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 연비강 23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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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663회 작성일소설 읽기 : 신마 연비강 236화
제236화. 복수의 끝(3)
콰콰콰…… 콰쾅!
성벽에 용의 문양은 그려지지 않았다.
성벽을 이루고 있던 돌덩이들이 부서지고 갈라졌다.
다섯 줄기로 날아간 하얀 악마들은 성벽뿐만 아니라 문루와 높디높은 정문까지 집어삼켰다.
“아직 약추완은 안에 남아 있소?”
비강은 무인들의 처절한 비명 소리를 한쪽 귀로 흘려들으며 물었다.
“예. 많은 무가와 무문의 가인들과 제자들이 빠져나갔지만 약추완은 없었습니다. 아직까지 안에 남아 있을 겁니다.”
약추완이 이곳에 남아 있으니 약하림도 이곳에 있을 것이다.
“그럼 수고해 주시오.”
살가는 어디론가 빠르게 사라지고, 비강은 부서진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
전에는 이곳을 지키기 위해 싸웠지만 오늘은 이곳을 멸절하기 위해 싸울 것이다.
성문을 들어섰지만 달려드는 적들은 없었다.
콰쾅! 쾅……!
비강은 눈에 보이는 건물들을 향해 휘황한 강기다발을 마구 날려 보냈다.
건물 안에 숨어 엿보던 자들이 부서지는 건물에 깔려 비명을 내질렀다.
그들은 이곳에서 도망쳐야 한다는 머리도 없었고, 그렇다고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할 용기조차 없었다.
언제 나타났는지 검은 복면을 쓰고 야행복을 입은 살수들이 횃불을 여기저기 던져 넣었다.
으아아악……!
“살려 줘! 제발 여기서 꺼내 줘!”
건물 잔해에 깔린 자들은 바로 옆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하자 목숨을 구걸했다.
하지만 살수들은 이미 사라지고 난 후였다.
비강은 계단을 밟아 천천히 위로 오르기 시작했다.
땅!
한걸음, 한걸음 위로 오르던 비강은 좌측에서 튀어나오는 검을 쳐 내고 목을 갈랐다.
그래도 아직까지 약추완에게 충성을 바치는 자들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었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눈앞으로 쏟아져 날아오는 화살들이 보인다.
쏴아아……
그러나 그 화살들은 비강을 지나쳐 나무나 바닥에 틀어박혔다.
화살을 쏘아 보내던 자들의 머리 위에 모습을 드러낸 비강은 땅으로 내려서며 좌우로 검을 휘둘렀다.
거미줄 같은 선들이 지나가자 무인들의 입에서 애끓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끄아아악! ……끄어어……!
토막 난 시체들에서 뿜어 나온 핏물은 계단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려갔다.
비강은 무심한 얼굴로 다시 계단을 밟았다.
“어떻게…… 이제 어떻게 해요? 어떻게 하냐고요?”
약하림은 약림의 성문이 박살 나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약추완의 전각으로 재빠르게 몸을 피신했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비명 소리를 듣고 있는 약추완은 자신의 죽음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확신했다.
그러나 연비강에게 이렇게 쉽게 자신의 목을 내주기는 싫었다.
“가자꾸나.”
약추완이 몸을 일으켜 방을 나서자 약하림도 얼른 뒤를 따라 움직였다.
전각을 나온 약추완과 약하림의 옆을 네 명의 호위들이 따라붙었다.
그들 모두 약가의 가인들이었다.
원래 호위대는 일백 명이 넘었으나 대부분 백리혈을 막기 위해 아래쪽으로 내려간 상태였다.
전각 뒤쪽의 능선을 따라 내려가면 예전 황곡 고수들이 머물던 북은각이 나타난다.
그곳을 통한다면 어떻게든 무사히 몸을 뺄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이 능선을 내려가기도 전에 외팔이 노인과 검은 복면을 쓴 자들이 앞을 막아섰다.
“누구냐?”
호위들이 약추완의 앞을 막아서며 물었다.
“살가. 약무한의 목을 베어버린 살수가 바로 나요.”
“바로 네놈이었군. 연비강이 여기까지 짐작하고 있었던가…….”
살가의 대답에 호위들은 어쩔 줄 몰라 했다.
하지만 약추완은 호위들과는 달랐다.
자신들이 모셨던 주인이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싫었던지 호위 둘이 앞으로 뛰쳐나왔다.
순간 살가의 손이 흐릿해졌다.
퍼퍽!
두 개의 검첨은 살가에 닿기도 전에 멈췄다.
끄르르륵……
짧은 비도에 목을 꿰뚫린 가인들은 힘없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약추완은 허리의 검을 빼 들었다.
