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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 누나!! 누나!!! - 하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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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회 31,720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누나! 누나!! 누나!!! - 하편

“김인호!! 이따가 교무실로 와서 스마트폰 찾아가! 알았어?” 한동안 나를 벌레보듯 쳐다보던 교생선생님이, 갑자기 내 목소리를 목청껏 불렀다. 화들짝 놀라서 무슨일인가 싶었더니, 일전에 ‘사고’로 빼앗겼던 수혁이 녀석의 스마트폰을 찾아가라는 말씀이다. 슬쩍 고개를 돌려 수혁이 녀석을 바라보니 녀석이 눈을 찡긋 거린다. 찾자마자 자기한테 돌려달라는 얘기겠지 뭐. 후우. 왜 이렇게 가슴이 답답하지? 속이 안좋아서 화장실 문을 걸어잠그고 변기 위에 앉았다. 속이 답답한건지, 아니면 머릿속이 답답한거지 도통 모를 일이다. 그냥 앉아서 억지로 배에 힘을 주고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큭.. 어제는 미안했다. 기분좀 풀렸어?” -후우. 몰라 임마. 재미는 혼자 다 보고. “이해해라. 큭. 좀만 더 기달려봐. 이제 거의 다 ‘껍질을 벗겨낸것 같아’.” -껍질? 큭.. 분명히 수혁이 녀석과 진수의 목소리였다. 나는 화장실 문에 바싹 기대어서 녀석들의 대화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래도, 어제 내가 너를 막지 않았으면, 다된 밥에 뭐 떨어뜨릴뻔 했다구. 어제 밤새도록 인호네 누나가 어떻게 행동했는지 너도 알잖아?” -뭐 대단한거라구. 기껏해야 자지를 손으로 문질러 준 것 뿐인데. “스스로 했다는게 중요한거지. 차츰차츰 그렇게 변해가는거야. 재밌지 않아?” - 변해간다라. 그래도 나도 사까시한번 받아보고 싶었는데. 누나가 어제 새벽에 들어올때까지 어디서 무얼 했는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이제 완전 잘하게 됐으니까, 큭. 그건 나중에 시켜줄게.” -완전 새끼. 니것처럼 말한다? “큭. 아 그런가? 그렇다고 해도 어제 너 조금 심했어. 무슨 여자 젖가슴을 물어뜯을것처럼 빨아대는 통에, 내가 다 걱정스러울 정도였다구. 나중에 보니까 누나 가슴에 피멍 맺힌거 같던데.” -피멍은 무슨. 오바하지마라 새끼야. 흐흐. 그나저나, 이제 정말 슬슬... “쉿..!” 갑자기 수혁이가 진수 녀석의 말을 가로 막았다. 그러더니 내가 있는 화장실 칸으로 걸어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크.... 큰일났다...’ 화장실 칸에 나밖에 없는데 나는 적잖이 당황해서 발을 이리저리 동동 굴렀다. 이쪽으로 향하는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서 미칠 지경인데, 갑자기 저~ 편에서 왠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너희들! 수업 시작한지가 언젠데 아직도 여기 있어? 빨리 교실로 안가?” 분명 물리 선생님의 목소리였다. 화장실 바로 앞에서 슬리퍼 끄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머리위로 흐르는 식은땀을 손으로 훔쳐냈다. 수업이 모두 끝났을 때, 수혁이 녀석과 진수 녀석이 재훈이에게 무슨 얘긴가를 하고는, 재훈이 녀석의 스마트폰을 뺏어서는 학교를 빠져나갔다. 또 도서관으로 가겠지. 그러면서도 내심 아까 화장실에서 진수 녀석이 했던 ‘이제 정말 슬슬’ 이라는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그러는 찰나에 재훈이 녀석이 내게 오는가 싶더니 나에게 말을 걸었다. “야. 수혁이가 먼저 도서관 간대. 그러니까 너 스마트폰 찾아오면 바로 나한테 줘. 아 혹시... 너.. 오늘 도서관 갈거야?” 