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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그것은.. - 1부1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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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기 : 어쩌면 그것은.. - 1부11장

어쩌면 그것은..우리 가족이 비로소 큰아빠네 처럼 하나가 되고 나서 나는 그 어느때보다 강렬한 책임감과 의욕이 솟구쳤다. 엄마는 1학기때까지는 숙제했냐, 예습했냐, 매일매일 묻고 숙제는 가끔씩이었지만 국민학생때처럼 검사도 하셨었는데, 2학기 중간고사 석차를 보시고는 그런 말씀은 더 없으셨다. 그리고 우리 가족이 하나가 된 이후 이틀이 지나 내 정액을 두 번이나 빼주신 다음 넌지시 장래희망을 물어보셨다. 장래희망이랄것 까지 생각해본 경험이, 국민학생때 그림그리기 하면서 그려봤던, 엄마와 똑같은 공무원이 다였다. 물론 공무원이 딱히 유니폼을 입는것 같지 않았고 공무원의 범위가 겨우 엄마를 본 정도였던 나는, 경찰이나 소방관도 공무원이라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었고, 그림그리기도 그냥 신사복을 입고 출근하는 아빠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렸었다. 반 친구들이 얼마나 놀리는지, 공무원이 뭐 그러냐며, 회사원이라고 그린 애랑 옷이 똑같느니 하며, 서로 말다툼하다가 드잡이도 하고 그랬었는데. "아직은 생각해보진 않았어요. 엄마처럼 공무원되면 되나?" 하지만 엄마는 아빠가 하실법한 말씀을 하셨다. 딱 정해진 논리로 무엇을 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남자 직업이 그냥 생각나는대로 정하면 되겠어? 그러면 하고 싶은거 확실하게 생길때 까지는 공부를 열심히 해. 너가 대학교를 가기 전까지 너가 평생 뭘 하고 살지를 정할 수 있게 되면, 너가 해놓은 공부 덕에 전공 선택하는게 쉬울거야." 엄마 말씀의 요지가 그것이었다. 오히려 하고 싶은게 명확하지 않으면 더욱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고. 그래야 나중에 후회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뒤늦게 생겨도 당황하지 않고 먹고살 준비를 할 수 있다고. 하고 싶은 것이란 범주 안에 가족을 먹여살릴 수 없는 분야도 많기 때문에 내가 내 삶은 물론 가족의 삶까지 책임지는 입장에 서려면 모든걸 다 고려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었다. 결론은 신중하게 장래를 고민하라는 주문이셨지만 나에게는 큰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내 성적표가 엄마가 걱정대신 내 장래에 대한 조언을 하시게 된 계기가 아닐까 싶어 더 힘이 났달까. 때문에 나는 좀 더 앞으로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국영수과사, 고등학생이 되어 배울 범위까지 나아가더라도 교과서만으로는, 참고서만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되어서 진도를 뺄래야 뺄 수 없을때까지 다 빼버리고 싶어졌다. 그러면 엄마의 흐뭇한 표정과 내 장래에 대한 따스하고 지혜로운 조언들을 더 들을 수 있겠거니 하면서. 그리고 사진을 찍은날로 딱 일주일이 되어 나는 사진을 찾으러 갔다. 액자들을 둘러봤지만 별다른게 없었고, 아저씨는 내 사진과 필름이 담긴 비닐봉투를 건내시고는 나에게 돌아갈 것을 요구했다. 