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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부의 장난감

무료소설 근친물: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39,725회 작성일

소설 읽기 : 형부의 장난감

저는 이번에 대학에 들어간 새내기라는 소리를 들으며 많은 뭇 남성들은 물론 선배와 동기를 포함한 남자들에게서 인기가 많아 하늘을 찌를 것 같은 기세이지만 그 누구의 프러포즈도 받아들일 수가 없는 입장이랍니다. 물론 두려운 나머지 다른 남자와 시도를 해봤었고 실제적으로 몇 번이나 하여 보았지만 제 뜻과는 달리 제 몸은 그 남자가 아닌 다른 남자들은 제아무리 정성을 들여가며 저를 즐겁게 해 주려고 노력을 하였지만 반응을 해야 하는 저는 마치 일제세대에 관동군들이 선량한 중국인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사람들을 시험용으로 사용을 하였다는 마루타처럼 저의 몸도 마음은 저를 즐겁게 해주려고 땀을 떨떨 흘리는 사람에게 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제 마음을 가져간 그 남자만 생각을 하게하고 있었습니다. 그럼 대관절 제 마음은 물론이며 몸까지 모조리 앗아간 그 남자란 누구일까요. 제가 말씀을 드리더라도 저라는 년을 나무라지는 마세요. 그리고 제 마음은 물론이며 몸까지 모조리 앗아간 그 남자에게도 나무라지 말았으면 해요. 죄가 있다면 사랑을 해서는 안 된 사람을 그도 싫다고 하는 사람에게 억지로 들어붙어서 저를 가지게 하였고 그분의 영혼까지도 저에게로 오도록 저라는 더러운 년의 욕심과 질투를 벗어나서 질투를 사랑으로 승화를 시키게 만든 데 마음이니까요. 형부! 그렇습니다. 제 마음은 물론이며 몸까지 모조리 앗아간 그 남자는 바로 형부입니다. 아니 제 스스로 주어버린 저의 유일무일 하게 사람 하는 남자 바로 형부입니다. 그도 친형부입니다. 저도 이미 근친상관을 하고 있기에 근친상간에 관심이 많았고 그 많은 관심은 저로 하여금 야설이라는 것을 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근친상간 중에서도 저처럼 형부와 처제 사이의 근친상간이 제일 짜릿하게 읽어졌고 아빠나 다름이 없을 정도로 형부하고 나이가 많이 차이가 나는 바람에 아빠와 딸의 근친상간도 짜릿하게 만든답니다. 야설 사이트에 올라온 야설들 중에 형부와 처제 간의 근친상간은 마치 언니가 결혼을 하면 덤으로 따라 먹히는 것이 처제의 입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끔 하는 부분들이 많았으며 나이도 별로 차이가 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많이 차이가 난 경우가 제가 제 이야기를 지보를 드릴 분이 쓴 야설 중에 아빠가 젊은 시절 첩을 두었고 그 첩의 딸을 배다른 언니가 키웠고 정이 깊게 들고 다른 가족들로부터는 찬밥 신세를 벗어나지를 못 하였지만 큰언니만은 마치 자기 친동생 대하듯이 하는 바람에 시집을 가게 된 큰언니를 따라와 살다가 형부하고 붙어먹은 경우가 있었습니다. 친정아빠 타던 배를 타다가 죽은 언니의 남편 즉 형부하고 눈이 맞아 형부의 아이를 임신을 하였다는 야설을 읽을 때는 죽일 년이라고 욕 하실 줄 모르겠지만 우리 언니도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고 그렇게 되면 저도 그 여자처럼 형부의 아기를 가질 수 있다는 생각가지 하였던 년이며 저는 그런 야설을 읽으면서 너무나 짜릿하게 느꼈고 언니가 집을 비울 경우 형부에게 깔려서 그런 야설을 읽어가며 형부의 사람을 지금도 듬뿍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저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맞선이란 자리에 처음 간 것은 5살 초겨울의 일입니다. 제가 직접 그 나이에 맞선을 봤냐고요? 돌아가신 우리엄마아빠 그리고 언니는 아니라고 하지만 저는 당당하게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저와 단 둘이서 본 것이 아니라 남자 하나와 여자 둘이서 시쳇말로 더블데이트에 가까운 선을 본 것입니다. 그 사연은 다음과 같습니다. 저는 엄마의 말에 따르면 태어나서는 안 될 것이 엄마의 사소한 실수 때문에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엄마는 나이 48살 때부터 생리가 끊겼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50살이 되던 해에 임신의 초기 증상이기도 한 헛구역질이 나왔으나 생리가 끊겼기에 임신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음식을 잘 못 먹어 체한 것으로만 생각을 하였답니다. 