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매가 부부로
무료소설 근친물: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41,808회 작성일소설 읽기 : 남매가 부부로
저는 이제 막 20대에 진입한 소녀입니다.
저희 부모님은 일찍이 저를 낳아 잘 키우셨는데 아빠가 고등학교의 선생님을 하셨고 엄마는
초등학교 선생님을 하셨는데 돌아가신 할머님의 말씀으로는 우리 아빠 엄마의 부부금실은
많은 사람들이 질투를 할 정도로 좋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제가 태어나고 첫 돌이 지난 어느 날 아침에 손수 차를 몰고 학교로 출근을 하시며
엄마가 근무하는 초등학교 앞에 엄마를 태워드리고는 아빠가 근무하시는 고등학교로 출근하시다
중앙선을 침범한 덤프트럭에 아빠의 차가 형체를 못 알아볼 정도로 찌그러져 우리 아빠는
그 자리에서 돌아가시고 말았답니다.
우리 엄마는 아빠가 돌아가시자 주위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저를 키우시며 묵묵하게 사셨는데
엄마는 저를 외할머니에게 맡기시고는 출근을 하셨다가 퇴근하며 저를 데리고 집으로 가는
다람쥐 체 바퀴 돌 듯이 사시면서도 남에게 기를 안 죽이고 저를 키우시려고 무척 애를 쓰셨답니다.
그러던 중에 엄마도 연탄불의 과열로 집에 불이나 저를 구하고 피하려다 그만 허벅지 아래에
큰 화상을 입어 장기 입원을 하는 바람에 감당하기 어려운 치료비 때문에 교직에서 사직을 하고
퇴직금을 받아서 그 돈으로 치료비를 하여 보기 싫은 화상 흔적을 간직하고 퇴원을 하였답니다.
그 때 내 나이 6살이었다고 하였습니다.
엄마의 고생은 그 때부터 시작이 되었다 합니다.
명색이 초등학교 선생님을 하시던 엄마는 엄마의 화상으로 화병이 생기신 단 두 분의 혈육인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중에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외할머니에게 저를 맡기고 행상부터
식당의 설거지까지 골고루 하시며 두 명의 입에 풀칠을 시키기에 급급한 생활을 하셨답니다.
그렇게 살다 제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막 중학교에 입학을 하던 해에 단 한 명의 어머니
혈육이신 외할머니가 돌아가시자 도저히 엄마 혼자 저의 뒷바라지가 힘이 드시던 차에 엄마를
잘 아시는 분이 엄마에게 한 남자를 소개 시켰는데 당시에 중학교 3학년이 아들을 하나 두고 키우는
홀아비라 엄마와 그 분은 바로 의견일치를 보아 살림을 합쳤습니다.
저는 그 분을 아빠라고 부르고 그 분의 아들을 스스럼없이 오빠라고 불렀습니다.
오빠 역시 우리 엄마를 엄마라고 불렀고 저를 동생으로 여겨주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엄마와 새 아빠가 주책 없이 늦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하나 낳았습니다.
아빠나 엄마 오빠 그리고 저는 그 아이를 극진하게 예뻐하며 키웠습니다.
그런데 엄마는 새 아빠와의 혼인 신고를 안 하였답니다.
먼저 돌아가신 우리 아빠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못 하겠다고 고집을 피워서.......
제가 중학교를 졸업을 하고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2학년에 올랐고 오빠가 대학에 입학을 하여
열심히 다니던 어느 날 아빠와 엄마가 동생을 데리고 연휴 휴가를 떠나셨는데 그 것이 우리와의
마지막 작별이 될 줄은 오빠나 저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 것은 운명의 장난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가혹한 형벌이었습니다.
나를 낳아주신 아빠처럼 중앙선을 침범한 덤프트럭이 엄마 아빠 그리고 사랑하는 동생이 탄
차를 형체도 알아 볼 수가 없을 정도로 뭉개어버렸는데 엄마와 동생은 현장에서 즉사를 하고
아빠는 겨우 생명을 유지하고 계셨습니다.
