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 연비강 93화
무료소설 신마 연비강: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67회 작성일소설 읽기 : 신마 연비강 93화
제93화. 아저씨
쫘아악―!
검은 빽빽하게 들어찬 대나무들을 차례로 쪼개 냈다.
화아악…….
그리고 어느 순간 눈앞에 빛이 일며 죽림 사이로 작은 길이 하나 나타났다.
아…….
비강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강호를 많이 겪은 것은 아니었으나, 빽빽한 숲에서 길이 나타나리라고는 꿈에서조차 상상하지 못했다.
스륵, 스륵…….
비강은 죽림의 어둠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끝없이 이어진 길을 걷던 비강은 귓속을 파고드는 바람 소리와 흔들리는 대나무들로 인해 눈과 귀가 어지러워 잠시 걸음을 멈췄다.
숲을 통과하는 미세한 바람 소리는 마음을 편안하게 했고, 흔들리는 대나무들은 졸음까지 쏟아지게 만들었다.
흔들리는 대나무 사이로 보이는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던 비강은 멈췄던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한참을 들어가던 비강의 눈에 돌계단이 보였다.
계단을 걸어 올라간 비강은 검을 빼 들어 앞을 막고 있는 대나무들을 갈랐다.
후아아…….
어두웠던 숲이 밝아지고 눈앞에 굳게 닫힌 대문이 하나 나타났다.
그리고 그 대문 중앙에는 흉측한 마귀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비강이 손가락에 끼고 있는 반지의 모양과 흡사한 모습이었다.
삐걱…….
굳게 닫힌 문을 밀자 짐작과는 다르게 기이한 소음이 일며 문이 열렸다.
문 안쪽의 풍경은 바깥과 또 달랐다.
작게 지어진 기와집 서너 칸과 부엌 하나, 헛간 하나, 그리고 기와집을 둘러싼 텃밭에는 푸른 소채로 가득했다.
텃밭을 둘러보던 비강은 기와집을 향해 다가갔다.
쿵쿵쿵쿵―!
차갑기만 했던 비강의 가슴은 지금 터질 듯 두근대고 있었다.
설마 하는 기대감으로 숨을 쉬기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열려진 방문 틈 사이로 반듯하게 앉아 있는 사내의 얼굴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아…….
이미 돌아가셨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잊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잊지 않기 위해 하루라도 저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단정하게 묶은 검은 머리카락에 각진 턱, 우뚝 선 코, 사내다운 인상은 분명 기억 속의 그분이었다.
“아저씨…….”
아저씨는 예전과 조금도 다름없는 모습으로 방 안에 앉아 있었다.
“왔느냐.”
아저씨는 비강을 향해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그러나 비강은 조금도 섭섭하지 않았다.
그저 아저씨를 만나게 되어 반가울 따름이었다.
“살아 계셨습니까? 아저씨.”
한달음에 방 안으로 달려 들어간 비강은 바둑판을 내려다보고 있는 아저씨를 향해 넙죽 무릎을 꿇었다.
“비강이, 아저씨께 인사 올립니다.”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비강의 눈에서는 뿌연 눈물이 흘러나왔다.
“잘 컸구나.”
아저씨는 여전히 바둑판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예. 아저씨 덕분에 이렇게, 지금까지 살 수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아저씨 덕분이었다.
아저씨가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도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비강에게는 아저씨가 아버지나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아저씨.”
아저씨는 들여다보고 있던 바둑판을 한쪽으로 치워 놓고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밥은 먹었느냐?”
방을 나간 아저씨는 부엌으로 들어가 솥에서 밥을 푸고 남은 소채로 찬을 차렸다.
“배고플 터인데 얼른 먹거라.”
부엌 한쪽에 밥을 차린 아저씨는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바깥에 나와 서 있던 비강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다가 자리에 앉아 수저를 들었다.
소채를 찬으로 밥 한 그릇을 깨끗이 비운 비강은 큰독에 채워 넣은 물로 설거지를 끝냈다.
아저씨의 얼굴에서는 반가워하는 표정 하나 없었으나, 개의치 않았다.
원래 아저씨는 저런 모습이었으니까.
오히려 기억 속의 모습과 다른 점 하나 없는 것이 더한 기쁨으로 다가왔다.
