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천왕 3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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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614회 작성일소설 읽기 : 절대천왕 32화
32화
“예, 노도장님.”
좌소천은 비감에 젖은 표정으로 자신이 겪은 일을 간략하게 이야기했다.
어머니의 죽음, 백부의 죽음, 소영령의 납치, 그리고 절벽에서 떨어진 이유까지.
다만 제천신궁에서의 일 등, 소소한 것은 이야기하지 않았다.
좌소천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영허 진인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도 어린 것이 참으로 많은 일을 겪었구나.”
영허 진인은 그 말만 하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좌소천은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바로 묻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지났을 때다. 영허 진인이 갑자기 물었다.
“그래, 복수를 할 것이냐?”
좌소천이 한마디로 대답했다.
“예, 노도장님.”
영허 진인은 그런 좌소천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허어, 그게 너의 길인 것을 내가 어찌하랴. 내가 복수를 포기하라 한다고 해서 네가 포기할 것도 아니거늘.”
“죄송합니다.”
“미안해할 것 없다. 너를 구한 것도 인연, 네가 복수를 하는 것도 인연 때문인 것을. 하늘이 그리 돌고 있는데 내가 무슨 용빼는 재주가 있어서 하늘의 흐름을 거꾸로 돌릴 수 있겠느냐? 다만 바라는 게 있다면, 행함에 있어 항상 뒤를 한 번쯤은 돌아보았으면 싶구나.”
“예, 그리하겠습니다.”
영허 진인은 주름진 눈을 가늘게 뜨고는 고개를 숙인 좌소천을 응시했다.
이제 열여덟에서 열아홉이 된다 했다. 그런 나이에 스스로를 저토록 냉정하게 다스린다는 것이 어찌 가능할까 싶었다.
임독양맥이 뚫린 것이야 천고의 기연을 만나면 가능할 수도 있는 일. 그러나 정신적인 성숙은 그와 또 다른 것이었다.
‘하아, 너무 늦게 만났어.’
자신의 삶은 이제 일 년가량 남았다. 억지로 늦춘다면 일 년 정도는 더 늦출 수 있을지 몰랐다.
그동안 눈앞의 아이에게 어떤 변화를 줄 수 있을지는 그 자신도 무엇 하나 예상할 수 없었다.
‘그래도 그냥 놔두는 것보다는 낫겠지.’
영허 진인은 노구를 일으켜서 구석으로 가더니 천으로 감싸진 것을 내왔다.
좌소천은 내용물을 보지 않고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네가 찢어진 손으로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그 물살 속에서도 놓치지 않았더구나.”
정말 인연은 인연인가 보다. 놓쳤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 상황에서도 놓치지 않았다니.
그때 영허 진인이 노인답지 않게 고운 손으로 천을 젖혔다. 그러자 무진도와 함께 시커먼 묵령기환보가 보였다.
“그런데 이건 뭔지 모르겠구나. 곤 같기도 하고……. 왠지 영기가 느껴지는 물건인데, 이것도 무기더냐?”
좌소천은 떨리는 손으로 묵령기환보를 받아 들었다.
어머니와 이어진 끈과도 같은 물건이었다. 아직 비밀은 풀지 못했지만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었다.
“저도 아직은 확실하게 모릅니다.”
“어쨌든 도도 그렇고 그것도 그렇고, 예사 물건이 아니다. 나로선 특히 도에 날이 없다는 것이 마음에 드는구나.”
‘저도 그래서 그 도를 택했지요.’
무진도를 생각하자 마음이 조금씩 진정되었다.
그걸 느꼈는지 영허 진인이 조용히 자신의 생각을 꺼내었다.
“소천아, 네가 진정 나에게 은혜를 입었다 생각한다면 내 부탁 한 가지만 들어다오.”
복수에 대해선 이미 끝난 이야기다. 그렇다면 다른 것일 터이다.
은(恩)과 원(怨)은 하나.
빚을 졌으면 갚아야 한다. 은혜는 갚지 않으면서 원한만 갚겠다고 날뛰는 것처럼 우스운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자신은 복수의 대상과 다르고 싶었다. 그래야 그들의 심장을 부수고 목을 자르는 데 조금도 거리낌이 없을 것 같았다.
좌소천은 이를 지그시 깨물고 허리를 숙였다.
“말씀하십시오, 노도장님.”
“네 몸이 온전해지더라도 당분간은 이곳에서 나와 함께 지내자꾸나.”
“노도장님…….”
“어차피 이 늙은이의 삶은 이 년을 넘지 못한다. 그리 길지 않은 세월이지.”
자신에겐 무공을 완성할 시간이 필요했다. 복수를 하기 위해선 힘이 있어야 하니까.
그걸 생각하면 이 년이라는 시간도 그리 길지 않았다.
말이 부탁이지 부탁이라 할 것도 없는 일. 좌소천은 순순히 대답하였다.
“그리하겠습니다.”
