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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오네트는 의심을 하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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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기 : 마리오네트는 의심을 하지않는다

인터넷이 가능하게 되자, 얼굴을 모르는 이와 컴퓨터를 이용하여, 메일을 보내거나 채팅하는 것에, 어느샌가 나는 푹 빠지게 되었다. 왠지 모르게 약간의 대인관계 공포증이 있는 나로서는, 대면하지 않고 상대와 편하게 얘기할 수 있는 수단이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평소에 늘상 하고 있던 생각이라도, 남과 얼굴을 마주하고 얘기하노라면 더듬거리고, 요점을 빼먹거나, 사족을 붙이곤 하여 남에게 엉망인 인상을 주는 것에 비하면 이 채팅이나 메일은 차분히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것 같아 좋았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질리게 되었다. 모두들 똑같은 느낌이 들었다. 더욱 참을 수 없는 것은 솔직하지 못한 그들의 태도였다. 상대에 따라 나이를 속이고, 성별을 속이고, 어투를 바꾸며, 신분이 바뀐다. 설마 그렇기야 하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며 애써 부인하다가, 정말 내 눈으로 확인한 후에는 왠지 채팅이란 것에 환멸을 느꼈다. 그래서 당분간은 채팅을 접고 그냥 웹서핑을 하며 돌아다니던 도중, 펜팔이 아닌 E-pal 이라는 것을 주선해주는 사이트를 발견했다. 해외와 국내로 분류되어 있었는데, 해외의 경우는 엄청나게 사람이 많아, 왠지 귀찮은 느낌이 들어 국내를 둘러보던 나는 하나의 작은 자기소개문을 발견했다. '마음을 터놓고, 메일을 주고받았으면 좋겠어요. 저는 고 3의 여학생입니다.' 다른 긴 내용의 소개문에 비하면 정말로 튀는 심플한 문구였다. 아니, 물론 스크롤을 내려 보면 아래에 더 있을 지도 모르지만, 그동안 표리부동의 채팅에 질린 나에게 '마음을 터놓고'라는 글이 신선하게 다가왔기 때문에 그랬을 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는 나의 소개를 간단히 적은 메일을 그녀에게 보내고 있었다. 그날 오후 바로 답장이 왔다. 메일을 주셔서 감사하고, 자기는 모뎀을 단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런 것들이 신기해서 그러는 것이라며, 앞으로도 자주 메일을 교환하자는 내용이었다. 나는 띄엄 띄엄 메일을 띄워주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계속 메일을 띄우면, 그만큼 상대에 대한 신비감이 덜어지고, 또한 말할 거리도 동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주로 나에게 답장만 보내는 편이었지만, 그것만 읽어 보아도 그녀의 성품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표현이 세련되어 있었다. 그래서 혹 나이를 속이는 것이 아닌가 하고, 여러 방법으로 유도심문을 한 적이 있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고등학생의 답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내용들이었다. '님의 메일을 보고 있자면, 정말 생각이 깊으신 것 같아 감동할 때가 많아요. 혹시 채팅프로그램은 안 쓰세요?' 이런 내용을 담은 메일이 왔다. 더 아래에는, 채팅을 통해 나와 대화해 보고 싶다는 글도 적혀 있었다. 채팅이라…. 환멸을 느껴 그만둔지가 꽤 되어, 기억속에서 녹아버린 그 단어가 다시 떠오르게 되자, 잊었던 흥미가 다시금 발동하게 되었다. 그녀에게 보내는 새 메일을 작성하는 창에, 나는 내가 쓰는(아니, 썼던)채팅 서비스의 이름과, 아이디를 입력하고 있었다. 마리오네트. 그녀의 아이디였다. 이미 서로에 대해 조금씩은 알고 있던 터라, 비록 채팅상에서는 처음 만났지만 간단한 인사 후 우리는 곧 얘기를 시작했다. 처음엔 주로 내가 묻는 편이었다. 학교 생활은 어떤가, 고 3이니까 힘들겠다, 이런 것들을. 그녀는 대답을 하면서 간간히 나의 신분에 대한 질문을 하였다. -앞으로 뭐가 될 생각이시죠? 