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 연비강 214화
무료소설 신마 연비강: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27회 작성일소설 읽기 : 신마 연비강 214화
제214화. 약림(3)
알록달록, 화려한 비단옷을 입은 여인이 고고한 자태로 방 안에 앉아 약철빙을 맞이했다.
“어서 오너라.”
틀어 올린 머리에는 진주가 박힌 비녀를 세 개나 꽂고 있었고, 화려한 비단옷은 발을 가릴 정도로 풍성했다.
“흥. 그렇게 옷으로 팔을 가린다고 없는 팔이 돌아오기라도 하나 보지?”
약철빙은 방안으로 들어서면서부터 심장을 후비는 독설을 내뱉었다.
이에 방 안에 앉아 있던 약하림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너는…… 나를 비웃어 주기 위해 찾아온 것이냐? 네가 아니더라도 수많은 연놈들이 나를 비웃고 있으니 너만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미친년이 지랄하고 있네.”
간신히 냉정을 유지하고 있던 약하림도 더 이상 참지 못했다.
“그런 말을 할 것이면 썩 사라져! 나는 너 같은 동생을 둔적이 없어!”
찢어지는 듯이 날카롭고 높은 목소리가 터져 나와 방 밖으로 흘러갔다.
그러나 약철빙은 독기 가득한 약하림의 눈을 마주 대하며 맞은편 의자에 가 앉았다.
“나도 너 같은 언니를 둔 적이 없어.”
“그렇다면 왜 나를 찾아온 것이지? 차라리 죽어 시신이 되어 나를 찾아왔다면 웃어 주기라도 했을 텐데 말이야.”
독기를 품은 말들이 동생에게서 언니로, 언니에게서 동생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약하림과는 달리 약철빙은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마치 원래 자신의 언니가 이런 사람이었다는 듯 당연한 반응이었다.
“강호에 약가에 관한 소문이 쫘하게 퍼졌던데? 어미는 아들을 죽이고 장인은 사위의 목을 베었다고 말이야. 그 소문 못 들어 봤어? 하긴 소문을 들었으면 얼굴을 들고 밖에 나가기는 어려웠을 테지. 아니지. 천하의 약하림이라면 오히려 더 당당하게 얼굴을 들고 다녔을지도 모르겠는걸?”
약하림은 더 이상 약철빙과 상대하기 싫은 듯 말머리를 돌렸다.
“새벽부터 나를 찾아온 이유나 말해.”
어차피 소문은 소문일 뿐이었다.
그 소문이 사실이라는 확신이 있다고 해도 면전에서는 그 어느 누구도 함부로 입을 놀리지 못한다.
“확인할게 있어서 찾아왔어.”
싸늘한 비웃음이 가득했던 약철빙의 안색은 순식간에 무겁게 가라앉았다.
“뭐야?”
약철빙은 쉽게 입을 열어 묻지 못했다.
그녀가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자 약하림의 눈에 이채가 스치고 지나갔다.
언제 이 망할 년이 이런 모습을 보였던 때가 있던가.
그녀의 기억으로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니,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기억에는 없었다.
“뭐냐니까?”
약하림은 질문을 재촉했다.
“연비강이…….”
약철빙의 입에서 뜻밖의 이름이 흘러나오자 약하림의 눈에서는 독기가 줄줄 흘러 넘쳤다.
“연비강이 정말 연월이 맞아?”
약하림은 이가 부서져라 입을 앙 다물었다.
망할 년이 망할 놈에 대해 묻고 있었다.
둘 다 제발 죽어 없어졌으면 하는 것들이었다.
“어디서…… 그런 소문을 들었느냐?”
“흥. 해와 달에도 귀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 봤나?”
“또 무슨 소문을 들었지?”
“십만대산에 그가 있다는 것. 네년이 그를 회유하러 갔다가 오히려 팔이 잘렸다는 것. 약가와 악가의 가인들이 십만대산에서 몰살을…….”
끄으으음…….
약철빙의 대답을 듣고 있는 약하림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세상을 살아오면서 가장 후회되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그놈의 죽음을 확인하지 않은 것이었고, 또 하나는 어리석게도 십만대산을 스스로 찾아간 것이었다.
놈은 짐작보다 훨씬 더 잔인하고 훨씬 더 독한 놈이었다.
세상에서 절대로 마주치고 싶지 않은 놈이 바로 그놈이었다.
두려움과 분노를 삭이던 약하림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 망할 것이 왜 그놈에게 이렇게 관심이 많지? ……설마 정말로……?’
지난날 북림이 온전할 때 소문이 하나 떠돌았다.
그 소문은 다름 아닌 순찰단의 단주 약철빙과 부관 연비강이 연인관계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소문은 연비강이 북림을 나와 피바람을 일으키고 다니면서 흐지부지 사라졌다.