오빠와 저는 그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이미 운명을 하신 엄마나 동생의 장례는 뒷전이고 숨을 유지하고 계시는 아빠가 사시기만을 기대하였습니다.
엄마와 동생의 장례를 어떻게 치렀는지 지금도 생각이 안 납니다.
그 정도로 오빠와 저는 아빠가 소생하시기를 기도하고 병실에서 날밤을 뜬눈으로 보냈습니다.
아빠도 일가 친척이 안 계셨고 저의 엄마도 일가 친척이 없었던 터라 오빠와 저는 친 혈육
이상으로 가까웠고 서로 위로를 하고 서로 잠을 권하며 아빠의 간병을 하였습니다.
아빠가 일반 병실로 옮겨 오빠와 나는 한시름 놓고 지내기를 몇 일 하던 차에 오빠의 아빠가
위험하여 다시 중환자 실로 옮겼다는 연락을 받고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오빠와 저는 손을 잡고 중환자 대기실에서 아빠의 회복을 기원하며 초조하게 기다렸습니다.
한참을 기다리자 아빠의 담당 선생님이 나오시더니
"마지막으로 할 말씀이 있다는 군"하시며 힘없이 말씀을 하시고는 우리를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아빠 힘내세요"하고 말하자 오빠도
"아빠 죽으면 안 돼"하고 아빠의 손을 잡자 의사 선생님이
"곱게 보내요"하는데 아빠가
"민수야 현영아 너희 둘은 피는 안 섞였지만 분명하게 남매이다, 둘이 사이 좋게 잘 도우며 살아라"하시고는
눈물을 조금 흘리시더니 우리의 손을 힘없이 놓자
"운명하셨습니다"하며 하얀 가운으로 아빠의 얼굴을 덮었습니다.
아빠도 엄마와 동생 곁으로 가 버리신 것입니다.
오빠와 저는 슬픈 마음으로 아빠의 장례를 치렀습니다.
오빠는 일다 휴학을 하고 아빠가 하시던 사업을 정리하였습니다.
엄마 아빠 그리고 동생의 그 세 사람의 목숨 값인 보험금도 받았습니다.
저는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실업계 고등학교로 전학을 하여 입시 지옥에서 벗어나고 오빠의
뒷바라지에 전념을 하기시작하자 오빠는 저를 나무랐지만 저는 그런 오빠가 너무나 자상하고 좋았습니다.
내가 고등학교만 나오더라도 오빠는 대학을 꼭 나와야 한다는 것이 제 마음이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을 그렇게 오빠와 저에게 많은 시련을 남겨주고 지나가고 그 해 겨울방학 오빠와 저는
그 다사다난하였던 그 해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새해를 아빠와 엄마가 연휴를 보내시려고 가시던
강릉 경포대에서 보내기로 마음을 먹고 간단한 차림으로 집을 나섰습니다.
오빠는 내가 버스를 타고 가며 아빠 엄마 그리고 동생이 사고를 당한 그 자리를 지나가자 하였으나
그 악몽을 더 이상 가슴속에 묻어두면 안 좋다고 하며 열차를 타자고 고집하여 오빠의 말대로
우리는 열차를 타고 강릉 경포대에 도착을 하여 호텔에 방을 하나 빌려 여장을 풀고 나와
백사장을 거닐다 횟집에 들어가 회를 시키고 오빠와 같이 약간의 술도 마셨습니다.
평소에 오빠를 무척 따르며 좋아하던 저는 알콜의 힘을 빌러 오빠에게 말했습니다.
"오빠, 우리 집에 가도 같은 방 쓰자"하고 말하자
"임마, 너하고 나는 남매야 남매"하며 알밤을 주었습니다.
"그래 남매라는 것 부정은 안 해, 그렇지만 오빠와 나는 분명히 피도 안 섞였고"하는데 또 알밤을 주며
"아빠가 임종하시기 하신 말씀 잊었니?"하기에
"안 잊었어, 사이좋게 잘 살라하셨지?"하자
"그래 그렇게 말하셨어"하기에
"그럼 부부로 사이좋게 살자 오빠"하고 울먹이자
"그 것은 엄마 아빠가 바라시는 일은 아닐 거야"하며 고개를 숙였습니다.
