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천왕 3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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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629회 작성일소설 읽기 : 절대천왕 38화
38화
좌소천은 먼지 구덩이에서 신음을 흘리며 바닥을 기는 자들을 한 번 쓸어보고는 몸을 날려 그곳을 떠나 버렸다.
“뭘 잘못했는지 몸이 나을 동안 잘 생각해 봐라.”
먼지는 한참이 되어서야 가라앉았다.
호정단 제일대 대주인 황보석은 멍한 표정으로 장내를 주시했다.
‘멍청한 자들이라고? 뭘 잘못했는지 생각해 보라고?’
상대의 실력은 자신들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아마 그가 작정했다면 이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상대는 그저 가벼운 상처만 입히고 이곳을 떠나 버렸다.
정수는 어디 갔을까? 그는 왜 도망을 간 것인가?
왜 적이라 생각했던 자는 자신들을 멍청하다고 했을까?
그때 뒤쪽에서 이십여 명이 날듯이 달려왔다.
다섯 명의 장로와 그들을 호위하는 호정단의 간부들, 그리고 그들을 바래다 주기 위해 산을 내려온 무당의 제자들이었다.
“무슨 일이냐?! 무슨 일인데 무당에 와서 이리도 소란을 피운단 말이냐?!”
“황보 대주,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뭐라고 할 것인가.
그는 무당에서 사 년을 넘게 살았다고 했다.
첩자와 싸웠다고 하자니 그가 첩자인지도 확실치 않다.
정수 도장이라도 있으면 모르겠는데, 그는 도망가 버렸다.
그러고 보니 머리카락에 가려져서인지 얼굴도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저 호정단 열 명의 무사가 바닥을 뒹굴었다는 것. 그것이 결과의 모든 것이었다.
황보석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알지도 못하면서 남의 말만 듣고서 무조건 첩자로 몰아세우고, 대항하니 내공을 폐지하겠다고 덤벼든 우매한 놈.
그게 자신이었다.
뭘 잘못했는지 황보석은 그제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정수 도장… 문제는 그 사람인데…….’
하지만 없는 사람을 문제 삼을 수도 없는 일. 더구나 이곳은 무당이 아닌가.
대신 그의 눈이 남궁호를 향했다.
“남궁 아우, 그가 누군지 아나?”
남궁호가 찔끔한 눈을 슬며시 돌렸다.
“그게… 정은이라는 소도장이 무진이라고 부른 것밖에…….”
그때였다.
뒤쪽에서 누군가가 버럭 소리쳤다.
“무진이라고? 혹시 그가 청의를 입고 옆구리에 칼을 차고 있지 않던가?”
무림맹의 장로들을 헤치고 나오는 노도장, 현오자였다.
황보석이 대답했다.
“맞습니다, 노도장님. 우리는 그가 첩자일지 몰라서 공격했는데…….”
현오자가 성질을 못 이기고 발끈했다.
“첩자? 영허 대사백의 의손자를 첩자라고?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가!”
그의 한마디에 무림맹의 장로들이 조용해졌다.
영허 대사백.
그 이름이 주는 무게 때문이었다.
무림맹의 장로 중 한 사람인 종남의 송양자가 놀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현오자, 설마… 삼십 년 전에 사라진 검성께서 돌아오셨단 말씀이시오?”
현오자는 그제야 자신의 말실수를 깨닫고는 콧소리로 대답했다.
“킁! 이미 우화등선하셨소이다.”
그러고는 황보석을 비롯해 바닥에서 겨우 몸을 일으키는 호정단의 무사들을 쓸어보았다.
“그래도 손에 인정을 많이 둔 것 같군. 잘들 가시오. 나는 그만 올라가 봐야겠소. 너희들이 모셔다 드려라.”
화가 난 표정이었다.
하나 그것보다는 자신의 말실수에가 꼬리를 물까 봐 자리를 피하기 위함이었다.
현오자는 정자배 제자들에게 책임을 떠맡기고는 횅하니 자리를 떠버렸다.
황보석은 사람들의 눈이 자신을 향하자 고개를 들지도 못한 채 눈빛만 잘게 떨었다.
‘정수 도장은 알고 있었어.’
그런데 왜?
‘설마 고의로?’
정말 그렇다면 정말 간교한 자가 아닌가?
‘제길. 무당에 그런 자가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군.’
그날 황보석의 가슴에 불신이 하나 싹텄다.
그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 날의 불신이 훗날 천하의 향방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4
백 명이 넘는 여인들이 날개 같은 옷을 휘날리며 옥으로 된 좌대 위의 여인을 바라보며 일제히 엎드렸다.
“신녀의 재림을 앙축하나이다!”
“앙축하나이다!”
좌대 위의 여인이 눈을 뜨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그녀의 앞에 서 있던 노파가 복받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본 궁의 한이 하늘에 이르러 하늘조차 감동했으니, 마침내 신녀께서 재림하셨노라!”