그렇게 지내다가 두 달이 지나자 헛구역질도 멎었고 대신 왕성한 식욕이 생기더랍니다. 아침에 눈을 떠서 밥을 앉혀놓고 앉히면서 전날 밥솥에 눌어붙어 있던 밥을 버리기가 아까워 냄비네 넣고 끓여서 먹고 아침이 준비가 되면 아빠 언니와 함께 다시 정식으로 이침을 먹고 아빠와 언니가 출근과 등교를 하고 나면 빨래 세탁기에 넣고 돌리고 청소기로 청소를 한 후에 다시 과일과 커피를 마셨고 다 된 빨래를 널고 나면 점심시간이라 혼자서 양은냄비에 밥과 나물에 고추장까지 넣고 비벼서 몽땅 비운 후 설거지를 하고는 시장에 갔고 시장에 가면 떡볶이나 어물을 어묵 국물과 함께 먹고서 장을 보서 집에 와서는 저녁준비를 하였고 대학 입학 준비 중이던 고삼의 언니가 학원에 가야할 먼저 오면 언니가 저녁을 먹는 동안 마주 않아서 구경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수저를 들고 먹었고 다시 아빠가 퇴근을 하고 와서 식사를 하면 또 아빠 앞에 앉아서 수저를 들고 밥을 먹었고 학원에 다녀오면 엄마는 아빠와 언니랑 나란히 앉아서 과일을 먹었답니다. 그런 말이 있잖아요. 살이 찌려면 맹물도 살이 된다고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먹어 대니 살이 안찌고 베기겠어요? 그러다 보니 뱃속에서 새로운 생명체인 제가 자라고 있는 것도 모르고 많이 먹어서 살이 찐 것으로만 알았대요. 7개월이 지나도 살은 쪘으며 그도 배는 다른 부위에 비하여 월등하게 살이 찌는 것으로만 알고 살을 뺄 욕심으로 헬스클럽에 갔는데 헬스클럽 강사가 엄마의 배를 유심히 보더니 살이 아닌 것 같다고 하며 일단 산부인과에 다녀오라고 하자 엄마는 생리가 끊어진지가 3년에 가까운데 그게 무슨 말이냐고 하면서 나와 버렸고 이웃에 사는 아줌마에게 헬스클럽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자 그때서야 이웃 아줌마도 엄마의 배를 유심히 보더니 임신이라고 장담을 하였고 긴 가민가 싶어서 산부인과를 찾아갔더니 이미 8개월에 가깝다고 하였고 사색이 되어서 돌아온 엄마는 아빠와 상의를 하였고 아빠는 엄마의 말에 박장대소를 하며 늦동이 하나 주다고 하였답니다. 그리하여 태어난 것이 바로 저라는 년입니다. 그렇게 하여 저는 언니가 대학에 입학을 하였던 해 여름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어 맞선을 보게 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언니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여러 곳에서 중매가 들어왔습니다. 중매가 들어오면 언니는 저를 핑계 삼아 맞선을 거부하였습니다. 자신이 저를 키워야 할 것이기에 시집을 안 간다고 말입니다. 그러자 엄마는 겨우 다섯 살 먹은 저를 꼬드겼습니다. 언니가 시집을 가면 따라가겠다고 하라고 말입니다. 저는 엄마의 말을 곧이 곧 대로 믿었고 언니에게 중매가 들어오면 언니더러 같이 선을 보러 가자고 하였습니다. 어린 저를 동생이상으로 귀여워하던 언니는 울면서 때를 쓰는 저에게 그렇게 하자고 하며 달랬습니다. 그해 초겨울 언니에게 중매가 들어왔고 언니는 약속대로 맞선을 보는 자리에 저를 데리고 나갔습니다. 당시 형부가 될 사람 일 줄도 몰랐던 맞선 당사자와 언니 사이에 무슨 말이 주고 갔었는지는 기억이 없습니다. 다만 둘이서 깔깔대며 저를 보고 웃어 대던 것은 분명하게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도 모르는 사이에 두 사람 사이는 급속도로 발전을 하였고 이듬 해 봄 본격적으로 결혼 이야기가 나왔고 그러자 저는 언니를 따라 시집을 간다고 고집을 피우기 시작하였습니다. 거기서 언니와 형부가 생각한 것이 화동이었습니다. 본래 화동이라 함은 신랑신부가 입장을 할 때 꽃가루를 뿌려주며 앞서가는 것이지만 언니의 결혼식에서는 달랐습니다. 남자 화동은 없었고 여자 화동 격인 예쁜 드레스를 입은 저는 꽃바구니를 들고는 있었지만 왼손에 꽃바구니를 들고 하얀 장갑을 낀 오른손은 형부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엄숙해야 할 식장은 식이 끝나고서도 웃음이 그치질 않았습니다. 결혼식이 끝이 나고 한복으로 피로연 장소를 돌아가며 인사를 할 때도 저의 손은 형부의 바짓가랑이에서 손을 때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지금도 저는 그때 이미 형부하고 결혼식을 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당연히 제 몸은 형부의 것이고 형부의 또 다른 아내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언니의 신혼여행은 저로 하여금 언니가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는 날까지 식음을 전폐하게 하였고 언니와 함께 쓰던 방의 방문을 걸어 잠그게 만들었고 저의 눈에서는 눈물이 마르지를 아니하였습니다. 