몸은 엉망이었지만 도망을 치려면 이들을 전부 죽여야 했다.
그러나 살가는 엉망인 몸으로 상대할 수 있는 살수가 아니었다.
그때 등 뒤에서 꿈에서조차 듣고 싶지 않았던 악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까지인가? 조금 아쉽군.”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백리혈의 손에서 절대로 도망칠 수 없다는 사실은 이미 느끼고 있었다.
아니, 백리혈이 아니라 일월신교의 마왕이라 불리던가.
강호에서 불리고 있는 별호가 어찌 되었든 이제는 상관이 없었다.
“네가 나를 죽인다면 강호인들은 전부 너를 금수만도 못한 자라 욕할 것이다.”
약추완은 끝까지 삶의 끈을 놓고 싶지 않았다.
“이유는?”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는 비강의 짧은 물음에 그는 천륜이라는 것을 입에 올렸다.
“너 혼자 세상에 뚝 떨어진 것이 아니지 않느냐. 비록 원치 않은 상황으로 인해 작금의 상황이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엄연히 나는 너의 외조부이고 이 아이는 너의 어미이지 않느냐.”
하하하하……
유난히도 맑은 비강의 웃음소리가 하늘을 향해 퍼져 나갔다.
“누가 그래? 내가 너희들의 혈육이라고. 웃기지도 않는 수작이로군. 내 아버지의 이름이 연서문인 것은 맞지만 내 어미와 어미의 아비가 되는 자는 존재하지 않아. 설마 극독을 먹이고 목까지 벤 자가 어미이고 외조부라 칭한다면 당연히 목을 베어야 하겠지. 그렇지 않나?”
모든 것이 끝났다.
저 연비강이라는 잔혹한 놈은 천륜마저도 우습게 여기고 있었다.
이대로 죽고 싶지는 않았지만 살아날 방법이 없었다.
“이제…… 이제 그만 죽여라, 백리혈.”
결국 약추완은 자신의 삶을 포기했다.
“아…… 안 돼. 나는 절대로 죽고 싶지 않아.”
그에 반해 약하림은 미련을 버리지 못해 발버둥을 쳤다.
그녀는 비강을 향해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스악.
약하림이 머리를 조아리는 순간 비강의 검이 약추완의 다리를 베고 지나갔다.
크아아아악!
약추완은 처절한 비명을 내지르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뿐만 아니라 약하림의 목 어름에도 긴 혈선이 생겨났다.
아아악!
약하림은 뒤늦게 자신의 목을 감싸 쥐며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둘 다 당장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툭.
비강은 검을 쥐고 있는 약추완의 손을 걷어찼다.
공중으로 날아오른 검을 낚아챈 살수 하나가 살가에게 다가가 검을 바쳐 올렸다.
“둘을 다 살려줄 수는 없어. 너희들이 결정해.”
이 얼마나 잔인한 말인가.
비강은 서로에게 죽음을 강요하고 있었다.
약추완과 약하림은 비강의 요구에 몸을 벌벌 떨었다.
“이대로 내버려 둔다면 약추완은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죽게 되어 있어. 그러니 일찍 죽여주는 게 좋을지도 몰라.”
교활한 악마의 속삭임이었다.
살가에게 단검 하나를 건네받은 비강은 그것을 두 사람 앞에 던져놓았다.
“악마가…… 강호에 나왔구나.”
세상에 어찌 이렇게 악한 놈이 있단 말인가.
약추완은 절망과 공포가 가득한 눈으로 비강을 올려다보았다.
애초부터 자신은 상대가 아니었다.
연비강이 이렇게 잔인하고 지독한 놈이라는 걸 알았다면, 정체를 알자마자 무릎을 꿇었을 것이다.
그렇게 했다면 지금보다 살아날 가능성은 훨씬 더 높았을 것이다.
먼저 몸을 움직인 쪽은 약하림이었다.
그녀는 주춤주춤 단검을 향해 피 묻은 손을 뻗었다.
“하림아…….”
그러나 약추완의 목소리에 단검을 향해 뻗어가던 손을 얼른 거두어 들였다.
약추완은 비강이 자신들을 절대로 살려 주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나는…… 얼마 살지 못한다. 그러니…… 네 손으로 나를 죽여 다오.”
약추완의 그 말에 약하림은 거두어 들였던 손을 천천히 뻗었다.
단검을 움켜쥐는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피 묻은 손으로 단검을 움켜쥔 그녀는 잠시 망설이는 것 같더니 약추완의 가슴에 단검을 꽂아 넣었다.
끄으으으으……,
약추완은 온몸을 부르르 떨더니 힘없이 땅에 몸을 뉘었다.