내 눈치를 살피면서 나에게 질문을 하자, 나는 여느때처럼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러자 내심 안심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는가 싶더니 재훈이 녀석이 ‘여기서 기다릴게, 빨랑 다녀와’ 라는 말을 내게 건냈다. 나는 풀이 죽어서 교무실로 향했다. “그러니까 내가 너 예뻐써 이걸 돌려주는게 아니라, 곰곰이 생각해봐도 분하고 괘씸한데.....” 나를 마주하고 있는 교생선생님은 여전히 화가 덜 풀렸는지, 기어이 30분이 넘는시간동안 나를 세워두고 이런저런 얘기를 쏟아냈다. 역시나 곱게 돌려줄 생각은 없어보였다. 묵묵히 선생님의 말씀을 다 듣고 나서 수혁이 녀석의 스마트폰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시간을 보니 교무실에서만 50분가까이 있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다리는 물론이고 몸 구석구석이 저려왔다. 수혁이 녀석의 스마트폰을 받아들고 교실로 올라가는데, 손에 들린 스마트폰이 미세하게 떨렸다. 무의식 중에 스마트폰을 슬쩍 내려다보니, 메시지 하나가 들어왔는지 우편엽서 모양의 아이콘이 깜박이고 있었다. 애써 무시하려고 하는데, 발신자 표시에 ‘차진수’라는 이름 세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가던 걸음을 멈춰서서 조작조차 하기 힘든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이것저것 눌렀더니, 큼지막한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 ‘야! 어디야? 하여튼 개새끼 존나 굼뗘가지고, 씨발 빨리 도서관으로 와. 수혁이 새끼 드디어 오늘 딸거래!! ㅋㅋㅋ’ 무슨말인지를 몰라서 계속 쳐다보려니까 갑자기 스마트폰 화면이 어두워졌다. 사이드 쪽에서 빨간불이 점등되고 있었다. 나는 그 상황에서, 필사적으로 통화버튼을 누르고 내 전화번호를 꾹꾹 눌렀다. 바지춤에서 내 휴대전화가 울리는가 싶더니, 기어이 수혁이 녀석의 스마트폰이 꺼지고 말았다. 다시금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여전히 진수 녀석이 말한 ‘따먹는다’ 혹은 ‘딴다’라는 의미가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느낌이 좋지 않다. 나는 무거운 발걸음을 천천히 떼며 재훈이 녀석에게 걸어갔다. 나에게서 스마트폰을 건내받은 재훈이는, 얼굴에 인상을 구겨넣고선 간다 어쩐다 인사도 없이 사라졌다. 나아말로 그런 재훈이 녀석을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것 만큼은 분명했다. 서둘러 학교를 빠져나왔다. 혹시라도 재훈이 녀석과 마주칠까봐 조심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어제처럼 서둘러 도서관에 가야 하나? 아니다. 어차피 지금 도서관에 가 봐야 녀석들이 있겠지. 그럼 어떻게 하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일단 나는 걷기로 했다. 한참을 걸어서 도착한 곳은 동네 파출소였다. 그러나 정작 파출소 앞에 다가가서는 아무것도 할 수 가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막상 파출소에 들어가서 뭐라고 해야하지? ‘누나가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이런식으로 말하기도 웃기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동네 파출소 앞에 서서는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시간은 흘러가서 내 마음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뭐하고 있니?” 한참을 파출소 앞에서 서성이고 있는데, 경찰복을 입은 경찰관이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화들짝 놀라서는 눈앞의 경찰관과 마주했다. ‘뭐.. 뭐라고 해야하지? 