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 연비강 212화
무료소설 신마 연비강: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12회 작성일소설 읽기 : 신마 연비강 212화
제212화. 약림(1)
산 아래로 내려간 종예는 이십 대 초반의 젊은 무인을 데리고 올라왔다.
그는 감찰대의 대원으로 약가와는 사돈관계에 있는 섬서 번가의 가인이었다.
약가는 수많은 무가나 무문과 혼인관계로 이어져 있었다.
무가나 무문에서 여인들이 약가로 시집을 오고 약가의 여인들은 무가와 무문으로 시집을 간다.
특히 중요한 무가나 무문은 겹사돈까지 맺어 한 가족처럼 대우를 해 주었다.
이 젊은 무인은 번가 가주의 둘째 아들로 약추완의 비호를 받아 감찰대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름이 무엇이냐?”
“번청이 천주님을 뵙습니다.”
시천세가 이름을 묻자마자 이름이 번청이라는 젊은 무인은 바닥에 엎드려 예를 올렸다.
“과연 영리한 놈이로구나. 오 년 후에 너는 강호를 떨쳐 울릴 절대고수가 될 것이다.”
번청이라는 젊은 무인은 더욱 깊숙이 머리를 조아렸다.
“번청이 천주님께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시천세가 웃으며 약추완을 내려다보았다.
“들었느냐?”
약추완은 번청의 배신에 치를 떨었다.
그러나 그것을 내색할 수는 없었다.
또한 왜 배신을 했는지 따져 물을 수도 없었다.
이미 천주의 사람이 되었다면 당사자는 물론이고 가문에 작은 위해조차 가하지 못한다.
너무 억울해 분통이 터졌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순순히 물러나야 했다.
“제가 제대로 알아보지 못해 천주님께 무례를 범하였습니다. 용서하여 주십시오.”
끌끌……
“역시 부천주는 포기가 빨라. 그만 가봐. 아, 이제는 부천주가 아니라 천주라 불러야 하나?”
“너무나 황망해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크하하하하……
시천세는 대소를 토해 내며 손을 저었다.
약추완은 굴욕으로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며 물러났다.
‘이 험난한 강호에서 내가 오래 살아남는지, 네가 오래 살아남는지 어디 두고 보마.’
이튿날 아침, 동이 트자 성문이 활짝 열리고 크고 작은 수레들이 줄지어 성문을 빠져나갔다.
거의 반 시진에 거쳐 수레들이 빠져나가고 난후 중천에는 묘한 정적이 찾아들었다.
“전부 빠져나갔습니다.”
눈을 감은 채 방 안에 앉아 있던 약추완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천주는?”
“지금 천주의 처소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시천세와 그의 부하들이 중천을 빠져나갔다는 보고를 받지 못했다.
그런데 그의 처소가 비었다는 것은 다른 길로 나갔다는 뜻이었다.
어쩌면 오늘 아침이 아니라 이미 전날 밤에 모두 이곳을 나갔는지도 모른다.
“시천세, 그자가 처소를 비웠단 말이지.”
약추완이 방을 나오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무인들이 일제히 머리를 숙였다.
무인들의 가장 앞에 서 있는 자는 순찰단주 염후룡이었다.
그는 원래 총관 벽하원과도 은밀히 왕래를 하고 있었으나, 어찌 된 일인지 이곳에 남은 것이다.
“중천의 새로운 주인을 뵙습니다!”
“중천의 새로운 주인을 뵙습니다!”
약 사백 명에 이르는 무인들이 큰 목소리로 예를 표했다.
그들을 바라보는 약추완의 입가에는 득의의 미소가 걸렸다.
이 얼마나 고대하던 순간이란 말인가.
수하들을 내려다보는 약추완의 입에서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들어라! 앞으로 이곳을 약림이라 칭하겠다!”
약림은 곧 약가의 무림을 칭하는 말이었다.
“약림의 새로운 주인을 뵙습니다!”
“약림의 새로운 주인을 뵙습니다!”
약추완이 걸음을 옮기자 사백여 명에 이르는 무인들이 그 뒤를 따라붙었다.
그는 천천히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계단이 끝나는 곳에 그를 위한 새로운 자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위엄을 갖추려 느긋했던 걸음은 조금씩 빨라졌다.
전에는 짧게만 느껴졌던 계단이 오늘은 왜 이렇게 길고 높기까지 하단 말인가.
정상에 오른 약추완은 잠시 천주의 전각을 바라보다가 중천이 내려다보이는 가장자리로 이동했다.
북림의 풍천양이 그랬고 중천의 시천세 또한 그러했다.
