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 연비강 19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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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93회 작성일소설 읽기 : 신마 연비강 197화
제197화. 무정(3)
몸집이 퉁퉁한 사내가 옮겨 간 곳은 공터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가장자리 나무 아래였다.
그는 그곳에서 나뭇가지를 모아 불을 피웠다.
그동안 약가와 악가의 가인들은 약하림을 위한 노숙 준비로 바삐 움직였다.
먼저 바닥에 푹신한 담요를 깔고 나뭇가지들을 모아 근처에 불을 더 피웠다.
그러고 난 후에 마차 안에 앉아 있는 약하림을 공터로 청했다.
“준비가 끝났습니다. 나오시지요.”
마차 밖으로 시녀가 먼저 나오고, 뒤이어 약하림이 시녀의 부축을 받아 나왔다.
그녀는 표정 없는 얼굴로 걸어가 가인들이 준비해놓은 담요 위에 앉았다.
시녀가 재빨리 그녀의 몸을 또 다른 담요로 덮어 주었다.
가인들은 뒤따라온 큰 마차에서 솥과 쌀을 꺼내 식사 준비를 시작했다.
몸집이 퉁퉁한 사내가 그들의 모습을 구경했다.
마침 나뭇가지들을 더 긁어모으기 위해 숲으로 들어갔던 가인 하나가 사내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몇 번이나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얼굴인데 도통 기억이 나질 않았다.
“왜 그러느냐?”
가인의 행동을 이상하게 여긴 나이 많은 가인이 물었다.
“아, 예. 어디선가 본 얼굴인데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가인의 대답에 나이 많은 가인이 코웃음을 치며 몸집이 퉁퉁한 사내에게 다가갔다.
“이름을 물어도 되겠소?”
가인이 무례한 말투로 물었으나 사내는 별다른 내색 없이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황옥.”
“황옥? 어디서 들어 본 이름…….”
나이 많은 가인의 눈동자가 점점 커지더니 곧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가문의 큰 어른이자 중천의 부천주를 모시고 있는 사내는 황옥이라는 이름을 몇 번이나 들어 보았다.
“죄송합니다. 감히 무명소졸의 눈이 어두워 태산 같은 분을 몰라뵈었습니다.”
아무리 가문의 위세가 대단하고 무공까지 대단한 약가와 악가의 가인들이라지만 황옥은 그들에게 있어 감히 넘보지 못할 존재였다.
바삐 움직이며 저녁을 준비하거나 말을 돌보고 있던 가인들도 그 광경을 목격하고는 황옥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누구……?”
“모두 머리를 숙여라. 중천의 황옥 대협이시다.”
나이 많은 가인의 말에 약가와 악가의 가인들 모두 고개를 조아렸다.
“황옥 대협을 뵙습니다!”
그들의 우렁찬 인사에 황옥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씨익 웃었다.
“이러면 내가 무안한데…… 어디로 가는 길이냐?”
“십만대산입니다.”
“목적은?”
“저희들도 그것까지는 모르고 있습니다. 다만 가모님을 호위해 십만대산에 다녀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낄낄낄…….
“그 명령을 내린 자는 필시 너구리같은 약추완일 테고.”
가문의 큰 어른을 욕보이는 치욕스런 말이었으나, 가인들은 함부로 발작하지 못했다.
다만 흠칫 몸을 떠는 것으로 끓어오르는 노기를 대신할 뿐이었다.
“왜? 방금 내게 살기를 일으킨 것 같은데…….”
“아…… 아닙니다.”
차가운 미소를 짓던 황옥의 시선은 공터 중앙에서 고고하게 앉아 이쪽을 쏘아보고 있는 여인에게 향했다.
‘과연 보통 여자는 아니야. 그러니 자식새끼에게 독약을 먹여 죽이려 했겠지. 에잇! 이왕 죽이려면 확실하게 죽일 것이지.’
황옥은 자리에서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실례지만 잠시 말씀을 나눌 수 있겠소이까?”
약하림은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자에 관한 일인데 괜찮겠소?”
하지만 이어진 황옥의 질문에 약하림은 멈칫하더니 잠시 생각에 잠겼다.
“너희들 모두 삼십 장 밖으로 물러나라.”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 이런 명령이 떨어졌다.
“가…… 가모…….”
약가와 악가의 가인들은 갑작스런 약하림의 명령에 당황해 어찌할 줄 몰랐다.
“내 말을 듣지 못했느냐?”
하지만 이어진 그녀의 명령에 가인들은 모두 공터에서 물러나 밖으로 나갔다.
‘성정이 참으로 드센 여자로군. 그러니 그런 드센 새끼를 낳았겠지.’
