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천왕 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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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46회 작성일소설 읽기 : 절대천왕 3화
3화
“일단 좌 군사의 명예를 먼저 회복시키겠소. 본 궁의 제일공신으로 추대하고 그에 준하는 대우를 해드리겠소이다.”
“편안한 죽음과 맞바꾼 것치고는 대단하군요.”
비꼼이 가득한 목소리에선 서리가 내리는 듯하다.
그런데도 혁련무천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조용히 말했다.
“병법을 아는 사람은 많으나 병법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소. 그리고 병법과 자신의 목숨을 맞바꿀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소. 좌 군사는 그런 대우를 받아 마땅하오.”
“훗! 정말 대단한 분이셨군요, 제 낭군님은!”
은선향의 목소리에 칼날이 섰다.
그러자 혁련무천이 침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남자이기 때문이오. 또한 한 아이의 아버지이기 때문이오. 남편과 아버지는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독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소. 나는… 부인께서 부디 좌 군사의 진심을 알아주었으면 싶소.”
질끈 눈을 감은 은선향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그 바람에 저는 그분께 지은 죄를 영원히 갚을 수 없게 되었어요. 아시겠어요? 죽을 때까지 가슴에 죄를 묻고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단 말입니다.”
그녀의 눈가에서 이슬이 방울져 떨어졌다.
“어머니…….”
좌소천은 무릎걸음으로 다가가서 어머니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혁련무천의 눈이 좌소천을 향했다.
“좌 군사는 소천이와 부인을 나에게 부탁했소.”
“그랬더군요. 저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게 만들더니, 그것만으로도 부족했는지 이제는 아들마저 넘겨주겠다고 했더군요.”
힘이 하나도 없는 목소리였다.
좌소천은 어머니의 손을 잡고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 저는 누가 뭐라고 해도 어머니 곁에 있을 거예요. 걱정 마세요.”
그런데 은선향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너는 네 아버지의 뜻을 따라야 한다.”
“아닙니다, 어머니! 저는…….”
“그것이 이 어미로 하여금 네 아버지에게 두 번의 죄를 짓지 않게 하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어머니!”
은선향은 매몰차게 고개를 돌리고 혁련무천에게 말했다.
“궁주께 이 아이를 맡기겠어요. 그분의 뜻대로. 데려가세요.”
그런데 이번에는 혁련무천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아니오. 당분간은 부인의 곁에 놔두고 사흘에 한 번씩 내궁으로 보내시면 되오. 그러다 열여섯이 되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가르치도록 하겠소.”
미처 생각지 못한 듯 은선향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마치 빼앗겼던 아들을 되찾기라도 한 것처럼.
“그나마 고맙군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정말 미안하오, 부인.”
은선향은 아무런 대답도 않고 눈을 감았다.
그러자 혁련무천이 다시 좌소천을 바라보았다.
“너는 이제부터 나를 백부라 불러라. 나와 네 아비는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는 호형호제하며 지냈느니라.”
‘그런데 왜 아버지를 그렇게 죽게 했어요!’
아버지의 뜻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어린 좌소천으로선 이해할 수가 없었다.
“소천아.”
은선향의 재촉이 있고 나서야 질겅거리며 입술을 씹던 좌소천의 입이 열렸다.
“예… 백부.”
다음날, 날이 새자 제천전에서 혁련무천의 일성이 터져 나왔다.
좌유승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가 목숨을 던져 꾸며낸 계책에 대한 칭송이었다.
“군사 좌유승에게 태군사의 칭호를 내리노라! 또한 그의 가족에게 태군사가 누릴 수 있는 모든 혜택을 주겠노라!”
제천신궁의 궁도들은 좌유승의 죽음에 대한 내막을 듣고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그런 한편으로 좌유승의 죽음을 탄식하며 애도했다.
뒤늦게 치러진 장례는 열흘간 이어졌다.
그동안 좌유승의 위패 앞에는 수많은 군웅들이 운집했다.
죽은 좌유승을 향해 동료들을 사지(死地)에 몰아넣고도 자신의 죄를 모르는 뻔뻔한 놈이라 욕한 자, 그의 시신에 침을 뱉었던 자들은 피를 토하면서 용서를 빌었다.
“오, 맙소사! 이 죄를 어찌 감당하리오!”
“좌 군사, 우리가 죽일 놈들이외다!”
“용서해 주시오, 좌 군사!”
좌유승의 목을 친 망나니는 자신의 칼을 부러뜨리고 열흘간 울부짖었다.
좌유승의 실패를 성토했던 군사부의 문사들은 붓을 꺾고 좌유승의 위패 앞에서 석고대죄하며 죄를 빌었다.
