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 연비강 23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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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636회 작성일소설 읽기 : 신마 연비강 235화
제235화. 복수의 끝(2)
가인들은 시위에 살을 얹어 비강을 겨누었다.
그러나 시위를 놓기도 전에 새하얀 예기들이 그들의 눈앞에 들이닥쳤다.
쉬아아악! 쉬악!……!
공간을 가득 메운 하얀 선들은 앞을 가로막고 있는 모든 것들을 갈라 버렸다.
콰콰쾅! 쾅!……!
가인들이 갈라지고 문과 담장이 갈라졌다.
토막이 나 널브러진 가인들의 피는 땅바닥과 무너진 담장을 적셨다.
비강은 박살 나 기울어진 악가의 문루를 올려다보며 안으로 들어갔다.
꽈지직! 콰르릉……!
비강이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그나마 남아 있던 형체를 유지하고 있던 문루는 땅바닥에 널려 있는 시신들을 덮쳤다.
따당!
안으로 들어선 비강은 좌측에서 갑자기 날아드는 창대를 튕겨 내고 가인의 가슴을 갈랐다.
끄으으…… 끄르르륵……
검은 수염이 멋들어진 중년 사내가 애끓는 신음 소리를 내며 뒤로 넘어갔다.
콰쾅! 쾅! ……!
뒤이어 검신을 빠져나간 강기 덩어리들은 웅장한 전각의 기둥들을 부숴놓았다.
콰드드드드……!
자신을 떠받치고 있던 기둥들이 박살 나자 전각은 괴로운 울림을 토해 냈다.
콰쾅!
기어이 뿌연 먼지를 피워 올리며 웅장하게 버티고 있던 전각이 주저앉았다.
비강은 가볍게 땅을 차며 주저앉은 전각의 지붕 위에 날아 내려섰다.
앞을 가로막고 있던 전각을 넘어서자 뒤쪽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일백여 명에 가까운 가인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고, 그 가운데 머리카락이 하얀 늙은 노인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연무장 안으로 들어서는 비강은 일렬로 늘어서 있는 가인들을 좌측에서 우측으로 천천히 훑었다.
비강의 시선을 받는 가인들의 표정에는 긴장감이 역력했다.
연무장 중앙에 도착한 비강이 걸음을 멈추자 의자에 앉아 있던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는가 싶더니 바로 무릎을 꿇었다.
“제발, 가문에 자비를 베풀어 주시오. 이 늙은이가 이렇게 엎드려 빌고 있소.”
처음 보는 노인이었다.
하지만 그가 이 가문의 가장 웃어른이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이 갔다.
“당신은 누구지?”
비강의 물음에 노인은 머리를 땅에 가져다 댔다.
“그대의 손에 목숨을 잃은 악규의 아비이자 악추산의 할아비가 되는 사람이오.”
노인은 잠시 심호흡을 하더니 말을 이었다.
“그대는 나의 아들은 물론이고 수많은 가인들을 죽여 분풀이를 충분히 하지 않았소? 그러니 제발 우리 가문이 대대로 이어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오.”
허어……
비강은 놀란 가슴을 짧은 탄식으로 진정시켰다.
세상에 어느 누가 아들과 손자를 죽인 자를 향해 무릎을 꿇을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비강의 화를 돋우는 꼴이 되고 말았다.
“왜 내가 당신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야 하지?”
그동안 용서를 빌 시간은 많고 많았다.
아니, 당장 정문 앞에서도 자신을 죽이려 사력을 다했던 자들이 아니던가.
그런데 이제 와서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하니 어찌 저들을 믿을 수 있을까?
늙은 노인은 땅에 박고 있던 머리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대는…… 가모의…… 아들이지 않소? 그러니…… 그러니 우리 가문과는 남이라 볼 수 없는…… 관계라 할 수 있을 것이오.”
비강은 이를 악물었다.
마음속에서는 그 주둥아리를 닥치라는 외침이 수없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런 모습은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크하하하하……!
오히려 비강은 웃었다.
바닥에 엎드려 있던 노인은 그 웃음소리를 듣고는 비강이 자신들을 용서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죽여라!”
그리고 그 외침은 비강이 기다리고 있던 소리이기도 했다.
채챙! 챙!……!
숨을 죽이고 있던 가인들은 일제히 검과 창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그들의 눈앞으로 하얀 악마들이 날아들었다.
노인은 철창을 들어 마치 악몽과도 같은 악마의 형상과 맞섰다.
콰콰콰…… 콰쾅!
다섯 갈래로 나뉘어 날아간 악마들은 가인들을 휩쓸고 뒤쪽에 서 있던 전각을 부숴놓았다.
