를 알지 못한다. 내 제자들이 아무리 잔인해도 그들만은 못할 것이야.”
아저씨의 말이 막 끝났을 때쯤 무진도가 다가와 머리를 조아렸다.
“식사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아저씨는 당연하다는 듯 식탁 앞에 앉았다.
뒤늦게 비강도 맞은편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자, 무진도는 조용히 자리를 피해 주려 했다.
“너도 같이 앉아라.”
“소인이 어찌 감히…….”
무진도는 아저씨를 대함에 있어 공손함이 지극했다.
“앉아.”
“예.”
나이 많고 다친 몸이기는 했지만 무진도는 재빨리 식탁 한쪽을 차지하고 앉았다.
그렇게 아침 식사가 시작되었다.
밥과 국으로 식사를 이어 가던 비강은 소채를 집다 말고 갑자기 젓가락을 멈췄다.
이제야 아저씨가 자신을 이곳으로 불러들이게 된 진정한 목적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깨닫자마자 젓가락에 잡혀 있던 소채가 식탁으로 떨어졌다.
비강은 급히 식탁에 떨어뜨린 소채를 집어 올려 입에 넣었다.
자신은 아저씨의 계획에 없었다고 했다.
그런데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해 그 계획에 끼어들게 되었다.
비강의 눈에는 뿌연 물기가 차올랐다.
얼른 감정을 추스른 비강은 지금의 감정을 숨기기 위해 전부터 묻고 싶었던 질문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아저씨의 존함을 아직까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나를 일(日)이라 불러 준 사람이 있었다. 독고일, 그것이 내 이름이었다.”
독고일.
꽤 오랫동안 같이 지냈으면서도 아저씨의 이름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식사를 끝내고 나니 무진도는 자신의 일인 양 그릇을 치우고 설거지를 했다.
그동안 비강은 세수를 하고 소금물로 입을 가셨다.
아저씨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아저씨는 작은 항아리 하나를 들고 집 안에 들어섰다.
“한잔하겠느냐?”
“예.”
비강과 아저씨는 마당 한쪽에 서 있는 커다란 나무 아래 자리를 마련해 앉았다.
쪼로로―
무진도가 황급히 술 사발 두 개를 내오고, 비강은 술독의 술을 사발에 채워 올렸다.
아저씨가 술 사발을 들어 올리고 비강도 사발에 들어 있는 술을 깨끗이 비워 냈다.
몇 사발의 술을 비운 비강은 술 힘을 빌려 어렵게 입을 열었다.
“아저씨는 제가 아저씨의 제자들을 제압한 후 무림을 지배하기를 바라시는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아저씨.”
“네 짐작이 맞다.”
“아저씨…….”
비강의 목소리와 눈빛이 격하게 흔들렸다.
아저씨는 제자들의 죽음에 조금도 관심이 없단 말인가.
그 제자 중에는 연비강, 자신도 포함되어 있었다.
비강의 흔들리는 눈빛을 흘깃 응시하던 아저씨는 손수 항아리를 들어 술잔을 채웠다.
“네 아비는 그 당시에 백도제일인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강호 무림을 자신의 의지대로 바꿀 수 있었어. 하나 어리석게도 그 녀석은 협객으로 살기를 바랐지.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버렸고. 너도 그 길을 가려느냐?”
비강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아버지의 길이 옳았을까?
만약 자신이었다면 스스로 목숨을 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검을 들어 자신을 해하려던 자들을 모두 베어 버렸을 것이다.
조용히 술잔을 비운 아저씨는 다시 입을 열었다.
“강호 무림이 바둑판이라면 강호의 고수들은 바둑알이겠지. 바둑알인 네가 바둑판을 벗어나 바둑돌을 손에 쥔 자가 될 수 있겠느냐?”
“왜, 왜 저입니까? 아직까지 아저씨에게는 네 명의 제자가 더 남아 있지 않습니까?”
비강의 질문에 아저씨는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자신은 있느냐?”
자신이 없다.
시천세는 물론이고 남아 있는 삼천존조차 싸워 이길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아저씨의 저 말이 너무나 섭섭하고 잔인하게 들려왔다.
아저씨의 제자들과 싸워 이기든지 아니면 그들의 손에 죽으라는 뜻이 아닌가.
“그만, 그만 떠나겠습니다.”
비강은 술 사발 조용히 내려놓으며 몸을 일으켰다.
이곳에 더 있다가는 아저씨에 대한 좋은 기억도 사라지게 될 것만 같았다.
“그렇게 해라.”
아저씨의 허락을 받은 비강은 바닥에 엎드려 절을 올렸다.
“못난 저의 가족이 되어 주어 고맙습니다, 아저씨. 만수무강하십시오.”
바닥에 엎드려 절을 올리는 비강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렇게 보고 싶은 분이었건만.
채 하루가 안 되어 이렇게 스스로 그분을 떠날 것이라고는.
인사를 끝내고 짐을 챙긴 비강은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막 문을 나가려던 비강은 몸을 돌려 아저씨를 흘깃 쳐다보았다.
아저씨는 여전히 나무 그늘 아래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작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비강은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비강이 밖으로 나가고 난 후, 독고일의 입가에 푸근한 미소가 걸렸다.
“나도 가족이라고는 너밖에 없구나.”
술을 비운 독고일은 자신이 기거하던 기와집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후두둑, 후둑, 꾸지지직.
손바닥에서 일어난 부드러운 바람은 태풍보다 더한 강풍이 되어 순식간에 초가집을 휩쓸었다.
부엌에 있다가 황급히 뛰어나온 무진도는 그 광경을 보고는 입을 떡 벌렸다.
* * *
어떻게 죽림을 나왔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정신없이 달려 죽림을 벗어나 산을 빠져나왔다.
후우.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하늘을 올려다보며 길게 숨을 내쉰 비강은 자신의 병기를 숨겨 놓은 객잔으로 향했다.
객잔으로 돌아와 백파를 챙겨 말에 오른 비강은 무작정 길을 나섰다.
가슴 한가운데가 뻥 뚫린 것 같은 것이, 말이 어느 곳을 향하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며칠을 그렇게 말이 이끄는 대로 몸을 맡겼던 비강은 어렵게 정신을 차렸다.
말이 향하는 방향이 남서쪽인 것을 보니, 아마도 말은 호북을 향해 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 보아라.”
말 머리를 쓰다듬으며 길을 가던 비강은 한참 늦은 점심때가 되어서야 말을 멈췄다.
관도 옆에 자리 잡고 있는 허름한 객잔 앞에 말을 세운 비강은 말먹이를 부탁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비록 마을과 동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는 허름한 객잔이었지만 손님들로 붐볐다.
손님 중에는 특히 강호인들이 많았는데, 대부분 안쪽에 자리한 마당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