누나가 위험에 처해있어요...’ “누.. 누나가...” -뭐? 뭐라구? 잘 안들리는데.. 누나가? 경찰관이 눈을 찡그리며 내 앞에 다가왔다. 잔득 경직되서는 더 이상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죄.. 죄송합니다. 아.. 아무일도 아닙니다!!” -잠.. 잠깐 기다려!!!! 야!! 등뒤로 식은땀이 흐른다. 등뒤에서 경찰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때까지 미친사람처럼 뛰고 또 뛰었다. 결국 뛰어서 돌아온 곳은 집이었다. 더 이상 누가 따라오지도 않는데, 대문을 열고 현관까지 뛰어 들어갔다. 텅빈 방에 땀이 범벅이 되어서는 대자로 누워서 거친숨을 몰아 내쉬었다. 겨우 눈을 떠보니, 천장이 빠른 속도로 빙빙 돌고 있다. 눈을 질끈감고 안정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조금 진정이 됐다 싶을 때 슬쩍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8시. 누나의 퇴근시간까지는 아직도 두시간이나 남아있고, 지금쯤 자료실은 ‘한적해질’ 시간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다시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교복 셔츠의 가장 윗단추를 풀어버리고 잠깐 망설이다가 누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 뚜... 뚜... 지금은 고객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전화를 받지 않는다. 다급해졌다. 익숙한 여자의 목소리를 애써 무시하고, 다시 누나의 전화번호를 꾹꾹 눌렀다. 하지만 이번에도 똑같은 메시지가 흘러나왔다. “아.. 역시 도서관에 갔어야 하나?” 나는 내 거지같은 판단력을 저주하고 또 저주했다. 역시나 좋든 싫든 도서관에 갔어야 했다. 어제 일과 맞물려서 다시 좋지 못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땀이 온 몸 구석구석 눌러붙어 찝찝하기 그지 없었지만, 지금 그런것까지 신경쓸 여력이 없었다. 텅빈 방안에서 손에 전화기만 쥔 채 멍하니 앉아있었다. 시간을 슬쩍 확인하니 시계바늘이 숫자 9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까 전화를 하고서도 두세통의 전화를 더 넣었지만, 누나는 모두 받지 않았다. 불안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는데 손에 심한 진동이 느껴졌다. 나는 거의 필사적으로 전화를 받았다. “여... 여보세요?” -어. 인호야. 전화했었네? 미안.. 누나의 목소리가 이렇게까지 반가웠던 적이 없었다. 게다가 누나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무척이나 침착했다. 괜히 말못할 안도감이 밀려왔다. “전.. 전화를 해도 받지를 않길래, 걱정했어..” -아. 그랬.. 그랬어? 전화기를 무음으로 해놨더니. 미안해 인호야. “별... 별일 없는거지?” 별거 아닌 내 질문에 누나가 잠깐 뜸을 드리는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천천히 입을 열더니 수화기 너머에서 밝은톤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럼. 별일 있을게 있나? 흐. " -그래? 후우. 그럼 다행이고. “그런데 인호야...”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누나의 다음 한마디는 겨우 찾아온 안도감을 조금씩 밀어내기 시작했다. “그... 저.. 오늘도. 누나가 좀 늦을것 같아.” -왜.. 왜? “아.. 그.. 그게. 오늘 마을 외부에서 손님이 오셔서, 행정쪽 직원분들이랑 같이 잠깐 그 회식을 하기로 했어.” -회식? 아까 그런말 없었잖아. “아. 오늘 갑자기 일정이 잡혔어. 누나 술도 한잔 하게 될 것 같으니까, 너무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 아침에 얼굴보니까 걱정돼. 