"아니야, 오빠 나는 오빠의 뒷바라지를 하고 오빠는 나를 지키고 또 오빠의 아기를 낳으면
오빠의 손을 잇고 나 역시 우리 엄마의 손을 잇고,,,,,"하며 울자
"일단 조금 생각을 해 보고 결정하자"하고 오빠는 한발자국 물러섰습니다.
오빠와 나는 호텔로 돌아와 방으로 갔습니다.
"오빠 오늘 밤 오빠 품에 안겨 잠자고 싶어"하고 말하자
"안 돼"하고 말하고는 두 개의 침대 중 그 하나에 누워 잠을 잤습니다.
오빠는 술이 취하면 누가 엎어가도 모르는 것을 아는 저는 오빠가 완전하게 잠이 든 것을
확인하고 오빠의 옆에 나란히 누워 오빠의 좆을 팬티 안으로 손을 넣어 주물렀습니다.
오빠의 좆은 잠결에도 제 손으로 주무르자 딱딱하게 일어났습니다.
친구들과 본 비디오나 야한 동영상이 생각이 나 바로 오빠의 좆을 제 보지에 박고싶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오빠와 결합을 하고 제가 처녀가 아니었다며 실망을 할까 두려운 마음에 그냥
오빠의 좆을 만지고 빨기만 하지 더 이상은 하지 않기로 마음을 굳혔습니다.
저는 오빠의 이부자리를 걷고 오빠의 팬티를 조금 내리자 오빠의 좆이 마치 용수철이 무언가에
눌려 있다가 그 무언가가 해방시키면 튀어 오르듯이 힘차게 팬티에서 튕겨 나왔습니다.
나는 비디오나 야한 동영상에서 본 것처럼 오빠의 우람하고 멋진 좆을 입으로 물고 흔들며 빨았습니다.
"으~"오빠는 잠결에도 느끼는지 가는 신음을 내었지만 결코 잠에서 깨어나지는 안 하였습니다.
얼마나 흔들고 빨자 오빠의 좆에서는 말로만 들어왔던 좆물이 제 목젖을 힘차게 두들기며 나오자 받아먹었습니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오빠의 팬티를 입혀주고는 떨어져 있는 침대에서 잠을 잤습니다.
다음날 새벽 해맞이를 구경하고 아침을 먹고 오빠와 저는 강릉의 몇 곳을 구경하였습니다.
다음날 호텔에 체크아웃을 하고 오빠와 저는 설악산으로 가 또 호텔에 여장을 풀고 설악산으로 갔습니다.
한참을 오르자 숨도 차고 힘이 들어 인적이 없는 곳에 앉자 오빠가 앞장서 가다가 뒤돌아보고 나에게 오더니
"힘들면 내려갈까?"하기에
"오빠가 뽀뽀 해주면 힘 안 들겠는데...."하고 말을 흐리자
"쪽"하고 제 뺨에 뽀뽀를 하기에
"뺨에 말고..."하자
"그럼 내려가자"하며 내려가려 하기에
"아냐! 올라 가"하고는 앞장을 서 올라갔습니다.
그렇게 오빠와 저는 강릉과 설악산을 구경하고 집으로 왔습니다.
누구에게 오빠와의 관계를 의논하고 싶었지만 저에게는 마땅하게 의논을 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궁리에 궁리를 한 끝에 인문계고등학교에 다닐 때 우리 담임 선생님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 선생님이 우리 엄마와 동생의 장례에 적극적으로 친구들과 주선을 하여 치러주셨고 저의
사정을 잘 아시는 그 선생님에게 상담을 하고 싶어 전에 다니던 인문계고등학교로 찾아갔습니다.
인문계인지라 방학도 없이 자율학습을 하는 친구들도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오래 수다를 떨면 방해가 되기에 조금 이야기를 하다 전의 담임선생님을 찾았습니다.
