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천왕 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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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602회 작성일소설 읽기 : 절대천왕 5화
5화
“우리와 네가 같은 스승께 배운다고 해서 그분들이 너에게도 우리와 같은 것을 가르칠 거라는 생각은 버려라. 주인과 하인은 배우는 것이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
그때만 해도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어느 날, 혁련호운이 자랑 삼아 자신이 배운 바를 말했다. 그제야 좌소천은 혁련호승이 말한 뜻을 확실하게 깨달았다.
제학전의 스승들이 혁련호운에게는 마지막 구결을 확실하게 풀어서 가르쳐 줬는데, 자신에게는 원론적인 구결만 이야기해 주었던 것이다.
비록 약간의 차이였지만, 그 간격은 천 리 떨어진 것만큼이나 멀었다.
조금은 약도 오르고 조금은 비참한 마음도 들었지만, 좌소천은 사흘 만에 그 마음을 털어내 버렸다.
자신은 혁련무천의 자식이 아니다. 궁주의 자식들과 똑같은 걸 배우고자 한다는 것 자체가 욕심일지도 몰랐다.
사실 따지고 보면, 검왕을 비롯한 제학전의 다섯 스승님에게 무공을 배우는 것만도 대단한 복이라 할 수 있었다.
어쨌든 스승들의 뜻을 안 좌소천은 이후로 무리하게 욕심을 내지 않기로 했다.
대신 나름대로 스승들의 뜬구름 같은 이야기를 풀어보려 애를 썼다.
풀리지 않으면 밤을 새서라도 매달렸다.
집 안에 있는 모든 기초 무공서를 들춰보고, 그래도 모르면 어머니에게라도 물어보았다. 혹시 도움이 될지 몰라서 아직 실력이 안 되어 입문도 하지 못한 금판의 해독서를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이해하려 애썼다.
그 덕분에 금판을 해석한 해독서, 아버지가 남긴 금라천경을 완벽하게 외우고, 이제는 그 안의 뜻을 조금씩이나마 이해할 정도가 되었다.
그렇게 일 년을 보낸 지금, 나름대로 스승들의 가르침을 해석해 온 좌소천은 위지승정의 원론적인 말조차 한마디 한마디가 아까웠다.
“마음이 흐르는 곳으로 검을 가게 해야 한다. 역행은 결코 순행을 따라잡을 수 없음이니…….”
여전히 뜬구름처럼 흘러가는 가르침이다. 그러나 좌소천은 머릿속에 하나도 놓치지 않고 새겼다.
‘금라천경에서도 그랬지. 역행은 단순히 속(速)에서 그치지만, 순행은 상승(相乘)을 동반한다고. 순행을 하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과 기운을 하나로 하고…….’
가르침을 내리는 위지승정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좌소천이 자신의 말을 모두 외우고, 그중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깨닫고, 거기에 나름의 해석을 더하고 있다는 것을.
그렇게 이각여, 위지승정의 입가에 쓴웃음이 매달렸다.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듣고만 있는 좌소천이다.
마치 모든 것을 포기한 것 같은 모습.
미안함과 자괴감이 동시에 들었다. 아무리 직전제자가 아니라지만, 스승이라는 작자가 잔머리를 굴려서 알아듣지 못하도록 가르침을 내리다니.
위지승정은 쓴웃음을 매단 채 고개를 저었다.
“기(氣)가 화(和)하고, 화가 정(靜)이 되면 모든 것이 하나가 되어 흐름이니……. 나중에라도 천천히 음미해 보면 조금이나마 얻는 것이 있을 것이니라.”
“예, 스승님. 오늘의 가르침, 잊지 않겠사옵니다.”
위지승정은 허리를 깊숙이 숙이는 좌소천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문득 기이한 생각이 들었다.
‘이 아이가 정말 배우는 것을 포기했을까?’
자신이 아는 한 절대 쉽게 포기할 아이가 아니다. 오히려 끝까지 파고든다면 모를까.
그런데 왜 묻지 않는 걸까?
하긴 묻는다 해서 대답해 줄 수도 없는 일. 씁쓸한 마음만 더해지는 위지승정이었다.
‘네 복이 거기까지라면 어쩔 수 없는 일.’
바로 그때, 밖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위지승정은 목소리만으로도 누가 왔는지 알고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나 다를까, 문이 열리더니 혁련호승이 들어왔다.
“아직도 안 갔느냐? 흥! 내가 보고 싶었나 보지?”
혁련호승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리자 좌소천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닙니다. 이제 막 가려고 하던 참이었습니다.”
“아니라고? 그러니까 내가 꼴 보기 싫어서 가려고 했다, 이 말이지?”
혁련호승의 눈초리가 뱀눈처럼 차가운 빛을 발했다.
“그게 아니라…….”
좌소천이 머뭇거릴 때다. 위지승정이 눈살을 찌푸리고 손짓을 했다.
“헛소리 그만 하고 이리 앉아라. 소천이는 그만 절룡각으로 가보고.”