“알고…… 있느냐? 너는…… 하림과 너무 많이…… 닮았어.”
그가 비강을 얼굴을 올려다보며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하아……
약추완은 탄식과도 같은 긴 한숨과 함께 눈을 감았다.
으아아아악!
그제야 약하림은 손에 쥐고 있던 단검을 떨어뜨리며 비명을 질렀다.
그녀를 잠시 지켜보던 비강은 살가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 안에 남아 있던 자들은 대부분 도망치고 없을 것이오. 일보는 자들을 제외하고 남은 자들이 있다면 전부 제거하시오.”
“존명.”
명령을 받은 살가는 살수들을 이끌고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
비강은 울부짖고 있는 약하림을 지켜보다가 자리를 비켜 주었다.
그녀의 목에서는 끊임없이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약하림은 이리 비틀 저리 비칠거리며 천천히 계단을 밟아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비강은 그런 그녀를 멀찍이서 지켜보며 뒤를 따라 걸었다.
비틀거리던 그녀는 발이라도 헛디뎠는지 계단 아래로 굴렀다.
끄아아악! 커억!
피를 한 사발이나 토해 낸 약하림은 간신히 몸을 일으켜 계단 옆으로 나 있는 비탈길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계단을 밟아 내려가기가 너무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몇 번 발을 떼지도 못하고 다시 비탈길을 나뒹굴었다.
허억! 허어…… 억!
거친 숨을 몰아쉬던 그녀는 하늘에 떠 있는 수많은 별들을 올려다보았다.
“살고…… 싶어.”
별빛은 점점 흐려지고 그 자리에 연서문이 나타났다.
그는 슬픈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사라졌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약추완의 환영이었다.
약추완은 약하림을 향해 어서 오라는 듯 손짓을 했다.
그 환영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리고 약추완의 환영은 더욱 또렷해져 갔다.
비강은 눈조차 감지 못하고 숨을 거둔 약하림을 내려다보았다.
감정 없는 투명한 눈과 생기를 잃은 약하림의 눈이 마주쳤다.
“이제 이곳에 남아 있는 자들은 일꾼들과 우리들밖에 없습니다, 교주님.”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인 비강은 약하림의 눈에서 시선을 떼어 냈다.
“시신들은 전부 불태우시오. 재물들은 따로 모아두었다가 일월신교가 도착하면 그들에게 넘겨주고, 또한 공이 큰 자들은 각주가 따로 선별해 알아서 포상을 해 주시오.”
“저…… 약추완과 약하림은 따로 무덤을 만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살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비강의 속내를 미리 짐작해 그런 말을 꺼냈다.
하지만 그건 잘못된 짐작이었다.
“다른 시신들과 다를 것이 없소.”
“……알겠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주인이다.
살수의 삶을 살며 수많은 자들을 만났으나 이 정도로 무서운 사람은 교주가 처음이었다.
교주는 무공이 아니라 마음이 무서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런 교주를 존경한다.
“도대체 왜 구파일방과 육대세가의 소집을 서두르는 것이오? 맹주.”
맹주를 찾아온 제갈곤은 드물게 얼굴까지 붉혔다.
일월신교는 벌써 섬서를 넘어섰다고 했다.
또한 일월신교의 교주 연비강은 약가와 악가를 완전히 파괴했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정파가 일월신교와 부딪친다면 피해는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그럼 시천세의 명령을 거부하자는 겁니까? 군사. 그자가 보복에 나선다면 우리 정파는 강호에서 씨가 마를 것입니다.”
제갈곤은 오진권이 무척 답답했다.
“최대한 출전을 늦춰야 한다고 전에도 말씀드리지 않았소? 저들은 서안에 도착할 때까지 무수한 싸움을 벌여야 할 거외다. 서안에 도착해서도 마찬가지요. 먼저 약림과 싸워야 하고 그동안 약림에 협조를 했던 무가나 무문들과 싸움을 벌이려면 적지 않은 희생을 각오해야 할 거외다. 적을 칠 때는 힘이 빠졌을 때 쳐야 우리 쪽 피해가 적은 법이오. 어찌 되었든 이미 본산과 본가에서 무인들이 출발했다고 하니 행군 속도를 조금 늦춰달라고 해야 하오이다.”
열변을 토하는 제갈곤은 지그시 지켜보던 오진권이 입을 열었다.
“군사께서는 지금 약림이 멀쩡할 것이라 보고 있는 겁니까? 벌써 백리혈에 의해 멸망했을 겁니다.”
“그걸 어찌 아시오?”
제갈곤도 비강이 약림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약추완은 살아남을 것이다.
그자는 권력과 목숨을 위해서라면 원수들에게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고개를 숙이는 자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