선생님은 반갑게 저를 맞이하시더니 제가 의논을 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하자 저를 상담실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래 무슨 일이야?"하시기에
"저 우리 오빠랑 결혼하고 싶은데 상관없죠, 선생님"하고 묻자
"흠~!엄마 아빠가 혼인 신고를 안 하셨기에 법적으로는 하자는 없지만...."하시고 말을 흐리시기에
"맞죠, 결혼해도 법적으로는 하자 없죠?"하고 되묻자
"그러나 도덕적으로는 문제가 있지"하시기에
"뭐가 요?"하고 묻자
"너희 엄마가 새 아빠의 아이를 낳아 간접적으로는 문제가 있지"하시기에
"그 동생도 죽은 것 아시죠?"하고묻자
"잘 알지, 너희 오빠 아버지와 너희 엄마간에 아이가 생겼다는 그 사실이 문제지"하시기에
"그럼 결혼하면 안 되나요?"하고 묻자
"그 오빠의 생각은 어떠니?"하시기에
"오빠도 생각을 해 보자고 했어요"하자
"그렇지 많은 생각을 하고 결정해야지 잘 못하면 둘 다 불행해져"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남자 18세 여자 16세 이상이면 부모의 동의가 있으면 혼인이 가능하지만 둘 다 부모가 안 계시니
별 문제는 없지만 본인의 의사가 가장 중요하고 혼인을 할 듯이 분명한가가 문제지"하시기에
"선생님이 우리 오빠 설득하여 주세요"하자
"일단 한번 만나는 보지"하시고는 오빠의 휴대폰 번호를 물어보시기에 적어드렸습니다.
그 날 밤 나는 저녁을 평소보다 더 많은 밑반찬을 준비하고 술도 준비를 하여 오빠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와~진수성찬이네"오빠는 식탁으로 오더니 말하였습니다.
"오빠 맛봐"하자 오빠는 의자에 앉고는 반찬을 집어먹고는
"야 솜씨 좋은데"하기에
"이 정도면 오빠 아내 자격 충분하지?"하고 묻자
"또 그 이야기니?"하기에
"오늘 전에 다니던 학교 담임 선생님 찾아가서 상담했어"하자
"........"오빠는 말없이 내 얼굴만 바라보았습니다.
"선생님이 오빠 만나고 싶데"하자
"왜?"하기에
"법적으로는 문제가 업지만 본인의 뜻이 문제라고...."하고 말하자
"나도 잘 알고 있어"하기에
"그럼 왜 오빠는 싫어?"하고 묻자
"왜 내가 싫겠니, 다만...."하고 말을 흐리기에
"다만 뭐야?"하고 묻자
"다만 내가 너를 행복하게 하여주지 못 할까가 두려워"하기에 나는 일어나 오빠에게가 오빠의 품에 안기자
"조금 더 생각하자"하며 저를 밀었습니다.
<좋아! 오늘밤에도 오빠의 좆을 빨아 오빠의 좆물을 먹을 거야>하는 마음으로 오빠에게 술을 먹였습니다.
오빠는 아무 생각 없이 술을 받아먹으며 앞으로의 계획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일단 내년에 복학을 하고 군대에 다녀오고 너는 전문대라도 입학을 해, 위자료가 있으니까"하기에
"나는 고등학교 졸업하면 오빠가 대학을 졸업 할 때까지 직장생활하며 아내 노릇 할 거야"하자
"또! 또~ 그이야기! 그 이야기는 그만 해"하기에
"오빠 군대에 가기 전에 결혼식 치를 거야"하고 힘주어 말하자
"나 졸려"하고는 비틀거리며 오빠의 방으로 갔습니다.
식탁을 정리하고 설거지를 끝을 내고 오빠의 방으로 가자 오빠는 죽은 듯이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나는 오빠가 잠이 든 것을 확인을 하고 이불을 걷고 오빠의 팬티를 내렸습니다.
귀여운 오빠의 좆이 축 늘어져 있었습니다.
저는 그 귀여운 오빠의 좆을 입에 물고 흔들었습니다.
오빠는 꿈결에서 느끼는지 조금 있으니 좆에 피가 몰리며 섰습니다.