그들 모두 이곳의 주인이 된 날, 이 자리에서 오만한 모습으로 세상을 내려다보았었다.
약추완은 그들처럼 그 자리에 서서 자신이 다스릴 강호를 내려다보았다.
“약림이 세상에 열리는 날에 술 한 잔이 없어야 쓰겠느냐. 잔치를 준비하라.”
“존명!”
수하들이 잔치를 준비하기 위해 달려 내려가고, 이제 그의 곁에는 순찰단주와 십여 명의 수하들만 남았다.
“자네들도 내려가 보게. 나 혼자 있고 싶으니.”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림주님.”
껄껄껄……
“고맙네. 순찰단의 일은 전부 자네에게 일임하겠으니 앞으로도 수고해 주게.”
염후룡의 인사에 약추완은 제법 그럴듯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감사합니다, 림주님.”
염후룡이 예를 끝내고 내려가자 약추완은 그의 처소로 걸어갔다.
처소 앞에는 일을 보는 여인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머리를 조아렸다.
“인사는 되었으니 맡은 일을 보거라.”
“예.”
여인들이 흩어지자 그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언제나 시천세가 앉아 있던 회의실로 들어간 약추완은 시천세가 앉아 있던 자리에 앉아보았다.
기다란 탁자 끝으로 회의실로 들어오는 문이 보였다.
막상 앉아보니 그리 좋은 자리도 아니었다.
‘풍천양도 그렇고 시천세도 그렇고 왜 이 자리를 그렇게 좋아했는지 모르겠군.’
막 몸을 일으키려던 약추완은 회의실 탁자 밑에 있는 서랍을 발견했다.
지금까지 탁자에 서랍이 있는지도 몰랐던 그는 호기심이 일어 서랍을 열어 보았다.
서랍 안에는 서류가 빼곡하게 들어 있었다.
이 자리에 앉아 보고를 받다 보니 서류를 이곳에 넣어 둔 것 같았다.
약추완은 서랍에 들어 있는 서류들 중에 하나를 꺼내 펼쳤다.
그리고 그의 눈은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맙소사…….”
이건 서류가 아니었다.
깊고 높은 고등의 무리(武理)를 휘갈겨 놓은 것이었다.
아마도 시천세는 이 자리에 앉아 여러 무공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촤르르, 촤륵,
약추완의 손이 빨라지고 서랍의 서류들은 하나씩 그의 손에 의해 펼쳐졌다.
하얀 종이에는 종횡으로 여러 무공들의 일부가 나열되어 있었다.
삼류무공의 무리에서부터 약추완이 들어가 보지 못한 새로운 무공의 무리들까지, 지금까지 그가 긁어모았던 무공비급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보물이었다.
특히 고등 무리에 삼류 무공의 무리를 접목시킨 부분은 전율까지 일게 만들었다.
하하…… 하하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지만, 입에서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것만 있으면 강호의 그 어떤 자도 두렵지 않았다.
이것만 있으면 몇 년 안에 강호제일인이 될 것이다.
“아니야. 이럴 때가 아니야.”
약추완은 급히 깨끗한 종이를 가져다가 서랍에서 나온 무공의 무리를 전부 베꼈다.
시천세가 언제 잊은 것을 기억해내어 찾으러 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무공의 이치를 베끼는 약추완의 손이 감격으로 덜덜 떨려 글씨가 자꾸 엇나갔다.
그렇게 한 시진 가까이 무공의 무리를 필사한 약추완은 서류들을 원래대로 되돌렸다.
끌끌끌…….
호북으로 향하는 시천세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연신 웃음을 흘렸다.
뒤를 따르던 종예도 미소를 지었다.
“호북 이천의 새로운 거처가 주공의 마음에 쏙 드실 겁니다.”
종예는 시천세가 즐거워하는 이유를 잘못 짚고 있었다.
“아. 그 때문에 웃고 있는 게 아니야. 그 버러지보다 못한 놈을 생각하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어.”
“재미있는 일이라면 함께 웃게 해 주십시오.”
하하하……
시원스런 웃음과 함께 시천세의 왼팔이 종예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종예의 얼굴이 붉어졌지만 그의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회의실 서랍에 무공의 무리를 넣어 놓고 왔지. 그놈이 구경조차 하지 못한 고등 무리에서부터 삼류 무공의 무리까지, 그것만 있으면 놈은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해질 거야.”
이건 전혀 재미있는 일이 아니었다.
“왜 그놈에게 그런 호의를 보이셨습니까?”
종예의 말투에는 은근한 나무람까지 섞여 있었다.
그러나 시천세는 그에 대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이 정도의 일로 화를 낸다면 우두머리로서 자격이 없었다.