결국 5박 6일 여정으로 제주도로 갔던 언니와 형부의 신혼여행은 3박 4일로 단축을 하여야 하였고 언니와 형부의 목소리를 듣고서 저는 울음을 멈추었고 언제 울었냐는 듯이 밝은 얼굴로 형부와 언니를 맞이하였습니다. 신혼여행을 당겨서 신행을 왔던 형부는 신생 기간 동안 제일 힘들어 했다고 나중에 저에게 고백을 하였습니다. 신혼인 언니와 형부가 단 둘이 있는 꼴을 제가 두고 보지를 못 하였기 때문입니다. 잠을 잘 때도 저는 언니 맞은편에 형부 옆에 나란히 누워 잤고 자다가 인기척이라도 들리고 몸이라도 움직임이 느껴지면 일어나 불을 켜고 지켜보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형부가 언니 몸 위에 올라가서 빠구리를 하다가 저에게 발각이 나서 하다 만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형부가 언니 몸 위에 올라가서 하는 짓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도 말입니다. 형부의 부모님이 그런대로 사시는 바람에 제가 언니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든다는 것을 알고 방 두 칸짜리를 전세로 얻어주었고 저는 거렇게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여 엄마아빠가 사는 집으로 가서 살려고 들지 않고 언니와 형부 곁에서 그도 방 두 칸짜리를 얻어주어 아들내외의 신혼살림에 방해가 되지 말도록 하였으나 어린 저는 어른들의 그런 뜻도 모르고 당연하다는 듯이 형부를 가운데 눕히고 언니와 제가 양쪽 누워 잤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형부가 언니에게 팔베개를 해 주면 저도 해 달라고 졸랐고 출퇴근을 하면서 언니에게 뽀뽀를 하면 저도 막무가내로 해 달라고 했습니다 초등학교에 입학을 성에 대하여 조금씩 알아 갔지만 저는 여전히 형부의 아내란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단 부부라는 것이 같은 자리에 나란히 누워 자면 부부인 줄로만 알았지만........... 본격적인 사건은 초등학교 삼학년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에 발생을 하고 말았습니다. 언니는 결혼을 하고 낮이면 시부모님들이 하는 장사를 도왔습니다. 보신탕집을 운영하는 시부모님들을 말입니다. 요즘이야 보신탕이 사철 음식이 되다시피 하였지만 당시에만 하더라도 여름 한철 장사를 하여 사철을 산다고 할 정도로 보신탕집은 초복부터 말복까지 북새통을 이루었습니다. 결혼을 하고 이년이 지나도록 남편하고 피서 한 번 가지도 못 하고 시부모님의 장사를 돕자 언니의 시부모님들이 언니에게 특별 휴가를 주었습니다. 형부가 근무를 하던 사무실의 경우 여름휴가를 로테이션으로 하였기에 사전에 형부의 엄마아빠가 그렇게 할 것이라고 말만 하였더라도 형부가 자신에게 주어진 여름휴가를 사용하지 않고 기다렸다가 언니가 시부모님들로부터 휴가를 받게 되면 그때 같이 사용을 하였으면 좋았겠지만 짐작도 못 하였기에 형부는 친구들이 휴가를 받는 날 같이 밭아서 피서는 다녀 온 후라 형부도 같이 할 수가 없었지만 저 역시 개학을 한 후에 언니하고 함께 할 수가 없었습니다. 언니는 고민 끝에 여고 동창 몇 명하고 부산으로 가기로 결정을 하였고 그날이 되자 언니는 형부하고 저에게 다녀온다고 하고 집을 나섰습니다. “이제 작은 색시하고 단 둘이네”하교를 하여 언니가 해 둔 밥의 양도 확인하고 형부의 퇴근시간에 맞추어 찌개를 덥히고 있는데 형부가 현관으로 들어서며 팔을 벌리며 환하게 웃었습니다. “어머 벌써 왔어”행주치마에 물기를 닦으며 현관으로 나가자 “응 집에 잣은 색시하고 둘 뿐인데 진짜 뽀뽀하자”형부가 저의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끼우고 번쩍 들어 올리는가 싶더니 신발장에 저를 기대게 하고 제 입술에 입술을 포개었고 혀를 입술과 입술 사이로 밀어 넣었고 숨이 막혀 입을 벌리자 형부의 혀는 마치 기다리고 있기라도 하였다는 듯이 게걸스럽게 저의 혀를 빨기 시작하였고 저는 저도 모르고 또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 한 황홀경에 빠져들었습니다. “유미야 너 내 작은 색시지”긴 키스 끝에 형부가 저를 거실 바닥에 살포시 내려놓는가 싶더니 치마 안으로 손을 넣고는 부끄러운 것을 덥석 잡으며 물었습니다. “....................”