“예, 스승님.”
좌소천이 다시 한번 허리를 숙이고 걸음을 옮기자 혁련호승이 나직이 말했다.
“돌아가기 전에 승화담에서 기다려라.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멈칫한 좌소천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방을 나섰다.
3
절룡각(折龍閣)은 비룡도객(飛龍刀客) 운추양이 머물고 있는 곳이었다.
그가 전각의 이름을 절룡각이라 지은 이유는 단 하나. 패배를 모르던 그의 칼이 제천무제 혁련무천에게 꺾였기 때문이다.
그는 위지승정과 달리 좌소천을 그리 좋게 보지 않았다.
좌소천의 체격이 평범하다는 게 겉으로 내세운 이유였다.
“그딴 몸으로 내 도를 제대로 배울 수나 있겠느냐?”
하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는 혁련무천의 둘째부인이자 혁련호승의 어머니인 운 부인의 오라버니였다. 하기에 조카인 혁련호승으로부터 매일같이 좌소천에 대한 험담을 들은 그로선 좌소천이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혁련무천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아이를 나 몰라라 할 수도 없는 일. 그는 자신만의 특별한 방법으로 좌소천을 괴롭혔다.
“무공은 머리로만 배우는 것이 아니다. 몸이 따르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겠느냐?”
괴롭히는 방법은 간단했다.
들기도 힘든 무거운 도를 휘두르게 하고, 그것이 조금 익숙해진 한 달째부터 목도 비무를 시작했다.
아이끼리 휘두르는 목도도 맞으면 멍이 들고, 잘못하면 뼈가 부러진다. 하물며 운추양이 휘두르는 목도다. 겉으로는 멍이 보이지 않고 뼈가 부러지지 않았지만 고통은 더 심했다.
한 대 맞을 때마다 뼛속이 다 시렸다.
도가 스치고 지나간 곳은 살갗이 찢겨져 나가는 듯했다.
그나마 자존심 때문에, 남의 눈 때문에 도를 넘기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좌소천은 그렇게 일 년을 견뎌왔다.
오늘 역시 그 일 년의 연장선상일 뿐이었다.
따다닥! 퍽!
좌소천이 이를 악물고 재빨리 두 걸음을 물러서며 도를 사선으로 올려쳤다.
딱!
한 번은 무사히 막아냈다. 그러나 교묘하게 휘돌아 떨어지는 도가 허벅지에 떨어졌다.
퍽!
“멍청한 놈! 그것도 못 받느냐?”
이를 악문 좌소천은 도를 세우고 한 걸음 물러섰다.
“죄송합니다, 스승님.”
좌소천이 자세를 잡자 운추양의 공격이 이어졌다.
“똑바로 보고 받아내라. 허초에 속는 멍청한 놈이 되지 말고!”
다시 일 초를 막아냈다. 그러나 처음 보는 두 번째 초식의 네 번째 변화에 또다시 일격을 맞았다.
‘이, 이건? 흐읍!’
좌소천은 숨을 들이켜고는 그 와중에도 도를 휘둘러 두 번의 공격을 막아냈다.
“흥! 이번에는 그래도 낫구나.”
운추양의 코웃음에 좌소천이 낮게 자세를 잡았다.
최근에 와서는 강도를 점점 세게 해서 도를 휘두르는 운추양이다. 일 초도 받아내지 못하고 나뒹굴던 자신이 이제는 오륙 초를 맞지 않고 받아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한계였다. 운추양의 공격이 거세지자 칠 초를 넘길 수가 없었다.
좌소천은 그 이후에 쏟아지는 구타에 가까운 무지막지한 공격을 거의 몸으로 막아내야 했다.
‘지독한 놈! 겉으로 보면 순진해 보이는 놈이 어쩌면 저렇게 독하단 말인가. 어른이라도 비명을 지를 상황이거늘.’
운추양은 좌소천을 바라보며 속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비무한 지 석 달째부터 방어에 틀이 잡히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오륙 초 정도는 거뜬히 받아내는 좌소천이다.
물론 자신이 절기를 펼치지 않아 그렇다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구석이 있었다.
자신이 펼친 도는 대부분 실전에서 얻은 도식. 그런데 좌소천이 방어하는 방법 역시 자신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수비식은 완벽하고, 가끔씩 공격해 들어오는 수법도 완벽했다. 때로는 섬뜩한 생각이 들 정도로 공격해 올 때도 있었고.
따로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끼고, 손이 저절로 따라간다.
아무리 공력을 끌어올리지 않고 맞상대한다지만, 이십 년을 전장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살아온 운추양이 아닌가.
이제 일 년을 익힌 놈이, 그것도 말도 안 되는 방법으로 가르침을 받는 놈이 자신을 그대로 따라 하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호승이가 왜 저 아이를 그리 대하는지 알 것도 같구나.’
셋 중 하나를 택해야 할 것 같았다.
