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천왕 2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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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646회 작성일소설 읽기 : 절대천왕 25화
25화
소영령이었다.
소영령은 고개를 꺾어 피와 시신으로 뒤덮인 백사장을 바라보았다.
굵은 눈물이 그녀의 얼굴을 타고 흘러 뚝뚝 떨어졌다.
“어, 어……. 꺼어어…….”
목에서는 울음소리 대신 꺽꺽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스승님께선 도망가라고 했다. 그런데 도망가지 않고 지붕 위에 숨어서 전장을 바라보았다.
스승님을 놔두고 혼자 도망가기가 싫어서였다.
그런데 눈앞에서 펼쳐진 모습은 충격이었다.
스승님의 팔이 잘리고, 얼마 안 돼 가슴에 검이 꽂혔다.
시뻘건 피가 분수처럼 뿜어지는 모습이 망막에 가득 찬 순간, 그녀는 입을 틀어막은 채 비명을 지르며 스승을 불러 외쳤다.
‘아아악! 스승님! 스승님!!’
그런데 가슴이 턱 막히는가 싶더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스승님을 부르짖는데 나오는 소리는 꺽꺽대는 소리가 고작이었다.
결국 그 소리로 인해서 적에게 들키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 스승님의 시신을 눈앞에 두자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언덕 위에 있던 그 계집인가 보군. 흐흐흐, 선우궁현의 제자인가?”
순우무궁이 눈을 번들거리며 소영령을 바라보았다.
“잘 모르겠습니다. 벙어리인 것 같은데, 지붕 뒤에 있는 것을 잡아왔습니다.”
소영령을 바라보던 순우무궁의 눈에 광기가 떠올랐다.
‘벙어리라고? 호오! 얼굴하고 몸이 기가 막히게 생겼구나!’
순우무궁이 소영령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계집, 혹시 좌소천이 어디에 있는지 아느냐?”
하지만 소영령은 듣지 못한 것처럼 울기만 했다.
“이년! 내 말이 들리지 않느냐?”
아무리 소리쳐도 마찬가지 반응이다.
그제야 순우무궁이 눈살을 찌푸렸다.
“흠, 벙어리들 중 대부분이 귀머거리라더니…….”
순우무궁은 하는 수 없이 바닥에 좌소천이라는 이름을 쓰고 소영령의 반응을 살폈다.
이상했다. 분명 이곳에서 살았다면 어떤 반응이라도 보여야 할 텐데 계집은 눈 한 번 깜짝이지 않고 꺽꺽대며 눈물만 흘린다.
몇 번을 다그쳐도 여전히 똑같다.
결국 그는 소영령에게서 뭔가를 알아내려던 생각을 포기하고 무사들이 모두 돌아올 때까지 주위를 서성거리며 한 시진을 더 기다렸다.
‘그토록 침착하던 이공자였거늘.’
교초온이 기이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데도 그는 여전히 주위만 서성거렸다.
그리고 그들이 다 빈손으로 돌아온 것을 보고 나서야 결론을 내렸다.
섬은 그리 크지 않았다. 한 시진을 뒤졌다면 사람이 숨어 있을 만한 곳은 모두 뒤졌다고 봐야 했다.
“놈이 정말 사천으로 간 건가? 젠장, 하는 수 없지. 교 장로님, 일단 사상자들을 수습해서 돌아갑시다.”
그러고는 소영령을 잡아온 천귀단의 무사에게도 명령을 내렸다.
“그 계집도 배에 실어라. 혹시 모르니 본가로 데려갈 것이다.”
일순간, 소영령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흐으으음, 볼수록 쓸 만해.’
3
식사가 오지 않았다.
운기행공을 하느라 시간을 잘못 계산한 것인지 몰라 반나절 정도를 더 기다려 봤다. 그래도 소영령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령매가 어디 아픈가?’
단순히 그런 일이라면 백부가 가져왔을 것이다. 그런데 백부마저 오지 않았다는 것은 섬에 무슨 일이 생겼다는 말.
좌소천은 급히 위로 올라가서 바위를 밀어내고 동굴을 나섰다.
목옥에는 아무도 없었다. 온갖 집기들이 흐트러져 있고, 원목으로 만든 침상도 뒤집어진 채 나뒹굴고 있었다.
백부님의 방은 물론이고 소영령의 방도 마찬가지였다.
“백부님! 어디 계십니까? 령매! 어디 있는 거야?”
아무리 불러도 답이 없다.
좌소천은 목옥을 박차고 나와 둔덕으로 올라갔다.
순간, 저만치 붉게 물든 초원과 백사장이 보였다.
누렇던 백사장도 벌겋고 마른풀이 융단처럼 깔려 있던 곳도 벌겋다.
