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 연비강 164화
무료소설 신마 연비강: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17회 작성일소설 읽기 : 신마 연비강 164화
제164화. 대혼란(3)
시천세의 발이 멈춘 곳은 성도가 아닌 호남의 흑산도였다.
그는 비강이 흑산도에 들어와 하오문주를 만날 것이란 확신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흑산도에 도착한지 사흘이나 지나갔지만 비강은 어디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시천세는 지금 화가 많이 나 있는 상태였다.
꿈틀거리며 밖으로 기어 나오는 화를 삭이려 애를 썼지만 분노는 더욱 커져만 갔다.
‘백요야…….’
한 팔을 잃은 사매가 죽었다.
자신에게 몸을 의탁하기 위해 지친 몸과 마음을 이끌던 사매가 죽었다.
북궁도에 의해 한 팔을 잃을 줄도, 그로 인해 연비강에게 죽임을 당할 줄도 몰랐다.
한 팔이 없는 사매는 더 이상 자신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부스스스스…….
시천세의 손에 있던 하얀색의 술잔은 가루가 되어 흘렀고, 그 안에 담겨 있던 맑은 술은 하얀 수증기가 되어 사라졌다.
술과 요리를 나르던 젊은 점소이는 시천세가 앉아 있던 식탁 앞을 지나가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술잔까지 내온 것 같은데 손님이 앉아 있는 탁자 위에는 술잔이 없었다.
“제가 깜박 잊은 것 같습니다, 손님.”
끄어어억…….
탁자 위에 새로 내온 술잔을 내려놓고 돌아서던 젊은 점소이가 갑자기 가슴을 움켜잡았다.
커억!
가슴을 움켜잡으며 괴로워하던 점소이는 피를 한사발이나 쏟아 내며 객잔 바닥에 쓰러졌다.
“아…… 아니…… 갑자기…… 이놈이…… 왜이래? 무이야. 무이야!”
당황한 객잔주인이 달려와 점소이를 안아 흔들었다.
하지만 이미 젊은 점소이는 숨이 끊어진 후였다.
쯧쯧…….
“급살을 맞았구먼.”
손님 하나가 혀를 차며 안타까워했다.
시천세는 젊은 점소이가 죽어 나자빠지자 얼른 마음을 추슬렀다.
젊은 점소이의 죽음이 애석해서가 아니라 잠시나마 자신을 제어하지 못했다는 자책 때문이었다.
은연중에 발산된 미미한 살기 하나가 재수 없게도 점소이의 몸을 관통한 모양이었다.
벌컥벌컥…….
단번에 술병을 비운 시천세는 탁자 위에 은자 한 냥을 던져놓고 객잔 밖으로 나갔다.
객잔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어진 넓은 길 한쪽에 자리 잡고 있었고, 그 길을 통해 여러 사람들이 오갔다.
오가는 사람들을 지켜보던 시천세의 신형이 꺼지듯 사라졌다.
“손님…… 거스름 돈…….”
때마침 황급히 밖으로 달려 나온 객잔주인은 사방을 두리번거렸으나, 방금 전에 객잔을 나간 손님을 찾지 못했다.
열대여섯쯤 되어 보이는 앳된 청년이 풀밭에 누워 서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앳된 청년의 주위로는 누런 소 수십 마리가 풀을 뜯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참으로 한가로워 보였다.
“중팔아!”
그때 들판 아래쪽에서 대여섯 명의 앳된 청년들이 뛰어올라왔다.
들판을 가로질러 뛰어 온 청년들은 누워 서책을 읽고 있는 청년 주위로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한여름이라 그런지 청년들은 아래는 허름한 속곳 한 장만 입은 채 벌건 상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중팔아, 뭐하냐?”
“그까짓 서책을 읽어 뭐하게?”
청년들의 말에 서책을 읽고 있던 청년이 일어나 앉았다.
“출세를 하려면 글 정도는 깨우쳐야지.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 줄 아냐?”
“모가지 달아날 소리 하지 마라. 당장 끼니조차 해결하지 못하는 주제에 출세는 무슨 출세야.”
“사람 일이란 모르는 거야. 그나저나 오늘도 일자리 못 구했냐?”
중팔이라는 청년의 물음에 다른 청년들은 고개를 푹 숙였다.
“오늘도 굶어야 할 것 같아. 나는 괜찮지만 동생들이 굶어 죽게 생겼어.”
“나도 너처럼 어느 집 하인으로 들어갔으면 좋겠다. 아니면 강호에 나가 낭인으로 살아가는 것도 지금보다 훨씬 나아보이고.”
“소문을 들으니 강호도 지금 개판이라더라. 무신으로 추앙받은 자들이 죽고 행방불명이 되는 마당에 우리 같은 것들이 끼어들 자리가 있겠냐?”
후우…….
