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천왕 2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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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84회 작성일소설 읽기 : 절대천왕 20화
20화
3
포봉은 어디서 구했는지 악양부 관청의 표식이 달린 마차를 끌고 왔다.
아무리 광한방이라 해도 관청의 마차는 뒤지지 않을 터.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마차가 동정호변에 도착하자, 작은 배 한 척이 마차 바로 옆으로 다가왔다. 세 사람은 그 배를 타고 동정호로 날듯이 나아갔다.
아침 호수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서늘함마저 느껴질 정도로 차가웠다.
악양이 까마득히 멀어지자 노를 젓던 선우궁현이 입을 열었다.
“포봉은 원래 장강수로연맹에 속했던 구포채의 채주였다. 팔 년 전에 신월맹의 공격을 받고 다 죽어가던 것을 내가 구해주었지.”
무안함에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소영령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커다란 눈이 더욱 크게 뜨여졌다.
“그럼 수적이었단 말이에요?”
선우궁현이 빙그레 웃었다.
“그 후 손을 털고 악양에 객잔을 차렸으니, 이제는 수적이 아니라 장사꾼이라고 할 수 있지.”
소영령이 입을 삐죽이더니 조용해졌다.
자신으로서는 은혜를 입었으니 수적이 아니라 산적이라 해도 그를 욕할 자격이 없었다.
‘칫, 하필이면 수적이었던 사람에게 은혜를 입다니.’
더구나 어제 일을 생각하면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도 창피하기만 했다.
어젯밤.
선우궁현과 포봉이 서너 번이나 설명하고, 좌소천까지 나서고 나서야 그녀는 선우궁현이 진짜 만패철검 철검판관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털썩 무릎을 꿇고 사정했다. 그러자 선우궁현이 말했다.
“내가 직접 원수를 갚아줄 수는 없다. 그러나 네가 원수를 갚을 수 있게끔 도와줄 수는 있다. 어떻게 하겠느냐?”
소영령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더구나 도와주겠다는 사람이 중원칠기의 한 사람이다.
그래서 단번에 결정했다.
“영령이 스승님을 뵈어요!”
문제는 그녀가 스승이라는 말을 꺼내면서부터였다.
선우궁현이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자로 삼기는 그렇구나. 내 무공은 여자가 익히기에는 너무 거칠어서…….”
어차피 빼 든 칼, 무라도 잘라야 했다.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아니, 굽힐 수도 없었다. 그녀가 생각하기로 선우궁현은 하늘에서 내려온 단 하나의 동아줄이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배울 수 있어요. 아니, 배울게요. 저를 제자로 삼아주세요, 스승님.”
“그게 말이다…….”
“밥도 하고 빨래도 하고, 다할 게요!”
“그건 나도 할 줄 안단…….”
그녀는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선우궁현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제가 길거리에서 죽는 모습을 보고 싶으세요? 정말 그런 마음이세요?”
그런데 그때, 어찌 세게 잡아당겼는지 그만 선우궁현의 허리띠가 느슨해지며 바지가 아래로 내려갔다.
번개처럼 바지를 붙잡은 선우궁현이 다급히 말했다.
“알았다! 알았으니 일단 일어나거라.”
‘바지가 그렇게 힘없이 내려갈 줄 누가 알았나, 뭐?’
그래도 덕분에 중원칠기 중 한 사람을 스승으로 삼았으니 창피한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녀가 힐끔 쳐다볼 때다.
선우궁현이 말을 이었다.
“그는 살아남은 수하들을 모아서 새로운 장사를 시작했는데, 그 후로 나를 주인처럼 받들었다. 나야 귀찮아서 그러지 말라고 했지만 말이야.”
그가 좌소천을 바라보았다.
“그가 무슨 장사를 하고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좌소천은 곰곰이 생각을 해보고는 조금 자신없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비밀스런 장사일 것 같습니다.”
“왜 그런 생각을 했지?”
“그토록 긴 지하 통로를 여기저기 연결해 놓은 것도 그렇고, 은밀히 사람을 부리는 것도 그렇고. 그러면서도 자신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걸 보면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일을 한다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 그가 할 만한 비밀스런 장사는 어떤 것이 있다고 보느냐?”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백부님이 그분의 일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 걸 봐서는 정보업 쪽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살수업, 청부업, 매춘업, 암시장…….
비밀리에 할 수 있는 일은 적지 않게 있다.
그중 하나를 콕 집어 말하고,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까지 설명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과연 좌 군사의 아들답구나. 경험이 없어서 아직 제대로 여물지 않아 그렇지.’
선우궁현은 미소를 지은 채 좌소천을 응시했다.