하지만 부끄러운 마음보다는 형주가 저를 작은 색시로 인정을 해 주는 것이 더 좋아 잡힌 그대로 손을 뿌리치지 않았습니다. “작은 색시 맞지?”손이 힘을 주며 다시 물었습니다. “응”얼굴을 붉히며 대답을 하자 “부부끼리는 이것을 맞추는 것도 알지”형부가 저의 손을 하나 잡고 이끄는가 싶더니 제 손가락으로 하여금 지퍼를 잡게 하였고 눈치를 차린 제가 형부 바지 지퍼를 잡자 형부가 밑으로 끌어당겨 열리게 하고는 다시 제 손을 바지 안에 넣으며 물었습니다. “응”사실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고부터 저는 언니랑 나란히 형부 곁에 누워서 잤지만 형부가 저가 잠이 든 줄 알고 언니를 알몸으로 만들고 고추를 넣는 것을 우연히 한 번 목격을 하고 충격을 받았지만 점점 성에 대하여 눈을 뜨기 시작하였고 또 나도 언젠가는 언니처럼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였기에 곁눈질로 수도 없이 보았던 것인데 형부의 그런 말에 싫다고 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유미야 아직 네 보지는 구멍이 작아 형부 아니지 이 서방님 좆을 받아들이기에는 역부족이거든”형부가 말하면서 저의 치마를 들쳐 올리고 팬티를 내리며 말하기에 “그럼 왜 벗겨?”하고 의아스러운 눈으로 형부의 얼굴과 야구방망이보다도 굴고 길어 보이는 좆을 번갈아보며 묻자 “넣을 수 있을 때 까지 우리 유미가 형부 좆에 대한 거부감이 사라지게 하려고”하고 말하며 저를 번적 들었습니다. “형부 뭐 하려고, 시간 걸려?”순간 제 눈에 보이는 것은 가스레인지 위에서 펄펄 끓고 있는 찌개 냄비였고 그 냄비를 가리키며 묻자 “밥은 천천히 먹고 어떻게 생긴 기회인데 유리와 즐겁게 먼저 놀아야지 안 그래”하고 말하며 가스레인지 앞으로 가더니 끄고는 저를 데리고 안방으로 갔습니다. “자 형부가 작은 색시 못 벗겨 주었으니 이제 색시가 서방님 벗겨야지”안방으로 들어서자마자 형부는 침대에 걸터앉더니 저의 옷을 하나 둘 벗겨 알몸으로 만들더니 일어서며 말하였습니다. “응 서방님”얼굴 하나 붉히지 않고 형부를 당당하게 서방님이라도 불렀던 기억이 납니다. 전 침대 위에 올라가서 형부의 넥타이를 먼저 풀고 양복저고리와 남방을 벗겼고 그러는 사이에도 형부의 손을 제 부끄러운 부분 아니 솔직하게 말하여 보지둔덕을 손바닥으로 문지르기도 하다가 보지 금을 벌려보면서 다리를 벌리게도 하였습니다. 러닝셔츠까지 벗기고 나자 저는 침대 밑으로 내려가 고사리 손으로 형부의 바지 혁대를 풀었고 그러자 형부가 스스로 호크를 풀자 바지는 미끄러지듯이 밑으로 내려갔고 이어서 팬티에 손을 대자 형부가 이번에는 딱딱하게 발기가 되어 오줌 수멍으로 나와 있던 좆을 다시 집어넣자 저는 형부의 팬티 양 허리 부분을 잡고 밑으로 내렸고 정강이에 걸리자 형부가 자신의 발로 팬티를 빼어내며 다시 저를 번쩍 들더니 침대 위에 눕혔습니다. 그때서야 저는 부끄러움을 느꼈고 자연스럽게 눈을 감았습니다. “형부 더러워”뭔가가 보지둔덕에 닿는 것을 느꼈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형부의 어딘가를 밀치며 눈을 떴을 때는 형부의 머리는 제 가랑이 부분에 이미 와있었고 제 보지둔덕에 닿은 것은 형부의 혀라고 느끼자 온몸이 마치 사시나무 떨듯이 부르르 떨고 있었고 더 강하게 밀착을 시키며 혀로 제 보지를 희롱하자 저는 저도 모르게 부르르 떨면서도 가랑이가 벌려졌고 동시에 형부의 머리에 손을 대고 강하게 눌렀습니다. 그러자 형부의 몸이 반대로 돌았고 제 눈앞에는 발기가 될 되로 된 좆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고 형부도 더러운 생각 없이 제 보지를 빨고 있다고 생각하자 저도 자신감에 생겨서 형부의 좆을 떨리는 손으로 잡고 입안에 넣었습니다. 완벽하게 하나의 몸이 된 것은 아니지만 거의 완벽에 가깝게 형부와 저는 한 몸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첫날부터 저는 형부에게 많은 것을 배였고 느꼈습니다. 딸딸이 치는 법이며 좆 물이 피부 미용에 좋다는 것도 배웠고 배운 것을 실습이라도 하듯이 오바이트 한 번 하지 않고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삼켰고 형부가 보지를 빨아주고 공알을(클리토리스라는 것은 한참 후에야 앎)빨아주자 평소 느껴보지 못 한 야릇한 느낌도 들었습니다. 그런 비밀이 생긴 것과 함께 언니에게 비밀로 하는 대신 우리들만의 신호도 생겼습니다. 그게 초등학교 이학년 여름방학이 막 지난 무렵의 일입니다. 가령 시부모님이 운영하는 보신탕집에서 일하고 온 언니를 보고 형부가 언니 힘들어 한다며 술상을 준비하라고 하면 그건 언니가 잠이 들면 좆과 보지를 빨아주는 놀이를 하자는 신호였고 형부 왼쪽 편에 누운 저의 허벅지를 두 번 콕콕 찌르면 언니가 자고 있으니 팬티를 내리고 자신의 보지를 만지게 하며 좆을 만져 달라고 하는 신호였습니다. 