혹시 내일 학교 늦어지면 안되니까...” -그렇게나 늦어? 어제보다 더? 갑작스러운 나의 질문에 누나도 당황하는 눈치다. 이건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다. 누나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 물론 누나 말대로 외부에서 손님이 왔을수도 있겠지만, 그냥, 설명할 수 없지만, 지금 누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어... 너무 늦지 않도록 누나도 노력해 볼게.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자.” -아.. 알았어. 누나 근데... 정말 별일.. 없는거지? “............ 어.. 그럼.... 그럼 그만 끊을게...” 더 이상 수화기 너머에서 누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가슴이 먹먹해 졌다. 전화기를 내려놓고 잠시동안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해야하지? 어떻게 하면 좋을까? 누나의 퇴근시간이 얼추 지났을 때까지 나는 전화기만 만지작 거리며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10분단위로 끊어질때마다 나는 버릇처럼 입속으로 10, 20, 30 이런식으로 숫자를 세고 또 세는 중이었다. 40이라는 숫자를 입구멍 밖으로 토해내려 할 때,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누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 너머에서 아까와 마찬가지로 긴 통화음이 흘러나왔다. 전화를 끊고 다시 할까 하는 생각이 들 때 쯤, 누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누나?” -어.. 어... 인호야... “어. 누나. 어디야?” -어? 어.. 여기... 여기.. 술자리. 직원 분들이랑 같이 .... “아.. 술.. 벌써 술 좀 했나보네?” -아.. 티.. 티나? 흑.. 누나 걱정되서 전화.. .해..해쿠나..? “어. 누나 술.. 조금만 마셔.” -어.. 그.. 그래 고마워. 우리 착한 동생. 인호야. 미안.. 누나가 지금... 전화좀... 음... “어.. 어그래 알았어. 미안해 누나.. 끊어” 누나와 겨우 통화를 했건만, 어쩐지 안심이 되기보단 쓸데없는 의심과 불안감만이 증폭됐다. 입술을 깨물고 또 깨물다가 한 십분쯤 지났을 때, 나는 전화기를 들어서 통화목록을 살폈다. ‘아마도... 이.. 번혼가?’ 시간이 11시를 넘어가기 시작했다. 너무 불안해서 못견디겠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통화목록을 검색하다가, 나는 결국 ‘낯선’ 번호 하나를 찾아서 통화버튼을 눌렀다. “내 여자로 만들겠어~ 널 내 여자로 만들겠어~” 통화버튼을 누르니, 얼마가지 않아 요상한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아까 스마트폰이 꺼졌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충전이라도 한 모양이다. 남자의 이상한 노랫소리는 한동안 계속됐다. 역시나 전화를 거는건 무리였나 싶은 생각에, 전화기를 내려놓으려 하는데 반대편에서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아.. 아.. 그... 혹시 기수혁씨 휴대폰 아닙니까? “예. 맞는데요?” -아.. 그.. 저.. 나. 인혼데... “누구?” -인호... 김인호... 누가 시킨것도 아닌데, 미칠듯한 정적이 흘렀다. 뜻밖의 전화였는지, 수혁이 녀석도 제법 당황하는 눈치다. 이런류의 대화에 익숙하지 않은 나로써도 이 어색함이 달갑지 않았다. “어.. 너.. 내 번호는 어떻게 알았어?” -그.. 아까.. 그... 스마트폰으로 나한테 전화를 걸어서.... “뭐? 아... 어.. 어떤 의민지 알겠어. 그런데 왜?” 나도 그걸 모르겠다. 나는 무엇이 궁금해서 지금 이 늦은 시간에 수혁이 녀석에게 전화를 걸었단 말인가? 