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 연비강 209화
무료소설 신마 연비강: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478회 작성일소설 읽기 : 신마 연비강 209화
제209화. 세월은 흐르고(5)
돌계단을 오르는 약추완의 발걸음이 가벼운 것은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두려움을 덜어 냈기 때문이었다.
연비강이 죽었다.
그놈이 죽었다면 이제 그의 앞날을 가로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앞으로도 시천세를 주인처럼 모셔야 하지만 그 일은 여태까지 해 왔으니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이제 자신은 북림의 주인 풍천양처럼 왕이 된다.
들뜬 가슴을 진정시키며 정상에 오르던 약추완은 계단을 밟아 내려오는 총관과 마주쳤다.
조용히 머리를 숙여 길을 피해 주는 그에게 약추완이 웃으며 말을 건넸다.
“천주님께서 돌아오셨다는데 만나 보셨소?”
총관 또한 담담한 미소로 말을 받았다.
“예. 올라가 보십시오.”
“고맙소.”
막 발을 떼려던 약추완은 다시 몸을 돌렸다.
“그런데 총관도 천주님을 따라 이곳에서 나갈 생각이오?”
“그렇습니다. 저는 천주님과 죽을 때까지 함께할 것입니다.”
약추완은 총관의 결정이 적잖이 만족스러웠다.
총관은 시천세와 더불어 껄끄러운 존재였다.
“유감이구려. 나는 앞으로도 총관과 함께했으면 했는데.”
“말씀만 고맙게 받겠습니다.”
대답을 마친 총관은 계단을 밟아 내려가고 약추완은 위로 올라갔다.
전각 앞에는 전과 다름없이 종예가 조용히 서 있었다.
계단을 밟아 오를 때의 좋았던 기분이 저 여자를 마주하는 순간 사라져 버렸다.
“안에 고해 주시오.”
종예는 시천세의 허락조차 받지 않고 길을 비켜 주었다.
약추완은 종예의 서늘한 시선을 받으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회의실 안으로 들어선 그는 바닥에 엎드려 예를 표했다.
“천주님을 뵈옵니다.”
식사를 하고 있던 시천세는 고개를 살짝 들어 인사를 받았다.
탁자 위에는 고기 한 접시와 지지거나 삶아 무친 채소를 담은 접시 네 개가 놓여 있었다.
천하제일인의 식탁이라고 하기에는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식사는 했나? 아직 식전이라면 같이 하지.”
뜻밖의 제안에 당황한 약추완은 얼른 대답을 얼버무렸다.
시천세와 마주 앉아 식사를 했다가는 체기로 며칠을 고생해야 할 것 같았다.
“저, 저는 먼저 식사를 끝냈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하는 수 없지. 무슨 보고할 거라도 있나?”
약추완은 고개를 살짝 들어 시천세를 살폈다.
시천세는 나물을 얹은 밥을 맛있게 먹고 있었다.
“십만대산을 제가 정리하고 싶습니다. 천주님.”
약추완은 시천세가 직접 움직였으니 틀림없이 연비강이 죽었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연비강이 죽었으니 그곳을 정리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장한 결심을 했군. 허락하지.”
식사를 하고 있는 시천세의 입가에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감사합니다, 천주님.”
시천세는 기쁨을 억지로 감추고 있는 약추완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연비강이 강해 보이기는 했지만 크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어. 해서 칠 년, 아니 육 년 후에 다시 만나기로 했지.”
기쁨으로 들떠 있던 약추완의 가슴에 차디찬 서리가 내려앉았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시천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이 자신을 향한 조소라는 것을 깨달은 약추완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뜨거운 것이 가슴속에서부터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라왔다.
하지만 그것을 쏟아 낸다면 자신은 이 자리에서 죽을 것이다.
“하면…… 육 년을…… 기다려야 한단 말씀이십니까?”
간신히 억누르고 있는 분노는 목소리까지 덜덜 떨리게 만들었다.
젓가락을 내려놓은 시천세는 붉게 물들어 있는 약추완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네게 힘을 주었으면 그만한 성과를 보여야 할 것이 아니냐. 네게 힘이 생긴다면 육 년을 기다리지 않아도 좋아. 네게 힘이 생긴다면 나를 쓰러뜨리고 무림의 황제가 되어도 좋아. 너의 도전이라면 얼마든지 받아주마. 육 년은 삼류무인이었던 자가 절대고수가 되어 등장할 만한 아주 긴 시간이기도 하니까.”
시천세의 무거운 목소리에 겁을 먹은 약추완은 황급히 바닥에 머리를 가져다 댔다.