노파답지 않은 낭랑한 음성이 동굴 안에 울려 퍼졌다.
“신녀시여!”
“신녀시여, 저희를 인도해 주소서!”
수백의 여인이 일제히 외치며 두 손을 받쳐 들었다.
그때 옥대에 앉아 있던 여인이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일어나자 한령파파가 고개를 들었다.
“파파, 강호에 나갈 준비는 다 되었나요?”
차갑게 얼어붙어서 열리지 않을 것 같던 옥대 위 여인의 입이 나직이 열리고, 신비롭고도 요요로운 음성이 은은히 울려 퍼졌다.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나 차가워서 듣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얼어붙는 듯했다.
지나가던 바람조차 그녀의 한기에 떨며 숨을 죽였다.
그녀의 앞에 서 있던 노파, 한령파파 역시 심장이 오그라드는 한기에 숨을 깊게 들이쉬고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신녀시여! 오백의 제자가 신녀의 명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나이다!”
“좋아요. 그럼 세상에 본 궁의 한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려주도록 해요.”
“예, 신녀시여!”
정한궁.
삼백 년 전에 사라졌다는 여인들의 문파.
그녀들이 마침내 자신들의 쌓인 한을 풀기 위해 강호행을 선언한 것이다.
바람, 무산의 서쪽 자락 깊은 동굴에서 만년빙보다 더 차가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혈향 가득한 바람이!
6장 한 맺힌 눈동자를 지닌 사나이
1
활짝 열린 창문이 강가에서 불어온 바람에 덜컹거린다.
좌소천은 찻잔을 내려놓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무당을 떠나온지 하루. 한수(漢水)와 남하(南河)가 만나는 곡성(谷城)에 도착했다.
두 줄기 강이 만나는 곳이어서 그런지 강바람이 제법 세차게 불어왔다.
‘서두르지 말자.’
복수는 자신의 운명이다.
그러나 천외천가는 천비삼역이라 불리는 곳 중 하나. 혼자서 어떻게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그는 일단 제갈세가의 제갈진우를 먼저 만난 후 대홍산에 들렀다가 악양으로 갈 생각이었다.
보다 철저히 하늘을 무너뜨릴 힘을 키우기 위해서!
‘반드시 태백산을 피로 씻어버릴 거다.’
좌소천이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데, 도선 한 척이 남하를 건너오는 게 보였다.
‘음?’
좌소천의 미간이 좁혀졌다.
배에 타고 있는 사람 중 반 이상이 무인이었다.
약 십여 명. 그들 중 몇은 일류고수라 칭하기에 부족하지 않은 고수처럼 보였다. 복장이 비슷한 걸 보니 모두 한 문파에 속한 무사들인 듯했다.
그때 옆에서 누군가가 소곤거렸다.
“제갈세가의 사람들이군.”
제갈세가.
그 말에 좌소천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의 살명부에 제갈세가의 사람도 올라가 있다.
제갈진우, 무은도의 진을 파훼한 자.
‘제갈세가가 그의 처단을 막는다면, 그들 역시 적으로 삼는 수밖에 없겠지.’
그때 문득 싸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객잔의 전면 구석진 곳에 앉아 있는 흑의장한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었다.
얼굴에 어찌나 상처가 많은지 정확한 표정을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슬쩍 보니 그의 눈도 창밖을 향한 채 눈동자가 제갈세가의 무사들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가늘게 떨리는 눈빛, 살기에 가까운 적개심이 그의 눈에서 쏟아진다.
저자는 왜 제갈세가의 사람들을 보며 저렇게 적개심을 품는 걸까?
‘단순한 적개심은 아닌 거 같은데…….’
자신처럼 씻지 못할 한이 있는 걸까?
그러나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 좌소천은 신경을 끄고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배에서 내린 사람들이 자신이 있는 객잔 쪽으로 방향을 트는 게 보였다.
그로부터 스물쯤 세었을 때, 주렴이 걷히더니 중년인 넷과 청년 여덟 명이 객잔으로 들어섰다.
동시에 흑의장한에게서 뿜어지던 싸늘한 느낌이 사라졌다.
좌소천은 다시 흑의장한을 돌아다보았다.
흑의장한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서 상처투성이 얼굴이 머리카락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그의 옆자리 의자 위에는 검은 가죽에 싸인 검이 놓여 있었고.
그가 흑의장한을 바라보는 사이, 제갈세가 무사들이 탁자 두 개를 차지하고 앉았다.
그들이 앉은 곳은 좌소천과 멀지 않았다.
그들은 두 개의 탁자를 차지하고서 오만한 표정으로 좌우를 쓸어보았다.
곧 스물이 채 안 되어 보이는 점소이가 그들을 향해서 쪼르르 달려갔다.
“뭘 드시겠습니까, 나으리들!”
그때까지만 해도 별일이 없었다.
