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한 절망 - 16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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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5,922회 작성일소설 읽기 : 내가 사랑한 절망 - 16부
내가 사랑한 절망
사실 그녀가 고통을 피하고 싶은 욕구가 합격에 대한, 기술자로부터 인정받고 싶다는 열망과 동일선상에 놓이는 것은 비합리적인 일이다. 우열이 명백히 다른 사안이었다. 진아가 이런 비합리를 눈치 채지 못한 것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희망을 찾고싶은 방어기제와도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이보다 더 직접적인 것은 바로 순수한 의미의 근원적 공포였다.
진아는 아지트를 방문한 뒤 딱 한번 외출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이곳에 온지 나흘째였다. 아무런 전조도 예고도 없이 다섯 남자는 “밖으로 나와”라는 한마디와 함께 진아를 데리고 차에 올랐다.
옷가지도 없이 눈가리개만 한 그녀가 두어 시간 뒤에 도착한 것은 어떤 시골길이었다. 그것도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오고 닭 소리와 매케한 동물의 배설물 냄새가 물씬 나는 칙칙한 곳이었다.
허름한 집 지하로 내려가면서 대식가는 “니년이 여기를 두 번째 보는 순간, 수명이 얼마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될거다”라고 말했다.
흉흉한 얘기였지만 이는 이후 들었던 이야기에 비하면 자상한 편이었다. 지하실의 육중한 문이 열리고 불이켜지자 진아는 얼어붙고 말았다.
문 안에는 그야말로 살벌한 물건들이 있었다. 천장에서 내려오는 수갑부터 큰 대자로 묶을 수 있게 된 형틀, 단두대 같은 형태의 조형물부터 가시가 잔뜩 달린 의자, 용도를 알 수 없는 뾰족한 쇠철봉 등. 이 안은 생각보다 넓었는데 별도의 방 없이 넓은 광장 형태로 돼 있었다. 그리고 그 공간은 우중충한 색깔의 고문기구들로 채워져 있었다.
“여기는 간단히 말하면 네 쓸모가 없어졌을 때 처분하는 곳이야. 물론 간단히 처분되는 것은 아니지만”
오덕이 킥킥되며 말했다. 그의 말을 기술자가 이었다.
“그래, 바로 처분되는 것은 아니지. 죽기 직전까지 겪을 수 있는 모든 고통을 겪게 될테니까. 길면 석달까지도 가”
“저번 그년은 두 달도 못버텼잖아? 기술이 부족해진 것 아니야?”
“그때도 얘기했지만 이미 오기 전부터 상태 안 좋았잖아요. 뭐 다음에는 더 신중히 오래 살려둬야겠죠”
진아는 피부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처음이 아니었다. 누군가 자신과 같은 지옥과 같은 고통 속에서 있다 이곳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이곳에 온지 두 달이 못되는 기간 안에. 자신도 그리 되지 말라는 보장이 없었다.
며칠 전 서기의 “지난번에는 털이 많았으니 이번에는 미는 것도 좋겠군”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지난번이 분명히 존재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그 지난번이 밟았던 길을 자신이 걷고 있다.
기술자는 대식가의 말에 답하다 문득 생각난 듯 길죽하고 가시가 달린 기구 하나를 들어 올렸다. 진아가 표정을 볼 수 없었지만 그는 그 정체모를 기구를 썼을 때를 떠올리며 추억에 잠긴 표정을 지었을 것만 같았다. ‘지난번의 그녀’에 대한.
“네가 이곳에 오는 경우는 간단해. 매달 한번씩 우리 다섯명이 투표를 할 거야. 여기서 과반수가 네게 불합격을 준다면 넌 이곳에서 조용히 생을 마치게 되겠지. 사실 이제 와서 하는 말인데, 대식가의 펀치면 스쳐도 골절상이야. 변기가 수십대를 맞고도 멀쩡히 걸어다니는 것은 다 나름 조절을 해줬다는 것이지”
선생의 말에 대식가가 으쓱해보였다.
“적어도 불합격을 받기 전까지 치료되지 않는 영구적 상처는 안 만들어준다는 거야. 아마도 말이지.”