깊게 패인 웅덩이는 노인이 서 있던 자리에서부터 전각을 지나 뒤쪽까지 이어졌다.
크크크크……
비강은 아직도 살아 있는 악가의 가인들을 둘러보며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
초조하게 방을 서성이던 약하림은 의자에 앉아 물을 들이켰다.
며칠째 한숨도 잠을 자지 못했다.
눈을 감기만하면 예전에 죽은 남편 연서문이 나타나 자신을 향해 어서 오라는 듯 손짓을 했다.
밤낮으로 악몽에 시달리다 보니 살은 더욱 빠져 이제 뼈만 앙상하게 남았다.
새까맣게 윤기가 흐리던 머리카락에도 서리가 내린 듯 하얗고 새둥지처럼 푸석푸석했다.
챙그랑!
약하림은 신경질적으로 방구석을 향해 물 잔을 집어던졌다.
“이제 제발 그만 좀 해!”
그녀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움켜잡으며 괴롭게 소리쳤다.
“괜찮으세요? 마님.”
수발을 드는 시녀가 방 안으로 들어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도 자신이 수발을 들고 있는 이 여인이 정상이 아니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고귀하고 기품이 넘쳤던 악가의 가모는 사라지고 앙칼지고 신경질적인 늙은 마귀가 남았다.
“누가 들어오라고 했어? 꺼져!”
시녀는 얼른 머리를 조아리며 방을 나갔다.
탁자에 엎드려 있던 약하림은 밖에서 들려오는 급박한 발자국 소리에 얼른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이냐?”
“가…… 가모…….”
문밖에 도착한 가인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벌컥 문을 열어젖힌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 있는 가인을 노려보았다.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았느냐?”
“그것이…… 그것이…… 본가가 백리혈의 손에 몰살을 당했다고 합니다.”
약하림은 눈물을 흘리며 간신히 대답을 내놓은 가인을 매섭게 노려보다가 거칠게 문을 닫았다.
쾅!
문을 닫은 그녀는 참고 참았던 울분을 토해 냈다.
으아아악……!
“이 개자식아! 내가……! 기필코 네놈을 찢어 죽일 것이다! 이 개자식아!”
으아아악……!
와장창! 쨍그랑!
약하림은 방을 장식하고 있던 물건들을 마구 사방으로 집어던졌다.
허억! 헉!
반 시진 가까이 발광을 하던 그녀는 옷매무새를 고치고는 방을 나섰다.
그녀가 향하는 곳은 바로 약추완의 전각이었다.
“산서 육도문과 정주 유가가 제자들과 가인들을 이끌고 성을 나갔다고 합니다, 림주님.”
호위로부터 보고를 받은 약추완은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가 자랑하고 좋아했던 전각은 여기저기 불에 탄 자국이 남아 있어 흉물스럽기 그지없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
천하를 아우를 것 같은 권력도 목숨을 바쳐 떠받쳐주는 자들이 없다면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십만대산의 패전이후 명예를 좇아 합류했던 강호인들이 먼저 떠나갔고, 약림의 기둥과 대들보였던 무가와 무문들이 하나둘 이탈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 후 약가가 몰살을 당하자마자 약림의 기둥이라 할 수 있는 하남 염가가 가장 먼저 성문을 빠져나갔다.
이제 악가도 몰살을 당했으니 남은 무가와 무문들도 떠나갈 것이다.
클클클……!
약추완은 문득 자신의 손등을 내려다보며 어이없이 웃었다.
고작 십여 일 사이에 몸 안의 모든 내공이 빠져나간 것처럼 손등에 수많은 주름이 생겼다.
“악가의 가모께서…….”
쾅!
호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방문이 거칠게 열리며 약하림이 성난 기세로 들어섰다.
“이제 어떻게 할 거예요? 아버님!”
약추완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약하림을 응시했다.
“뭘 어떻게 하란 말이냐?”
“연비강, 그 개자식을 죽여야 하잖아요! 당장 무인들을 이끌고 가 그놈을 죽여 버려요!”
약추완을 향해 악을 써대던 약하림은 아버지의 흐릿한 눈을 대하자 갑자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으헝헝! 으헝……!
“추산이의 복수를 해야 하잖아요. 제 남편의 복수를 해야 하잖아요. 약가와 악가의 복수를 해야 하잖아요.”
전부 맞는 말이었다.
그런데 무슨 힘이 남아 있어 복수를 한단 말인가.
“왜 저를 그자에게 시집보내셨어요? 왜 제게 그자와 자식 놈에게 독을 먹이라고 하셨어요? 왜? 왜? …….”
약추완은 약하림의 원망을 묵묵히 받아들였다.
하지만 억지로 시집을 보낸 것은 아니었다.
