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 연비강 182화
무료소설 신마 연비강: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465회 작성일소설 읽기 : 신마 연비강 182화
제182화. 정체가 밝혀지다(3)
흔한 도자기 하나 없는 검소한 방 안에 비강과 주동이 마주 앉았다.
그들 사이에는 탁자가 놓여 있었는데, 탁자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요리와 술병들이 놓여 있었다.
쪼르르르…….
비강이 먼저 술병을 들어 주동의 잔에 술을 채우고 자신의 잔에도 술을 채웠다.
주동은 말없이 술을 채운 술잔만 응시했다.
그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들어.”
비강이 술잔을 들어 올렸지만 주동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에 비강은 먼저 잔을 비우고 술병을 내밀었다.
“마시기 싫으면 내 잔에 술이라도 채워 주든지.”
주동은 말없이 술병을 잡아 비강의 잔에 술을 채웠다.
술을 채우고 술병을 내려놓은 주동이 물었다.
“양조와는 어떻게 만나게 된 겁니까?”
“양조?”
“그 아이의 이름이 양조라 하더군요.”
“아, 그런가.”
너무 어이가 없는지 주동은 비강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제 보니 이 사람은 아이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지 않은가.
“좋은 얘기는 아니야.”
“알고 싶습니다.”
“계모에게 심한 학대를 당하고 있었어. 아이의 아비는 병이 들어 누워 있었고. 나는 아이에게 네가 들고 있는 단검을 선물해 계모의 학대를 중지시켰지.”
하아…….
설마 그 아이에게 그런 과거가 있을 줄은 몰랐다.
“양조는 평생 그 일을 잊지 못할 겁니다.”
“그럼 계모에게 맞아죽게 내버려 두어 야 했나?”
주동은 저도 모르게 술잔을 비웠다.
크으…….
쓰다.
강호에 나와 술을 몇 번 마셔봤지만 오늘처럼 술이 쓴 적은 없었다.
저 사람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주동이 술잔을 비우자 비강은 그의 잔에 술을 채웠다.
술이 또 비워졌다.
주동은 연거푸 술잔의 술을 비웠다.
“안주도 먹어. 속 버리니까.”
“그때 왜 저를 죽이지 않으셨습니까?”
“별거 없어. 그냥.”
비강은 솔직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주동이 북궁도와 닮아 살려 주었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이번에는 비강이 연거푸 술잔을 비웠다.
주동은 조용히 빈 잔에 술을 채웠다.
“술을 좋아하시는군요.”
“그렇게 보이나? 사실 별로 좋아하지 않아. 요즘 술맛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기는 하지만. 하나 묻지. 왜 저 아이에게 호의를 베풀었나?”
“별거 없습니다.”
비강과 똑같은 대답이었다.
그러나 술잔을 비운 주동은 자신의 대답을 바꿨다.
“저와 같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아무도 없는 아이였으니까요.”
“중천에 동료들이 있지 않나?”
“나왔습니다. 아마 그들은 제가 당신의 손에 죽은 줄 알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원래부터 그들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항상 옆에 있었기에 같이 움직였을 뿐입니다.”
주동의 잔에 술을 채워 주려던 비강은 곧 술병이 비었음을 알아차렸다.
다른 술병을 들어 잔을 채운 비강이 물었다.
“어떻게 그들과 함께하게 되었나?”
주동은 숨기지 않고 지난날의 일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정말 똥구멍이 찢어질 정도로 가난한 집안이었습니다. 굶기를 밥 먹듯 했지만 우리 형제들은 무척 행복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한데 어느 날이었습니다…….”
길고 긴 이야기를 끝낸 주동이 비강의 눈을 쏘아보았다.
“당신 같은 사람이 나 같은 사람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하하하…… 아하하하하…….
비강이 시원스런 웃음을 터뜨리자 주동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제 얘기가 그렇게 웃깁니까?”
“아니. 그게 아니야. 너는 낯선 자들에게 팔려 갔지만 나는 어미에게 죽었거든.”
크하하하하…….
대소를 짓고 있는 비강을 노려보던 주동이 눈을 부릅떴다.
이게 무슨 말일까?
어미가 죽였다니?
한참을 웃던 비강은 술잔의 술을 비우고 스스로 술을 채웠다.
“이제 어디로 갈 생각이냐?”