다시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조금 고민을 하다가, 더 이상 침묵했다간 꼴이 우스워 질 것 같아 아무말이나 꺼내보기로 했다. “아. 그.. 도서관에서 공부는 많이 했어?..” -어? 도서관? 그거 물어보려고 전화한거야? 이 시간에? “아... 아니.. 그.. 그... 사실은..” -사실은? “내... 내가 요즘 고민이 있는데.... 사.. 상담좀 받을까... 해서” -나한테? 큭. 상담을? 왜? “친... 친구 니까.” 맘에도 없는 소리를 수혁이 녀석에게 쏟아냈다. 그랬더니 반대편에서 아무말도 없다. 좋은징조인지 나쁜징조인지 알 길이 없다. “상담? 큭. 상담이라. 그래? 말해봐 그럼.” -그게.. 그러니까.. 음... “아니... 큭.. 아니다. 큭... 있잖아. 인호야. 너 그러지말고 이리로 와라. 우리집으로” -어? 어? 지금.. 이 시간에? “큭. 그런말 할 처지는 아니잖아? 이 시간에 먼저 전화한게 누군데. 큭 역시 그게 좋겠어. 내가 우리 집주소 알려줄게. 큭 지금 이리로 와라. 여기가....” 갑작스러운 일을 당해버렸다. 나는 얼이 빠져서는 수혁이 녀석이 토해내는 집주소를 메모지위에 써 나갔다. # 방문 일이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수혁이 녀석과 통화를 하고 나서 메모지를 손에 들고선 집을 나섰다. 수혁이 녀석이 불러준 집주소를 보아하니, 의외로 우리집 근처다. 하기야, 녀석의 전화번호도 오늘 알았는데 살고있는 집이야 오죽하겠냐 만은. 수혁이 녀석의 집까지 걸어가면서도 머릿속엔 누나 생각으로 가득했다. 아직 눈으로 확인한 건 아니지만, 수혁이 녀석의 목소리를 들은 것 만으로는 어쩐지 조금 ‘안심’이 된다. 이미 누나와 수혁이가 한 짓을 몇 번이고 봤으면서도, -우습게도- 내가 괜한 걱정을 했을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혁이가 알려준 곳으로 갔다. 어둠이 내려앉은 허름한 단독주택들 몇 채가 눈에 들어왔다. -분에 넘치게도- 마중이라도 나와 있을줄 알았는데, 사람이라곤 보이질 않는다. 어둑어둑한 주위탓에 괜시리 스산한 기운이 몸을 감쌌다. 그 때였다. 어둠속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혁인가 싶어서 고개를 빼꼼 내미니까, 차츰 얼굴의 형체가 눈에 들어왔다. 재훈이였다. 잔득 뾰루퉁한 표정으로 나를 안내하고 나서는 재훈이 녀석을 보니, 다시금 의문과 불안, 의심이 치솟았다. 아무리 친하다고 해도 지금 이 시간까지 같이 있을줄은 몰랐다. 게다가 어쩐지 녀석에게서 술냄새가 난다. 아닌게 아니라, 나보다 앞장서서 걷는 녀석의 목덜미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다. 게다가 입밖으로 자꾸 ‘씨팔’ ‘씨팔‘ 소리를 뇌까리는걸로 봐서는, 확실히 술에 취해있는것 같다. 재훈이 녀석이 슬리퍼를 질질 끌고 가더니 문을 열고 나에게 손짓을 한다. 후덥지근하고 썩 좋지 않은 향기가 코끝을 자극했다. 담배냄샌지 뭔지 모를 이상한 냄새다. 어색하게 코를 한번 매만지며 재훈이 녀석을 따라 신발을 벗고 들어가니, 수혁이 녀석과 진수가 나란히 자리에 앉아서는 나를 올려다 본다. “여~ 생각보다 빨리 왔네? 하긴 너희 집이랑 우리집 생각보다 가깝지? 큭. 앉아 앉아.” 어색하게 웃어보이며 자리에 앉았다. 슬금슬금 주위를 살피니, 조금 너저분한것 빼고는 썩 나쁘다할 수 없는 분위기다. 것보다 벌써 얼마를 마신건지, 녀석들 앞에 소주병과 맥주병이 수도 없이 나뒹굴고 있었다. 일전에 안좋은 기억도 있고 해서 -괜히 무안해져서- 고개를 슬쩍 돌리는데, 수혁이 녀석이 앉아있는 자리 옆에 이상한 물건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저건... 어... 저건... 여자... 브레지어 같은데?’ 내가 수혁이 옆자리에 시선을 구겨넣고 있으려니까, 벌써 몇잔을 마셨는지 얼굴이 벌게진 진수가 엉덩이를 방바닥에 따악 붙인채 수혁이 녀석 곁으로 자리를 고쳐 앉았다. 덕분에 브레지어인지 뭔지는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그나저나 놀랬다 야. 큭. 갑자기 전화라니.” -어.. 어. 미안.. 놀랬지? “아니, 아니 뭐. 큭. 그나저나 고민이 뭔데? 다들 궁금해하고 있어 큭..” 