천하가 좌유승의 충절에 탄성을 금치 못했다.
좌유승 같은 군사가 있기에 제천신궁이 천하제일패가 되었다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심지어 신월맹의 살아남은 무사들마저 자신들에게 좌유승 같은 군사가 없음을 탄식하며 그의 충절 앞에 건배를 했다.
그러나 오직 두 사람만은 감동도, 칭송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그저 원망할 뿐이었다.
―아버지는 바보야!
―나쁜 사람!
하지만 저 하늘 아래, 그 두 사람보다 좌유승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6
열흘에 걸친 좌유승의 장례가 끝난 다음날.
은선향은 깊숙한 곳에서 낡은 궤를 하나 꺼내 좌소천에게 내밀었다.
“받아라.”
“무엇입니까, 어머니?”
“네 아버지에게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아느냐?”
말이 별로 없는 어머니였다. 한 번도 제대로 안아주지도 않던 어머니였다.
어릴 때는 그런 어머니가 무섭게 느껴지기도 했다.
걸어 다니면서부터 책과 놀고, 또래의 아이들에게 독종처럼 행동한 것도 어쩌면 그 때문인지 몰랐다.
“자세히는 모릅니다.”
은선향은 물끄러미 궤를 내려다보더니 나직이 말했다.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좌소천은 왠지 어머니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고 느껴졌다.
“이것 때문이라니요?”
“정확히는 이 속에 든 것 때문이지.”
은선향은 기다란 손가락을 뻗어 궤의 뚜껑을 열었다.
궤 안에는 금판이 차곡차곡 겹쳐져 있었다. 봉황 같기도 하고 용 같기도 한 괴상한 동물이 그려져 있는 덮개까지 모두 일곱 장이었다.
그리고 아래에는 작으면서도 제법 두꺼운 책자가 놓여 있었다.
“이 어미의 집안에 전해지던 물건이다. 이것만 아니었다면 네 아버지는 누구보다도 건강하게 살아왔을 것이다. 기혈이 뒤틀려 불구의 몸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죽음과도 같은 고통을 참으며 살아오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것을 네 아버지에게 주었다.”
그녀가 스무 살 때의 일이다.
당시 좌유승은 제천신궁의 촉망받는 후기지수 오 인에 꼽히는 절세기재였다. 그러면서도 제천오룡이라 불리던 그들 중 인물과 집안이 가장 뒤떨어졌다.
부상을 입은 채 적에게 쫓기던 은선향은 우연히 그에게 목숨을 구원받았다. 그 후 그의 집에서 숨어 지내던 그녀는 자신보다 일곱 살이나 많은 그에게 남은 삶을 맡기기로 결심했다.
어쩌면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의 추격을 따돌리는 것에 지친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석 달을 함께 지내는 동안 그녀가 좌유승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그녀는 석 달 열흘 만에 그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털어 놓았다.
마음도, 비밀도.
“어쩌면 이것을 네 아버지에게 준 것은, 내 마음 한구석에 도사리고 있던 욕심을 차마 떨칠 수가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차라리 이것을 영원히 없앴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것을…….”
“어머니…….”
은선향은 고개를 저어 좌소천의 말을 막았다.
그러고는 묵묵히 이야기를 이어갔다.
“네 아버지는 신비에 싸인 무공을 익힌다는 것에 환호하며 일 년간 금속판의 해석에만 전념했다. 본래 무보다 문에 더 뛰어났던 그분은 제천신궁의 모든 자료를 뒤지며 미친 듯이 파고들더니 결국 모든 것을 해석해 냈다. 그리고 그 후부터는 금속판의 무공을 익히는 것에 매달렸지. 그런데… 반년 만에 기혈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나중에서야 그 원인을 알았지만, 이미 그때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상황이 악화된 이후였지.”
담담히 말하던 은선향의 눈매가 급격하니 떨렸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그분을 볼 때마다, 그 지독한 고통을 참으며 나를 보고 억지웃음을 지을 때마다 이 어미의 가슴은 찢어질 것만 같았다. 내 뱃속에 너만 없었다면, 아마 함께 죽자고 했을지도 모를 정도였어.”
좌소천도 아버지가 일 년에 두 번 정도 고통과 싸우며 사흘간 식음을 전폐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설마 그 정도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어머니, 그 일이 어머니의 잘못은 아니잖아요. 그러니 마음을 가라앉히세요.”
은선향은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않고 좌소천을 바라보았다.
“아마 지금의 궁주가 아니었다면, 궁주가 매년마다 영약을 주지 않았다면 네 아버지는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을 거다.”
