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 연비강 215화
무료소설 신마 연비강: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46회 작성일소설 읽기 : 신마 연비강 215화
제215화. 몇 해의 봄(1)
잔치가 끝이 나고 가주들과 장문인들은 모두 자신들의 가문과 무문으로 되돌아갔다.
이른 아침 자리에서 일어나 운기행공을 마친 약추완은 시천세가 남겨 놓고 간 것들 중에 한 장을 펼쳤다.
시천세가 남겨 놓은 것은 한 장 한 장이 천고의 무공비급이었다.
그는 이 무공비급으로 인해 무공을 다른 관점으로 보게 되었다.
즉 삼류무공도 절대무공이 될 수 있었고, 절대무공도 삼류무공이 될 수 있었다.
무공비급에 깊이 빠져들었던 약추완은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림주님.”
그는 자신이 보고 있던 비급을 황급히 다른 곳으로 치우고 자신의 자리로 가 앉았다.
“어서 들라 하라.”
이른 아침부터 누가 찾아왔는지는 모르나 이곳까지 올라온 것을 보면 필시 보통 사람은 아닐 것이다.
“아…… 이거 오랜만이네.”
누군가 조금은 거만한 목소리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약추완은 회의실을 들어서는 자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황…… 대협께서 어인 일이시오?”
회의실로 들어선 자는 다름 아닌 황옥이었다.
약추완은 황옥이 이곳을 다시 찾은 이유를 단번에 알아차렸다.
‘역시 내 짐작이 옳았어.’
그의 내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황옥은 이 회의실을 처음 들어와 본 사람처럼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화병(花甁)도 처음 보는 것 같고 벽에 걸린 화조도(花鳥圖)도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역시 부천주는 강호제일의 부자야. 주공이 자리를 내주자마자 이런 것들로 안을 치장한 것을 보면.”
비꼬는 말을 약추완이 알아듣지 못할 리 없었다.
“회의실이 너무 삭막해 보여 들여놓은 것뿐이오. 그리 값나가는 것이 아니오.”
말과는 달리 저 화병과 벽에 걸린 그림은 많은 은자를 주고 사들인 것들이었다.
“그렇단 말이지? 그렇다면 내가 이 화병 하나 정도는 가져가도 되겠네?”
황옥이 화병을 들어 보이며 이죽거리자 약추완은 속내와는 달리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시오. 황 대협께서 가져간다면 흔쾌히 내드리리다. 한데 무슨 일로 오셨소?”
“아…… 깜빡 잊고 있었네.”
황옥은 화병을 들고 약추완 앞으로 다가갔다.
“주공의 명을 받고 왔어. 회의실 탁자의 서랍 속에 뭐가 들어 있다고 하시더라고. 혹시 부천주는 알고 있나?”
너구리같은 약추완이 그렇다고 할리 없었다.
그는 처음 듣는 소리처럼 놀란 눈을 뜨며 되물었다.
“회의실 탁자에 서랍이 있었소? 내가 한번 살펴보리다.”
“아. 내가 직접 살펴보지.”
황옥은 약추완을 막아서며 직접 탁자를 살펴 서랍을 찾아냈다.
서랍을 열자 잘 정리되어 쌓여 있는 서류들이 보였다.
“여기 있었네.”
서류들을 몽땅 끄집어낸 황옥은 회의실을 밝히고 있는 촛불에 그것들을 한 장 한 장 태우기 시작했다.
종이들이 한 장 한 장 타들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약추완이 물었다.
“아주 중요한 서류인가 보오?”
“아. 나는 잘 모르겠지만 주공의 말씀으로는 이름 있는 강호 고수들의 눈에 띄면 큰일 날 것이라고 하던데…… 왜? 관심 있나?”
약추완은 태연하게 능청을 떨었다.
“강호인이라면 당연한 것 아니오?”
하하……
“이거 미안해서 어쩌지?”
기어이 모든 무공비급을 태워 버린 황옥은 약추완을 향해 화병을 들어 보였다.
“잘 있으라고. 아, 당신 여식을 지키지 못한 것은 미안해. 나도 이 한 몸조차 빼내기가 힘들었거든.”
황옥은 그 말을 남기고 방을 나갔다.
크크크크……
회의실 안에 음침한 웃음이 맴돌았다.
서랍 안에 들어 있는 것이 정말 대단한 것이라면 분명 시천세나 그의 수하가 찾아올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 짐작대로 시천세를 대신해 황옥이 찾아와 그것들을 불살라 버렸다.