그날부터 자소천은 하루의 반을 운기하는 데 소모했다.
하루하루 온몸이 찢어지는 고통과 싸우며!
운기를 할 때마다 혈맥이 찢어져 나가는 듯했다.
기운이 스치는 곳마다 거친 칼날이 긁어대는 것만 같았다.
‘끄으으으!’
하지만 절대 멈추지 않았다. 충혈된 눈을 부릅뜨고 이를 부서져라 악문 채 쉬지 않고 금라천황공을 운기했다.
일 주천에 전신이 흠뻑 젖고, 이 주천에 온몸이 붉어져 금방이라도 땀구멍에서 피가 뿜어져 나올 것만 같은데도.
신(身)은 어느 정도 안정된 상태다. 영허 진인이 매일 밤 추궁과혈로 풀어준 덕분에 혈맥 역시 이제 기를 받아들이는 데 큰 무리가 없다. 다만 워낙 큰 내상이어서 그만큼의 고통이 따를 뿐.
하지만 시간은 멈추지 않고 마음의 한은 커져만 간다.
고통을 두려워해서 운기를 게을리 할 수는 없는 일.
‘하늘을 무너뜨리겠다는 나다! 이따위 고통에 질 수 없어!’
좌소천은 열두 번의 대주천이 끝날 때까지 쉬지 않고 진기를 휘돌렸다.
그리고 결국 여섯 시진의 운기가 끝나자 그 자리에 스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런 좌소천의 입가에 떠오른 희미한 웃음.
이제 시작이었다.
2
무당칠검 중 다섯째인 현오자.
이십 년 전, 그가 무당파의 살림을 도맡은 도재전의 전주로 임명되자, 많은 사람들이 그의 괄괄한 성격을 우려해서 한목소리로 장문인의 결정을 말렸다.
“절대 아니 됩니다, 장문 사형!”
“현오 사제에게 맡기면 일 년도 안 되어서 무당의 살림이 거덜 날 것입니다! 재고해 주시길!”
“무당이 구대문파에서 가장 가난한 문파가 되길 바라시는 것은 아니시겠지요?”
“그러잖아도 한 해 한 해 재정 때문에 걱정이 많은데, 어쩌자고 그런 결정을 내리시는 것인지요? 차라리 진무전을 맡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사제들의 탄원에 장문인인 현고자가 물었다.
“그의 방에 이십 년 전에 쓰던 도관이 아직도 남아 있더군. 혹시 도관을 오 년 이상 쓴 사제가 있는가? 아니면 도복을 삼 년 이상 입는 사제가 있는가?”
아무도 없었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사제들을 향해 현고자가 말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현오 사제가 무당제일의 자린고비라는 것은 나도 알고 사제들도 아는 바가 아니던가? 그러니 잔말 말고 내 결정에 따르도록 하게.”
그렇게 도재전의 전주가 된 지 이십 년. 현오자는 꼼꼼하게 살림을 꾸려 나갔다.
그는 한 되의 쌀도 이유 없이 반출되지 못하게 철저히 관리했고, 한 필의 옷감이 쓰이면 반드시 기록하도록 제자들은 닦달했다.
물론 무력을 앞세워서.
당연히 장로들도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도복을 삼 년 이상 입어야 했고, 오 년이 되어야 도관을 새 것으로 바꿀 수 있었다.
덕분에 지금의 무당은 구대문파 중 제일 알부자로, 무림맹에 속한 모든 문파가 부러워하는 대상이었다.
그렇게 도재전을 이끌어온 현오자이기에 그는 나이 어린 막내제자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말해보아라. 그러니까, 백 살은 되었을 것 같은 본 파의 어른이 식량을 가지러 온단 말이냐?”
“예, 사부님. 낡긴 했지만 분명 본 파의 도복이었습니다. 열흘에 한 번씩 오늘 아침까지 벌써 세 번째 오셨는데, 계속 드려야 하는지 사부님께 여쭈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이 육십이 넘어 받은 마지막 제자가 바로 눈앞의 정은이다. 사형과 사제들의 눈치에도 그가 끝까지 사손이 아닌 제자로 받아들였을 만큼 정은은 재지가 있고 똑똑했다.
그런 정은이 누군지 모르겠다고 할 정도의 어른이 무당에 얼마나 될 것인가?
“영우 사숙이나 영오 사숙은 아니었고?”
그렇게 물으면서도 현오자는 그런 질문을 하는 자신이 어이없었다.
그 두 분은 영자배 전대 장로들로, 오래전부터 은거해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정은이 얼굴을 모를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분들조차 그러한데 아예 모습을 보이지 않은 지 수십 년이 지난 다른 사숙들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더구나 두 분의 사숙에게는 몇 명의 제자가 시동처럼 딸려 있지 않던가. 하거늘 그 두 분이 직접 식량을 가지러 올 이유가 뭐가 있을까?
아니나 다를까, 정은이 말한다.
