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 연비강 17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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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04회 작성일소설 읽기 : 신마 연비강 178화
제178화. 은혜는 죽음으로
시천세는 중천을 되찾았으나 문밖으로 일절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수십일 동안 어두운 회의실에 앉아 지냈다.
그렇게 수십 일이 지나 겨울이 다가오자 종예는 어렵게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시천세는 여전히 의자에 앉아 있었다.
“주공, 종예입니다.”
“아, 들어왔으면 앉아.”
시천세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종예는 오히려 그런 시천세가 더욱 어렵고 두려웠다.
차라리 화를 내면 기분이라도 알아챌 수 있을 터인데,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으니 지금 어떤 상태인지 도무지 알아볼 수 없었다.
“괜찮으십니까? 주공.”
종예가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괜찮냐고? 당연히 괜찮지. 너는 내가 미쳐버리기라도 했다면 좋아했을 것 같구나.”
“무슨 그런 말씀을…… 절대 아닙니다.”
크하하하…….
종예가 안절부절 당황하는 모습에 시천세는 대소를 터뜨렸다.
“농담이다. 잠시 좀 생각할 것이 있었어.”
수십 일을 잠시라고 하는 시천세는 확실히 이상했다.
“생각할 것이라니…… 무엇을 생각하고 계셨습니까?”
“아. 별거 아니야. 남궁악 그놈을 어떻게 처리할까를 고민하고 있었지.”
그제야 종예는 안심했다.
시천세는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그놈은 지금 뭐하고 있나?”
“이상하게 아무런 움직임이 없습니다. 동천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럴 리가…….”
두려워하던 사형을 눌렀으니 마땅히 강호를 떠들썩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렇게 해야 더 많은 고수들이 몰려들 것이고 강호의 인심이 쏠릴 것이다.
흐흠…….
시천세는 다시 생각에 잠긴 듯 손으로 턱을 고였다.
종예는 그런 시천세를 걱정했으나 다행스럽게도 그의 고심은 그리 길지 않았다.
“남선은 어떻게 되었지?”
“예. 동천의 고수들이 완전히 접수했습니다. 하나 다행스럽게도 그곳의 신임총관이 우리가 심어 놓은 자입니다.”
“좋아. 서패는?”
“석장이 맡아보고 있습니다. 총관으로 있는 공의란 자가 일을 잘 처리하고 있습니다.”
“좋아. 무림맹은?”
“움직임이 없습니다.”
“영리한 놈들이로군. 약추완은 무얼 하고 있느냐?”
종예가 안색을 찌푸렸다.
“주공. 그놈은 도무지 쓸모가 없습니다. 차라리 일찍 베어버리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크크크크크…….
시천세는 짓궂게 웃었다.
“그 쓸모없는 놈이 거느리고 있는 수하들이 얼마나 되는지 아느냐? 또한 약가에 협력하고 있는 가문과 무가가 얼마나 되는지 알고 있느냐?”
종예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시천세의 말대로 이 중천 안에 약추완을 따르는 자는 절반이 넘었다.
“그놈은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하지. 가끔 위협만 가해 준다면 내게 충성을 다할 놈이야. 남궁악이 이곳을 함락시켰을 때도 그놈은 나를 배신하지 않았어. 그것만으로도 놈은 충분히 내게 충성을 다했다고 할 수 있겠지.”
시천세가 약추완에게 후한 점수를 주자 종예는 입맛만 다셨다.
약추완이 충성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든지 등에 칼을 꽂을 수 있는 놈이 바로 그놈이었다.
“황옥은 어디에 있느냐?”
“연비강의 종적을 추격하다가 얼마 전에 성 안으로 들어와 쉬고 있습니다. 한데 석장이 주공께 전서를 보냈는데 마동의 동주와 우열을 가리고 싶답니다.”
쯧쯧……
“정신 나간 놈.”
시천세는 혀를 차며 그 일을 못마땅해 했다.
“허락하시지요. 동주 마적강은 살귀나 마찬가지라 힘으로 눌러 주어야 합니다.”
종예는 석장의 편을 들어 허락을 구했다.
“너는 둘 중에 누가 더 강할 것 같으냐?”
“석장이 조금 더 강할 것입니다.”
“틀렸다. 놈이 석장보다 더 강해. 마적강이라는 놈은 나 때문에 억지로 참고 있는 것뿐이다. 마적강에게 전서를 보내 만약 앞으로도 이런 불미스런 일이 발생한다면 목을 베어버릴 것이라 전해.”