‘이 새벽부터 찾아온 것을 보면 틀림없어. 그놈은 아니더라도 이년은 맞아.’
약하림의 입가에 섬뜩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맞아. 그놈이 네가 형부라 부르며 따라다니던 그자의 아들이야.”
그녀의 대답이 끝나는 순간 약철빙의 눈빛은 깊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래. 역시 그렇단…… 말이지. 그랬어…… 역시…… 그랬어.”
그녀는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마치 정신이 나간 것 같았다.
“그런데 그걸 왜 물어보는 거지?”
음침하면서도 표독한 물음이 약하림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깊은 어둠으로 물든 약철빙의 눈이 눈앞에 앉아 있는 여인을 훑었다.
한번 찔리면 목숨마저 위태로울 날카로운 가시들이 그녀의 온몸에 돋아 있었다.
‘찢어 죽일 년.’
으드득…….
죽이고 싶다는 의지가 발현이 되자 약철빙의 전신에서 칼날과 같은 살기들이 풀풀 풀려나왔다.
치렁치렁 늘어뜨리고 있던 머리카락마저도 하늘로 밤송이처럼 치솟았다.
크흡! 끄아아악!
갑자기 쏟아져 나온 살기에 약하림은 가슴을 쥐어뜯으며 괴로워했다.
벌컥!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녀의 비명 소리에 가인들이 문을 거칠게 열어젖히며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차창!
“멈추시오!”
가인들은 약철빙을 향해 검을 빼 들어 겨누며 소리쳤다.
하늘로 치솟았던 그녀의 머리카락이 천천히 가라앉고, 방 안을 가득 채우던 살을 에는 살기도 스러져 갔다.
그러나 당장이라도 죽일 듯 무섭게 쏘아보는 눈빛만은 여전했다.
“네년과 내가 전생에 어떤 악연으로 엮여 이번 생에 자매로 태어났는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다시는 마음속으로라도 절대 네년을 나의 혈연으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약철빙은 그 말을 남기고 자신에게 검을 겨누고 있는 악가의 가인들을 쳐다보았다.
검을 겨누고 있던 가인들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양옆으로 물러서 길을 열어 주었다.
아무리 가모를 해하기 위해 무시무시한 살기를 드러냈다고는 하지만, 그녀는 가모의 동생이자 약가의 직계혈연이었다.
만약 이 일을 빌미로 약철빙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잡아 두었다가는 약가와의 관계가 틀어질지도 몰랐다.
허억…… 허억……
거친 숨을 몰아쉬며 식은땀을 흘리던 약하림은 등을 보이고 걸어가는 약철빙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년을 죽여!”
“가모. 진정하십시오.”
“가모. 저분은 가모의 아우가 되시지 않습니까.”
악가의 가인들이 그녀를 진정시키려 애썼으나, 그녀는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죽여! 죽이라고! 저년을 당장 죽여!”
고래고래 악을 써대며 소리를 지르는 그녀를 향해 약철빙이 몸을 돌렸다.
“내가 네년을 왜 죽이지 않은 줄 알아? 네년을 죽일 사람은 따로 있으니까 그에게 양보를 한 거야. 그때까지 두려움에 떨며 잘 살아 봐. 아무리 네년이 구중심처에 틀어박혀 있어도 그가 반드시 찾아내 복수를 할 테니까.”
약철빙은 그 말을 남기고 몸을 돌려 악가를 빠져나갔다.
악가를 빠져나가는 그녀의 뺨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남염가, 악양주가, 검의문, 정주유가, 상주정가, 산서 육도문…….
섬서와 하남, 호북, 산서에 걸쳐 있는 여러 문파와 무가의 주인들이 한자리에 모여들었다.
그들이 모여 앉아 있는 곳은 예전 북림의 풍천양과 중천의 시천세가 회의실로 사용하던 곳이었다.
명색이 회의실이기는 했으나 풍천양이나 시천세는 그곳에서 회의를 개최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약추완이 시천세로부터 북부 무림을 이어받으면서 한자리에 모이게 된 것이다.
약추완은 이 자리를 이용해 오로지 자신만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 싶었다.
때문에 시천세를 따라 황곡으로 들어간 가인이 속해 있는 가문이나 무문은 초대하지 않았다.
언제나 시천세가 앉아 있던 자리에 앉은 그가 손짓을 하자 뒤에 늘어서 있던 무인들은 비단 보자기에 싼 물건들을 각 무문과 무가 주인들의 앞에 내려놓았다.
뒤에 서 있던 무인들은 회의에 참석한 무가와 무문들의 가인들과 제자들이었다.