뭘 하는 놈이길래 일이 맨날 많다는건지. 김경미선생님과 저 남자에 대한 관계를 좀 더 파볼 수 있지 않을까 했던 기대는 허무하게 무너지고, 나는 며칠 후 벌어진 사건 전까지는 잠깐 그 일을 잊은채로 공부만 했다. "씨발, 우리 형 남창이라고 한 번만 더 해봐. 너 형한테 일러서 그냥 박살날 줄 알어. 쨔잔!" 재호는 손에서 사진을 든채로 나와 철호에게 보여줬다. 문제의 그 사진은 지문 자국이 여기저기 지저분했고 특히 가장자리가 심했다. 카메라가 위에서 사타구니쪽을 찍고 있는 구도, 여자의 얼굴보다 위에서 찍고 있는 구도였다. 사진 왼쪽의 여자의 얼굴은 너무 가까워서 촛점이 빗나가 흐렸지만 이마부터 눈, 코가 보였고 중앙은 도드라진 가슴과 유두가 살짝 촛점이 덜 나간채로, 그리고 선명하게 찍힌 오른쪽의 그곳은 남자의 좆이 여자의 까만 숲속에 들어가 있는 모습이었다. "야, 이렇게 흐리고 이게 좀 비슷하긴 한데 그래도 이거가지고 어떻게 경미라고 확신할 수 있냐? 일단 비슷한것 같으니까 니네 형 남창이라고 한건 취소." "야, 취소가 아니고 사과를 해야지. 사진이 실제로 있잖어!" "아이, 씨발, 그래 미안하다. 근데 이거 나한테 팔아라." "뭐? 만원 줄래?" "이 새끼가 어디서 바가지를." "새끼야, 너 딸치려고 이 사진 사겠다는 거잖아. 나도 이거 잠깐 빌려온거야. 알지? 우리형이 학교 통인거." "학교 통인지, 탑인지 관심없고. 이거 내가 만원 주면 파는거지?" "안돼 임마. 그냥 말해본거지, 형한테 안가져가면 나 존나 쳐맞어." 순간 철호는 오른손으로 재호의 손목을 잡고 비틀면서 왼손으로 사진을 잡아 뺏었다. 사진이 안찢어지게 완력을 쓴것이다. "만원 내일 줄께. 이거 내가 샀다." "아우, 씨발! 야! 나 형한테 맞아죽는다고! 내가 언제 판다고 했어 새꺄!" "니가 아까 만원이라며! 다른 애들도 다 들었는데 어디서 개뻥이야?" "너 형한테 다 말할꺼야 한번 뒈져봐라 썅노무 새끼." 철호는 쌍욕을 듣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재호는 재빠르게 뒤돌아 달렸다. 그리고 교실 밖으로 나갔다. 점심시간이 20분 정도 남았을까. "준규야, 이거 진짜 아니겠지?" "너 딸치려고 산거 아냐? 진짜든 아니든 뭔 상관이야?" "염병, 니가 사랑을 알어? 내가 이걸 손에 넣어야 경미 히스테리가 줄거 아냐? 이게 있으니까 개나 소나 경미를 창녀취급하잖아. 에휴, 너 같은 어린애가 어르신 속을 어찌 알겠냐." "진짜냐? 순정남?" "순정남 어때서? 사랑을 모르는 어린애는 죽었다 깨어나도 모른다." "내가 아는지 모르는지 어떻게 알고? 그나저나, 니가 진심이면 나도 알려줄게 있는데." 철호는 크게 대수롭지 않은듯 그 사진을 겉옷 속주머니에 넣었다. 그것도 다른 애들이 보는지 살피면서 은밀하게. "진짜야, 임마. 너 이런 반응이면 말 안해준다?" "아휴, 뭔데? 이거보다 쎄냐?" "안쎄면 내가 말이나 꺼냈겠냐?" "뻥치지마~. 니가 그런걸 알면 진작에 이야기 했겠지." "나도 알아낸지 며칠 안됐어." "알아내? 니가 탐정이냐?" "어라? 말 안한다?" "들어보고 별거 아니면 니가 떡볶이에 군만두랑 삶은계란 얹어서 쏴라?" "그걸 니가 판단하냐?" "당연하지." "내가 말해주고 떡볶이 살거면 그냥 말 안하고 말지. 너는 생각을 좀 해봐라. 정보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너지 나냐? 하여튼. 됐어 임마. 니자리로 가." "알았어, 알았어. 들어줄께 뭔데?" "어랍쇼? 공짜로?" "야이씨, 너랑 나 사이에 그럼, 돈받을래?" "형식상 떡볶이는 쏘라고. 맨날 니가 먹고 싶은거 먹잖어. 나는 이거 알아낸다고 삼천원이나 날렸는데." "존나 대단한거면 내가 삼천원치 쏠께 됐냐? 뭔데? 빨리말해봐." "학교에서 우리집 쪽으로 골목길로 가면 나오는 사진관이 있는데, 거기서 김경미 선생님 사진을 발견했거던. 