그곳에 한 사람이 누워 있다. 역시 시뻘겋게 물든 채.
좌소천은 벌벌 떨리는 몸으로 정신없이 내달렸다.
‘아니야! 절대 아니야! 하늘이여, 제발 아니어야 합니다!’
아니어야 했다.
저기에 누워 있는 사람은 백부님이나 령매가 아니어야 했다.
하지만 하늘은 그의 소원을 외면한 채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철검이 보인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백부의 얼굴이 보인다.
이 장가량 떨어진 곳에 시뻘건 피로 물든 팔도 보인다.
“백부님! 으아아아아아아!”
통곡이 무은도를 뒤흔들었다.
한 맺힌 절규에 동정호가 숨을 죽였다.
오오오! 어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이 아니었다면 백부님이 어찌 이렇게 처참한 모습으로 죽었을 것인가 말이다!
한쪽에 자신의 이름이 쓰여 있다. 왜 자신의 이름이 거기에 쓰여 있는가는 알지 못했다. 분명한 것은 자신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결국 모든 게 자신의 죄였다.
하다못해 내상만 입지 않았어도 지금 누워 있는 사람은 결코 백부님이 아니었을지 몰랐다.
“백부님! 백부님! 죽어야 할 사람은 저인데 왜 백부님이 돌아가신단 말입니까!”
좌소천은 선우궁현 앞에 무릎을 꿇고 참담한 절규를 터뜨렸다.
피눈물이 흘러 가슴을 적셨다.
온몸이 울어댔다.
갈가리 찢긴 마음에 피눈물이 스며들었다.
“으아아아아아아!”
그렇게 한 시진.
무은도에 석양이 붉게 비칠 즈음에서야 통곡이 그쳤다.
반듯이 눕혀진 선우궁현이 웃는 듯 보인다.
무엇이 그리도 좋아 웃으신단 말인가.
좌소천은 무릎에 올린 선우궁현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충혈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이여! 어찌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신단 말입니까!”
악다문 이가 입술을 파고든다.
핏물이 반은 입 안으로, 반은 턱을 타고 흘러내린다.
“내게 무엇을 바라시는 겁니까! 진정 악귀가 되어 세상을 피로 물들이기를 바라시는 겁니까!”
좌소천은 하늘을 향해 붉게 물든 입으로 한 자, 한 자 씹어뱉듯이 소리쳤다.
“좋습니다! 그걸 원한다면 그리하지요!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드리지요! 세상을 피로 물들이겠습니다! 당신이 만족할 때까지!”
천천히 고개를 내린 그의 눈이 선우궁현의 허벅지로 향했다.
부서진 륜이 살 깊숙이 박혀 있었다.
그는 륜의 주인을 알고 있다.
적은 그들이었다. 천외천가!
‘모조리 죽여 버린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선우궁현의 잘린 팔을 주워 들었다.
피가 다 빠졌는지 하얗게 탈색된 살결이 차갑기만 했다.
좌소천은 선우궁현의 가슴에 잘린 팔을 올리고 선우궁현의 몸을 안아 들었다.
차가운 몸이 손끝을 통해 느껴졌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걸음이 더해질수록 좌소천의 몸도 싸늘히 식어갔다. 그러더니 결국 심장마저 만년빙처럼 차갑게 굳어졌다.
‘령매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놈들에게 잡혀갔다는 뜻.’
숨어 있다면 벌써 나왔어야 했다. 자신보다 먼저.
하긴 수십 명이 섬 구석구석을 뒤졌을 터, 찾지 못할 리가 없다.
잡아갔다면 당분간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당할지도 모른다.
그녀는 여인. 상대는 자신을 죽이기 위해 만 리 길을 달려온 자들. 무슨 짓을 할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좌소천의 눈빛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당장 구하러 가야 해!
마음은 그렇게 소리치는데 차갑게 가라앉은 이성은 그의 발길을 붙잡는다.
―백부가 너를 어떻게 살렸는데 아무 준비도 없이 만 리 길을 쫓아 여자를 구하러 가겠다고? 힘도 없는 놈이 가봐야 죽기밖에 더해? 네가 죽으면 누가 어머니의, 백부의 복수를 해주지?
하지만… 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소영령이 놈들에게 잡혀 있는데 무공을 완성한답시고 혼자만 편하게 있을 수 없었다.
최선을 다해 보는 수밖에.
어차피 흐트러진 정신으로 무공을 익힌다고 당장 크게 늘 것도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령매, 조금만 참고 기다려 다오!’
좌소천은 백부의 시신을 안은 채 둔덕을 올라갔다.
하늘에 짙은 구름이 몰려온다.
비가 내릴 것 같다.
동정호에도, 자신의 가슴속에도.