비강은 아저씨가 들어가 있는 방 앞에 공손히 서서 머리를 숙였다.
“들어오너라.”
“예.”
비강은 얼른 방 안에 들어가 아저씨와 마주 앉았다.
그제야 아저씨는 비강에게 눈길을 주었다.
“묻고 싶은 것이 있다면 물어도 좋다.”
“아, 예.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아저씨.”
비강은 머뭇머뭇 그렇게 물었다.
강호에서 백리혈이라는 무시무시한 별호가 붙었으나 아저씨 앞에서는 여전히 아이였다.
“궁금한 것은 그게 전부이더냐?”
“……아저씨는 정말 신선이나 신 같은 그런 존재이십니까?”
그럼 무슨 말을 더 할까?
비강은 그저 아저씨를 만나 반가울 따름이었고 정체가 궁금할 뿐이었다.
“매일이 지금과 같았느니라. 또한 나는 신선이나 신 같은 것이 아니니라. 내가 신이었다면 죽음을 알고 있지는 않겠지.”
그럴 리가.
아저씨의 모습은 전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오늘은 그만 쉬어라. 피곤할 터이니.”
“아저씨, 저는 이제 강호를 떠나 아저씨와 함께…….”
비강은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던 작은 소망을 꺼내 놓았다.
“하면 천양의 원수는 갚지 않을 생각이더냐?”
“아?”
의외의 장소에서 너무 뜻밖에 듣게 된 말이라 비강은 적잖이 당황했다.
사부는 어떻게 풍천양에 관한 일을 알고 있단 말인가?
더군다나 풍천양이 아니라 천양이라니?
전부터 풍천양을 알고 있던 사람 같지 않은가.
‘설마…… 설마.’
너무 놀란 나머지 눈까지 부릅뜬 비강을 지그시 바라보던 아저씨의 입이 열렸다.
“내가 가르친 아이들이 여섯이었느니라.”
여섯.
여섯이라면 사패의 주인들과 시천세, 그리고 자신이었다.
그렇다면 시천세는 물론이고 사패의 주인들 전부 자신의 사형들이 아닌가.
비강은 멍한 얼굴로 아저씨를 바라보다가 불현듯 깨달은 것이 있는지 입을 열었다.
“역시, 아저씨가 바로 천마셨습니까.”
“네 짐작이 맞다.”
모든 것을 알게 된 비강은 혼란스런 나머지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강호 사패의 전쟁은 다름 아닌 바로 아저씨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아저씨가 가르친 제자들이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세상을 뒤엎고 새로운 세상의 주인이 된 것이다.
그리고 쫓겨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는 또 다른 제자와 손을 잡고 다시 세상의 주인이 되기 위해 또 다른 피를 흘리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강호인이 죽었고 앞으로 죽어 나가겠는가.
솔직히 강호인의 죽음은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그 죽음에 아저씨가 관련이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많이 놀란 것 같구나.”
아저씨의 표정과 목소리는 여전했다.
아저씨를 만났다는 흥분과 기쁨은 여전했지만, 어느샌가 분노라는 상반된 감정이 조금씩 자라나고 있었다.
비강은 억지로 감정을 추슬렀다.
오늘은 아저씨를 만난 기쁜 날이었다.
감정을 다스린 비강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제자들의 싸움을 보고만 있으셨습니까? 아저씨가 나섰다면 제자들이 싸움을 멈췄을 것이니, 지금과 같은 상황은…….”
“비강아.”
아저씨는 비강의 이름을 부르며 말을 끊었다.
“예.”
“바둑을 잘 아느냐?”
“아닙니다.”
아저씨는 옆으로 치워 두었던 바둑판을 앞에 내놓았다.
바둑판에는 흰 돌과 검은 돌이 가득했다.
비강도 바둑판을 살펴봤지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저씨와 사천존, 그리고 시천세의 관계 때문에 바둑판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러나 아저씨는 바둑판을 앞에 내어놓고는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바둑판 위의 흑돌과 백돌의 정세를 살피는 것도 아니었다.
가끔 밖으로 시선을 돌려 소채밭을 응시하기도 했고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는 것도 같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밖은 점점 어두워져 갔다.