그래서 나는 니가 하도 김선생님 좋아하니까 들어가서 좀 캐내볼까 했지. 근데, 그게.." "그게 뭐? 그래서?" "들어갔더니 벽에 액자가 가득한거야. 일단 호기심도 땡기고 해서 하나씩 훑어보는데, 내 직감대로 딱! 김경미 선생님 닮은, 밖에 걸린 사진이랑 똑같은 사람 사진이 더 있더라고. 근데, 그게.." "어휴, 너 왜 자꾸 끊어!" "땡기냐?" "몰라, 일단 말해보라고." "옷 다벗고 찍은 사진도 있더라고." "야이 썅, 개뻥치고 있어!" "내가 그런놈이냐?" 철호는 눈이 거세게 요동쳤다. 구미가 확 당기는 정보겠지. 나는 이 녀석의 확답을 듣고 싶었다. "내가 너를 위해서 알아본거 믿어 안믿어?" "아이씨, 믿어. 얼른 말하라고!" "어라? 이게 나를 대하는 태도야?" "어우, 진짜 확 때릴 수도 없고." "때려봐 임마. 내가 그런놈을 위해서 피같은 용돈 다 날리고, 그동안 내가 숙제까지 베끼게 해준게 한스러우려고 하네." "아~ 미안, 알았다. 미안하다. 근데 너 이렇게 뜸들였는데 별거 아니면 진짜 한대만 맞아라." "얼씨구?" "알았어, 알았어! 빨리 말해달라고!" 철호가 약이 바짝 오르는지 소근거리듯 이야기 하다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니 운동장에 안나가고 교실에 있던 애들 몇명이 우리를 쳐다봤다. 철호는 다시 소리죽여 나를 독촉했다. "필요도 없는데 증명사진 찍고, 다시 그 사진 보면서 사진관 아저씨한테 혹시 애인이냐고 그랬지. 근데 아니라고는 안하더라고. 또 한번 감이 확 오길래, 우리학교 김경미 선생님이랑 닮았다고 그 남자 반응을 살피면서 말을 했는데, 이름 나오니까 몸이 움찔 하는거야. 이거 백퍼 아니냐?" "와... 씨발... 진짜야?" "아휴, 넌 아직도 정신을 못차렸네. 더 말 안한다?" 철호는 정신이 나가고 있는것 같았다. 내 정보는 그만큼 치명적인 위력이었던 것이다. "내가 방금 그 사진보고 떠오른 그림이 있는데, 그 사진이 흘러나온 사연이 분명, 그 사진관과 연관있을 수도 있어. 그 말은?" "그 말은?" "너 김경미 선생님 지키고 싶지 않냐?" "당연하지. 그러니까 그 말은 그 사진관을 털어보자?" "이야~ 머리 빨리 돌아가네?" "존나 그러다 잡히면 뒈져 임마." "얼씨구? 천하장사 되려던 놈이 새가슴이었냐? 순정 어쩌고 하더니..." "아니 임마, 니 걱정 하는거야. 해도 나 혼자 해야지." "내가 언제 같이 한대?" "아... 그, 그래. 씨발, 우정 존나 얕다." "킥킥, 그렇다고 내가 또 언제는 같이 안한대?" "어휴, 너 이씨!" -벌컥! 탁! "원철호란 새끼 어딨어!" 철호는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던 약간 엎드린 그 자세 그대로 품속 사진을 빼더니 내 품속으로 넣었다. "이거 갈기갈기 찢어버려. 나 갔다 올께." 그러면서 찡긋 해보이는데, 이놈에게 한 번도 가져본적 없던 느낌이 뭉클 올라왔다. 이 놈은 진심으로 김경미 선생님을 여자로서 좋아해서, 그녀를 위해서 희생을 치르려는 속셈인게 전해지자 멋있어 보였던 것이다. -끼긱! 철호는 순간적으로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더니 교실 밖으로 내달렸다. 나는 무슨일인가 하는 연기를 하며 그쪽을 보는데 이미 한무리의 애들이, 아니 3학년 선배일 놈들이 복도를 달리는게 보였다. 뒷문으로 맨먼저 지나간 놈이 아마 재호말대로면 제 형이겠지? 그리고 철호는 학교 끝날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책가방은 어찌하나 싶은 생각으로 종례를 기다리는데, 선생님이 돌아오기 직전에 철호가 들어왔다. 재호가 째려보고 있었다. 맞은곳은 없어보였고 옷도 멀쩡했다. 담임선생님은 사람이 다 있어서 그런지 출석부를 확인하지 않고 종례를 하셨다. "야, 학자떡볶이 뒤에서 보자?" 철호는 내가 일어서기도 전에 다가와서 말해놓고는 또 순식간에 달려나갔다. 