온 세상을 씻어버린 폭우가 내리면 얼마나 좋을까.
9장 추적(追跡)
1
석양이 군산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릴 즈음.
한 척의 조각배가 악양 남쪽 이십 리 지점의 동정호변에 머리를 들이밀고 정박하더니 소년 하나가 내려섰다.
좌소천이었다.
좌소천은 선우궁현을 양지바른 곳에 묻은 다음날, 무은도의 모든 것을 정리해 암운동에 집어넣고 입구를 틀어막았다.
그리고 소영령을 구하기 위해 무은도를 떠나왔다. 묵령기환보와 무진도만 지닌 채.
백부님께 죄스러웠지만, 힘이 안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신 좌소천은 밤새도록 선우궁현의 무덤에 백 번의 절을 올렸다.
절대 죽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지며!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소영령을 구하겠다는 약속을 하며!
아수라에게 혼을 팔아서라도 복수를 하고 말겠다는 한 맺힌 다짐을 하면서!
그리고 아침 해가 밝아오자 배를 찾아보았다.
다행히 적들은 구석에 놓인 배를 부수지 않고 그냥 갔다. 사람이 없을 거라는 생각에 별반 신경을 쓰지 않은 듯했다.
배가 부서졌다면 대나무를 엮어서 동정호를 가로질러야 했을 터. 한시가 급한 상황에서 배가 무사하다는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좌소천은 뭍으로 오르자 곧장 북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일단은 악양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곳에 가서 만나봐야 할 사람이 있었다.
악양현은 동서가 십 리, 남북이 이십 리나 뻗어 있었다.
그렇게 거대한 악양에서 포봉객잔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처음에 갔던 길을 찾으려 해도 거기가 거기 같아서 몇 번을 헤매야 했다.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포봉객잔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하긴 수백 개의 객잔 중 골목의 조그마한 객잔을 알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결국 아무 객잔이나 들어간 좌소천은 점소이들에게 포봉객잔에 대해 물어봤다.
한창 바쁜데 다른 객잔의 위치를 묻는 사람이 고울 리 없었다.
점소이들은 좌소천에게 대충 위치를 가르쳐 주었다. 그나마도 좌소천의 허리에 칼이 걸려 있기에 심한 말을 하며 내쫓지는 않았다.
좌소천은 점소이들의 말대로 서너 군데를 더 돌아다녔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포봉객잔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밤은 점점 깊어졌다.
좌소천은 하나둘 불이 꺼져 가자 스스로가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시간은 자꾸 흘러가는데 자신은 한 것이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말이다.
말 그대로 미칠 것 같았다.
쥐구멍이 있으면 머리라도 들이밀고 싶었다.
‘뭐? 령매를 구해? 객잔 하나도 제대로 찾지 못하는 놈이 천하를 뒤져서?’
경험에 대한 것을 숱하게 이야기하던 백부였다. 백부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제야 절실함으로 다가온다.
사람도 거의 보이지 않는 거리.
초겨울 바람이 차갑게 불어온다.
갈비뼈를 훑고 지나간 바람이 자신을 비웃는 듯하다.
외롭고 쓸쓸함에 걸음마다 얼어붙은 대기가 부서져 흩날린다.
묵묵히 걷던 좌소천은 동정호가 보이자 물가로 다가갔다. 길게 늘어선 선창에 수백 척의 크고 작은 배가 정박해 있는 게 보였다.
선창가에 앉은 좌소천은 물끄러미 동정호를 바라보았다.
“크크큭…….”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천하의 똥멍청이라는 말이 자신을 가리켜 하는 말 같았다.
무릎에 팔을 얹고 팔 위에 턱을 걸친 그는 어둠으로 검게 물든 동정호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맞다, 좌소천. 너는 똥멍청이다. 백부님이 아니었으면 몇 번은 죽었을 놈. 그러면서 백부님의 시신이 식자마자 백부님 곁을 떠난 무정한 놈! 너는 나쁜 놈이다!”
감정이 욱해서인지 마지막 말은 조금 크게 흘러나왔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불렀다.
“이봐.”
좌소천은 고개를 돌리지도, 대답도 하지 않았다.
천하의 똥멍청이에게 뭐 물어볼 게 있다고 부른단 말인가.
그런 마음이었다.
“내 말 안 들리나?”
좌소천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뒤를 바라보자 이 장 정도 떨어진 곳에 어깨를 움츠린 장한이 하나 보였다.
“무슨 일이오?”
장한은 힐끔 주위를 둘러보고는 종종걸음으로 다가오더니, 앉아 있는 좌소천 옆에 섰다. 그러고는 속삭이듯이 물었다.
“자네가 포봉객잔을 찾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