보신탕이 사철 음식으로 변하기 시작하였고 거기다가 너무 작은 기업체에 근무를 하는 탓에 일요일도 옶이 출근을 하던 형부에게 뜻밖의 스카우트가 들어왔고 직장도 근무 조건이 아주 좋은 곳으로 옮기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되자 토요일 오후부터(요즘이야 토요일에는 근무 자체를 안 하지만)일요일 언니의; 시부모님이 운영하는 보신탕집의 영업이 마치기 전까지는 집에는 형부와 저의 어떤 행위에도 간섭을 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언니가 제 6살 때 결혼을 저와 함께 형부하고 결혼식을 올렸지만 5학년이 될 때 까지 아이가 들어서지 않았습니다. 초등학교 이학년 때부터 시작이 된 형부와 저만의 비밀스러운 놀이는 점점 진화가 되었고 오학년이 되었을 때는 초경도 시작이 되었기에 임신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형부는 좆을 제 보지구멍 입구에 대가리 부분만 박히게 하고 용두질을 하여 쌀 때가 되면 제 입에 좆을 가져다 대고 쌌고 그러면 저는 형부의 좆 물을 환하게 웃어가면서 게걸스럽게 삼켰습니다. “색시야 생리 어제 끝났지? 오늘은 안에 싼다.”하고 말하며 형부가 자신의 좆 대가리를 제 보지구멍 입구에 조금 끼우고 용두질을 치기 시작 한 것은 오학년의 여름방학이 막 시작이 된 날이었습니다. “응 여보야 안에 싸”저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무려 25살 차이임)형부였지만 형부와 단 둘이 있을 적에는 여보 야라고 불렀습니다. “고마워 색시”형부도 처음과 달리 작은이란 단어를 쓰지 않고 색시라고 불렀습니다. “여보야 그런데 조금 아파”고개를 들고 형부의 좆 대가리 부부이 박힌 보지구멍을 내려다보며 말하는데 “어~들어가는데”하는 형부의 말과 동시에 “아~아파 뻐근하고”토끼눈을 하고 자세히 밑을 봤을 때는 결코 들어가지 않을 것으로만 보였던 형부의 좆 절만 이상이 제 보지구멍 안으로 자취를 감춘 후였습니다. “야~이거 놀라운데 우리 색시 보지구멍이 서방님 좆을 받아들이고”형부가 환하게 웃으며 제 얼굴과 밑을 번갈아보며 말하였습니다. “여보야 날 버리면 안 돼”아픔의 통증보다 형부의 완전한 여자가 되었다는 기쁨의 눈물이 눈두덩을 적시었습니다. 또 한 가지 저보다 먼저 경험을 가진 아는 언니들이나 못 믿으시겠지만 저보다 어린애들 중에서 경험을 하였던 애들의 말에 따르면 처음 보지구멍에 좆이 박혔을 때는 거의 참을 수가 없을 정도의 통증이 수반이 된다고 하여 형부의 좆 대가리뿐이지만 대가리 부분을 보지구멍 입구에 대고 용두질을 칠 때마다 잔뜩 겁을 먹고 있던 상태였으나 막상 형부의 좆이 완전히 박히자 말로 들었던 대로 참을 수가 없을 정도로 아프지는 않았고 약간의 아픔과 뻐근함만이 느껴질 따름이었습니다. 그날 저는 한 여자로 다시 태어났고 형부의 좆 물을 완전하게 보지구멍 안으로 받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그런데 잠시 제가 아직도 언니 집에서 살고 있는 이유를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저 생각만으로 언니가 결혼식을 형부하고 하던 날 저 역시 형부하고 결혼을 하였다고 생각하기에 언니 집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제가 사랑하는 남자이자 저에게 비록 화동이란 이름으로지만 예쁜 드레스에 면사포에 가까운 화관을 스고 당당하게 형부의 바짓가랑이를 잡고서 결혼식을 올렸다고 하는 생각이 지금까지도 변함이 없는 이유도 있지만 다른 한 가지가 있었으니 그 이유는 저를 낳아둔 엄마아빠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삼학년이 되던 해에 아빠가 정년퇴임을 하셨고 정년퇴임 기념으로 엄마와 단 둘이서 여행을 떠났다가 불귀의 객이 되고 만 것입니다. 가끔 생각합니다. 제가 형부 곁에서 떠나자 못 한 것도 제 탓이라고 말입니다. 엄마아빠는 저에게 같이 여행을 가자고 하였으나 이학년 때부터 형부와 시작한 어른 놀이에 빠져서 가지 않겠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때 엄마아빠와 함께 여행을 떠났더라면 형부의 발목을 지금처럼 잡고 있지도 않을 것이고 형부와 제 사이를 눈치를 차리고 있지만 어린 여동생인 저에게 부담을 지지 않게 하려고 입을 닫고 있는 언니에게도 부담이 되지 않았을 것인데 말입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갑니다. 형부의 뜨거운 좆 물 전부를 보지구멍으로 받은 후부터 저에게는 하나의 문제가 생기고 말았습니다. 