크크크…… 크하하하하……
산을 내려오던 황옥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네놈이 십만대산을 함락할 수 있는지 없는지 지켜보마. 아…… 아닌가? 저런 개자식한테 십만대산이 함락된다면 내 체면이 말이 아니지. 에이 썅! 도무지 나도 나를 모르겠다.”
***
여름이 가고 가을이 찾아왔다.
낙엽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어느샌가 떨어진 낙엽 위에 눈이 쌓였다.
가진 것 없는 사람들에게는 더욱더 혹독한 겨울이 깊어가고, 정월 초하루가 찾아왔다.
“강호의 주인께 인사 올립니다.”
“두궁천이 강호의 주인을 뵙습니다.”
“약림의 림주가 곡주님의 만수무강을 기원합니다.”
강호에서 만난다면 서로가 적이었을 세 사람이 나란히 시천세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시천세는 그들을 차례로 훑어보다가 두궁천에게 먼저 물었다.
“남선의 잔당들을 전부 잡아들였다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이냐?”
“예. 남쪽 깊숙이 숨어 있었던 자들 중에 일부가 투항하는 바람에 나머지도 손쉽게 잡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을 이곳으로 보내도록.”
“영을 받습니다.”
두궁천에 이어 오진권이 시천세의 질문을 받았다.
“구파일방과 육대세가가 나날이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던데, 듣자 하니 곤륜이 세력을 확장하는 와중에 사련과 마찰을 빚었다고?”
“산동은 원래부터 곤륜의 땅이었습니다. 한데 남선과 동천이 산동을 나누어 다스려 곤륜은 자신의 땅을 잃게 되었습니다. 하여 이번에 원래의 땅을 되찾으려 하고 있습니다.”
끌끌끌……
오진권의 대답을 듣고 난 시천세는 어이없어 웃었다.
남선이 다스리던 영역은 산동의 이 할 정도밖에 되지 않았었다.
나머지는 동천의 영역이라 곤륜은 이미 팔 할의 땅을 자신들의 영역으로 삼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남을 이 할마저 차자하려고 저렇게 아옹다옹 다툼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두궁천, 너의 생각은 어떠냐?”
시천세의 시선을 받은 두궁천은 머리를 조아려 대답했다.
“주인께서 원하신다면 곤륜에 그 지역을 양보하겠습니다.”
시원스런 두궁천의 대답에 시천세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두궁천은 머리가 좋다.
이 자리에서 양보를 하지 않는다면 그보다 더한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좋다. 하면 힘으로 그 땅의 주인을 가리도록 하라. 설사 이 싸움으로 곤륜이 멸망한다고 해도 벌을 내리지 않을 것이다.”
시천세의 판결을 들은 오진권은 고개를 조아린 채 질끈 두 눈을 감았다.
역시 이렇게 될 줄 이미 짐작했다.
그동안 곤륜과 사련의 싸움을 중재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었다.
무림맹에 남아 있는 곤륜의 문인을 통해 설득을 해 보고 직접 서신까지 써 보냈지만, 곤륜에서 보내온 답장에는 오히려 무림맹이 힘을 보태달라는 소리뿐이었다.
군사인 제갈곤도 벌써부터 사련과 갈등을 빚어 유리할 것이 없다고 판단했기에 직접 서신을 써 곤륜으로 보냈었다.
하지만 곤륜은 요지부동이었다.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끝까지 고집을 부린 것이다.
현재 강호는 예전의 사패처럼 약림과 정파, 사련이 삼분을 하고 있지만 그때와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사패가 강호를 지배할 때는 서로 간에 갈등은 피하려 했었다.
그들은 서로 적이라는 인식이 별로 없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약림과 무림맹, 사련의 관계는 적을 넘어 원수라 할 수 있었다.
“제가 직접 곤륜을 방문해 이번 일을 처리하겠습니다.”
“좋아.”
오진권의 뒤를 이어 약추완의 차례가 되었다.
시천세는 오묘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엎드려 있는 자는 말이 없었고, 내려다보는 자 또한 말이 없었다.
갑자기 방 안에 침묵이 찾아오자 엎드려 있던 약추완은 슬며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웃고 있는 시천세의 눈과 마주친 약추완은 황급히 머리를 숙였다.
아직은 저자와 맞설 수 없었다.
“림주, 요즘 꽤 재미있는 소문이 들려오던데, 제자들을 스무 명이나 한꺼번에 들였다고?”
