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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마 연비강 120화

무료소설 신마 연비강: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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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기 : 신마 연비강 120화

제120화. 여장부(1)

 

 

 

“비강이를 이곳으로 보내 주어라. 내가 스스로 움직여도 될 것이나, 앞날을 위해 용 단주가 그 일을 해 주어야 하느니라.”

“저를 어찌 아십니까?”

“아주 오래전에 용전웅이라는 청년과 잠깐 인연이 있었느니라.”

심장이 벌렁거리고 머리에서는 식은땀까지 흘렀다.

용전웅이라는 분은 자신의 할아버지였다.

오래전에 그분께서 이런 말씀을 남기셨다.

‘강호에는 신이 존재한단다. 나는 그분께 구명지은을 입은 덕분에 천수를 누릴 수 있게 되었지.’

그렇다면 바로 이분이 할아버지의…….

 

* * *

 

“그분께서 남기신 말씀은 없었습니까?”

용단주는 급히 상념을 떨쳐 버렸다.

“있습니다. 아쉽게도 이제 더 이상 저를 만날 일은 없다고 하시더군요.”

용중연은 착잡한 목소리로 말을 맺었다.

비강은 말없이 타오르는 불길만 바라보았다.

용중연도 말이 없었다.

“부탁이 있습니다, 단주님.”

이윽고 비강이 입을 열었다.

“말씀하십시오.”

“십만대산에 새롭게 근거지를 마련할 생각입니다. 그에 필요한 물자들을 단주님께서 전부 마련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 * *

 

약추완이 악추산을 불러들인 것은 늦은 저녁이 지난 후였다.

“부르셨습니까? 할아버님.”

“거기 앉아라.”

악추산이 자리에 앉자 약추완은 서랍에서 서책 몇 권을 꺼내 탁자 위에 내놓았다.

“여전히 무공 수련에 힘을 쏟고 있는 것이더냐?”

“예. 할아버님과 가문을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거짓말이다.

악추산은 지금 무공이 아닌 다른 일에 정신을 쏟고 있었다.

“그것을 가지고 그만 가문으로 돌아가거라.”

갑작스런 말에 악추산은 너무 놀라 멍하니 약추완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아직도 이곳에 남아 있고 싶은 것이더냐?”

“그, 그렇습니다. 할아버님.”

악추산이 악가의 가주가 되었음에도 중천에 남아 있는 이유가 있었다.

가문의 부흥을 위해서는 중천에 남아 공적을 세워 강호에 명성을 떨쳐야 했기 때문이다.

강호 무림에서 명성은 곧 권력과 부로 연결이 된다.

그러나 악추산은 아직까지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했고 강호에 명성도 드높이지 못했다.

백리혈 연비강을 추격할 때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면 명성을 드높였을지 모르나, 악추산은 아무런 활약도 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마음이 급한 악추산에게 약추완이 서책을 꺼내 들었다.

“살펴보아라.”

악추산은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서책 세 권을 차례로 펴 보았다.

그리고 서책의 책장을 넘기는 그의 손이 점점 경련을 일으켰다.

꿀꺽.

마른침까지 삼키며 악추산은 서책에 빠져들어 갔다.

약추완은 반 시진이 넘는 동안 아무 말 없이 기다려 주었다.

이윽고 악추산이 창백한 표정으로 서책을 내려놓았을 때, 약추완의 입이 열렸다.

“그동안 모아 놓은 무공비급 중에 가장 좋은 것만 고른 것이다. 너는 이미 북림의 림주였던 풍천양으로부터 무공을 사사받았으니 그것들을 대성하기에 무리가 없을 게다.”

북림의 주인, 풍천양이 조금 더 오래 살아 있었다면 악추산의 무공은 비약적으로 고강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죽어 이제 추산에게 무공을 가르칠 자가 없으니 스스로 깨우쳐야 했다.

“이곳에…… 이곳에 남아 무공을 연마하겠습니다, 할아버님.”

약추완의 얼굴에 은은한 노기가 떠올랐다.

“홍죽이라는 계집 때문이더냐?”

악추산은 시간이 있을 때마다 기루에서 주색잡기를 즐겼다.

요즘은 홍죽이라는 기녀에게 빠져 있었다.

약추완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이는 악추산을 향해 노기를 드러냈다.

“못난 놈! 그 홍죽이라는 계집이 벽사군과 많이 닮았다고 하더구나. 이름난 무가의 가주가 되어 어찌 그런 못난 꼴을 보이는 것이더냐! 네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다른 자들이 뭐라 하든 당연히 취해야 할 것이다! 이 할아비는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느니라!”