나는 일단 태연하게 나가서 학교 옆길을 빙돌아 학자떡볶이로 갔다. 철호가 자주 끌고가는 큰길가 떡볶이집이 아니라 학교 뒷편 골목에 있는 가게였는데, 우리학교 애들 같은 몇명이 앉아있었다. 나는 가게 뒷편으로 슬그머니 들어갔는데, 철호가 나를 보자마자 끌고 건물 뒷쪽 틈으로 해서 다른 골목으로 나왔다. 돌아다니는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철호는 주변을 살핀 다음 나를 잡고 물었다. "야, 쇠뿔도 바로 빼야 안되겠냐?" "뭔소리야?" "오늘 털자." 나는 이 과도하게 느껴지는 추진력을 어찌 말릴까 고민했다. "고민되면 그냥 사진관이나 알려주고 빠져있던가." 나는 정곡을 짚은 그 녀석을 쳐다봤다. 아까 본 그 멋있던 모습이 아니었다면 대충 말리면서 상황을 넘기려 했을텐데.. "이거 잘못되면, 너랑 나 퇴학감이고, 나는 가평가야돼. 니가 사나이 배포는 있는 놈이니까 내가 같이 할께." "퇴학이 중요하냐? 한 여자 인생이 달렸는데." "우리가 김경미 선생님을 위해서 그리 한들 알아주겠냐?" "야, 사나이 운운한 놈이 그딴거 따지냐?" "따져야지 임마. 니가 말 안해도 내가 할거야. 그냥 소리 없이 희생하는건 좀 아닌것 같다." "어휴, 맘대로 해." "그러면 집에 갔다가 열두시에 학교 후문에서 보자. 되겠어?" "니가 작전짜냐?" "너 보다 내 머리가 더 낫지 않냐?" "어휴, 이게 콱." "얼씨구? 때려봐." 나는 히죽거리며 게겼다. 철호도 딱히 내가 미운 표정은 아니었다. "옷은 어두운거 입고. 집에 마스크랑 야구모자 같은거 있냐? 없으면 사던 해서 챙겨와. 그리고 빈가방 메고 오고." "오~, 존내 술술 나온다?" "진즉에 작전은 생각해놓고 있었지 임마." 사실이었다. 이놈이 나에게 사진을 맡기고 도망갔을때 부터. "사진은 찢었어?" "아니, 니가 찢어야지. 니 여잔데." 나는 사진을 건네주고 자정을 기약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부모님이 오시자, 조별과제 때문에 철호집에서 자고 오겠다고 하고 열한시에 집을 나왔다. 쌀쌀한 날씨라 장갑낀채로 아파트 놀이터에서 죽치고 있었다. 엄마 아빠는 퇴근하시면 왠만해선 나오는 분들이 아니니까. 20분 정도를 있다가 학교로 갔다. 지금가면 얼추 10분전에는 도착할터였다. 나도 쇠톱만 든 가방을 메고 있었고 모자를 쓰고 마스크는 주머니에 있었고. 그 집이 유리문이라는 문제 때문에 나는 이 일이 실제로 벌어질줄은 몰랐지만 하교길 공상 속에서 문득 떠올라 주변에 유리문을 부술만한 벽돌 정도의 크기와 무게를 가지는 콘크리트 조각 위치도 알아놨고, 셔터를 내렸으면 자물쇠를 잘라야 하니까 집에 있던 쇠톱을 미리 챙겨놨다. 철호가 제시간에 맞춰 도착했고 우리는 지체 없이 사진관으로 이동했다. 사진관이 있는 골목은 사진관 앞은 다행히 가로등이 없었고 멀찍한 간격으로 등이 있어서 충분히 작업할 수 있을거라 계산했다. 철호는 사진관 위치를 몰랐기에 순전히 내 인도에 따랐다. 그리고 나는 그곳으로 가는 동안 철호에게 말했다. "이게, 돈이나 물품을 노린 범죄면 경찰한테 꼼짝없이 잡힐 일인데, 내 추측이 정확히 맞아서, 이 놈이 야한 사진을 가지고 있거나 한다면, 우린 사진이랑 필름만 훔칠꺼니까 캥기는게 있으면 신고 못할거야. 문제는 문따는건데, 유리문이라서 잠겨있으면 깨야돼. 이것때문에 잡히는 위험은 각오해야돼. 괜찮겠지?" "생각보다 덜 위험하네? 그것보다 더 한거라도 얼마든 한다 임마." 우리는 싸늘한 공기에 입김을 뿜으며, 골목을 누볐다. 일단 사진관에 도착했는데, 사진관은 셔터로 닫혀 큰 자물쇠로 잠겨있었다. 그리고 먼저 살폈었던 대로 가로등은 멀찍이 떨어져 있어서 사진관은 아주 제대로 암흑속에 있었다. 우리는 인적이 더 사라질때까지 사진관이 있는 골목과 그 주변을 돌며 시간을 더 보냈다. 새벽 한 시가 되자 천천히 걷는다고 걸었지만 추위도 거세졌고 슬슬 피로감이 몰려왔다. 