형부가 제 보지구멍에 박기 전에는 좆을 제 보지구멍 입구에 대거나 대라기 부분만 박고 용두질을 치다가 저에게 먹도록 하였지만 보지구멍으로 직접적으로 형부의 좆 물을 받아들인 후부터는 생리 때가 아니면 입으로 받아먹지를 아니하고 보지구멍에 모조리 받아들이지 않으면 마치 빠구리를 하다 만 그런 이상한 기분이 든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임신에 대한 두려움은 저나 형부나 마찬가지였고 형부가 사준 먹는 피임약을 복용을 하다 보니 부작용으로 살이 찌기 시작하였습니다. 여자치고 뚱뚱해 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여자는 없을 것입니다. 거기다가 라이벌 아닌 라이벌인 언니의 경우 매우 날씬하여 바람이 조금 불기라고 할라치면 날라 가버릴 것 같이 보일 정도 날씬하였기에 제 몸이 뚱뚱하여 꼴 보기 싫어지면 형부가 저를 멀리 할 것 같은 두려움이 피임약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오게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금방 앞에서 언급을 하였던 것처럼 형부의 좆을 박고 빠구리를 하여 직접 좆 물을 싸야만 빠구리를 한 느낌이 들고 형부로부터 사랑을 받았다는 만족감을 가지는 제 입장에서 형부가 좆에 콘돔을 끼고 하는 것은 아예 하지 않는 것보다 못 하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형부도 아예 시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집에 콘돔이 비치 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언니하고 할 경우에는 사용 한다는 것을 처음 저의 보지구멍에 좆을 박고 난 후에 알았습니다만 잠시 후 콘돔은 집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제 나이 6살 때 결혼을 한 언니가 임신을 하지 않자 시부모님들이 성화를 부린 것입니다. 그 성화의 화살을 저에게도 날라 왔습니다. 피임을 하지 않고서 언니와 빠구리를 하는데도 임신이 되지 않자 형부는 저와 빠구리를 하면서 언니가 아이를 정말로 낳지 않겠다고 하면 저에게 대신 낳을 자신이 있느냐고 물었던 것입니다. 그런 질문에 저의 대답은 하나였습니다. 고등학교 졸업을 할 때까지 언니가 아이를 낳지 않으면 제가 대신 낳겠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지만 제가 초등학교 육학년이 되던 해에 언니는 아이를 가졌고 중학교에 올라갔을 때 사내아이가 탄생을 하였습니다. 그때까지도 형부가 가운데 눕고 양 사이드로 언니와 내가 누워서 잠을 잤으나 조카의 탄생을 저로 하여금 혼자서 자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변화는 형부가 엄마 대신 부모님이 하시던 보신탕집의 운영에 참여를 하였습니다. 또 하나 노골적으로 변한 것이 있었습니다. 형부가 언니가 눈을 뜨고 보는 가운데에서도 베개를 달랑 들고 제가 자는 방으로 왔고 언니는 마치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담담하게 받아들였고 심지어는 저에게 아직 어리고 학생 신분임을 잊지 말고 몸조심을 하라고 함으로서 우회적으로 임신을 하면 안 된다는 당부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언니의 그런 아량은 저로 하여금 형부 곁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몸 다로 마음 따로 이었습니다. 형부를 다시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고 다짐을 하였지만 밤만 되면 베개를 들고 들어오는 생각을 하였고 막상 베개를 들고 형부가 저의 방으로 들어서기 무섭게 저는 벌떡 일어나 형부 목에 매달리기 일쑤였습니다. 마음을 다잡아먹고 진짜로 형부를 멀리 하여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중학교 삼학년 때의 일입니다. 새로운 남자 친구를 사귀어서 형부의 좆 맛에 익숙하여진 보지구멍에 새로운 남자의 좆 맛을 익히게 하면 자연적으로 형부를 멀리 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하였던 것입니다. 물론 초등학교 때부터 제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애들이 하나 둘이 아니었고 형부로부터 거의 매일 공급받았던 남성호르몬 덕분에 저의 몸매는 도래 여학생들에 비하여 월등하게 섹시하여져(중학교 일학년에 올라가면서 이미 B컵 브래지어를 하였고 이학년에 올라가서는 B컵도 작아 C컵을 사용하였음)있었기에 남학생들의 시선은 온몸으로 받았고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형부 말고는 남자로 보이지 않았기에 보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제 마음을 제 스스로가 변하게 만들려고 한 것입니다. 