“죄…… 송합니다, 할아버님. 용서해 주십시오.”

악추산이 잘못을 빌자 약추완은 드러냈던 노기를 누그러뜨렸다.

“네가 이 무공비급에 있는 무공을 대성한다면 벽사군도 너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게야. 그 계집이 다른 자를 마음에 품고 있더라도 네가 원한다면 네 것으로 취해라. 하나 그전에 그만한 자격을 갖추어야 하느니라.”

자격을 갖춘다면 벽사군을 차지할 수 있을까?

숨겨 두었던 욕망을 그녀와 비슷한 얼굴의 기녀에게 풀고 있었지만, 갈증은 여전했다.

“벽사군은 자신만을 위한 새로운 조직을 만들었다고 하더구나.”

악추산도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

금편복(金蝙蝠).

오직 벽사군만을 위한 조직이었다.

“지금 같은 난세에 믿을 것은 오직 자신의 무공밖에 없느니라.”

약추완의 말을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악추산은 바보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 어느 누구보다 야비하고 집요했다.

“반드시 무공을 대성해 원하는 것을 제 손안에 넣겠습니다, 할아버님.”

“오냐. 이제 그만 나가 보아라.”

노기로 가득했던 약추완의 얼굴은 금세 흡족한 미소로 바뀌었다.

“준비가 끝나는 대로 가문으로 출발하겠습니다.”

 

* * *

 

후우……!

악추산을 내보내고 한숨을 돌린 약추완은 잠시 일에 매달렸다.

그러나 채 일각도 되기 전에 또 다른 자의 방문을 받았다.

벌컥!

“누구…….”

거칠게 문을 열어젖힌 약철빙은 보자기로 싼 몇 개의 보퉁이를 약추완의 책상 위로 던졌다.

터텅! 텅!

책상 위로 굴러떨어진 보자기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으헉!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더냐!”

책상에서 벌떡 몸을 일으킨 약추완은 약철빙을 향해 비명과도 같은 소리를 질러 댔다.

“순찰조의 조원을 살해한 구파일방과 육대세가의 조무래기들입니다.”

으아니……! 이 미친 것이!

챙!

괴성을 발한 약추완은 벽에 걸린 검을 빼 들었다.

그리고 검신은 순식간에 약철빙의 목을 파고들었다.

뚝…… 뚝…….

약철빙의 목을 파고들던 검이 멈추고, 그녀의 목에서 흘러나온 피는 검신을 적시다가 마룻바닥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얼굴에는 비웃음만 가득했다.

“무엇을 망설이시는지요? 부천주, 사위의 목을 벨 때처럼 내 목도 베어 버리셔야지요.”

으으으…….

약추완은 이까지 덜덜 떨며 약철빙을 노려보았다.

“조금 더 힘을 내 보세요.”

“너는…… 너는 언제 철이 들려고 그러는 것이냐? 언제까지 이 아비가 참아 주어야 하는 것이냐?”

“참지 마세요. 제발 부탁이니까.”

챙그랑…… 챙!

약추완은 들고 있던 검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만 나가라. 네 얼굴은 더 이상 보기 싫으니.”

“약가는 절대로 후손들을 남기지 못할 거예요.”

약철빙은 약추완에게 저주의 말을 남기고 방을 나갔다.

 

약추완은 이마를 감싸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연서문. 언제까지 나를 잡고 있을 것이냐…….”

 

* * *

 

‘오늘따라 왜 이리도 심란한 것인지…….’

잠자리에서 일어난 당백요는 겉옷과 검 한 자루를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이미 시각은 자정이 지나 사방은 고요한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시리도록 맑은 하늘 위에서 밝은 달과 수많은 별들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나 혼자 걷고 싶으니 너희들은 따라오지 마라.”

은밀히 뒤를 따르던 호위들이 물러나자, 그녀는 방향조차 정하지 않고 하염없이 걸었다.

 

얼마쯤 걸었을까, 바위들이 늘어선 곳을 지난 그녀의 눈앞에 깎아지른 절벽이 모습을 드러냈다.

절벽 아래쪽으로는 물이 흐르고 있고, 건너편에는 또 다른 바위산이 자리 잡고 있었다.

“여전히 아름답구나.”

심란했던 가슴은 어느새 진정되고, 흐릿한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떠올랐다.

그러나 그 미소는 언제 나타났냐는 듯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이곳이 마음에 들어 서쪽을 차지하지 않았느냐.”

바위들이 늘어선 곳에서 누군가 걸어 나와 당백요와 나란히 섰다.

“사형…….”

당백요의 입에서 시천세를 부르는 목소리가 흐릿하게 흘러나왔다.