“아닌 것 같았습니다, 사부님. 제가 들었던 두 분 사조의 모습과 많이 달랐습니다.”
“그래? 어떤 모습이더냐?”
“주름이 많고 매우 온화한 표정이었습니다. 눈빛은 모든 것에 달관한 것 같아서 마주 보는 제 마음이 편해질 정도였습니다.”
아마 그런 사람을 꼽으라면 두 손으로도 다 못 꼽을 것이다.
그러나 직접 식량을 가지러 다닐 만한 사람은 그들 중 한 사람도 없었다. 모두가 무당의 장로 아니면 무당산에 은거하고 있는 이름 높은 도인들이었으니까.
그때 정은이 고개를 모로 꼬고 말을 이었다.
“이제 생각해 보니 오른쪽 귀밑에 커다란 점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사부님. 처음에는 머리카락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는데, 자루를 집기 위해 몸을 숙이는 바람에…….”
이번에는 현오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억 저편에 희미한 얼굴 하나가 떠오르는데, 누군지 바로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희미한 그의 얼굴이 완벽히 떠오르자 현오자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아니야! 절대 그분일 리가 없어!’
하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도 귀밑에 커다란 점이 있었다. 그것도 오른쪽 귀밑에.
“호, 혹시… 그 어른의 손도 보았느냐?”
현오자는 절대 아닐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정은에게 한 가지를 확인해 보았다.
“손이요? 아! 얼굴의 주름만 보면 백 살도 넘었을 것 같은데, 손만은 유난히 곱게 보였습니다, 사부님.”
정은의 말이 끝남과 동시였다.
현오자가 벌떡 일어서더니 천장을 바라보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사부님……?”
깜짝 놀란 정은이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현오자는 격동을 가까스로 억누르고서 어린 막내제자를 바라보았다.
“지금 그 이야기는 당분간 아무에게도 하지 말거라. 내가 확인하고 나서 어찌할 것인지 일러주마.”
“예, 사부님.”
현오자는 그 길로 옥청궁을 나섰다.
마음이 조급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옥청궁을 벗어나자마자 몸을 날리는데, 스쳐 가는 바람 소리에 조금 전에 들었던 정은의 말이 섞여 들려오는 듯했다.
오른쪽 귀밑의 점, 노인답지 않은 고운 손.
어쩌면 정은이 잘못 봤을지도 몰랐다.
설령 제대로 봤다 해도 그런 특징이 있는 사람이 꼭 그만이 아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제발 그였으면 싶은 마음이 현오자로 하여금 전력으로 몸을 날리게 만들었다.
‘가서 직접 확인해야 해! 그분이 오셨다면 분명 그곳에 계실 거다!’
삼십 년 전, 무당칠검의 수장이었으며 천하인들로부터 검성이라 추앙받았던 영허 진인이 사라졌다. 청성으로 가던 길에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
그를 찾기 위해서 무당은 오 년의 시간을 투자하고, 전제자를 동원해서 중원 십팔만 리를 뒤졌다.
하지만 누구도 영허 진인의 행방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의 모습이 촉산과 섬서에서 몇 번 보였다는 것이다.
이후로도 감숙과 서장에서 그를 봤다는 사람이 나오긴 했으나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 후 영허 진인이 머물렀던 암자 승허암은 항상 비어 있는 상태로 주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천주봉에서 서쪽으로 세 개의 봉우리를 넘어가면 승허암이 보일 터. 전력으로 달리면 일각이면 갈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지금의 현오자에게는 그 일각이 일 년처럼 길기만 했다.
일각 후.
저만치 승허암이 보였다.
깎아지른 절벽에 난 삼백서른 개의 계단이 예전이나 다름없이 그대로였다.
문득 현오자는 자책감에 얼굴이 붉어졌다.
지난 삼십 년 동안 이곳을 몇 번이나 찾아왔던가.
처음의 일이 년을 빼면 기껏 서너 번뿐이었다. 사오 년에 한 번, 그나마도 지난 십 년간은 한 번도 오지 않았다.
아마 자신뿐만이 아니라 누구든 그러했을 것이다. 기껏해야 일 년에 한 번 제자들을 시켜 청소를 해놓는 것이 전부였을 뿐.
‘좀 더 자주 찾아왔어야 하는데…….’
그런데 이상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
계단에 수북이 쌓여 있어야 할 먼지가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가 청소를 하지 않았다면 있을 수 없는 일.
그걸 본 현오자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승허암에 누가 있다! 오오오! 그럼……!’
계단을 오르는 현오자의 발걸음이 늦추어졌다.
하나하나 남은 계단이 줄어들 때마다 승허암이 가까워진다. 사백과의 거리도 가까워진다.
현오자의 눈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때 승허암의 암자 문이 열렸다.
순간 우뚝 걸음을 멈춘 현오자의 숨소리가 커졌다.
하지만 그도 잠시, 문을 열고 나오는 자를 본 그가 이를 악다물었다.
‘뭐, 뭐야, 저놈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