“맞다. 네 말대로 그는 정보를 취급하고 있단다. 그것도 상당히 크게. 덕분에 나도 그의 도움을 많이 받았지.”
구포봉에 대한 것을 밝혔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
좌소천은 묵묵히 선우궁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휘이잉!
제법 강한 바람에 머릿결이 날렸다.
선우궁현은 눈앞을 가린 머리를 쓸어 올리고는 하늘을 바라보며 담담히 입을 열었다.
“훗날 그를 네 사람으로 만들어라. 네가 창공을 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거다. 그리고 기회가 되면 대홍산에 가서…….”
선우궁현의 이야기가 동정호의 바람에 실려 좌소천의 귓속으로 파고든다.
좌소천은 한마디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 바람을 모두 가슴에 담았다.
갑자기 뿌연 안개가 앞을 가로막았다.
선우궁현은 그럴 줄 알고 있었다는 듯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안개 속으로 배를 몰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뿌연 안개를 통과하자 앞이 환하게 밝아지더니 두 눈에 아름다운 섬의 모습이 가득 찼다.
안개밖에 보이지 않던 곳에서 느닷없이 섬이 나타나자 좌소천과 소영령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은도(霧隱島).
정말 이름에 어울리는 섬이었다.
그런데 조금 이상했다. 아무리 봐도 자연적인 안개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뒤를 돌아다보니 그렇게 지독하던 안개는 보이지 않고, 바다처럼 넓은 동정호만이 두 눈에 가득했다.
‘역시 기문진이구나!’
아버지에게서 기문진에 대한 것을 배운 적이 있다. 비록 깊이 있게 배우지는 못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어지간한 기문진은 파훼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 좌소천조차 안개가 기문진에 의해 생성된 것이라는 것을 눈치도 채지 못했다는 것은 그만큼 이곳에 펼쳐진 기문진이 뛰어난 것이라는 말이었다.
“굉장한 기문진이군요.”
천외천가가 찾지도 못할 곳으로 갈 거라 했다. 이제야 선우궁현의 말이 이해되었다.
“천승운무진이다. 밖에서는 보이지 않고 안에서는 모든 것이 다 보이지. 이곳에 진을 펼친 분이 말하길, 천하에서 이 진을 파훼할 수 있는 사람은 기껏해야 두세 사람뿐이라 하시더구나.”
“어느 분이 펼친 것입니까, 백부님?”
선우궁현의 얼굴에 아련한 표정이 떠올랐다.
“삼뇌자(三腦子)라는 분이시다. 이 백부의 선사가 되시는 분이시지. 섬에는 그분이 남긴 서책도 적지 않게 있으니 많은 공부가 될 거다.”
* * *
섬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러나 너무나 아름다웠다.
소영령은 배에서 내리자마자 입을 반쯤 벌린 채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푸른 초원이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그 뒤로 다섯 개의 작은 봉우리가 서로의 자태를 뽐내며 병풍처럼 둘러서 있었다.
선우궁현은 배에서 두 개의 커다란 자루를 내리고는 좌소천과 함께 하나씩 짊어지고 초원을 가로질렀다.
완만한 경사가 다시 아래로 꺾어지자 제일 높은 봉우리 밑의 대나무 숲 사이로 작은 목옥이 보였다.
그 앞에는 바위가 파인 작은 연못이 있고, 연못으로 절벽 틈에서 물줄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와! 진짜 멋져요, 스승님!”
소영령은 그 모습을 보고 탄성을 터뜨렸다. 두 눈에 고여 있던 슬픔조차 희석되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좌소천도 예외가 아니었다.
“정말 굉장하군요!”
이 작은 섬에 어떻게 이토록 멋진 풍경이 들어설 수 있는지 불가사의한 일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선우궁현이 빙그레 웃으며 손을 들어 목옥을 가리켰다.
“저기가 내 거처다. 그리고 앞으로 너희들이 살 곳이지. 자, 내려가자. 아무래도 너희들과 함께 지내려면 정리해야 할 일이 많을 것 같구나.”
두 시진 후.
대충 목옥이 정리되자 선우궁현이 좌소천을 불러 앉혔다.
“선사께서는 무공을 익히지 못하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공을 모르는 것은 아니셨다. 그분은 단전이 부서진 몸이어서 직접 익히지 못하셨을 뿐, 수많은 무공을 알고 계셨지. 그분은 오십여 년 강호를 떠돌며 본 수많은 초식들을 당신이 아는 지식에 접목시켜서 모두 일곱 초식을 만들어내셨다. 비록 일곱 초식이지만, 변화가 가히 만변이라 할 수 있는 무공이지. 나는 검으로 그 무공을 익히고 만상검이라 이름 붙였다.”