막차를 타고 오는 사람들도 더는 안보였다. 우리가 행동을 개시할때였다. 나는 사진관 셔터의 자물쇠 바로 옆에 앉아서 쇠톱을 꺼낸 다음 재빨리 작업을 시작했다. 생각보다 소리가 크진 않았지만 혹시 몰라서 철호가 망을 보는 중이었다. 취객이 한명 지나가느라 톱질을 멈추고 이야기 하는 척 기다리다가 다시 톱질을 재개했다. 한참을 톱질하여 겨우겨우 자물쇠 고리가 잘리고 셔터를 살짝 들었다. 지은지 얼마 안된 건물이라면 소리가 안나겠거니 했는데 생각외로 상당한 소리가 날것 같았다. 우리는 최대한 덜 요란하게끔 셔터를 올렸는데 자물쇠 위치를 찾으려고 문을 미는 순간! -스윽! 문이 열리는것이었다. 이런 행운이! 나는 더 주저할것 없이 문을 활짝 열고 철호를 안으로 들인 후 셔터를 닫았다. 안심하고 작업할 여유까지 확보된 것이다! 그리고 유리문을 닫고 불을 켰다. 다음 그놈이 나왔던 방쪽으로 가서 문을 열었는데, 무슨 약품냄새가 지독했다. 불을 켜는 스위치를 눌렀는데 불은 안들어와서 손전등을 켜서 벽을 다시 살폈더니 형광등 스위치 보다 좀 위에 전선으로 연결해 만든 똑딱이 스위치를 발견하고 켰다. 그랬더니 정육점 같은 붉은 빛이 그 방을 밝혔다. 사진들이 빨랫줄 같은데에 잔뜩 걸려있었는데, 대부분은 평범한 사진들이었다. 그런데! 그 중에 구석에 걸어놓은 사진들이 충격이었다! "야! 좆된것 같다!" 나는 숨소리로만 말했지만 거의 외치듯 했다. 심장이 크게 고동쳐왔다. 바로 낮에 재호로 부터 뺏은 사진들과 비슷한 종류의 사진들이었던 것이다. "이거 쌩 포르노 사진이네! 이 새끼 도대체 뭐하는 놈이지?" 철호도 그 사진을 보더니 분노 부터 뿜어냈다. 물론 나 처럼 아랫도리는 별개로 반응할 것 같았고. "일단, 담자. 여기가 인화하는 곳인가본데, 사진도 챙기고, 필름! 무조건 필름은 다 찾아야돼. 뭐가 뭔지 모르니까. 혹시라도 표시 해뒀으면 좋으련만." 다행히 우리는 사진을 챙기면서 필름더미도 찾아냈는데, 필름들이 다행히 잔글씨로 머라머라 표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남자도 사진으로 먹고 사는 사람이라 그런지 꼼꼼하게도, 그리고 고맙게도 증명사진이나 가족사진 같이 건전한 영업을 통해 찍은 사진들과 은밀하고 음란한 사진들의 필름을 구별해서 보관하고 있었다. 나는 그게 식별되자 마자 통에서 필름 더미를 내 가방으로 있는대로 집어넣었다. 사진은 주로 철호의 가방에 들어갔다. "야! 씨발, 이거 뽀르노 사진 장사해도 되겠다." "니가 그러면 이 사람이랑 똑같이 되는거야. 엄한 여자들 인생 망칠래?" "아니, 그 정도로 양이 많다고. 나를 뭘로 보는거야?" "원철호로 보지 뭘로 보긴." 우리는 암실에서 음란한 사진들을 싹싹 긁어담은 후 밖으로 나와서 또 다른 곳에 보관되어 있을법한 곳이 있나 봤다. 문이 하나 더 있었는데, 문을 여니 좁은 방이 나왔다. 어른 둘이 들어가서 잠 정도는 잘 수 있을 정도였고, 이불도 깔려 있었다. 그리고 책장이 저쪽 벽에 있었는데, 나는 신발을 벗고 그 책장을 열어젖혔다. 철호와 같이 그곳에서 찾아낸것은, "유레카!" "와.. 여기있네!" 작은 앨범집들이 수두룩했는데, 인화된 사진들이 한면에 두장씩, 빼곡하게 꽂혀있고 앨범 맨 뒤에는 필름이 끼워져 있었다. 두 사람이 애인 사이라면, 그 문제의 사진들은 여기에 있을거란 확신을 하고 열심히 뒤지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작품전에 보냈을법한 사진들이 절반 정도, 나머지는 죄다 여자들 사진이었다. "야. 이거, 다 담아갈 수 있을까?" "간당간당 하겠는데, 일단 담자." 담기 시작했는데, 내 가방엔 필름이 들어있던 터라 그래도 꽤 많은 양이 들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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