“북쪽의 연비강을 놈에게 맡겨야 하지 않겠나. 약추완, 그놈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람도 재물도 아닌 바로 무공이지.”
“하지만 아무리 그놈이 강해진다고 하더라도 연비강을 막지는 못할 겁니다.”
아무리 약추완을 높게 봐준다고 하더라도 연비강에게는 미치지 못했다.
설사 놈의 무공이 연비강보다 더 강해진다고 하더라도 결과는 연비강의 승리로 끝날 것이라 확신했다.
그만큼 연비강이라는 존재는 종예의 마음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끌끌……
“놈은 그 사실을 몰라. 하나 놈이라면 십만대산을 멸망시킬 수는 있을 거야. 놈은 연비강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십만대산을 공격할 수밖에 없어. 결국 연비강 그놈은 처음처럼 혼자가 되겠지.”
“그렇다고 해도 놈이 죽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시천세는 종예의 어깨를 감싸고 있던 팔을 풀었다.
“그다음은 종예의 추측에 맡기지.”
그 말을 남기고 시천세는 앞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일보를 내디딜 때마다 그의 신형은 사라졌다가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종예는 공간을 건너뛰어 순식간에 사라져 가는 그의 뒤를 쫓으며 생각에 잠겼다.
‘수하들을 전부 잃은 연비강은 어떻게 움직일까?’
아…….
이제야 알겠다.
“그놈은 주공을 찾아올 겁니다.”
***
남쪽에서 북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던 비강은 호북 이천으로 방향을 틀었다.
“호북에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강호의 중심이 북쪽에서 호북으로 이동을 하니 멀리서나마 구경을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소.”
비강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했는지 담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강호의 중심이라니, 무슨 말씀인지 도통 알아듣지 못하겠습니다.”
하하……
“가보면 알 것이오.”
두 사람이 걷고 있는 넓은 관도에 유랑걸식하는 이들이 드문드문 눈에 띄었다.
홀로 떠도는 자들도 있었으나 어린아이들까지 있는 가족들도 있었다.
강호에서는 흔한 풍경이라 담혁수는 그러려니 넘어갔으나 비강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재작년에는 이런 이들이 별로 눈에 띄지 않았으나, 작년부터 눈에 띄는 횟수가 많아졌다.
이렇게 몇 년이 흐른다면 길을 걷는 사람들 중에 태반이 유랑걸식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재미있군.”
비강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담혁수가 또 의아해 하며 물었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으십니까? 교주님.”
“저들을 보시오. 저들은 먹을 것이 없어 거지처럼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고 있소. 한데 기루나 유명한 요리점, 포목점, 장신구점에는 은자를 쓰지 못해 안달난 이들이 넘쳐 나고 있소. 한쪽에서는 식량 한 톨 구하지 못해 유랑걸식을 하는데, 한쪽에서는 온갖 사치란 사치는 다 부리고 있잖소.”
“세상이 원래 그런 걸 어쩌겠습니까. 그렇다고 우리가 저들을 전부 구해 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말은 그렇게 했으나 담혁수도 지금 이 상황이 답답하기만 했다.
십만대산으로 몰려드는 유랑민들이 날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을 불쌍히 여겨 며칠에 한 번씩 식량을 나눠 주고 있기는 하지만 이제는 거의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결국 하는 수없이 수하들로 하여금 십만대산으로 들어오는 자들을 쫓아내고 있는데, 명령을 내리는 담혁수의 심정도 편치만은 않았다.
“그런 뜻으로 한말이 아니오. 이런 자들이 많아지면 결국 민란이 일어나게 될 거요. 그렇게 되면 강호에도 그 영향이 미칠 것이고 신교도 어쩔 수없이 휩쓸리게 되오.”
하하……
“아무리 그래도 설마 민란이 일어나겠습니까?”
“야심차고 똑똑한 자가 저들 앞에 선다면 반드시 일어나게 될 거요.”
어둠이 지기 시작하자 담혁수는 서둘러 객잔을 찾았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깃발이 펄럭이고 있는 것이 보여 두 사람은 그곳을 찾아들어갔다.
식사를 끝내고 객잔과 따로 떨어진 별채를 안내받아 들어간 그들은 점소이를 불러 목욕물을 준비시켰다.
점소이가 물을 길어 목욕통에 채우는 동안 두 사람은 별채에 딸린 마당에 앉아 하릴없이 어둠을 빛내며 날아다니는 반딧불을 구경했다.
그때 관도로 이어진 길을 통해 삼십대로 보이는 여인과 열두어 살 정도 된 계집아이 하나가 마당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