“제가…… 감히 어떻게 천주님께 도전을 하겠습니까. 다만 저는 언젠가 연비강으로 인해 불어닥칠 강호의 혼란을 미연에 방지하고 싶을 뿐입니다.”
“그 혼란을 부천주가 직접 방지할 생각은 못해 봤나? 듣자 하니 외손자가 제법 성취가 있다는 소문이 있던데.”
약추완의 외손자는 악가의 악추산이었다.
그는 지금 가문에 틀어박혀 오로지 무공 수련만 하고 있었다.
시천세가 이리 말을 하는 이상 이제 다른 방법은 없었다.
스스로 강해지거나 강력한 조직을 만들어 그놈을 처 죽여야 한다.
“부천주, 약추완은 그만 물러가겠습니다.”
“가봐.”
잔뜩 굳은 얼굴로 방을 나가는 약추완을 시천세가 웃으며 지켜보았다.
끌끌끌……
저놈은 앞으로 연비강에게 죽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빠르게 힘을 키워 십만대산과 전쟁을 벌일지도 모른다.
‘저놈이라면 그렇게 하고도 남지.’
앞으로 일이 어떻게 진행이 되든 시천세에게는 나쁠 것이 없었다.
***
“십만대산을 나올 때는 아침저녁으로 날씨가 제법 쌀쌀했는데 오늘은 새벽부터 후텁지근합니다.”
뱃전에 나와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만끽하던 담혁수가 강물을 바라보고 있는 비강을 흘깃거렸다.
사실 오늘 새벽부터 후텁지근한 것이 아니라 남쪽은 이미 여름이었다.
하지만 담혁수가 이런 말을 하며 운을 뗀 것은 남쪽으로 향할수록 말수가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다.
평소에도 그리 많은 말을 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요즘은 그 정도가 조금 심했다.
하루 종일 함께 있으면서도 몇 마디 말을 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고 계십니까? 교주님.”
담혁수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비강은 강물만 응시했다.
후아,
이에 담혁수는 길게 한숨만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교주와 강호에 다녀오라는 말에 너무 설렌 나머지 밤잠까지 설쳤었다.
강호에 나와 유람을 하며 술도 마시고 어여쁜 여인들과 담소를 나누는 상상을 했던 그였으나, 막상 강호에 나오니 어여쁜 여인들과의 담소는 고사하고 술조차 제대로 마시지 못했다.
거기다가 교주는 애초부터 목적지라는 것이 없는 것 같았다.
남쪽으로 내려가다가도 동쪽으로 움직였고, 동쪽으로 움직이다가 다시 서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물론 가는 곳마다 경치가 좋은 곳이 나타나기는 했으나 담혁수의 눈에는 그 아름다운 경치조차 제대로 들어오지 못했다.
“하늘은 정말 오지게 맑구나.”
그의 혼잣말을 들었는지 강물만 응시하던 비강이 고개를 돌렸다.
“앞쪽에 꽤 괜찮은 기루가 있소. 그곳에서 술이나 한잔 합시다.”
하늘을 올려다보던 담혁수의 고개가 천천히 비강을 향해 돌려졌다.
‘설마…… 강바람 때문에 교주의 말을 잘못 들은 건가?’
교주가 기루에서 술을 마시자고 하다니.
동그래진 담혁수의 눈동자를 마주한 비강이 피식 웃었다.
“싫소?”
“아……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정말로 기루에서 술을 마셔야 합니다. 아셨지요?”
하하하하……
손사래까지 치는 담혁수의 모습이 우스운지 비강의 입에서 커다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하하……
민망해진 담혁수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런데 교주님,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십니까?”
“걱정이 무에 있겠소. 지난날을 떠올리다 보니 쓸데없는 감상에 젖었던 것 같소.”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북궁도의 밝은 얼굴이 떠올랐다.
그 녀석과 함께 했던 지난날들은 언제나 눈부시게 밝았었다.
당장이라도 눈앞에 나타나 환하게 웃으며 짓궂은 말들을 지껄일 녀석은 이제 이 세상에 없다.
유람객들과 상인들, 그리고 강호인들과 여러 필의 말을 태운 배가 뭍에 닿았다.
비강과 담혁수도 하선하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땅에 발을 디뎠다.
“여기서 요기를 하고 출발하는 게 좋겠습니다.”
포구에 늘어선 객잔들을 둘러보며 담혁수가 말했다.
“좋은 곳을 한번 찍어 보시오.”
“저기 저 국수집이 좋겠습니다.”
담혁수가 가리킨 곳은 벽조차 없는 허름한 국수집이었다.