아 뭐라고 말해야 하지? 애석하게도 나는 지금 이런 순간에 발휘할 만한 순발력따윈 없다. 다시금 식은땀이 줄줄 흘러 내렸다. 그러자 나를 앞에 두고 세놈사이에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큭. 그냥 말하긴 좀 그래? 그럼 한잔 받아!” -어? 아.. 아니 난.. 그게.. “에이, 저번에 보니까 잘 마시더만, 큭. 사양하지 말고 받아.” 수혁이 녀석이 소주를 권하는 통에 몸이 얼어붙었다. 맥주도 간신히 간신히 한모금씩 넘겼었는데, 소주라니. 나는 얼어붙어서는 그냥 수혁이 녀석만 멀뚱멀뚱 쳐다봤다. 하지만 옆에 앉아있던 진수가 기어이 내 눈을 노려보기에 할 수 없이 수혁이가 건내주는 잔을 받아 목구멍 뒤로 넘겼다. “욱!!!” -크핫 이새끼 졸라 웃긴다! 하하 겁도없이 소주잔을 입안가득 털어넣었다. 맙소사 이렇게 쓴게 세상에 존재했다니. 이건 차라리 재앙이다. 그 모습이 재미있어 보였던지 진수 녀석이 연신 키득키득대며 웃고 있다. 무안해져서 입가를 손등으로 훔쳤다. 그랬더니 이번엔 진수 녀석이 한잔을 또 권하고 나섰다. 표정을 보아하니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이라 나는 어쩔 수 없이 또 한잔을 받아 마셨다. 두 번째 지옥이 찾아왔다. 그렇게 30분동안, 쉴새없이 잔이 오갔다. 분명 눈앞에 맥주가 떡하니 있는데, 녀석들은 줄곧 소주만을 권했다. 상황이 이쯤되니, 차라리 맥주를 받아마시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어차피 녀석들은 내 고민이나 상담따윈 관심에 없었는지 계속 술잔만 따르려고 안달이었다. 후우. 호흡이 거칠어진다. 체감상, 소주 한잔은 맥주 한캔과 맞먹는 느낌이다. 벌써 8잔 정도를 받아마시고 있다. “이야~ 잘 마시네?~! 큭.” -그.. 그게 아뉘고... “큭. 술주정한다 인호. 큭큭.” 정신은 멀쩡한것 같은데, 속이 매스껍고 기분이 알딸딸 하다. 말은 제대로 나오지 않고, 혀는 얼어붙은 듯 얼얼하다. 술을 마시면 겁이 없어지는지, 나는 수혁이한테 이것저것 물어보고 나섰다. 부모님은 어디 계시냐, 항상 이렇게 자주 모여서 술을 마시느냐? 뭐 이런 시덥지 않은 질문들이 태반이었던것 같다. 수혁이 녀석은 내 질문에 일일이 대답해 주었다. 그러면서도 가끔씩 고개를 돌려 시간을 확인하는 것 처럼 보였다. 거의 정신을 놓고 있는 재훈이 녀석과는 다르게 진수 녀석도 가끔씩 어딘가를 슬쩍슬쩍 훔쳐보고 있었다. 내가 녀석을 따라 굳게 잠겨있는 방문에 시선을 가져다대니 진수 녀석이 허걱지겁 다시 술잔을 가져다 댔다. "하암. 큭. 슬슬 졸렵네. 재훈이 녀석은 벌써 뻗어 버렸네. 큭. 수혁아. 어떻게 할래? 큭. 벌써 시간도 1시가 다 되어가는데. 내일 학교도 가야하고 큭.“ -아.. 아.. 알아.. 알았어. 흐흐. 미안... 나.. 나.. 그만 갈게. 듣던중 반가운 소리였던지, 진수 녀석이 자리에서 성큼 일어섰다. 한쪽 손을 비틀거리면서 현관쪽으로 걸어가는데, 갑자기 머리가 핑돌기 시작했다. [쿵!!] -야.. 야... 나는 그대로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벽인가 어딘가에 머리를 크게 찌인것 같은데, 아픔 속에서도 정신을 차리려 노력했다. 등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후우. 큭. 인호 많이 취했나 보네. 그럼 잠깐 우리집에서 쉬다가라.” -뭐? 너.. 끅. 임마.. 괜찮겠어? 수혁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진수 녀석이 쏘아붙였다. 무슨일인가 싶어 자리에 쓰러져서 고개를 슬금슬금 돌리니 수혁이 녀석과 진수 녀석이 무언가 얘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진수 녀석은 무엇이 그토록 걱정되는지 얼굴빛이 영 좋지 않다. 이와는 반대로 수혁이 녀석은 연신 생긋 웃어보이더니 나를 부축하고 나섰다. 거실쪽 쇼파위에 그대로 쓰러졌다. 그리곤 거짓말처럼 스르륵 눈이 감겼다. 아까 봤던 브레지어가 진수녀석의 엉덩이에 꾸욱 눌려서는 얇게 저며져 있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고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하지마. 