주동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어려서부터 배운 것이라고는 칼질밖에 없었다.
마동에 들어가 살고자 했으나, 그곳에도 딱히 생계를 이어 나갈만한 일거리가 없었다.
겨우 생각한 것이 몇 가지 알고 있는 약초나 캐 팔거나 사냥으로 연명하는 수밖에는.
“이곳에서 살아.”
“네?”
“이곳에서 살아 봐. 나중에라도 마음에 안 들면 떠나도 좋으니까.”
“제가 이곳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도움이 되고 안 되고는 천천히 생각해.”
이곳에 며칠이라도 있어 볼까?
주동은 마음이 한결 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제야 식어가고 있는 안주가 눈에 들어왔다.
젓가락을 들어 고기 안주를 한 점 집어먹으니 갑자기 배까지 고파진다.
그러고 보니 아이와 함께 몇 끼 굶었다.
안주를 마구 집어먹던 주동은 술잔을 기울이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비강을 쳐다보았다.
“그 어미는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죽여야지.”
약하림은 서신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서신을 잡고 있는 그녀의 두 손에 경련이 일었다.
그 아이가 살아 있었다.
그것도 몇 번이나 보았고 대화도 나눴었다.
그런데 알아보지 못했다.
그 아이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 아이는 아직까지 어미가 누구인지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알고 있었다면 벌써 이 어미를 찾아와 아비에 대해 물었을 것이고, 어미를 원망했을 것이다.
만나고 싶다.
아들과 만나 지난 일에 대해 용서를 빌고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중천으로 출발할 것이니 준비를 서둘러줘요.”
가인들은 가모 약하림의 지시에 충실했다.
마차를 준비하고 시녀들에게 철저한 교육을 시켰다.
가모를 호위할 가인들도 가려 뽑아 출발 준비를 마쳤다.
하지만 악가 장로들은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모가 중천으로 향하는 연유도 모르겠거니와 동천 남궁악으로 인해 무가와 무문들이 전부 몸을 사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천의 주인이 천하제일인이었을 때에는 악가의 문지방이 닳도록 몰려들었으나, 동천의 남궁악이 중천을 함락시킨 이후로는 줄을 잇던 손님들의 발길이 뚝 끊어졌다.
하지만 악가는 이미 약가와 한 몸이나 다름이 없었다.
“가모, 부천주를 찾아가려는 연유나 말해 주시오.”
“꽤 오랫동안 뵙지 못했기에 인사차 방문하는 것뿐이에요. 뭣들 하느냐? 어서 출발하지 않고.”
천연덕스러운 말로 장로들을 뿌리친 약하림은 가인들을 호령해 중천으로 출발했다.
약하림이 중천으로 출발한 다음 날 약가의 가인들이 악가를 찾아왔다.
“천하제일 무가인 약가가 악가에 협조를 요청합니다. 약가는 강호의 협의와 도리를 지키기 위해 마왕 백리혈에 대한 추격에 나섰습니다. 악가 또한 약가와 흥망성쇠를 같이 하는 가문이니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악가는 약가의 요구를 거부하지 못했다.
곧 악가의 모든 가인들을 풀어 마왕 백리혈의 추격에 나섰다.
십만대산은 아이 양조에 있어 꿈에 그리던 곳이나 다름없었다.
또래 아이들이 수십 명이나 되어 함께 뛰어놀기 좋았고 끼니 때가 되면 밥이 나왔으며 편안하게 잠을 집도 있었다.
물론 혼자 사는 집은 아니었으나, 그 집에는 자신처럼 고아들이 많아 한밤중에도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그렇게 대엿새 동안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던 양조는 문득 주동을 만나고 싶었다.
말수가 적은 사람이기는 하지만 언뜻언뜻 느껴지는 따뜻함이 아버지와 닮았기 때문이었다.
마을을 나온 양조는 신이 살고 있다는 산 중턱으로 걸어 올라갔다.
이곳에 들어온 첫날 저곳에 올라가보았지만, 그 후로는 감히 그곳으로 올라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마을 사람들은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는 전각들을 신성시했다.
“상제(上帝)의 미움을 받아 하계로 내려오신 일월성신께서 저곳에 기거하고 계시니라. 그러니 너희들은 절대 저곳에 올라가지 마라. 행여 일월성신의 노여움을 살 수 있음이니.”
