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천왕 3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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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그러나 흑의장한은 못 들은 척 곧장 주렴을 젖히고 밖으로 나갔다.
“거기 서보라니까!”
뒤늦게 제갈세가의 사람들 중 창을 든 중년인과 검을 멘 두 청년이 흑의장한의 뒤를 쫓아나갔다.
계산을 끝낸 좌소천도 객잔을 나섰다.
밖에는 여전히 황사바람이 불고 있었다.
* * *
좌소천은 선창가로 나가서 도도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았다.
만감이 교차했다.
이제 기나긴 여정을 시작해야 한다.
아마 많은 피가 흐르겠지.
그래도 멈출 생각은 없었다.
‘그대들은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머리칼을 바람에 휘날리며 묵묵히 서 있던 좌소천의 고개가 서쪽으로 돌아갔다.
무기 부딪치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서 들려온다. 상류 쪽 우거진 갈대숲 너머에서.
흑의장한이 끝내 제갈세가의 무사들과 부딪친 듯했다.
좌소천은 그들의 싸움을 무시할 생각이었다. 자신의 일만도 벅찬데 남의 일을 신경 쓰기에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문득 흑의장한의 눈빛이 떠올랐다.
‘그건 한이 맺힌 눈동자였어.’
동병상련이랄까? 좌소천은 흑의장한에게 어떤 한이 있어서 제갈세가 사람들을 공격하려 했는지 궁금해졌다.
마음이 움직이자 몸도 움직였다.
천천히 몸을 돌린 좌소천은 갈대숲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세 걸음 옮기는 사이, 그의 몸이 이십여 장 떨어진 갈대숲 쪽으로 사라졌다.
쩌저정!
“어림없다!”
흑의장한은 두 청년과 격전을 벌이며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나 입으로 힘차게 소리치는 것과 달리, 그의 마음은 다급하기만 했다.
단순히 두 청년만 상대하는 것이라면 걱정할 것이 없었다. 문제는 창을 든 채 퇴로를 막고 있는 중년인이었다.
그는 현의신창 제갈광. 제갈세가에서 가장 창을 잘 쓴다는 고수였다. 능히 제갈세가에서 열 손가락에 드는 고수.
그를 신경 쓰다 보니 두 청년의 합공이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제기랄!’
두 청년과 손을 나눈 지 십여 초. 벌써 서너 군데 상처를 입었다. 어쩌다 한 번씩 끼어드는 제갈광에게 입은 상처였다.
휘리리릭!
검을 휘돌리며 두 사람의 공격을 막아낸 흑의장한은 이를 악물고 반격을 시도했다.
‘이곳에서 죽을 수는 없어!’
포위망을 빠져나가야 하는데 막막하기만 했다. 상처를 입어서 몸놀림도 둔해진데다, 세 사람이 펼치고 있는 삼재진은 너무나 견고했다.
게다가 한곳을 제갈광이 막고 있는 상태가 아닌가.
“흥! 제갈세가가 정파의 기둥이라더니 다 헛소리구나! 나 하나를 상대하기 위해서 세 놈이 진을 펼쳐 덤비다니!”
흑의장한은 악에 받친 표정으로 소리치며 검을 좌우로 휘둘렀다. 그 기세가 어찌나 사나운지 두 청년도 쉽게 달려들지 못했다. 그러나 포위망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여전했다.
그렇게 삼사 초가 더 흘러갔을 때였다. 흑의장한이 이를 악물었다.
그가 제갈세가 사람들을 노린 이유는 단 하나다.
마도에 몸을 담았다는 이유만으로 친구들과 식솔 십여 명이 죽임을 당했다. 무정효(無情梟) 제갈승이란 놈에게.
놈의 목을 쳐서 그들의 한을 풀어주려 했다.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
그게 바로 자신이 사는 목표였으니까!
그런데 아무래도 틀린 것 같다.
‘제갈승을 죽이지 못한다면, 그 대신 다른 놈의 목을 가족들에게 바치리라!’
검을 불끈 쥔 그는 악을 쓰며 달려들었다.
“으아아아아! 죽어라, 개자식들!”
쩌저저정!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는 흑의장한의 공격에 두 명의 청년이 흠칫 뒤로 물러섰다.
“어림없다, 장하경!”
바라만 보고 있던 제갈광이 몸을 날렸다.
흑의장한은 정면으로 날아드는 제갈광의 창을 향해서 연달아 삼초를 펼치며 갈지자로 물러섰다.
하지만 그가 상대하기에는 제갈광의 창이 너무나 신랄하고 강했다.
따라라라랑!
연이은 검명이 울리며 흑의장한 장하경의 검이 한쪽으로 밀렸다.
순간, 하늘 가득 퍼진 창영이 물러서는 그의 가슴으로 밀려들었다.
앞이 캄캄해진 장하경은 눈을 부릅떴다.
“함께 죽자, 제갈광!”
독심을 품은 그는 물러서던 걸음을 멈춘 채 혼신의 힘을 다해서 검을 뻗었다.
상대의 창이 가슴을 꿰뚫어도 상관없다는 듯.