“잘 있었느냐? 네 말대로 이곳은 정말 아름답구나. 예전에 전진이 이곳을 차지하고 있었다지?”

“이제…… 이제 저를 죽이러 오셨나요? 사형.”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인 시천세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토록 예쁜 사매를 감히 어느 누가 죽일 수 있겠느냐?”

“거짓말하지 마세요.”

크하하하하…….

시천세는 통쾌하게 웃어 젖혔다.

우웅…… 웅웅!

그의 웃음소리는 반경 십 장에 걸쳐져 있는 기막에 부딪쳤다.

“역시, 사매는 똑똑해.”

당백요의 속눈썹이 가늘게 흔들렸다.

“제게, 대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사형…….”

“운패의 머리를 가져오너라.”

가늘게 흔들리던 당백요의 속눈썹은 질끈 감겼다.

결국 이런 날이 오고야 말았다.

절대로 오지 말았어야 할 끔찍한 날이었다.

“왜…… 왜 내가 운패와 싸움을 벌여야 하죠?”

“그렇지 않으면 악이에게 너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할 테니까.”

“사형!”

우웅…….

당백요의 외침 소리도 기막에 막혀 스러져 갔다.

“사형은…… 사형은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우리끼리 서로 죽이고 죽게 만들려 하는군요.”

“내 손에 천양의 피를 묻혔으니 네 손에도 운패의 피를 묻혀야 공평하지 않겠느냐. 너에게도 야망이 있음을 벌써 알고 있었다. 나는 그 야망에 충실해 너희들보다 먼저 움직였을 뿐이다.”

당백요는 무서운 눈으로 시천세를 노려보았다.

“운패는 너희 중에 가장 정이 많은 녀석이었지. 그놈은 자존심이 강할지언정 야망은 없었다. 하나 너희들은 다르지. 그렇지 않느냐?”

“저도…… 저도 그 돼지처럼 이미 오래전에 야망을 접었어요.”

그러나 곧 시천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그녀의 동공은 물론이고 온몸까지 격하게 흔들렸다.

“사부께서 살아 계신다.”

“……!”

이게 갑자기 무슨 말인가?

당백요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시천세의 눈을 살폈다.

“그게 무슨! 정말, 정말 사부께서 살아 계셨던 건가요?”

“내가 직접 만나 뵈었다.”

“그, 그렇다면…… 사부, 사부님께서는 지금 어, 어디에 계시는 건가요?”

“백요야.”

시천세는 그녀의 이름을 불러 혼란스런 마음을 잡아 주었다.

“그분은 수백 년 전의 혈마이기도 했고, 무극천황이기도 했었다. 천마를 거쳐 그분이 우리를 제자로 받아들인 이유가 무엇인지 아느냐? 그분은 거짓을 말하지 않으셨다. 우리 중 하나가 뒤를 잇길 바라셨어.”

사부에 관한 이야기는 비밀로 하고 싶었다. 하지만 사제들에게만은 해 주고 싶었다.

“사부님은…… 사부님은…… 정말로 신이셨군요.”

사부님이 아주 오래 사신 분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오랜 세월을 살아온 분인 줄은 모르고 있었다.

한동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당백요의 눈빛이 어느새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래서 우리들을 전부 죽이고 사부님의 후계자가 되고 싶은 거로군요.”

“그래. 하나 너희들에게도 기회를 주마. 마지막까지 남은 녀석에게는 원하는 만큼 시간을 줄 것이다. 그리고 나를 넘어설 자신이 생겼을 때 찾아오너라.”

“좋아요. 사형의 제의를 받아들이지요.”

시천세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까지 가능하겠느냐?”

“이제 곧 봄이 올 것이니, 여름 전에 운패의 머리를 보실 수 있을 거예요.”

“기다리마.”

그 말을 끝으로 시천세는 당백요에게서 등을 돌렸다.

“잠깐. 묻고 싶은 것이 있어요, 사형.”

멀어져 가던 시천세의 걸음이 뚝 멈췄다.

“백리혈 연비강에게 왜 그리 집착했나요?”

순간 시천세의 눈은 무저갱처럼 깊숙하게 침전되어 갔다.

“내가 집착한 것으로 보이느냐. 만약 내가 네 말대로 집착을 했다면 그놈은 벌써 죽었을 거다.”

“……그렇군요.”

사나운 사형의 기세에 당백요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뭔가 자신이 모르는 것이 있다.

그런데 그것이 도통 짐작이 가지 않았다.

멈췄던 시천세의 발이 움직였다.

휘이잉…….

그리고 어느 순간 그의 신형은 바람과 함께 모습을 감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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