“저도… 알아요, 어머니.”
처음에는 은혜고 뭐고 미칠 것만 같았다. 한이 맺혀 어떤 식으로든 복수를 하고 싶었다.
그러다 아버지의 서신을 보고, 혁련무천이 찾아와 사죄를 하고, 명예를 되찾은 아버지의 장례가 끝났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걸까?
어린 좌소천은 혼란스럽기만 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어머니의 뜻이 전부였다.
‘그래도 아버지는 바보예요. 어머니에게는 알렸어야죠. 그렇죠, 어머니?’
그때 은선향이 천천히 손을 뻗어 좌소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비록 네 아버지를 사지로 내몰긴 했지만 은혜는 은혜. 그래서 내가 궁주를 크게 원망하지 않는 거란다.”
평상시 하지 않던 어머니의 행동에 좌소천은 몸이 떨렸다.
언제인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아무리 기억을 되돌려 봐도 어머니가 머리를 쓰다듬어 준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네 아버지의 기혈이 뒤틀린 원인이 무엇인지 아느냐?”
어머니가 묻는데도 좌소천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모르는 것도 모르는 것이지만, 가슴이 미어져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그때 은선향이 좌소천의 머리를 당겨 가슴에 안으며 말했다.
“이 안의 무공으로 인한 씨앗이 생성되기 전에 여자를 안으면 안 되는데, 이 어미를 안아서란다. 그리고… 네가 생겼지. 네 아버지는 당신의 아픔 대신 네가 생겼다고 기뻐했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럴 수가… 없었어.”
어머니의 눈물이 뺨으로 떨어져 흘러내렸다.
좌소천의 눈에서도 눈물이 쏟아져 어머니의 가슴을 적셨다.
어머니의 가슴이 너무나 따뜻하다.
‘그래서였나요, 어머니?’
자신을 볼 때마다 아버지의 고통스런 모습이 떠올랐나 보다.
그래서 자신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빛이 그렇게도 아팠었나 보다.
아버지의 고통스런 모습과 겹치다 보니 제대로 한 번 자신을 따뜻하게 바라보지 못했나 보다.
기초적의 심법 외에 무공을 배우지 못하게 한 것 역시도.
자신이 무공을 펼치는 걸 보면 마음이 아플 테니까.
‘어머니……!’
두 모자가 떨어진 것은 한참이 지나서였다.
“미안하구나. 좀 더 자주 안아주지 못해서…….”
“아니에요, 어머니.”
은선향은 아직 눈물이 마르지 않은 좌소천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어느 때보다 따뜻한 눈빛이었다.
좌소천은 울컥 또 눈물이 쏟아지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그때 은선향이 궤를 밀었다.
“이제 이것은 네 것이다.”
“어머니?”
“촉산혈전에 참전하신 이 어미의 조부께서 환상마궁의 지하 깊숙한 곳에서 얻었다는 말만 들었을 뿐, 정확한 이름은 모른다. 네 아버지는 이것을 해석한 책의 이름을 금라천경(金羅天經)이라 지었지. 익히든 익히지 않든, 그것도 네 마음이다. 다만 익히려거든, 씨앗이 생길 때까지는 여자를 안아서는 안 된다.”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좌소천도 모르지 않았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좌소천을 바라보며 은선향이 말했다.
“그리고 천아야, 이 어미의 진짜 이름은 은선향이 아니라 동방선유란다. 혹시나 나를 찾는 자들이 있을지 몰라서 이름을 숨기고 살아왔지.”
“동방… 선유요?”
“그래, 십사 년 전, 천외천가에 의해 멸망한 금라천의 삼십이 대 후손인 동방선유가 이 어미의 진짜 이름이란다.”
그것은 결코 작지 않은 비밀이었다.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십여 년간 숨기고 살아야 했을 정도로.
그때만 해도 좌소천은 짐작도 하지 못했다.
천비삼역(天秘三域) 중의 하나인 금라천(金羅天), 그리고 환상마궁(幻想魔宮).
그 이름이 주는 무게를.
동방선유는 자신의 이름을 되새기는 좌소천을 바라보고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동안 무공을 익히지 못하게 해서 화도 많이 났었지?”
“아니에요, 어머니.”
아들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어찌 모를까.
동방선유는 쓴웃음을 지으며 금라천경을 가리켰다.
“이제는 네 맘대로 해도 좋다. 책 뒤에는 내가 따로 적어놓은 것이 있단다. 이 어미 집안에서 대대로 전해지던 세 가지 무공의 구결이지. 당장은 내공이 딸려서 익힐 수 없을 테니 일단 외워놓기만 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