저를 졸졸 따라 다니는 남학생이 있었으나 저의 눈에는 차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마음을 돌려 먹고 나니 정이 들면 변하겠지 하는 마음이 생겨서 사귀기 시작하였습니다. 약간의 문을 열어주기 시작하고 두 주일 후에 노래연습장에 갔습니다.(물론 청소년만 사용하는 방은 따로 있었지만 그 남학생 오빠가 돈을 더 주어 거의 밀폐가 되다시피 한 방이었음) 제가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그 남학생 오빠가 등 뒤에서 저를 끌어안았습니다. 형부 아닌 다른 남자에 안기는 자체가 부자연스러웠지만 언젠가는 겪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마치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계속 모니터만 주시하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반항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남학생 오빠는 티 안 아니 브래지어 안까지 손을 넣고 형부의 손과 입에 의하여 커질 대로 커진 저의 젖가슴을 마구 주무르면서 저의 귓불도 질겅질겅 씹어 대었습니다. 송충이가 기어 다니는 것 같은 오글오글한 느낌이 들자 눈을 질끈 감고 노래를 계속 부르며 형부의 손이고 형부의 입과 입김이라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제 노래가 끝나자 연이어 제가 눌렀던 노래가 나왔습니다. 그러자 남학생 오빠는 마이크를 들고 있던 저의 등을 구부리게 하였고 저는 두 손으로 탁자를 짚었습니다. 팬티가 형부가 아닌 다른 남자의 손에 의하여 벗겨졌습니다.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형부의 좆이 아닌 남학생 오빠의 좆에 제 보지구멍으로 들어왔습니다. 다리를 모으고 힘을 줬습니다. 하지만 그 남학생 오빠의 좆은 형부의 좆으로 가득 찼었던 제 보지구멍을 메우지를 못 하였습니다. 벌어진 입에 겨우 손가락 하나가 들어온 그런 허전한 느낌이었습니다. 벌떡 일어나 엉덩이를 앞으로 당김과 동시에 제 엉덩이를 잡고 있던 남학생 손을 쳤습니다. 그리고 좆이 빠지자마자 저는 발목에 걸쳐있던 팬티를 끌어올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울면서 왔습니다. 영문을 모르는 언니가 이유를 물었으나 저는 신경질적인 반응만 보이고 제 방으로 가서 방문을 걸어 잠그고 계속 울면서 후회를 하였습니다. 저의 신경질적인 반응은 형부가 장사를 마치고 돌아와서 그 남학생 오빠의 좆이 잠시나마 박혔던 제 보지구멍을 가득 채워 준 후에야 풀렸습니다. 다시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겨우 한 학년 위의 오빠 좆이라 어른인 형부 좆보다 가늘고 짧아서 그럴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형부 도래의 남자 그도 겉보기에도 형부처럼 듬직한 좆을 가진 남자를 상대로 시험을 해 보기로 한 것입니다. 세상이 영계만 노래를 하다 보니 그런 조건을 가진 저 같은 영계를 밝히는 남자를 구하기는 시쳇말로 맨 땅에 헤딩하기보다도 쉬었습니다. 학교를 마치고 언니에게는 학원에 간다고 하고는 노래연습장 주변을 서성이니 남자들이 이 사람 저 사람 마구 말을 걸어 왔습니다. 같이 노래를 부르며 놀지 않겠냐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런 남자들과 잠시만 대화를 하여도 남자들의 시선은 저의 풍만하여 터질 것만 같은 젖가슴에 몰렸고 동시에 가운데 다리에 힘이 들어갔습니다. 처음 몇 남자들 중에는 좆을 굴고 길게 보였지만 나이 아주 많거나 아님 좆이 짧고 가늘어보였습니다. 그러던 중에 아주 우리 형부의 좆 사이즈와 비슷해 보이는 남자가 저에게 말을 걸었고 저는 두 말도 하지 않고 그 남자와 노래연습장으로 들어갔습니다. 남자는 계산을 하면서 맥주와 안주도 시켰습니다. 후하게 맥주와 안주를 시키자 노래연습장 카운터를 지키고 있던 아줌마는 상대인 제가 아주 앳된 얼굴을 가진 것을 알고도 아주 구석진 방으로 들어가라고 하였습니다. 맥주와 안주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아주 신사적으로 놀았습니다. 저의 몸을 더듬기는커녕 제 곁에 가까이도 오지 않았습니다. 