국수집 앞쪽으로 노상에 의자와 식탁들이 놓여 있었는데, 손님들 서너 명이 둘러앉아 국수를 먹고 있었다.
비강과 담혁수가 의자에 가 앉자 인심 좋아 보이는 인상의 중년 여인이 허름한 부엌 안에서 물었다.
“몇 그릇이나 드릴까요?”
“두 그릇 주시오. 양은 많을수록 좋소.”
“잠시만 기다리세요.”
인심 좋아 보이는 국수집 주인은 큰 그릇에 가득 국수를 말아 내왔다.
배가 고팠던 두 사람은 얼른 젓가락을 집어 국수를 먹기 시작했다.
허겁지겁 국수를 먹던 담혁수는 맞은편에 자리 잡고 있는 객잔을 흘깃 쳐다보았다.
“저…… 두궁천이라는 자가 보통이 아닌 모양입니다.”
국수를 먹다 말고 담혁수가 어렵게 의미 모를 말을 꺼냈다.
하지만 비강은 담혁수의 그 말을 바로 알아들었다.
“그냥 모른 척하시오. 아직까지 저들은 우리 두 사람의 정체를 모를 터이니.”
“알겠습니다.”
푸짐한 국수로 식사를 끝낸 두 사람이 길을 나서자 허리에 검을 찬 강호인 두 명이 그들을 지나쳐갔다.
“의심을 거둔 모양입니다. 며칠 전부터 우리를 미행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럴 거요. 우리가 움직이고 있는 방향은 두서가 없었으니.”
“아, 그래서 교주님께서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셨군요?”
그제야 알겠다는 듯 담혁수는 감탄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오. 실은 핑계 삼아 그 동한 보지 못했던 경치를 구경했소.”
“진즉에 제게 말씀을 해 주시지요. 저는 저것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두고 며칠을 고민하는 바람에 그 좋은 경치들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일찍 죽여 없애자니 더욱 의심을 받을 것 같기도 해서…….”
하하……
“일찍 말하지 그러셨소?”
“교주님을 모시는 사람으로서 그런 일은 혼자 처리하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함께 강호 유람을 나온 거요. 그러니 나를 호위하고 있다는 생각은 버리시오.”
담정천과 담수연, 담혁수, 이렇게 세 사람 중에 가장 마음이 잘 맞는 사람이 바로 담혁수였다.
담정천과 담수연도 가깝게 지내고는 있으나 마음속으로는 뭔가 거리감이 느껴졌다.
“그런데 기루에는 언제 도착합니까? 교주님.”
가끔가다 이렇게 바라는 것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는 것도 담혁수의 좋은 점이었다.
“저녁때쯤이면 도착할 수 있을 거요.”
하하하……
“잘 됐네요. 저녁이라면 술 마시기 좋은 때가 아니겠습니까.”
***
남선이 자리 잡고 있던 곳과 그리 멀지 않은 큰 마을에 도착한 비강은 기루 한곳을 찾아들어갔다.
짐작보다 훨씬 늦은 시각에 도착한 탓에 기루는 이미 방마다 불이 밝혀져 있었다.
“교주님께서 잘 아는 곳입니까?”
담혁수가 안으로 따라 들어가며 물었다.
“전에 친한 벗과 한번 들렀던 곳이오.”
“친한 벗이라면…… 아…….”
그제야 이 기루가 어떤 곳인지 알아차린 담혁수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아마도 교주는 이곳에서 벗과의 추억을 떠올리고 싶었나 보다.
비강을 맞이한 총관은 전에 북궁도를 비강을 반겨 주던 총관이 아니었다.
“강호의 영웅들을 뵈어요.”
환하게 밝힌 방을 올려다보며 비강이 물었다.
“방은 있소?”
삼십 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총관은 호들갑을 떨며 비강의 팔을 잡았다.
“그럼요. 당연히 방은 있지요. 다만 두 분께서 너무 늦게 찾아주셔서 어린아이들은 전부 나갔어요. 그래도 아주 예쁜 애들이 남아 있으니 어서 들어가세요.”
낯선 총관에 이끌려 안으로 들어가던 비강이 문득 입을 열었다.
“남협이라는 협객이 자주 사용하던 방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그 방으로 안내해 주시겠소?”
“남협이라면…… 아, 예전에 자주 방문하셨다는 그분을 말씀하시는 그분이로군요. 그 자리는 아주 구석진 곳이라 남아 있어요.”
낯선 총관은 북궁도를 얼른 기억해 내지 못했다.
그 녀석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건만 벌써 이렇게 잊혀 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