주문을 받은 점소이가 돌아가고, 제갈세가 무사들이 있는 곳에서 가벼운 웃음이 흘러나올 때까지만 해도 그냥 그렇게 지나가는 줄 알았다.
그런데 점소이가 양손에 가득 음식을 들고 탁자 사이를 지나갈 때다.
슬며시 검을 쥔 흑의장한의 좌수에 힘이 들어갔다.
은은히 퍼지는 싸늘한 기운.
바로 그때. 고개를 돌린 좌소천의 눈에 제갈세가의 네 중년인 중 두 사람이 슬며시 손을 내리는 게 보였다.
얼굴은 웃고 있는데, 눈은 조금도 웃지 않았다.
두 사람의 탁자 밑으로 내린 손이 소매를 쓰다듬는다.
동시에 좌소천의 전음이 흑의장한의 귀청을 때렸다.
<들켰소. 손을 쓰지 말고 그냥 나가시오.>
순간, 검을 꽉 쥔 흑의장한이 엉거주춤 반쯤 일어서다 말고 굳어버렸다.
그는 격렬히 떨리는 눈으로 탁자 위를 바라보고는, 허리를 다친 노인마냥 천천히 몸을 세웠다.
“여, 여기… 얼마인가?”
점소이가 쪼르르 달려갔다.
“열닷 푼입니다요!”
그제야 제갈세가의 두 중년인도 표정을 풀고는, 소매를 쓰다듬던 손을 탁자 위로 올렸다.
하지만 그들의 의혹에 찬 시선은 여전히 흑의장한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좌소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제갈세가 사람들 쪽으로 다가가자 두 군데에서 반응이 일었다.
흑의장한이 품속에서 돈을 꺼내 계산하려다가 멈칫했다.
제갈세가의 중년인들도 다시 눈빛을 바꾼 채 좌소천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터벅터벅.
좌소천은 서너 걸음을 걸어서 제갈세가 무사들 앞에 섰다.
“혹시 제갈세가 분들이 아니신지?”
네 중년인 중 매부리코의 중년인이 대답했다.
“맞네만, 그러는 자네는 누군가?”
“무당산에서 살다 어제 내려온 강호 초출의 후배입니다.”
무당산이라는 말에 매부리코의 중년인 제갈승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흠, 무당이라……. 무당의 제자는 아닌 것 같네만?”
무당산에는 무당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산중 곳곳에 수백 개의 도관이 있고, 그곳마다 적게는 몇 명, 많게는 수십 명의 제자들이 있었다. 게다가 우송 도인처럼 수십 년을 홀로 수도하는 사람도 많았다.
또한 도인이 아니면서도 무당산의 기운이 좋아서 은거한 무인만도 수백은 되었다.
“그저 무당산에서 사 년 조금 넘게 살았을 뿐, 말씀하신 대로 무당의 제자는 아닙니다. 제갈세가 분이시라면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습니다만?”
“물어볼 것? 뭘 말인가?”
“혹시 제갈 성에 진 자, 우 자 이름을 쓰시는 분이 지금도 제갈세가에 계십니까?”
제갈승의 얼굴에 가벼운 놀람이 떠올랐다.
“무슨 일로 숙부님을 찾는 건가?”
“오래전에 약간의 인연이 있어서 찾아뵈려는 것입니다.”
“그분이야 본가에 계시기는 하네만…….”
제갈승이 말을 늘일 때다. 눈썹이 굵은 호안의 중년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형님, 숙부께서는 이미 사람을 안 만나신지 오래되었잖습니까? 굳이 그분의 거처를 저 청년에게 알려줄 필요가 있겠습니까?”
본가에 있기는 한데, 거처가 따로 떨어져 있다는 걸까?
말리려던 게 오히려 단서를 제공한 꼴. 좌소천은 내심 쾌재를 부르며 어깨를 으쓱했다.
“만나주시지 않겠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만, 한번 가보기는 하겠습니다. 그런데 거처가 제갈세가 안이 아닌지요?”
“같은 융중산에 있긴 하나, 아마 간다 해도 저 아우의 말대로 만나지는 못할 것이네.”
“못 만난다면 어쩔 수 없지요. 좌우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가볍게 포권을 취한 좌소천은 고개를 돌려 점소이를 바라보았다.
그때까지도 흑의장한은 계산을 끝내지 못하고 있었다.
좌소천이 전음을 보내서 그를 재촉했다.
<뭐 하는 거요? 기회를 놓치면 이들이 보내주지 않을 것이오!>
움찔한 흑의장한이 서둘러 계산을 끝내는 걸 보고 좌소천이 점소이를 불렀다.
“나도 계산을 했으면 좋겠군.”
점소이가 손에 든 돈을 세며 좌소천에게 다가왔다.
그사이 흑의장한이 좌소천의 뒤를 지나서 입구 쪽으로 향했다.
그때 제갈세가 사람들 중에서 누군가가 흑의장한을 불렀다.
“이봐, 잠시 거기 서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