“이런!”
뜻밖의 강수에 제갈광이 창을 비틀었다.
땅!
귀청을 떨어 울리는 소리와 함께 장하경의 검이 한쪽으로 밀렸다.
하지만 그 덕분에 가슴을 뚫을 제갈광의 창이 어깨를 가르고 지나갔다.
“크읍!”
장하경은 몸을 굴리며 제갈광과의 거리를 이 장으로 벌렸다.
그가 벌떡 몸을 일으키자, 제갈가의 두 청년이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장하경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쩍 갈라진 왼쪽 어깨에서 피분수가 솟구쳤다. 한쪽 팔이 마비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
장하경은 이판사판이라는 마음으로 두 청년을 향해 마주 달려들었다.
“이놈들! 죽어도 나 혼자 죽지 않겠다!”
그때였다.
콰아아아아!
갑자기 세 사람 사이로 돌개바람이 몰아쳤다.
단순한 돌개바람이 아니었다.
바위도 부숴 버릴 가공할 위력을 동반한 권풍이었다.
“뭐, 뭐야?!”
제갈가의 두 청년이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동시에 돌개바람이 그들을 덮쳤다.
쾅!
굉음과 함께 청년 하나가 훌훌 날아갔다.
“크어억!”
“헉!”
남은 청년이 홱 고개를 돌렸다.
대기가 비틀리는가 싶더니, 거대한 압력이 그의 몸을 짓눌렀다.
청년, 제갈소는 아연한 표정을 지은 채 본능적으로 검을 뻗었다.
퍽!
“끄억!”
제갈소가 뒤로 날아갔다.
순식간에 두 청년이 당하자, 제갈광이 창을 앞세운 채 몸을 날렸다.
장하경의 앞에 한 사람이 내려서고 있었다.
무심한 표정의 청년, 좌소천이었다.
“이노오오옴!”
수백 개의 창영이 땅에 내려선 좌소천을 뒤덮었다.
좌소천은 하늘을 가득 메운 채 쏟아지는 창영을 바라보며 두 주먹을 휘돌렸다. 회오리가 광풍처럼 일었다.
고오오오오!
하늘과 땅이 비틀어지면서 수백 개의 창영이 권풍 안으로 휘말려들었다.
제갈광은 창이 제대로 제어되지 않자 눈을 부릅떴다.
간격이 일 장으로 줄어든 바람에 뒤로 물러설 틈도 없는 상황.
제갈광은 이를 악물고 혼신의 공력을 쏟아 부었다.
새파랗게 젊은 놈이 강해봐야 얼마나 강하랴! 그런 오기가 섞인 공격이었다.
창영(槍影)이 폭풍처럼 몰아치며 좌소천을 향해 밀려갔다.
순간, 한 발을 내디딘 좌소천이 두 손을 거꾸로 휘돌렸다.
건곤신권 중 사초 건곤역회(乾坤逆回)!
구구구구구!
가공할 역류에 대기가 비명을 질렀다.
제갈광의 창을 잡은 손이 비틀리며 찢겨지고, 폭류처럼 쏟아지던 기혈이 역류하며 혈맥이 터져 나간다.
심장이 터져 나가는 충격!
숨이 턱 막힌 제갈광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피화살을 뿜어냈다.
“푸헉!”
동시에 뒤따라간 또 하나의 권풍이 그의 가슴을 그대로 두들겼다.
쾅!
가슴이 움푹 함몰된 제갈광은 신음도 내지르지 못한 채 훌훌 날아갔다.
털썩!
먼지를 일으키며 떨어진 몸뚱이가 들썩거리자 입에서 피가 뿜어졌다.
좌소천은 고개를 돌려서 한쪽에 멍하니 앉아 있는 장하경을 바라보았다.
반쯤 넋이 빠진 모습이었다.
“저들 일행이 올지 모르는데, 여기 계속 있을 거요?”
흠칫, 정신을 차린 장하경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한쪽 어깨가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정도의 아픔은 눈앞에서 펼쳐진 광경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 어디로……?”
입을 열던 장하경은 좌소천과 눈이 마주치자 부르르 몸을 떨었다.
직접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제갈세가의 현의신창 제갈광이 패했다. 두 명의 조카와 함께. 그것도 삼 초 만에.
그런데 현의신창을 쓰러뜨린 자의 눈빛은 한 점 흔들림이 없었다.
‘대, 대체 저 자가 누군데……?’
그때 좌소천이 무심한 목소리로 입을 연다.
“일단 지혈을 하시오. 이곳을 떠나야 하니까.”
장하경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좌소천은 장하경이 지혈하는 것을 바라보고는 몸을 돌렸다.
아직은 제갈세가와 정면으로 부딪칠 때가 아니었다. 무진도를 뽑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칼을 쓰면 자신의 정체를 간파하고도 남을 자들인 것이다.
“다 되었으면 갑시다.”
냉정한 좌소천의 말에 장하경은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좌소천이 장하경과 떠난 지 일 각가량 지났을 즈음, 공터에 한 사람이 들어섰다.