“우리들도 소문은 들었어. 그래도 굶어 죽는 것 보다는 낫지 않겠냐?”
한숨을 푹푹 내쉬는 청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중팔은 문득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소들을 둘러보았다.
“저놈들 중 한 마리 잡자.”
중팔의 말에 청년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곧 후환이 두려운지 고개를 저었다.
“너는 어떻게 하려고? 주인 놈한테 맞아 죽을 텐데…….”
“소가 수십 마리인데 설마 한 마리 없어졌다고 알아보겠냐?”
“그런……가? 확실히 그렇기도 할 것 같아.”
기대에 찬 청년들의 표정에 중팔은 허리에 차고 있던 도를 끌러 그들에게 건넸다.
“적당한 놈으로 한 놈만 잡아.”
중팔의 허락이 떨어지자 청년들은 바로 실행에 옮겼다.
우어어엉!
구슬픈 황소의 비명 소리가 끝이 나자마자 청년들은 잡은 황소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가죽은 가죽대로 벗기고 고기는 고기대로 떼어 냈다.
뼈까지 추려낸 그들은 먼저 싱싱한 날고기로 배를 채우며 불을 피워 다른 고기를 구웠다.
중팔도 청년들과 어울려 날고기를 씹고 구운 고기를 입안에 쑤셔 넣었다.
“배불리 먹기는 먹었는데, 앞으로 어떻게 하냐?”
배를 채운 청년들은 그제야 앞으로의 일을 걱정했다.
“걱정하지 말라니까. 너희들만 비밀을 지킨다면 아무도 모를 거야. 얼른 고기를 나눠가지고 집으로 돌아가.”
중팔의 말에 청년들은 각기 고기와 뼈를 챙겨 들었다.
“얼른 가봐.”
“괜찮겠냐? 중팔아.”
“괜찮아. 비밀만 지켜 줘.”
“고맙다. 정말 고맙다. 다음에 네가 원한다면 내 목숨이라도 떼어 줄게.”
청년들은 중팔에게 머리까지 조아렸다.
그들이 돌아가고 난후 중팔은 다시 풀밭에 누워 서책을 읽었다.
“중팔아!”
반 시진이 지난 후 들판 아래쪽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워 서책을 읽고 있던 중팔은 깜짝 놀라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풀밭은 소를 잡을 때 흘린 피로 인해 온통 붉은색인데다, 풀밭 한쪽에는 소 엉덩이 살과 꼬리 가 남아 있었다.
청년들이 중팔을 위해 남겨 둔 것이었다.
중팔은 얼른 고기를 풀숲으로 던져 버리고, 붉은 피로 얼룩진 풀밭을 발바닥으로 비볐다.
하지만 발바닥으로 비벼 사라질 핏자국이 아니었다.
당황한 중팔은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소꼬리를 들고 갈라진 바위를 향해 뛰어갔다.
그리고 갈라진 바위틈으로 소꼬리를 집어넣은 그는 여느 때처럼 보이기 위해 풀밭에 누워 서책을 읽었다.
곧 삼십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사내가 중팔이 누워 있는 곳에 도착했다.
“소는 돌보지 않고 뭐하는 게야?”
사내가 꾸짖자 중팔은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하게 머리를 숙였다.
“잠시 서책에 정신이 팔려 총관 어른께 무례를 범했습니다.”
“하인 놈이 글을 알아 뭐하게? 에잉…… 한심한 놈.”
중팔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총관은 푸른 풀밭에 얼룩진 핏자국을 발견했다.
킁킁…….
냄새를 맡아보니 비릿한 피 냄새가 확실했다.
“아…… 아니, 이게 무슨 냄새야?”
당황하기는 중팔도 마찬가지였다.
“초, 총관어른. 다름이 아니라 소 한 마리가 저기 저 절벽 너머로 들어갔습니다.”
총관은 중팔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과연 그의 말대로 절벽으로 이어진 바위틈에 소꼬리가 걸려 있었다.
그러나 이름 있는 가문의 총관은 그리 어리석지 않았다.
“소 한 마리가 저곳으로 넘어갔다 이 말이렸다.”
총관은 험한 바위틈을 밟고 올라가 그 너머까지 확인했다.
소꼬리가 바위틈에 끼어 있었으나, 그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순간 총관의 눈에 살기가 감돌았다.
소 한 마리 값은 저런 놈들 열 명과 맞바꾼다 해도 부족했다.
바위틈에서 내려온 총관은 풀밭을 나뒹굴고 있는 도를 집어 들었다.
“왜…… 왜 그러십니까?”
중팔이 어수룩한 표정으로 물었다.
챙!
도집에서 도가 뽑혀 나오며 붉은 소피가 묻어 있는 도신이 드러났다.
“이래도…… 나를 속일 테냐?”