고 3한테 으레 묻는 그런 질문을, 내가 했을 때였다. 내 말이 나가자마자 거의 바로 대답이 오던 페이스였는데, 답이 오기까지 제법 시간이 걸렸다. -의사요. -와, 공부 잘하시는 모양이군요. -시험을 잘 친 것 뿐이죠. -시험을 잘 치려면 공부를 잘 해야죠. -그런가요? 그 말이 뜬지 얼마 되지 않아, '마리오네트님이 나가셨습니다' 라는 메시지가 떴다. 렉인가 싶어, 10분 기다리고 있었으나, 그녀는 들어오지 않았고, 쪽지조차 오지 않았다. 그래도 왠지 찜찜한 기분에, 채팅창을 아래에 깔아둔 채로, 딴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30분 정도 지났을 때, 쪽지 창이 떴다. 발신인은, 마리오네트. '죄송해요. 엄마가 들어오셔서.' 다시금 그녀를 채팅에 초대하여, 말을 계속했다. -그럴 때는 알트 탭을 같이 누르면 다른 창으로 전환되요. -엄마가 그런 거 다 아세요. -대단하시네. 그런데, 엄마가 채팅 못하게 하세요? -네... 공부하라구요. -많이 시키시는가 보죠. -...... 지금까지 한번도 말줄임표로 대답하지 않던 그녀의 이 의외의 반응에, 나는 조금 놀랐다. -네. 많이 시키시죠. 피곤해 죽겠어요. 뭐야, 그런 거였던가. -고3이니까, 당연한 거죠. 누구나 다 그런 거 아니겠어요. -그럴까요? -그럼요. 나도 그때 컴 켜기만 하면 죽도록 맞았다구요. -그래요..... -다 마리오네트님을 사랑하시니까 그런 거죠. -...... 다시 말줄임표. 나는 대답을 기다렸다. -그 분들이 사랑하는 것은, 제가 아니에요. 내가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그녀의 대답이 올라왔다. -나의 '능력' 이죠. 그 말을 끝으로, 다시금 그녀는 퇴실하였다. 이번에도 시간이 좀 지나면 들어오려니 했으나, 그녀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에게서 다시 메일이 온 것은 그로부터 2주일이 지난 어느날이었다. 내용은 이번 주 일요일 몇 시에 채팅에서 만나자는 것이었다. 나도 그러마고 답장을 했고, 그러는 동안 약속의 그 날이 되었다. -그 때 또 어머니가 또 들어오셨나요? -네. -에, 그럼 차라리 컴퓨터를 없애버리시지 왜 그러실까요? -인터넷을 써서 하는 과제가 많고, 인터넷 교육방송도 봐야 하니까요. -아아. 나는 대답을 하고, 곧 다른 화제로 바꿨다. -공부하다가 스트레스 많이 쌓이죠? 뭘로 풀어요? -만화요. 즉각 대답이 왔다. -만화 보는거? -아니, 그리는 거요. -야... 대단하시네요. -중학교때는 동아리에도 들어서, 그린 거 판매하고 그랬어요. -놀랍군요. -내가 그린 것을, 남들이 좋아하면서 돈 주고 사는 걸 보니까, 너무 가슴이 벅차더라구요. -그 정도면, 만화가 해도 되겠군요. 다시 대답이 없었다. -부모님이 싫어하시니까요. -왜요?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우리 집 사람들은 전부 엘리트에요. 전부 다 메이져 대학 출신이고. 그런데 그 집안에서 혼자 만화가 따윌 해서 가문에 먹칠할 수는 없잖아요? -형제가 있나요? -오빠가 둘요. -딸은 하나라서, 잘 되라고 신경쓰시는 것 아닐까요? 아까처럼은 아니지만, 몇 초 지난 다음 대답이 왔다. -그렇겠죠? 그 후, 나는 다시 만화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그녀는 정말로 만화에 대해 많이 알고, 좋아하는 것 같았다. 언젠가 그린 것을 보내달라는 말로 그날의 만남을 종료했다. 한달 정도 지났다. 그동안 비어 있던 메일함에, 그녀의 편지가 왔다. 제목은 '정말 싫어!' 였다. 엄마가 때렸어요. 전교 1등 못했다구요. 1등이랑 총점 10점밖에 차이 나지 않는데, 정말 너무해요. 내가 공부하는 기계인줄 알아요? 하고 소릴 질렀더니 그냥 때리는 거에요. 나도 맞은 김에 더 큰 소릴 질렀어요. 의사 따위 하고 싶지 않다구요. 만화가 하고 싶다고 그랬어요. 엄마 표정이 일그러지더군요. 정말로 내가 행복한 길로 보내고 싶다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달라고, 더 덧붙였어요. 그러니까 한마디 더 남기고 돌아서더군요. '그럼 자식으로 안 보겠다' 구요. 그날 돌아온 아빠한테 이른 모양이에요. 집안이 떠나가게 소릴 질렀어요. 그딴 생각 두 번다시 하지 마라고. 할말이 없어요. 정말 싫어요. 전에도 말했잖아요. 나 자신이 아닌, 내 머리, 내 능력을 사랑하는 거라고. 그게 맞아요. 나는 마리오네트에요. 뭔지 아시죠? 줄에 매달려서 딸랑딸랑 움직이는 인형 말이에요. 기대와 희망, 그리고 체면이라는 보이지 않는 줄에 매달려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는 마리오네트. 