마을 어른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었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이곳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양조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허허허…….
“녹원선인께서 하신 말씀이니 틀림이 없을 게야. 더구나 저곳에는 신녀도 계시니라. 그분 또한 하늘의 신인이신데 일월성신과 함께 하계로 내려오셨느니. 그분께서는 우리 하찮은 인간들의 지난날과 앞날을 말해 주셨고 조금도 틀림이 없었다. 그러니 너희들은 절대로 저곳에 오르지 마라.”
마을 어른들의 말에 아이들은 전부 겁을 먹었으나 양조는 달랐다.
다른 아이들과 달리 저곳에 가 본 적이 있었고 저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도 만났다.
허억, 헉…….
가쁜 숨을 몰아쉬며 산을 오른 양조는 아무도 없는 연무장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서 누군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얘야,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그때 얼굴이 흉측하게 생긴 노인 하나가 나타났다.
양조는 노인의 얼굴을 보자마자 겁을 먹었다.
지렁이처럼 기다란 흉터가 얼굴 가득 그어진 노인은 꿈에 나올까 봐 무서운 모습이었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담노의 물음에 겁을 잔뜩 집어먹고 있던 양조가 어렵게 대답했다.
“야…… 양조라고 합니다.”
“양조라…… 옳거니 네 녀석이 내 단검을 가지고 온 바로 그 녀석이로구나.”
이미 비강에게 들어 저간의 사정을 모두 알고 있던 담노가 웃으며 친근함을 표시했다.
하지만 그 친근함이 양조를 더욱 두렵게 만들었다.
“두려워하지 마라.”
양조는 담노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조금 안심이 된 듯 물러나던 발걸음을 멈췄다.
“혹시 주동을 만나러 왔느냐?”
“예.”
양조는 자신이 바라던 말이 나오자 바로 대답했다.
허허…….
“주동은 십만대산을 둘러보러 나갔으니 저녁때나 되어야 돌아올 것이다.”
“……네.”
양조는 축 처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담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양조를 지켜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주인이 관심을 준 아이이니 뭔가 특별한 것이 있을 것이다.
“따로 할 일이 없으면 주동이 돌아올 때까지 나와 같이 있자꾸나.”
양조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싫다고 대답을 해야 하는데 차마 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담노도 양조의 속내를 알고 있었지만, 쉽게 내려보낼 생각은 없었다.
“먼저 저곳부터 가보자꾸나.”
담노는 아이를 병기고로 이끌었다.
무공에 관심이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삐걱…….
병기고의 문을 열자 어둠이 걷히며 벽에 걸린 병기들과 탁자 위에 놓인 병기들이 눈으로 들어왔다.
검, 도, 창, 극, 편, 궁, 암기 같은 것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와아…….
언제 겁에 질려 있었냐는 듯 양조의 입에서 환성이 터져 나왔다.
“골라봐라. 하나 정도는 네게 선물로 줄 수 있으니.”
“정말 제게 주실 거예요?”
양조가 좋아라하며 물었다.
“약속하마. 어서 골라봐라.”
양조는 바로 병기고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검과 도를 만져 보기도 하고 창대를 쓸어 보던 양조의 눈에 기이한 병기가 잡혔다.
아니, 기이한 병기들이었다.
그것들은 나무막대에 걸려 있었는데 동그랗게 생긴 쇠테였다.
원형의 쇠테는 바깥쪽으로 날이 서 있었는데 아이의 눈에는 처음 보는 병기였다.
양조가 동그란 쇠테에 관심을 보이자 담노는 조금 곤혹스러웠다.
“이건 뭐지요?”
바로 이런 질문이 나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담노조차 저 병기의 이름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용 단주가 새외에서 들여온 것인데 저 병기의 이름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오직 용 단주와 비강밖에 없었다.
“차…… 차, 구…….”
차, 뭐라 한 것 같은데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양조가 자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자 담노는 더욱 곤혹스러웠다.
“이곳에서 뭐하고 있습니까? 담노.”
그때 마침 등 뒤에서 비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살았다.’
담노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렸다.
“어서 오십시오.”
비강은 담노의 인사를 받으며 병기고 안을 흘깃 쳐다보았다.
병기고 안에서는 아이 양조가 둥그런 쇠테 하나를 들고 있었다.
“챠크람이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