황옥은 약하림과 그녀의 수발을 들고 있는 시녀를 향해 다가가 이 장 정도 떨어져 앉았다.
“이렇게 몸소 행차를 하는 것을 보니 그자가 맞는 모양이오?”
“아직 확인된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심중으로 확신을 하니 직접 움직이는 것이지 않소?”
약하림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그녀가 물었다.
“그 녀석이 맞다면 나를 보고 어떻게 나올 것 같나요?”
‘이 여자가…….’
황옥의 눈빛은 깊숙하게 가라앉았다.
눈앞에 앉아 있는 여인은 고고한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지만 사갈보다 더 차가운 성정을 지니고 있었다.
자식을 독약으로 죽여 놓고 그 자식이 어떤 반응을 할지 궁금해 하는 여인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약하림의 질문은 황옥도 궁금해 하던 터였다.
“어디 봅시다. 내가 그동안 살펴본 바로는 그놈은 잔인하기는 하지만 협객의 풍모를 풍기고 있소. 그놈은 당신이나 당신의 아들, 당신의 애비를 죽일 기회가 많았는데 죽이지 않았소. 악가의 가주인 악규를 죽인 이유는 어미를 빼앗아 간 자의 질투일수도 있고. 그놈은 힘없는 자나 양민은 죽이지 않소. 오히려 소문을 들으면 어려운 자들을 돕기까지 한다고 하니 부모를 잘 만났다면 천하가 알아주는 협객이 되었을지도 모르겠소.”
은근히 어린 자식을 죽인 어미를 질책하는 황옥의 말이었다.
하지만 약하림은 눈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지독한 여인이로고…….’
“그렇게 본다면 연비강이라는 놈이 어쩌면 당신을 용서할지도 모르겠구려. 아니 그럴 가능성이 많을 것이오.”
그제야 약하림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조금 전에 가인들의 말을 들으니 중천의 대단한 고수이신 모양이로군요. 한데 그런 분께서 어쩐 일로 홀로 밤이슬을 밟고 계신 건가요?”
쩝…….
황옥은 입맛을 쩍쩍 다시다말고 바닥에 놓여 있는 과일 하나를 집어 들었다.
초봄에 귀한 과일까지 준비한 것을 보면 확실히 약가와 악가의 재력은 대단해 보였다.
우적우적…….
약하림의 허락조차 받지 않고 과일 하나를 뚝딱 해치운 황옥이 말문을 열었다.
“실은 어떤 자들을 추격하고 있던 중이었소. 한데 십만대산에 도착을 한다고 해도 안쪽까지 들어가 자세히 살펴볼 자신이 없어서 말이오. 해서 부탁 하나만 하고자 하오.”
“말씀해 보세요.”
“가인들이 입고 있는 옷 한 벌 빌려 주시오. 그리고 잠시 내가 악가의 가인이 되어야겠소. 내 부탁을 들어 준다면 십만대산을 빠져나올 때까지 당신을 지켜 주겠소.”
“쓸쓸하고 황량한 곳에서 아주 귀한 분을 뵙게 되었군요. 당연히 그 부탁을 들어드려야지요.”
약하림이 공손하게 머리를 숙여보이자 황옥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껄껄껄껄…….
“지금까지 악가의 가모 되시는 분과 같은 분은 만나 본 적이 없소. 이 황옥에게 있어서 일생의 영광이오.”
이른 새벽 시천세는 술 한 병을 들고 황산에 올랐다.
황산 정상에 새로 만들어 놓은 돌무덤이 바로 남궁악이 묻힌 곳이었다.
돌무덤 앞에는 사부의 도가 바위를 뚫고 깊숙이 박혀 있었다.
쪼르르…… 벌컥 벌컥…….
시천세는 돌무덤에 술을 반병쯤 붓고 남은 반병은 한 번에 비워 냈다.
그러고는 무덤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앞으로는 너를 찾아오기 힘들 것 같구나. 마지막 인사를 하러 왔다.”
남궁악은 죽어 가면서 마지막 당부를 남겼다.
‘황곡에서 함께 지낸 그 녀석들과 그 녀석들의 혈족들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시천세는 그렇게 한다고 약속했다.
지금까지 그들을 잊은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구파일방과 육대세가에 의해 가족이 죽어 황곡으로 들어온 자들이었으나, 그래도 혈족이 있는 자들은 있었다.
사제는 죽어 가면서도 그들을 걱정한 것이다.
돌무덤을 지그시 바라보던 시천세는 문득 싸한 기분이 들어 황급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제 천하를 얻었느냐?”
“오셨습니까?”
시천세가 공손히 머리를 조아리자 독고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돌무덤으로 걸어왔다.