웃고 싶지 않아도 웃어야 되고, 하고 싶지 않아도 해야 되는 나는 마리오네트. 마리오네트에요, 나는! 왠지 상당히 흔들리는 것 같았다. 연장자의 입장에서 내가 무슨 말인가 해야 겠다는 자각이 들어, 이번 주 일요일에 채팅에서 만나자고 했다. -요즘 어때요? 내가 먼저 물었다. -공부하고 있어요. 즉각 돌아온 그녀의 대답이었다. -나는 공연을 위해 준비된 거니까. 시키는 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니까요. 아직도 그녀는 자신을 마리오네트에 비유하고 있다. 나는 여기서 뭔가 한마디를 해 줘야 될 것 같다고 느꼈다. -과감히 자신의 길을 가 보는 게 어때요? -네? -그, 마리오네트를 속박하고 있는 끈을 끊어 버리세요. 나름대로 멋진 말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나는 그녀가 내가 한 말을 씹어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마리오네트의 줄을 끊어버리라구요? -그래요. -맞아요. 그러고보니 마리오네트를 조종하는 실은 분명히 그것을 속박하고 있죠. 그녀의 말은 나를 긍정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하지만 '그렇지만' 이라는 말이 나왔을 때, 나는 긴장했다. -자신을 속박하고 있는 그 줄이 아니면, 마리오네트는 움직이지도 못하잖아요. 갑자기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할 말이 없어진 것이다. 그런 나에게, 그녀는 말을 계속했다. -그 줄이 있기에 마리오네트는 삶... 움직임의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 건데. 그걸 끊어버리면? 즉, 그녀의 삶의 이유는 그녀 부모의 기대와 체면에 걸려 있다는 것인가… 물론 비유상으로 보면, 그렇게 된다. 그녀가 살아온 것은, 그녀의 부모를 위해 살아왔다는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자신의 희망대로 가라는 것은 전자를 부정하게 되는 것이 된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존재 가치가 없어져 버린다. 이것이 그녀의 생각일 것이다. -아니야, 님은 마리오네트가 아니에요. -그럼 뭐에요? 자신의 희망조차 조종당하는 데 뭐가 아니란 말이에요?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한 대답을 생각하는 동안, 그녀는 나가버렸다. 자의는 아니었을 것이다. '인형사'가 거둬들인 것일 뿐이다. 유복한 가정, 가족 전원 모두 메이져 대학 출신의 자녀가 자신의 방에서 목을 매었다는 보도가 들렸다. 고 3의 수험 스트레스가 엄청난 것 같다고 기자는 전하고 있다. 그녀의 죽음에 관해서는 단지 그 말로 끝낼 뿐, 다른 수험생들의 정서조절을 위해 본인이나 주위 사람들이나 각별히 신경을 써 줘야 할 것 같다는 말로 그 뉴스는 짧게 지나갔다. 언제 온 것인지 메일함에 메일이 들어 있었다. 두 줄의 짧은 내용을 눈으로 훑고, 나는 손을 이마에 갖다대었다. 그녀는 최소한 시키는 대로 살아온 것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끝까지 자신은 조종당할 것이라 믿었다. 그리하여 자각이 없는 상태에서, 본인의 말마따나 자신의 원동력이 되는 속박의 끈을 잘라버린 '마리오네트'마냥 힘없이 바닥에 떨어진 것이다. 본인은 결국 끝까지 자신을 마리오네트에 비유해 버린 것이다. 자신의 희망에 대한 욕구를 품었을 때, 이미 그녀는 인형사에게서 벗어나 자의로 움직이게 된 것을, 그녀는 왜 몰랐을까. 나는 그녀에게 이 말을 해 줬어야 했다. '마리오네트는 자신이 왜 움직이는지 의심하지 않는다' 라는 말을. 그리고 의심을 품게 된 이상, 그녀는 더 이상 인형이 아니라는 것을. '줄을 끊어 버려라' 이 다음에, 왜냐하면 당신은 이미 마리오네트가 아니니까. 그 말을 덧붙였어야 했다. 단지 '끊어 버려라' 라고 해 버렸던 것은 나다. 내가 그녀를 죽인 것이다. 나는 얼굴에 양 손을 갖다대어 문지르며, 언제까지나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을 속박하고 있는 줄이 아니면, 움직이지도 못하는 마리오네트. 그렇기에 그 줄을 싫어하면서도 싫어할 수 없는 나는, 마리오… 네트. 그녀가 남긴, 마지막 유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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