오덕이 부연설명을 했다. 그 끔직한 구타와 폭력이 조절된 것이었다는 말도 믿을 수 없었지만 불합격을 받은 이후에는 그마저도 조절하지 않겠다는 얘기 아닌가. 진아는 대답을 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자기도 모르게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물론이지. 아주 차근차근 고통을 줄 거야. 아마 여기에 오게 되면 제발 죽여 달라고 부탁할걸. 하지만 그러면 재미가 없지. 아주아주 천천히. 네가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통을 줄 거야. 그걸 가능하게 하는 것이 여기에 있는 이곳이지. 공교롭게도 여기에는 생명 연장에 필요한 의료기구가 갖춰져 있거든.”
“뭐 겁은 여기까지만 주죠. 미리 알면 직접 알아가는 재미가 떨어지기도 하고.”
기술자가 오덕의 말에 제동을 걸었다.
“그래 뭐 궁금한거라도 있어?”
“…혹시 저 말고 전에 온 사람이 있었나요?”
진아가 용기를 내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대답은 선생이 했다.
“그래, 이름이 뭐였더라? 아, 그래 암캐였지. 20대 중반 대학생이었는데 머리가 별로 안좋았지.”
머리가 안좋았다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오덕은 의미심장하게 킥킥 거리며 말을 받았다.
“멍청했지. 잔머리 굴리다가 여기에 오기 전부터 혀도 잘리고 걷지도 못하는 상태였으니까”
머리가 좋지 못한 대가로? 잔머리? 진아는 그의 말을 곱씹으며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적어도 그녀가 무언가 그들의 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했고 그로 인해 대가를 치뤘다는 말이었다. 혀와 다리라니.
“자, 지난 얘기는 그쯤하고”
기술자가 이 지하에 가장 구석으로 진아를 데리고 가며 말했다.
“사실 네가 여기 온 것은 이걸 보기 위해서야. 모든게 끝날 때. 네가 살기를 거부하고 우리 역시 네가 필요 없어졌을 때, 네가 가야할 종착지야. 여기 사다리 위로 올라가서 봐”
그가 가리킨 것은 거대한 기계였다. 용도를 알 수 없었지만 기술자가 패널에 뭔가를 작동하고 나자 거대한 굉음과 함께 기계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그가 오덕으로부터 고기뭉치를 받아서 그 기계 위 크게 벌려진 입에 던져 넣었고 그때서야 진아는 이 기계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분쇄기였다.
굉음과 함께 돼지고기는 분쇄기의 톱니와 칼날에 썰려 기계 안으로 천천히 빨려들어 갔다.
“원칙은 이곳에 들어가게 될 때 분명히 숨이 붙어있고 감각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을 거라는 점이야”
이내 고기덩이는 기계 안으로 완전히 빨려 들어가 사라 졌다.
“하지만 이 지하실에 오게되면 이 분쇄기를 절실하게 원하게 될걸”
대식가가 덧붙였다. 충격적인 광경이지만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죽도록 괴롭힘을 당하고 이렇게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니. 끌려와서 폭력에 시달리던 진아 입장에서는 지금 현실도, 이 분쇄기도 도무지 리얼리티가 없었다. 도무지 사람이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다.
조심스레 사다리를 내려오던 진아는 바닥에 닿자 긴 한숨과 함께 주저 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린 것이다.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그 모습을 본 서기가 조용히 말했다.
“걱정마. 과반의 합격만 받으면 이곳에 또 오게 될 일은 없다.”
역으로 과반의 합격을 받지 못한다면 진아는 이곳에서 폐기된다는 이야기였다. 이 살인광 세디스트들에 의해서.
이날 본 분쇄기의 모습은 진아의 뇌리에 오랫동안 남아 그녀를 괴롭혔다. 트라우마가 될 정도의 깊게, 그리고 분명히 현존하는 형태로 자리 잡은 공포였다. 그녀가 견디기 힘든 폭력과 고통스러운 요구 속에서도 참고 그들의 요구에 응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내면에는 이 공포를 피하고자 하는 의지가 깔려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합격의 조건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그저 고통을 참고 잘 보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진아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진아가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쾌감을 느끼라는 기술자의 말을 실낱 같은 희망으로 삼고 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공존하기 힘든 두 가지 감각의 끝자락에 서서히 다가가고 있었다.
그 스위치는 바로 자기연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