“소, 소인은 총관어른께서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중팔은 끝까지 잡아뗐다.
하지만 총관은 거저 얻은 직책이 아니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일, 이, 삼…….”
총관은 풀을 뜯고 있는 소들의 숫자를 일일이 세기 시작했다.
“팔십사, 팔십오, 팔십육. 가문의 소가 정확하게 팔십칠 마리인데, 팔십육 마리밖에 없구나.”
“초…… 총관어른.”
중팔은 당황했다.
설마 총관이 소들의 숫자까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퍽! 퍽! 퍽!……!
어이쿠! 억! 악!……!
총관은 도신으로 중팔을 두드려 패기 시작했다.
“이 도둑놈의 새끼가 감히 이 어르신을 속이려고 해? 어디 한번 죽어 봐라.”
도신에 온몸을 두드려 맞던 중팔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총관의 팔목을 잡아 비틀었다.
어억!
“아니…… 이 새끼가? 놔라, 놔! 이 쌍놈의 새끼야! 이거 안 놔?”
팔이 뒤틀린 총관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저항했지만 중팔의 힘을 이겨 내지 못했다.
중팔은 총관의 다리를 걸어 쓰러뜨린 다음 몸 위에 깔고 앉아 주먹을 퍼부었다.
어이쿠!
“중팔아! 그만! 그만해라! 내가 잘못했다!”
주먹질을 못이긴 총관이 사정을 하자 중팔은 도를 집어 들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들판을 가로질러 뛰었다.
이제 곧 가문의 하인들이 그를 잡으러 올 것이다.
그들에게 잡힌다면 사지가 멀쩡하게 살아남을 수 없다.
“도둑놈 잡아라! 소도둑놈이 저기 도망친다!”
도망치는 중팔의 뒤로 총관이 고래고래 고함을 치며 뛰어갔다.
나무 그늘에 앉아 건포로 배를 채우던 비강은 이곳에서 일어난 상황을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지켜볼 수 있었다.
본래라면 헐벗은 앳된 청년들이 소를 잡을 때쯤 자리를 떠야 했으나, 그 뒤가 궁금해 남아 있었다.
결국 중팔은 벗들의 죄까지 자신이 짊어지고 도망을 쳤다.
“재미있는 놈이야.”
헐벗고 굶주린 이들이 넘쳐 나는 세상이었다.
내일이라도 당장 민란이 일어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다.
그렇기에 굶주림에 지친 자들은 먹고살기 위해 칼 한 자루만 차고 강호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대다수가 살벌하고 잔인한 칼날 아래 덧없이 스러져 갔다.
잠시 휴식을 취했던 비강은 북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남쪽에서 호남으로 들어오는 입구에는 중천의 고수들이 눈에 불을 켜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는 남쪽 밑으로 깊숙이 내려와 뒤에서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저들을 겁내서가 아니라 하오문주의 안전을 위해 조심해야 했다.
***
“백리혈이 살아 있었다는구먼.”
“나도 그 소문은 들었네. 검신이 어찌하여 백리혈을 살려 보냈는지 그 이유가 궁금하이.”
“나는 그것보다 서패의 주인인 신후가 어디에 있는지가 더 궁금하네.”
“그것도 그렇지. 이거 이러다가 강호에 큰 전쟁이나 일어나지 않을지 모르겠어.”
거리를 걷는 강호인들마다 서패의 일과 백리혈의 일을 수군거렸다.
시천세는 이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나가는 강호인들을 전부 쳐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마을 중심부에서 벗어나 강을 끼고 있는 음침한 거리로 접어든 그는 주저 없이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진한 화장을 한 나이 든 창기들과 흉악한 인상의 사내들이 즐비한 거리는 여느 때와 다름이 없었다.
“거기. 가진 것이 있으면 전부 내놓고 들어가.”
술이 거나하게 취한 사내 하나가 비틀비틀 걸어오며 시천세에게 시비를 걸었다.
시천세는 사내를 무시하며 걸었다.
“아니, 이 새끼가…….”
커어억!
뒤를 쫓으려던 사내는 입으로 핏덩이를 쏟아 내더니 땅바닥에 고꾸라졌다.
그러자 음습하고 어두운 골목 안에서 학창의를 입고 있는 노인이 걸어 나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중천의…… 아니, 강호의 주인을 뵙습니다.”
시천세는 노인의 인사조차 받지 않았다.
어둡고 긴 골목 안으로 들어간 그는 돌계단을 밟고 아래로 내려갔다.
폭이 넓은 수로가 나타났고, 그 수로 앞에는 작은 배한 척이 대기하고 있었다.
“어서 오르십시오.”
시천세는 아랑곳없이 강물을 향해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찰박, 찰박…….
강물 위를 걸을 때마다 가죽신과 부딪치는 강물이 은은한 파장을 만들어 내며 퍼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