다시는 도를 잡지 못하게 하든지, 아니면 그냥 놔두든지. 그것도 아니면 제대로 가르치든지.
조카의 부탁대로라면 첫 번째를 택해야만 한다.
어려울 것도 없었다. 근맥을 교묘히 끊어버리는 일 정도야 식은 죽 먹기니까.
그런데 은근히 자존심이 상했다.
도에 관한 한 적수가 없다는 자신이 이제 열네 살인 어린아이를 의식해서 악랄한 방법을 쓸 생각을 하다니.
아무리 자신의 조카인 혁련호승이 부탁을 했다지만, 그건 너무 치졸했다. 그거야말로 자신의 명성을 깎아먹는 짓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제기랄, 천하의 운추양이 이게 무슨 꼴이람!’
그는 스스로에게 짜증이 났다.
“됐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후들거리는 다리로 겨우 서 있던 좌소천은 도를 거꾸로 잡고 허리를 깊게 숙였다.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스승님.”
절룡각에 머문 지 반 시진.
좌소천은 소나기라도 맞은 듯 땀에 흠뻑 젖은 몸으로 절룡각을 나섰다.
운추양에게 맞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자신이 제학전에서 배우기 시작한 지 한 달째부터 그랬으니까. 아마 혁련호승이 뻔질나게 절룡각을 드나든 이후부터인 듯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골탕이나 먹이자는 뜻으로, 나중에는 혁련호승의 말에 설득당해 좌소천이 무공을 익히는 걸 포기하게 하려는 뜻으로.
그런 운추양에 대해 화가 날 만한데도 좌소천의 입가에는 보일 듯 말 듯 웃음이 매달렸다.
‘오늘도 하나 배웠군.’
중요한 것은 그것이었다. 무엇을 배웠느냐 하는 것.
운추양은 좌소천이 고통을 참으며 자신의 칠 초를 막아내자 새로운 초식을 썼다.
그것 역시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좌소천은 또 다른 도식 하나를 배웠다.
그거면 됐다.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였지만, 머리는 그 어느 때보다 맑았다.
좌소천은 말아 쥔 주먹에 힘을 주고 비연각을 향해 걸음을 떼었다.
‘그래도 오늘은 유난히 더 힘들었어.’
4
신법에 관한한 천하에서 세 손가락에 든다는 비연선자(飛燕仙子) 하조영.
비연각은 바로 그녀의 거처였다.
또한 그녀는 비연문의 문주이며 혁련미려의 사부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제학전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은 혁련무천의 간곡한 청에 의해서였다.
“오 년, 오 년만 본 궁에 머물며 내 아이들을 가르쳐 주시오.”
물론 말로만 청한 것은 아니었다. 혁련무천은 그녀를 비연각에 머물게 하는 대가로 비연문이 오래전에 잃어버린 칠연비영(七燕飛影)의 비급을 내놓았다.
하조영으로선 절대 거절할 수 없는 조건을 내놓은 것이다.
그렇다고 비연문의 절기를 아무에게나 가르칠 수는 없는 일. 하조영도 조건을 걸었다.
“좋아요. 하지만 비전의 절기는, 미려 외에 다른 사람에게는 가르칠 수 없어요.”
“내가 원하는 것은 신법과 경공의 기초요. 무리한 요구는 하지 않겠소.”
그것이 이 년 전의 일이었다.
사실 하조영은 혁련미려에게만 자신의 절기를 가르쳐 줄 뿐, 심지어 혁련호승과 혁련호운에게도 진실 된 절기는 가르쳐 주지 않았다.
당연히 좌소천도 하조영에게서 배우는 것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저 기초적인 신법이 전부일 뿐.
그런데도 오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절룡각에서 입은 충격을 추스르고 가라는 혁련미려의 강압이나 다름없는 부탁 때문이었다.
자신이 비연각을 그냥 지나치면, 혁련미려는 끝까지 도끼눈을 뜨고 따라다녔다.
그날은 공치는 날이었다.
제학전의 어떤 스승도 그녀의 수다를 당해내지 못했으니까.
비연각으로 가자 마침 혁련미려가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좌소천은 비연각으로 다가가다 그녀를 보고 멈칫했다.
연노랑색 경장을 입은 그녀는 화사한 한 마리 나비처럼 아름답고 발랄해 보였다. 이제 겨우 열일곱 살인데도 제천신궁의 삼대미녀 중 하나로 불리는 혁련미려다.
좌소천은 사흘에 한 번씩 보는데도 그녀를 볼 때마다 가슴이 뛰었다.
‘누님은 갈수록 아름답게 변해가는구나.’
좌소천의 얼굴이 붉어질 때다. 밖으로 나오던 혁련미려가 그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소천! 언제 왔어?”
“소천이 누님을 뵙습니다.”
“호호호호! 대체 언제 그 인사법을 바꿀 거야? 그냥 누나라고 부르라니까.”
“그, 그게…….”
“왜? 둘째오라버니가 또 때렸어?”
혁련미려가 눈을 치켜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