* * *
밤이 깊었지만 비강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아저씨는 왜 이곳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일까. 왜 자신의 죽음을 위장하고 있을까.’
의문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스르르.
문득 바람이 흐르는 소리를 느낀 비강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자신의 잘못이다.
그때 뒤끝을 없앴다면 아저씨의 거처에 불청객을 들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바깥으로 나온 비강의 신형이 흐릿해졌다.
퍽! 커억!
어둠 속에서 외마디 비명 소리가 들리고 주변은 조용해졌다.
“죽이지 마라.”
그때 거처 안에서 아저씨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막 신선 노인의 목숨을 끊어 놓으려던 비강은 아저씨의 목소리를 듣고 힘을 주고 있던 왼손을 풀었다.
털썩.
비강의 왼손에 목줄을 맡기고 있던 신선 노인은 바닥에 힘없이 널브러졌다.
“죄송합니다, 아저씨.”
노인을 질질 끌고 와 마당 한쪽에 내려놓은 비강이 머리를 숙였다.
“방에 눕히고 보살펴 주어라. 상처에 쓸 약은 헛간에 있으니 가져다 쓰고.”
“예.”
도둑놈을 살려 주는 이유는 묻지 않았다.
아저씨가 그리 말했으니 따르면 되는 것이다.
신선 노인을 방 안으로 안고 들어온 비강은 노인을 침상에 눕혔다.
그리고 허벅지의 상처부터 살폈다.
“참으로 아름답지 않느냐.”
헛간에서 가져온 약초로 상처를 치료한 비강이 물그릇을 들고 밖으로 나왔을 때 아저씨가 불렀다.
아저씨는 마당 한쪽에 서서 하늘의 별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저 별들도 움직이지 않는 것 같지만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겠지.”
비강은 아저씨의 말속에 숨은 뜻을 언뜻 알아차렸다.
“아저씨가 이곳에 앉아 강호를 내다보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까?”
밤하늘을 향해 있던 아저씨의 눈은 비강에게 돌려졌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아저씨의 질문을 받은 비강의 얼굴은 서서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자신의 앞에 내놓은 바둑판의 의미를 깨달은 것이다.
‘그래, 그랬었어. 바둑판은 강호 무림을 뜻하는 것이었어.’
일그러지고 있는 비강의 표정을 바라보고 있던 아저씨의 입가에 가는 미소가 지어졌다.
태어나 처음으로 보는 매력적인 아저씨의 미소였다.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서늘한 미소였다.
비강은 말없이 아저씨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리고 또 다른 깨달음이 찾아왔다.
“제가 아저씨를 찾은 것이 아니라, 아저씨가 저를 부른 것이었군요.”
진정으로 숨고자 한다면 어느 누가 천하제일인을 찾을 수 있겠는가.
거기다가 비강은 너무나 쉽게 아저씨를 찾았다.
비강은 자신의 손가락에 끼어 있는 검은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이 반지가 저의 손에 들어온 것도 우연이 아니었군요.”
뿐만이 아니었다.
용 단주도 분명 아저씨와 무슨 연관이 있을 것이다.
아저씨는 지금까지 자신을 떠나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이유에 대해서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나는 너를 지켜보기만 했을 뿐, 부를 생각은 없었다.”
역시, 자신의 짐작이 맞았다.
섭섭함은 뒤로하고, 그 이유가 몹시 궁금했다.
“한데 어찌하여 저를 찾으셨습니까?”
“죽음이란 것이 너무 빠르게 나를 찾아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 말은 아저씨가 머지않아 죽게 된다는 뜻이다.
비강의 눈에 언뜻 슬픔이란 감정이 떠올랐다.
“나는 나를 대신할 다섯 명의 제자를 키워 냈다. 그들 중에 어느 누가 나를 대신해도 상관이 없었다. 제자 중에 가장 강하고 현명한 놈이 나를 대신할 테니까. 또한 그자는 자신을 대신할 또 다른 제자를 키워 낼 것이고.”
“그것 때문에 제자들로 하여금 강호를 피로 물들이셨습니까?”
비강은 언뜻 잠자고 있던 분노를 일깨웠다.
“너는 천하제일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그 말을 끝으로 아저씨는 방으로 들어갔다.
홀로 남은 비강은 아저씨처럼 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천하제일인이 도대체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