마적강이 석장보다 더 강할 것이라는 시천세의 말에 종예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석장과 그녀는 그리 큰 실력 차가 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마적강을 너무 경계할 필요는 없어. 그놈은 치명적인 약점이 있으니까.”
“치명적인 약점이 뭡니까?”
“그놈은 수명이 짧아.”
종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봐도 마적강이 병에 걸린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일찍 죽을 것 같지도 않았다.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내년 봄이나 여름쯤이면 알게 될 거다.”
내년 봄이나 여름쯤에 마적강이 죽는다는 말인가.
종예가 그에 대해 물으려 했지만 시천세는 이미 의자에 등을 기댄채 눈을 감고 있었다.
“물러가겠습니다.”
***
“이십여 년 전에 하북에 있는 연가에서 비강이라는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 가문은 무가가 아닌 유학자의 가문이었는데 역모에 연류가 되어 멸족을 당했다고 합니다. 한데 연가의 먼 친척이 연비강이라는 아이만은 멸족을 당하기 전에 빼돌렸다는 소문이 떠돌았던 적이 있습니다.”
남궁악은 영파의 보고를 묵묵히 듣기만 했다.
“이십여 전 강호의 가문들 중에 연가가 있었는데 가주의 이름은 연서문이었고, 아들의 이름은 연월이었습니다. 강호의 고수들이 황곡에 대한 공격을 결의할 때 오직 그자만이 그것을 거부해 장인이었던 약추완의 손에 목이 달아났다고 합니다. 결국 연가는 멸문을 하게 되었는데 연월이라는 아이는 극독에 중독된 탓에 그때 죽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남궁악도 연서문에 관한 이야기는 들어 알고 있었다.
황곡의 고수들과 강호에 출도 했을 때 그 소문을 들었고, 연서문의 죽음을 애석해 했다.
듣자 하니 연서문은 그 누구보다 협객이라 했었다.
비록 고루하기 그지없는 자였으나 강호 전체를 적으로 돌리면서까지 황곡의 편을 들었으니 어찌 그의 죽음이 안타깝지 않겠는가.
“계속해.”
“예. 약 삼십 년쯤 전이라고 합니다. 멀리 사천에 연가가 있었는데 막 태어난 아들의 이름이 연송의였다 합니다. 당가의 눈 밖에 나 멸문을 당했는데 갓난아기였던 연송의의 시신은 없었다고 합니다.”
한시진이 넘게 연가에 관련이 된 일들을 전부 읊은 영파가 책자를 접었다.
그 책자는 동천에 있는 하오문의 잔당들이 조사해 영파에게 넘긴 것이었다.
“누가 연비강 같으냐?”
“모르겠습니다.”
영파의 대답이 바로 남궁악의 속내였다.
남궁악은 연월을 의심했었다.
연월이란 아기가 운 좋게 살아남아 사부와 인연을 맺고 강호에 출도 했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연비강을 연월이라 단정 짓기에는 걸리는 것이 너무 많았다.
우선 연비강이 정말로 연월이라면 약추완은 벌써 죽었어야 했다.
아주 어릴 때의 일이라 기억에 없다고 하더라도 연이라는 성을 쓰는 것을 보면 가문에 대해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북궁도의 죽음 때문에 서패를 그 지경으로 만들어 놓은 놈이 아버지의 원수인 약추완을 아직까지 살려놓을 리 없지.’
또 다른 것은 연월의 어머니였다.
연월의 어머니는 아직 살아 있고, 악가에 재가를 해 악추산을 낳았다.
연비강이 연월이라면 분명히 어머니를 찾을 것이었다.
하지만 연비강은 악가의 어머니를 찾지 않았다.
아니, 찾기는 찾았었다.
바로 악가의 가주를 죽인 자가 연비강이었으니 충분히 의심을 해 볼만 하지만 그때는 천마의 도 때문에 그런 일이 발생했다고 판단하는 것이 옳았다.
가장 크게 걸리는 점은 바로 사부였다.
사부는 연비강을 제자가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연비강은 십여 세 때부터 군에서 굴러먹었다.
아무리 무공이 남다르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 화살과 칼이 날아올지 모르는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것은 순전히 운이 좋아서였다.
그렇게 따진다면 연비강은 사부의 말대로 제자가 아니었다.
늑대나 이리처럼 들판에 풀어 놓은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방치라 할 수 있었다.