“맙소사!”
주먹을 움켜쥔 그는 부릅뜬 눈을 파르르 떨며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숙부님! 여깁니다! 광 숙부님께서… 광 숙부님께서 쓰러지셨습니다!”
숨을 두어 번 쉬기도 전에 중년인 셋과 청년 셋이 달려왔다.
그들은 공터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말을 잃었다.
“광 아우!”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제갈승이 제갈광에게 달려갔다.
그는 쓰러져 있는 제갈광의 상태를 살펴보더니 표정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이, 이런!”
제갈청이 곁으로 다가가 급히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형님?”
“혈맥이… 광 아우의 혈맥이 완전히 뒤틀려 버렸네. 그리고 심장이 부서졌어.”
그 말에 제갈청과 제갈웅의 얼굴도 해쓱하게 굳어졌다.
상처투성이 얼굴의 장한은 결코 제갈광의 적수가 아니었다. 더구나 제갈광의 옆에는 두 조카가 있던 상황이 아닌가?
그들까지 함께 간 이상 흑의장한은 제갈광의 손을 벗어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세 사람이 모두 죽었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이 자리를 벗어나서 연락이라도 할 수는 있었을 텐데, 아무도 이곳을 벗어나지 못했다.
제갈광의 혈맥이 완전히 뒤틀리고 손아귀가 찢어져 너덜너덜해진데다, 가슴이 함몰되며 심장이 부서진 것이 의미하는 것은 단 하나.
세 사람을 단숨에 죽일 만한 고수가 이곳에 나타났다.
도대체 누군가? 누가 있어 제갈광과 두 명의 조카를 도망칠 시간도 주지 않고 죽일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주먹으로.
이를 악다문 제갈승의 눈이 잘게 떨렸다.
그는 냉철한 자다. 강호에서 무정효라 불리는 사람. 이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짐작한 이상 감정에 치우쳐 움직이는 자가 아니었다.
‘과연 이곳에 남은 사람들로 그를 상대할 수 있을까?’
어쨌든 상대는 동생과 조카들을 죽인 자. 당장은 그자를 쫓는 게 우선이었다.
“본가에 연락을 취해라. 지원을 요청해! 우리는 지원이 올 때까지 놈을 쫓는다!”
‘무림맹 사람들과 합류하기는 다 틀렸군.’
2
곧장 남하를 건넌 좌소천은 장하경이 쓰러질 때까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장하경도 필사적으로 좌소천의 뒤를 따라왔다. 뒤를 따르지 않으면 당장 죽을 거라 생각하는 듯했다.
하긴 장하경이 중간에 쓰러졌다면, 좌소천은 뒤도 안 돌아보고 그냥 혼자 갔을 것이다.
그렇게 남서쪽으로 삼십 리를 이동한 좌소천은 이름 없는 바위산 아래쪽에 작은 산신당이 보이자 발걸음을 멈추었다.
“저곳에서 쉬었다 갑시다.”
산신당 안으로 들어가자 장하경이 기다렸다는 듯 주저앉았다.
‘독하군. 그만큼 한이 깊다는 말이겠지.’
오면서 대충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장하경이라 하오. 한때는 신월맹의 무사였는데…….”
신월맹이 제천신궁에 패해서 멸망하자, 살아남은 동료 몇 사람과 함께 전마성에 몸을 담았다.
그리고 오 년. 그는 자신이 속한 전마성 사혈검대가 죄 없는 양민을 살육하는 걸 보고는 욕을 바가지로 퍼붓고 전마성을 나와 버렸다.
그 후 그는 함께 전마성을 나온 두 친구와 그 친구들의 가족들을 대동하고서 형문 근처에서 숨어 살았다.
그런데 이 년 전. 제갈세가의 무사들이 전마성의 준동을 살피기 위해서 형문 근처에 온 적이 있었다.
재수없게도 그들 중 한 사람이 장하경을 알아보았다.
무정효 제갈승, 바로 그가.
그는 장하경이 그때까지도 전마성의 사람인 것으로 알고 장하경을 핍박했다.
장하경은 그에게 자신은 이제 전마성을 떠난 사람이니 그냥 놔두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날 밤, 제갈승은 제갈세가의 제자 몇 사람과 함께 장하경이 살고 있는 작은 장원을 쳐들어왔다.
언제 다시 전마성의 사람이 될지 모르니 미리 싹을 자른다는 말과 함께.
결국 그날 친구 두 명을 비롯한 열두 명의 가족이 죽임을 당하고 장하경만 겨우 살아남았다. 전신에 수많은 상처를 입은 채.
혼자 살아남은 장하경은 대홍산까지 도망을 간 후 그곳에서 이 년간 몸을 치료했다. 그러고는 몸이 완쾌되자 제갈승을 죽이기 위해서 대홍산을 떠나왔다.
그런데 제갈승을 죽이기는커녕 중상을 입은 채 다시 도망자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구해줘서 고맙소, 공자.”
“그런 말할 시간 있으면 상처부터 돌보시오. 언제 그들이 쫓아올지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