연서문은 누가 보더라도 사내답게 잘 생겼고 행동거지와 목소리는 점잖았다.
한 번밖에 보지 못했지만 약하림도 연서문을 마음에 들어 했었다.
대성통곡을 하며 신세 한탄을 하던 약하림이 갑자기 고개를 쳐들었다.
“황곡에 부탁을 해 봐요. 우리를 지켜달라고 부탁을 해 봐요. 우리를 지켜 주지 못할 거면 저와 아버님이라도 받아달라고 부탁을 해 봐요.”
그 방법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약림에 도착하자마자 황곡에 사람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아무런 답변이 없었다.
그렇다는 것은 시천세가 약림의 멸망을 지켜보기만 한다는 의미였다.
“그래. 그러자꾸나.”
약추완은 희미한 목소리로 대답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직접 황곡을 찾아가 고개를 조아린다면 쫓아내거나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약림에 남아 있는 약가와 악가의 가인들을 이끌고 간다면 받아줄 것이다.
전보다 더욱 치욕스런 일을 겪겠지만 목숨을 구한다면 어떤 것이든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내일 떠날 것이니 너도 나가 준비해라.”
“예, 아버님.”
약하림의 얼굴에 조금이나마 생기가 돌았다.
그러나 약추완은 여전히 시체와 다름없는 얼굴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약림을 떠나는 것이 두렵다.
이곳을 떠난다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았다.
후우……
오랜만에 서안의 거리를 거닐었다.
추운 겨울이기는 하지만 이곳은 여전히 오가는 사람들로 인해 활기가 가득했다.
지나가던 사람이 걸음을 멈추고는 몸을 돌려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포목점 앞에 걸음을 멈춘 비강은 안으로 들어가 가장 비싼 무복을 골랐다.
“은자 열 냥입니다, 손님.”
“여기 있소.”
피에 절은 무복을 벗어 버리고 검붉은 비단무복으로 갈아입은 비강이 밖으로 나서려 할 때 포목점 주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호, 혹시 연 부관님 아니신지요?”
“맞소. 오랜만이오, 주인.”
“여, 역시 연 부관님이시군요. 그동안 평안…… 아니지. 약림에 들어가시는 길이신지요?”
“그렇소.”
“아…… 안녕히 가십시오.”
고개를 꾸벅 숙인 주인은 비강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쯤 거리의 사람들을 서둘러 불러 모았다.
“연비강…… 아니…… 백리혈…… 아니…… 마인…… 일월신교의 마인이 나타났소!”
이제 서안의 사람들에 십만대산에 일월신교가 자리 잡고 있었다는 사실은 비밀도 아니었다.
그곳에서 패하고 살아 돌아온 사람들의 입을 통해 퍼져 나갔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을 흘려들으며 하늘을 올려다보니 어느새 해가 기울어가고 있었다.
약추완이 황곡으로 도망을 칠까 봐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온 것인데, 덕분에 여러 끼를 굶어 배가 출출했다.
마을을 막 벗어났을 때쯤 외팔이 노인이 다가와 머리를 조아렸다.
“오셨습니까? 교주님.”
“아. 고생이 많으셨소, 살각주.”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외팔이 노인은 다름 아닌 살각의 각주 살가였다.
“혹시 건량 가진 것 있소? 몇 끼를 굶어 그런지 배가 등에 달라붙은 것 같소.”
하하하……
살가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품에서 건포를 꺼내 내밀었다.
두 사람은 약림을 향해 걸었다.
“어디에 숨어 계셨소?”
“서안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살수들은 어디에서나 몸을 숨길 줄 알아야 합니다. 저는 살수들을 허투루 키우지 않았습니다, 교주님.”
건포를 씹으며 걷고 있는 비강의 양편으로 검은 복면을 쓴 자들이 나타나 숲길을 통해 약림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그들의 목표는 약림으로 들어서는 길 양쪽 산 정상에 자리 잡고 있는 초소였다.
저번에 살행을 할 때에도 초소를 지키던 무인들을 가장 먼저 죽여 없앴다.
흐흠……
눈앞에 약림의 성벽이 보이기 시작하자 비강은 잠시 걸음을 멈췄다.
성벽 너머로 살수들에 의해 불에 탄 건물들의 시커먼 잔해들과 불에 타지 않은 멀쩡한 건물들이 보였다.
비강의 시선은 성벽 너머에서 성벽으로 이어졌다.
저 성벽은 예전에 황곡 고수들과 일전을 벌였을 때 검으로 용의 문양을 그려 넣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흔적이 말끔하게 사라지고 없었다.
아마도 약추완이 새로 보수를 한 것 같았다.
비강은 성문을 향해 걸어가며 검을 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