‘그놈과 사부가 어떤 인연으로 맺어졌는지 도무지 모르겠어.’
“연비강이라는 놈은 애초부터 연 씨 성을 쓰는 놈이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영파의 의견에 남궁악도 고개를 끄덕여 동조했다.
그때 문득 남궁악은 회의실 문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잠시 후 밖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병천이 천주께 뵙기를 청합니다.”
“들어오라.”
남궁악의 허락이 떨어지자 문이 열리고 여병천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남궁악을 향해 큰 절을 올리고 넙죽 엎드렸다.
“무슨 일로 왔느냐?”
“감히 궁금한 일이 있어 천주께 묻기를 청합니다.”
남궁악은 대번에 눈살을 찌푸렸다.
“산채의 일은 잘되고 있느냐?”
“예. 제자가 열과 성의를 다하고 있습니다.”
“십만대산의 동정은 어떠하더냐?”
남궁악은 말을 돌려 연비강의 일을 물었다.
“백리혈 연비강이 일월신교의 교주가 되었습니다.”
응?
“방금…… 뭐라고 했느냐?”
남궁악은 자신의 귀를 의심해 다시 물었다.
“연비강이 일월성신을 모시는 일월신교의 교주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크흐흐흐…… 크하하하하……!
잠시 놀란 눈으로 여병천을 내려다보던 남궁악은 크게 웃어젖혔다.
“이럴 수가 있나? 세상에 이럴 수가…….”
남궁악은 대번에 연비강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연월. 그놈의 본명이 연월이었어. 이제 보니 연서문의 아들이었군.”
옆에 있던 영파가 의아해 하며 물었다.
“어찌 그런 생각을 하셨습니까?”
크크크크…….
남궁악은 웃기만 했다.
연비강이라는 놈이 사교를 만들어 굳이 일월신교라는 명칭을 붙일 리 없었다.
독고일은 사부의 이름이었고, 연월은 연비강의 본명일 것이다.
사부의 이름과 자신의 이름을 따 일월신교라 한 것이 틀림없었다.
한참을 웃던 남궁악이 미소를 머금으며 여병천을 내려다보았다.
“물을 것이 있다고 했으니 어서 물어보아라.”
“예.”
여병천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연비강과 천주의 승부가 어떻게 되었는지 묻고 싶습니다. 연비강이 살아 있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그것을 왜 네가 알아야 하느냐?”
남궁악의 목소리가 대번에 차가워졌다.
이쯤에서 여병천은 묻기를 그쳐야 했다.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물었다.
“알고 싶습니다.”
“굳이…… 그것을 알고 싶은 이유가 무엇이더냐?”
“이 늙은이가 알기로 연비강은 강호의 소문과 달리 협객입니다. 또한 무신입니다. 저는 천주께서 연비강과 싸움을 그치기를 원합니다.”
“감히…… 이 늙은이가…….”
남궁악의 전신에서 은은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여병천은 조금도 겁을 먹지 않았다.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온몸이라 계속 남궁악의 심기를 건드렸다.
“연비강이 천주의 손에서 또 살아남았으니, 그의 강함은 천주와 비견될 만 하다 할 수 있겠습니다.”
“계속…… 지껄여 보아라.”
자리에서 일어나는 남궁악의 손에는 어느새 도가 들려 있었다.
엎드려 있는 여병천은 눈을 질끈 감았다.
남궁악의 은혜가 너무나 크니 배신은 하지 못한다.
그러나 천주의 손에 죽는다면 제자만은 동천과의 인연을 끊어 버릴 수 있을 것이다.
최소한 제자만은 사부가 엮어 놓은 인연의 굴레에서 벗어나 스스로 인연을 찾아가게 하고 싶었다.
‘천주 덕분에 원수를 갚을 수 있었으니 당장 죽는다 해도 원망은 없을 것입니다.’
여병천은 속내와는 달리 남궁악의 심기를 건드리는 말을 이어 나갔다.
“천하를 제패한다면 측은지심으로 강호인들을 돌보십시오. 모든 일에 공명정대하게 대하시고 강호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네…… 놈이 관여할 일이 아니라고 했다.”
“천주, 강호는 천주의 것이 아니라 강호인들의 것입니다.”
스각.
기어이 남궁악의 손에 들려 있던 도는 여병천의 뒷목을 향해 떨어졌다.
툭. 떼구르르,
“빌어먹을 늙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