물론 노래도 제가 계속 하였고요. 맥주와 안주가 들어오고 저에게 맥주를 권하기에 시원스럽게 한잔 마시고 나자 그 남자의 행동은 180도로 달라졌습니다. 제 견에 바짝 다가앉은 것은 물론이고 아예 허벅지 위에 손을 얹고 술을 마시기 시작하였고 저에게서 반항의 조짐이 보이지 않자 노골적으로 음담패설을 늘어놓으며 한 탕 하자고 제안까지 하였습니다. 물론 형부의 몸을 잊어버리기 위하여 한 행동이지만 남자의 요구에 바로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는 남자의 손길을 뿌리치고 일어서서 다시 노래를 불렀습니다. 물론 노래연습장 방에 바로 들어와서는 아이돌 가수들이 부르는 따른 곳을 불렀다면 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을 하였을 때는 느린 발라드 곡을 불렀고 몸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역시나 기대 하였던 대로 남자가 제 등 뒤로 오는가 싶더니 끌어안았고 놀라지 않고 계속 노래를 부르자 남자라는 동물은 어쩌면 하나같은지 반항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남자는 티 안 아니 브래지어 안까지 손을 넣고 형부의 손과 입에 의하여 커질 대로 커진 저의 젖가슴을 마구 주무르면서 저의 귓불도 질겅질겅 씹어 대었습니다. 역시 송충이가 기어 다니는 것 같은 오글오글한 느낌이 들었고 참으며 눈을 질끈 감고 노래를 계속 부르며 형부의 손이고 형부의 입과 입김이라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남학생 오빠하고 다른 것이 하나 있었다면 귓불을 질겅질겅 씹다말고 뜨거운 입김을 저의 귀에 불어 넣으며 한 탕 하자고 하였고 거절을 하지 않자 치마 안으로 손을 넣고는 팬티를 벗기더니 소파를 가리키며 소파에 누우라고 하며 혁대를 풀었습니다. 제 예상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습니다. 굵기나 길이 면에서 형부의 좆과 흡사하였습니다. 다만 형부의 좆이 저와 언니의 보지구멍에 자주 들락거리다 보니 조금은 더 검었기에 그 남자의 좆은 조금은 밝게 보였습니다. 그래요. 남학생 오빠의 좆의 비하여서는 검은 편이고 형부의 좆에 비하면 하얀 편이었습니다. 남학생 오빠가 막무가내로 저를 탁자에 손을 짚고 엎드리게 하고서는 팬티를 벗기기 무섭게 박았던 것이 비하여 여유를 줘 가며 자신의 좆을 보가 하자 저는 마치 그 남자의 좆이 형부의 좆으로 보여 흥분이 되기 시작을 하였고 흥분이 시작이 되었다는 것을 저에게 알리기라도 하듯이 보지구멍에서는 음수가 흐르고 있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남자가 제 입을 덮치고 저의 혀를 게걸스럽게 빨면서 좆을 박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변고란 말입니까. 몸은 흥분이 되어 야단법석을 떠는데 비하여 몸은 아주 냉정하여 지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마음은 그 남자를 밀쳐야 한다고 생각을 하였지만 몸은 그렇게 하지 못 하고 흔들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대로 된 오르가즘을 느낄 사이도 없이 그 남자의 좆 물이 보지구멍으로 흘러들어왔습니다. 역시나 제 몸과 마음을 동시에 만족을 시켜 줄 남자는 이 세상에서는 형부 한 사람뿐인 것을 알았습니다. 좆 물을 다 싼 남자가 놀다가 또 하자고 하였습니다. 건성으로 그렇게 하자고 하고선 보지구멍을 휴지로 대충 닦고 화장실에 가서 씻고 오겠다고 하고선 나왔습니다. 그리고 씻은 후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고 형부가 올 때까지 무려 다섯 번이나 사워를 하였지만 제 몸에서 그 남자의 냄새는 가시지 않았고 형부가 집으로 와서 저를 안아주고서야 제 몸에서는 그 남자의 냄새가 사라졌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다른 남자에게는 시선을 주지도 않습니다. 언니도 저와 형부 사이를 거의 인정을 하는 상태이니까 말입니다. 점점 커 가는 조카의 시선이 무서울 따름이지만 저는 언제까지나 우리 형주가 가장 재미있게 가지고 노는 장난감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지금 제 나이 20살이라 형부 아니 훨씬 많아 45살이나 되지만 형부가 환갑 아니 백 살이 되더라도 형부가 원한다면 언제라도 저는 형부의 장난감이 될 작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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