“어려워말고 어서들 풀어 보시오.”
그의 말에 무가와 무문의 주인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다가 앞에 놓인 비단보자기를 풀었다.
“이…… 이건…….”
“마…… 맙소사.”
회의실 안은 경악과 불신의 목소리로 가득했다.
비단 보자기 안에서 나온 것은 다름 아닌 강호 무림의 절정비급이었다.
그 비급들이 무가와 무문을 대표하는 자들의 앞에 각각 한권씩 놓여 있는 것이다.
어떤 무공은 절전되었거나 혹은 어떤 무공은 전설로만 떠돌아다니던 것들이었다.
비급을 든 채 놀라 어쩔 줄 모르고 있는 무가와 무문의 주인들을 둘러보며 약추완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뒤에 서 있는 제자들과 가인들이 직접 필사를 하였으니 원본과 일획도 다르지 않을 것이오.”
“그렇다면 가인들과 제자들에게 이미 이 무공을 전하셨다는 것이 아닙니까?”
악양주가의 가주는 더욱 크게 놀라 물었다.
“바로 그렇소. 뒤에 서 있는 가인들이나 제자들은 비급을 필사하며 이미 무공을 외웠소.”
비급에 나와 있는 그 많은 글자들을 한꺼번에 다 외울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필사를 하는 가인들이나 제자들 또한 바보가 아니었다.
천재일우의 기회가 자신에게 찾아왔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그들은 필사를 하면서도 무공구절을 외우느라 사력을 다했다.
“이런 황망한 기연이 세상에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림주, 우리 상주 정가는 앞으로 림주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상주 정가의 가주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숙였다.
그러자 그의 뒤를 이어 다른 무문과 무가의 주인들도 약추완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림주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림주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껄껄껄껄……
일이 뜻대로 흘러가자 약추완은 호탕한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모두 같이 다 잘 살자고 하는 일이오. 우리가 이렇게 뜻을 모은다면 그 어떠한 사마의 무리들도 감히 이 약림을 넘보지 못할 것이오.”
“백 번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림주. 약림이 어려움에 처한다면 가문의 모든 힘을 동원해 도울 것입니다.”
“맞습니다. 저 또한 약림을 위한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겠습니다.”
이구동성으로 가주들과 장문인들이 떠들어댔다.
분위기가 무르익을 것을 확인한 약추완은 탁자에 종이 두루마리를 펼치게 했다.
탁자 끝에서 끝으로 이어진 아주 긴 두루마리였다.
“우리의 뜻이 모아졌으니 문서로 남겼으면 하오. 내 약속하건대 그대들을 섭섭하게 대하지 않을 것이오. 또한 가문이나 무문의 뛰어난 인재들을 뽑아 보내 준다면 그들에게 나의 무공까지 전수할 생각이오.”
비록 오래전 강호의 최강자라 일컬어지는 오천왕에는 미치지 못하나, 그다음 자리에는 앉아도 될 것이라는 말까지 나돌았던 약추완이었다.
그래서 한때는 그를 일컬어 천봉검군(千峰劍君)이라고까지 일컬었다.
거기다가 이런 절정의 무공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준다는 것은 더욱 대단한 무공의 성취가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회의실에 있는 가주들과 장문인들은 공통적으로 하나의 생각을 하게 되었다.
‘림주는 늙은 너구리가 아니라 때를 기다리는 늙은 잠룡이었구나.’
북림주 풍천양이나 중천주 시천세가 있을 때는 크게 느끼지 못했으나, 그들의 그늘을 벗어나고 나니 또 다른 큰 인물이 아닌가.
장문인 한 사람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무문과 이름을 적고 손바닥에 먹물을 묻혀 종이에 찍자 다른 가주들과 장문인들도 너 나 할 것 없이 손도장을 찍었다.
그렇게 연판장을 받아 낸 약추완은 그것을 말아 한쪽에 치우게 했다.
“여러 귀빈들을 위해 내가 조촐하게나마 잔치를 준비했소이다. 어서 술과 요리를 들여오라.”
명령이 떨어지자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리더니 술과 요리를 받쳐 든 여인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들이 회의실 탁자에 가득 술과 요리들을 늘어놓자 약추완이 잔을 들었다.
“자. 기쁜 마음으로 잔을 듭시다.”
장문인들과 가주들은 뭔가에 홀린 듯 그의 손짓에 따라 술잔을 들어 올렸다.
“약림을 위하여!”
“림주님을 위하여!”
약추완은 술잔을 비우며 곁눈질로 가주들과 장문인들을 둘러보았다.
이제 힘을 키울 모든 준비는 끝이 났다.
무공이 있고 재물이 있고 사람도 있었다.
‘두고 보아라. 나는 강호 무림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