선우궁현은 색 바랜 책자를 꺼내 좌소천에게 내밀었다.
겉표지에 무연(武然)이라 적혀 있는 게 보였다.
“이제 이것은 네 것이다. 나처럼 검으로 익혀도 되고, 도로 익혀도 되고, 권장으로 익혀도 된다. 여기에 적힌 것은 도(道)와 법(法)이지, 술(術)이 아니니까. 네가 여기에서 무엇을 얻을지, 얼마나 익힐지는 오직 너의 노력에 달려 있다.”
좌소천은 두 손을 내밀어 공순히 책을 받아 들었다.
“나는 나의 검을 완성하기 위해서 수많은 싸움을 하고 몸으로 직접 깨달아야 했다. 하지만 너는 그럴 필요가 없다. 내가 있으니까.”
어렴풋이 선우궁현이 왜 팔천팔백 번이나 싸워야 했고, 졌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그 덕에 보다 쉽게 무연칠식을 익힐 수 있을지 몰랐다.
한편으로는 미안하면서도 죄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 또한 각자가 짊어질 짐이었다.
그때 선우궁현이 말을 이었다.
“대신 너는 내가 못 다한 것을 완성해야 한다. 어떠냐, 자신있느냐?”
좌소천은 고개를 들어 선우궁현을 직시했다.
자신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무공이 잠자고 있는 상태다.
검왕의 검결, 봉왕의 천붕칠절, 신권의 건곤신권, 금라천의 삼대절기.
어디 그뿐인가? 평생을 익혀도 완성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금라천경의 무공까지 들어 있다.
그런데도 욕심이 났다.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다. 선우궁현의 말 중에 들었던 한마디, 무엇으로 익혀도 된다는 것, 바로 그 말 때문이었다.
무연칠식이 꼭 어떤 무공과도 융합할 수 있다는 말처럼 들린 것이다.
“하겠습니다, 백부님. 꼭 완성해 보이겠습니다.”
“많이 힘들 것이다. 참을 수 있겠느냐?”
당연히 힘들 것이다. 백부님의 이십수 년 적공을 단기간에 흡수해야 할 테니까.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참겠습니다.”
“때로는 외롭고 괴로워서 심마가 들지도 모른다. 이겨낼 수 있겠느냐?”
당장 이해하기 힘든 뜻이 담긴 말이었다. 하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 항상 외로움과 괴로움을 달고 산 좌소천이 아닌가.
“스스로 혀를 깨물더라도 견디어내겠습니다.”
4
소영령은 열넷. 좌소천보다 두 살 어렸다.
그녀는 생각보다 뛰어난 머리를 지니고 있었다. 아니, 엄청난 기억력의 소유자였다. 외우는 것만 따지면 좌소천조차 따라가기 힘들 정도였다.
그걸 안 것은 무은도에 들어온 지 열흘째 되던 날이었다.
그날 선우궁현은 일단 소영령에게 내공 구결을 먼저 가르치기로 하고 구결을 불러주었다.
그런데 한 번 알려줬을 뿐인데 다 외워 버리는 것이 아닌가.
혹시나 해서 만상검의 구결을 불러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그 긴 만상검의 구결을 딱 세 번 만에 외워 버렸다.
처음에는 장난처럼 시작했던 선우궁현조차 그 상황에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즉시 선우궁현은 검을 펼쳐서 여자가 익히기에 알맞은 비화십팔검의 초식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소영령은 단 두 번 만에 어설프게나마 흉내를 냈다.
그렇게 소영령의 재질을 발견한 것은 그에게 또 다른 기쁨을 선사했다.
어떻게 저 아무것도 모르는 꼬마 계집아이를 가르치나, 그저 까마득하게만 생각했던 선우궁현으로선 소영령이 가르치는 족족 흡수해 버리니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좋아! 어디 본격적으로 배워보자꾸나!”
5
무은도 오른쪽에서 두 번째 봉우리 뒤쪽 절벽의 오 장 높이에 직경 일 장가량의 뻥 뚫린 구멍이 나 있었다.
전면으로 바다처럼 넓은 동정호가 내려다 보이는 곳이었는데, 내부가 직경 십여 장 정도로 넓었다.
선우궁현은 그곳을 참연동(?然洞)이라 불렀다.
자신이 그곳에서 수련하며 언젠가는 강호에 우뚝 서겠다는 각오를 다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근 이십여 년, 파도소리만이 메아리쳐 울리던 그곳에서 언제부턴가 거친 숨소리와 기합성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좌소천이 이십여 년 전의 선우궁현처럼 그곳에서 수련을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