쪼르르르…….
그는 돌무덤에 술을 뿌려 술 한 병을 전부 비우고는 바로 몸을 돌렸다.
“어찌하여 저를 꾸짖지 않으십니까?”
독고일이 걸음을 멈추며 되물었다.
“내가 꾸짖어야 하는 것이냐?”
“사제들을 전부 죽였습니다.”
“강호에 그와 같은 일이 어디 이뿐이겠느냐. 어리광부리지마라.”
크흐흐흐…… 흐흐흐…….
시천세의 입에서 억눌린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 그는 울고 있었다.
“그래서 속이 시원하십니까? 이 제자는 천하를 얻었으나 또 칠 년, 아니 육 년을 더 기다려야 합니다! 사부께서는 이미 후계자로 그놈을 점찍고 계셨던 것이 아니십니까! 저와 사제들은 그놈을 후계자로 만들기 위한 도구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까!”
시천세는 악에 받친 듯 소리쳤다.
그는 지금 속에 품고 있던 이야기를 전부 토해 내고 있었다.
등을 돌리고 있던 독고일이 몸을 돌려 시천세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없는 것이냐?”
“자신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육 년, 아니 육십 년 후라도 그놈은 충분히 내 손으로 죽일 수 있습니다!”
“악이의 발전이 두려워 무리수를 둔 것이 너였다.”
시천세의 얼굴은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사부는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바보 같은 놈. 이 독고일의 첫째 제자가 무엇을 두려워한단 말이냐. 네가 원한다면 칼을 들고 있는 강호인들 전부를 도륙할 수도 있지 않느냐.”
시천세는 너무 놀란 나머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머릿속에 들어 있던 것들이 새하얀 백지처럼 변해 버렸다.
사부가 이런 말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으헝헝……!
대성통곡을 하며 무릎을 꿇은 시천세는 머리를 바닥에 가져다 댔다.
“가…… 감사합니다, 사부님.”
“네가 나의 후계자가 되든, 그 녀석이 나의 후계자가 되든, 나는 어느 쪽도 만족할 것이다.”
독고일의 목소리는 순식간에 멀어져 갔다.
시천세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사부님. 정말 감사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조아린 시천세는 바닥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
회의실에서 조반을 받은 시천세는 종예와 오진권, 그리고 두궁천을 불러들였다.
“주공을 뵙습니다.”
인사를 마친 종예는 회의실에 있는 의자로 가 앉았다.
하지만 오진권과 두궁천은 사정이 달랐다.
두 사람은 회의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주공을 뵙습니다.”
“두궁천이 새로운 주인을 뵙습니다.”
시천세는 물끄러미 두 사람을 내려다보다가 두궁천부터 불렀다.
“네가 사련의 새로운 주인이라지?”
“이제 사련은 없습니다.”
끌끌끌……
“사제도 내말을 믿지 않았는데 내가 너의 말을 믿을 것 같으냐?”
두궁천은 자신의 답변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바닥에 머리를 찍었다.
쿵!
“속하가 영명하신 주인을 속이려 들었습니다. 하나 주인께서 하명만 하신다면 그들을 전부 제 손으로 죽여 없애겠습니다.”
“주인이 부하를 죽여 없앤다라…… 그것도 좋겠지. 하나 그 녀석들 또한 이번에 많은 피를 흘리지 않았느냐. 그에 합당한 보상을 하려 한다. 남선이었던 곳을 네가 맡아라.”
두궁천으로서는 뜻밖의 횡재였다.
“모……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주공.”
지금까지 속내를 드러내지 않던 두궁천은 말까지 더듬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드디어 할아버지가 원하던 것을 얻었다.
할아버지는 남쪽에 있는 광동이나 광서, 복건, 운남 중에 한곳을 사파의 영역으로 삼는 것이 일생의 소원이었다.
남선이라면 할아버지가 원하던 땅의 몇 배나 되는 크기였다.
거기다가 남선의 영역에는 호남 일부까지 들어가 있었다.
“매년 정월 초하루에 인사를 올 것이며, 남선에 자리 잡고 있는 무가와 무문들은 절대 해치지 마라. 만약 이것을 어길 시에는 네게 남은 것은 오직 죽음일 것이다.”
쿵!
바닥에 머리를 찍은 두궁천은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주공! 또한 절대로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주공! 만약 제가 방금 맹서한 말을 어긴다면 성을 바꿀 것입니다.”
두궁천으로서는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한 맹세를 한 셈이었다.
“나가봐.”
“예.”
두궁천을 내보낸 시천세는 오진권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꿀꺽,
오진권은 너무 긴장한 나머지 마른침을 삼켰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주면 좋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