“그러하옵니다. 재주 있는 젊은이들을 골라 제자로 받아들였습니다.”
“오직 그대만의 약림을 만들어 보겠다는 심산이로군. 어쨌든 좋아.”
끌끌끌……
제자들 외에도 이번에 새로 아들까지 들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혈족들 중에 영특한 젊은이를 골라 아들로 받아들였다고 하는데, 그 일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약림에서 크게 잔치까지 벌였다고 한다.
대를 이을 아들이 없거나 설사 아들이 있다고 해도 변변치 못한 가문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었으나, 약림의 림주가 되자마자 아들을 두었다는 것은 그만큼 약추완의 욕심이 대단하다는 것을 뜻했다.
시천세는 두궁천이나 오진권과 달리 약추완이 벌이고 있는 일에 대해서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흘깃 세 사람을 내려다본 그는 탁자 위에 놓인 크기가 각기 다른 세 개의 나무상자들 중에 하나를 열었다.
상자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전표들과 보옥이었다.
저들은 지난날 사패가 그랬던 것처럼 그를 위해 매년마다 재물을 바쳐야 했다.
시천세는 상자 안에 들어 있는 것들 중에 푸른빛이 감도는 보옥을 꺼냈다.
그것은 보옥을 깎아 만든 선녀상이었다.
값어치로 따진다면 대략 은자 삼만 냥은 족히 넘을 것이다.
선녀상을 상자 안에 집어넣은 그는 다른 상자를 열었다.
또 다른 상자 안에는 누런 금궤가 가득했다.
“새해를 맞아 이렇게 모였으니 어찌 술이 없을 수 있겠느냐. 그대들을 위해 조촐하게나마 술자리를 마련했으니 마음껏 즐기다가 되돌아가도록 하라.”
시천세의 입에서 축객령이 떨어지자 세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이고는 방을 나갔다.
그들이 모두 물러가자 한쪽에 서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벽하원이 입을 열었다.
“저들은 술자리보다 일찍 돌아가기를 원할 것입니다. 주공.”
끌끌……
“그렇겠지. 원수나 다름없는 것들이 한자리에 모였으니. 이제 곧 힘을 길러 서로 싸우려 들게야.”
총관의 짐작처럼 세 사람이 앉아 있는 방 안은 어색한 침묵만 감돌았다.
그들의 앞에 놓인 상위에는 요리들과 술이 즐비했으나 누구 하나 먼저 움직일 줄 몰랐다.
기묘한 침묵이 흐르던 중 먼저 자리에서 일어선 자는 오진권이었다.
“네놈들의 얼굴을 보고 술을 마시라니, 고역이 따로 없군.”
그가 먼저 자리를 뜨자 뒤이어 두궁천도 몸을 일으켰다.
그는 말 한마디 없이 방을 나갔다.
홀로 방 안에 남게 된 약추완은 그제야 술병을 잡아 술잔을 채웠다.
술잔을 비우는 그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걸렸다.
저놈들 모두 영리하고 뛰어나지만 연륜이라는 것이 없었다.
지난날 그는 연서문이 오천왕보다 뛰어남을 알아보고 딸을 내주었다.
하지만 그자는 기대를 저버렸다.
황곡을 공격하는 계획에 반대를 하고 나선 것이다.
그 일로 인해 강호고수의 반감을 불러 왔고 결국 약추완은 결단을 내려야 했다.
오천왕과 수많은 강호 고수들의 힘이 두려워 딸을 이용해 연서문과 그 아들까지 죽인 것이다.
약추완은 그 일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가 후회하는 것은 황곡을 제대로 보지 못한 어리석음이었다.
자신만만하게 황곡으로 쳐들어간 오천왕은 사천존과 시천세와 싸움을 벌였으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강호무림에서 고르고 고른 고수들 또한 황곡의 고수들에게 패해 전멸을 당했다.
그때 약추완은 오천왕이 저들의 상대가 아님을 알아차려 바로 무릎을 꿇고 항복했다.
‘약추완! 죽어 귀신이 되어서도 네놈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사위와 외손자를 죽인 더러운 놈을 믿는 것이 아니었는데.’
그때 죽어 가면서 자신을 노려보던 오천왕의 목소리와 눈빛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약추완은 스스로 잔에 술을 채우고 비웠다.
크으,
삶과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까짓 굴욕쯤이야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었다.
결국 그 덕분에 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되지 않았는가.
‘강호에서는 마지막에 웃는 놈이 진정한 강자이지. 크크크크…… 그렇고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