나는 흥분이 되어 오빠의 좆을 물고 흔들며 제 가슴을 주물렀습니다.
아니 보지도 주물렀습니다.
그리고는 오빠의 좆물을 먹고서야 오빠의 좆을 해방시켜주고 오빠 옆에 나란히 누워 잤습니다.
새벽에 오빠가 일어난 기척이 느껴지자 저는 자는 척하고 오빠의 행동을 보기로 하였습니다.
어제 밤 저는 오빠의 팬티를 벗기고는 입히지 않았습니다.
오빠는 자신의 팬티가 벗겨 진 것에 대하여 무척 당황해 하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잠꼬대를 하는 것처럼 오빠의 몸에 다리를 걸쳤습니다.
"허~이 녀석이"하고는 제 다리를 잡고 바로 하더니 내 뺨을 손바닥으로 만졌습니다.
"오빠"하고는 오빠의 머리를 끌어안아 제 큰 가슴사이로 당기며 하체를 오빠의 몸에 밀착을 시켰습니다.
"이러 지 마"하고 오빠는 말했으나 억지로 밀지는 안 했습니다.
"나 오빠 여자야"하고 말하자
"너 밤에 나에게 이상한 짓 했지?"하기에 오빠의 머리를 더 힘주어 안고는
"오빠 그 것 먹었어"하자
"너 정말 후회 안 할거니?"하기에 오빠의 고개를 가슴에서 때고는 오빠의 입술에 내 입술을
대는 것으로 대답에 대신하자 오빠는 자신의 입을 열어 내 혀를 받아들이고는 빨았습니다.
드디어 오빠는 마음의 문을 저에게 열어주었습니다.
나는 오빠의 목을 끌어안고 오빠의 정열적인 키스를 받았습니다.
한참을 키스를 하여 주더니 입을 때고는
"너랑 식을 올리고 몸은 합치자"하기에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오빠 고마워"저는 오빠의 품에 안기어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전의 담임선생님이 개입을 하자 일을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었습니다.
마땅하게 초대를 할 사람도 없었습니다.
전에 다니던 학교의 친구 몇 명과 전학을 간 학교의 친구 몇 명 그리고 전에 다니던 학교의 몇 몇 선생님
전학을 간 학교의 담임선생님이 저의 하객이었고 오빠는 고등학교 동창 몇 명과 대학의 동아리 친구들과
지도교수님이 하객으로 참석하여 그 교수님의 주례로 조촐한 결혼식을 하였습니다.
물론 이제 고등학교 3학년인 제가 결혼을 한다고 학교에 이야기하자 학교에서 제동을 걸었지만
저의 사정을 잘 아시는 전에 다니던 학교의 담임선생님이 내가 다니는 학교로 찾아가 제 입장을 이야기하여
승낙을 받아 주어 결혼식을 하게 되는 고난도 있었습니다.
더구나 한 겨울이라 식장 구하기는 힘이 전혀 안 들었고 피로연을 할 장소도 쉽게 구하였습니다.
오빠와 저는 사전에 신혼여행은 오빠가 대학을 졸업하는 날 가기로 하고 초야는 집에서 치르기로 하였습니다.
우리의 결혼식은 온통 눈물바다를 이루는 그런 결혼식이었습니다.
오빠의 사정을 잘 아시는 지도 교수님의 주례사는 모든 이에게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습니다.
주례선생님께서 주례사가 끝이 날 무렵에는 제 화장이 다 지워질 정도로 엉망이 되어 식장에서
급히 화장을 고쳐주어 기념사진을 찍을 수가 있었습니다.
폐백을 두 아빠와 두 엄마의 영정을 앞에 두고 오빠와 저는 눈물을 흘리며 드렸습니다.
하객들은 단 한 분도 자리를 뜨지 않고 울면서 우리의 폐백을 지켜보았습니다.
오빠와 저는 급기야 엄마 아빠하고 소리쳐 울며 폐백을 끝을 내었습니다.
울음을 달래려는 친구들이나 선생님들이 오히려 더 저와 오빠를 끌어안고 울었습니다.
심지어는 시장에서 폐백 도우미를 하시는 아줌마들도 울음을 참느라 부들부들 떨며 겨우겨우 절을 시켰습니다.
그리고는 간편한 옷을 입고 오빠와 함께 피로연장으로 갔습니다.
우리가 들어서자 모두 일어서서 박수로 우리를 맞아주었습니다.
오빠와 저는 하객 한 분 한 분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였습니다.
오빠의 우인들이 손님이 없는 식당 주인을 설득하여 노래방기기를 가지고 와 사회를 보았던
오빠 친구의 사회로 결혼식과는 달리 피로연을 성대하게 하였습니다.
전에 다니던 학교의 담임선생님 그리고 전학을 간 학교의 담임선생님은 물론 오빠의 근엄하신
지도 교수님도 마이크를 잡고 우리에게 축하의 노래를 불러주셨습니다.
모든 행사가 끝이 나자 오빠와 저는 오빠친구가 준비한 차를 타고 우리 집으로 왔습니다.
현관에 들어서자 문을 닫고 오빠가 저에게 깊은 키스를 하여주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며
"이럴 줄 알았지"하며 오빠의 친구들과 제 친구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었습니다.
"어~!모두 집에 안 갔어?"하고 오빠가 묻자
"자네 낮부터 뒹굴고 야단칠까 우리가 감시하러왔지"하자 제 친구들은 얼굴을 붉히며 웃었습니다.
그리고는 밤이 이슥 하자 냉장고를 바닥을 드러내고야 갔습니다.
"수고했어"오빠는 저를 힘주어 끌어안고 말했습니다.
"오빠도"저는 오빠의 품을 파고들며 말했습니다.
오빠는 저를 번쩍 들더니 엄마 아빠가 쓰던 방으로 가 엄마 아빠가 쓰던 침대에 눕히고는
"이제 이 침실이 우리들의 침실이야"하며 웃자
"응~!알았어"하고 대답을 하자 오빠는 천천히 제 옷을 벗겼습니다.
이 날을 그 얼마나 기다렸던가
눈물이 나오는 것을 참으며 오빠의 얼굴을 외면하였습니다.
오빠는 저의 옷을 다 벗기고는 한참을 혼을 빼고 보더니 오빠의 옷을 벗었습니다.
"처음이지?"하기에 고개를 끄덕이자
"아플 거야, 참어"하기에 고개를 끄덕이고 외면을 하였습니다.
오빠는 한참을 키스를 하고 가슴을 주무르더니 좆을 잡고 제 보지 둔덕을 벌리고 그 사이에 끼우더니
"참겠어?"하기에 다시 고개를 끄덕이고 이를 앙 다물었습니다.
"악!"하는 비명이 앙 다문 입에서 터져 나오며 하복부에 심한 통증이 느껴졌습니다.
오빠는 그런 저를 끌어안으며 한참을 있다가 제 눈에서 눈물이 안 흐르자 천천히 펌프질을 하였습니다.
아파도 참아야지참아야지 하며 오빠가 빨리 끝을 내어주기를 기다렸습니다.
오빠와 나는 사전에 안전한 날을 잡아 날짜를 정하였습니다.
최소한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에는 출산을 안 하기로 하였습니다.
오빠는 한참을 펌프질하더니 제 보지 안에 전에 EN 번 먹어 본 적이 있던 좆물을 뿌려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샤워를 하고 신혼의 첫날밤을 보내었습니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우리가 결혼을 한지 1년이 됩니다.
2월이면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을 하고 4월이면 오빠는 군대에 입대를 합니다.
그런데 지금 내 뱃속에는 오빠와 나의 결실인 아기가 힘차게 자라고 있습니다.
올 8월이면 나는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아빠는 군대에 가 있겠지만.....
오빠는 요즘 자면서 내 배를 쓰다듬는 것이 첫 번째고 두 번째가 제 보지를 즐겁게 하여 주는 것입니다.
요즘 사회가 다른 남자나 여자에게 눈을 돌리는 경향이 많다고 들었지만 오빠와 저는 절대 그런 짓은 안 할겁니다.
여러분이 우리를 지켜보아 주십시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