역시 못하겠어...’ ‘진짜 짜증나게 할래요? 자기 발로 여기까지 와놓고선. 후우 맘대로 해요. 잘됐네요. 밖에 인호도 있으니까, 언제라도 나가서 다 말해버리면 그만이죠 뭐.’ ‘그러지마. 그러지마.. 흑..’ ‘그럼 가만히 있어요. 알겠어요?’ ‘아 제발.. 그럼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싫어요..’ ‘제발.. 안돼.. 안돼...’ ‘자꾸 그렇게 반항하고 소리내면, 밖에 있는 인호가 다 들을텐데요.’ ‘아... 그... 아...’ ‘넣을게요.’ ‘아... 아..!! 제.. 제발 흑흑. 안돼..’ ‘으... 으.. 드..들어갔다!!’ ‘아.. 아파!!!!’ “음..” 목이 타들어가는 것 같은 갈증을 느끼며 잠에서 깼다. 꿈인지 뭔지 모르겠는데, 하여튼 기분이 정말 나쁜 꿈을 꾼 느낌이다. 눈을 부비적 거리면서 쇼판지 뭔지 푹신푹신한 곳 위에서 겨우 일어나는데, 아까는 꺼져 있던 거실의 티브이가 환하게 켜져 있다. 술병이 잔득 널부러져 있는 방바닥에 발바닥을 내딛는데, 뭔가 물컹한 느낌이 전해졌다. 눈을 비비면서 그쪽을 보니 재훈이 녀석이 인상을 쓰며 바닥에 잠들어 있다. 아까 주는 족족 넙죽넙죽 마셔댔더니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지끈거린다. 일단 목이 타들어가는것 같아서 비틀거리며 조심조심 자리에서 일어섰다. “쨍그랑” 조심한다고 조심했는데, 기어이 발밑에 널부러져 있는 술병을 발로 건드렸나 보다. 거실에 유리의 마찰음이 요란하게 울려댄다. 그러자 아까부터 계속 곁눈질로 흘겨보던 ‘방’의 방문에 귀를 붙이고 기대어 있던 진수가 짐짓 놀란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 보고 서 있었다. 영문을 몰라 인상만 잔득 찌푸리고 있는 나에게 진수 녀석이 다가오고 있었다. “무.. 물.. 물좀 줘.” 나에게 다가오는 진수녀석에게, 나는 엉뚱하게도 물을 찾았다. 실수했다고 생각하는 찰나에, 이게 웬걸. 진수가 몸을 돌리는가 싶더니 부엌으로 달려가 물을 떠오는게 아닌가. 지금 취해서 내가 헛것을 보나 싶은 마음에, 볼을 꼬집고 눈을 비벼봤지만 확실히 꿈을 꾸고 있는건 아니다. 그럼 진수녀석도 취한건가? 진수가 건내주는 물을 들이키고, 진수를 봤다. 그런데 이제야 녀석의 행동이 어딘가 부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뭐랄까, 나를 관찰하는 듯한 느낌. 애써 무시하고 시간을 확인하려 바지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야. 이 시간에 어디다 전화하려고?” -어.. 어? 아니.. 난 잠깐 시간좀... 확인할까 해서.. “3시야 3시.” 정말이다. 나는 그냥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려 했을 뿐인데, 왠일인지 진수 녀석이 나를 막아섰다. 별일도 다 있다 싶어서 힐끔 올려보니, 이제야 나를 보며 면상에 인상을 잔득 구겨 넣는다. 안되겠다 싶어서 주머니에 다시 휴대폰을 집어 넣으려니까, 갑자기 진수 녀석이 내 팔을 낚아채며 말했다. “야, 수혁이도 피곤한지 벌써 잠들었다. 우리도 슬슬 집에가자. 야! 야! 박재훈. 일어나 새끼야. 집에 가자.” 진수에게 팔을 잡혀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 있었다. 것보다 진수녀석이 내 팔을 얼마나 쎄게 잡았는지 팔이 아플정도다. 비틀거리며 서 있는데, 방바닥에 누워있던 박재훈이 쌍욕을 하면서 일어나는게 보였다. 그러자 진수가 재훈이 녀석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가격했다. 괜히 분위기가 살벌해 지는것 같아서 -실은 더 여기에 있지 못할것 같아서- 진수 녀석에 이끌려 현관쪽으로 다가갔다. 간다는 인사도 없이 수혁이 녀석의 집을 나서려니 찜찜해 져서, 슬쩍 ‘수혁이가 잠들어 있을’ 방문쪽을 살펴봤다. 그런데 기분탓인지, 방 밑에 옅은 불빛이 새어나오는게 보이는 것 같았다. 뭐지 싶어서 집중을 하고 보려는데, 진수 녀석이 나를 거세게 잡아 끄는 통에 결국 수혁이의 집을 빠져 나올 수 밖에 없었다. 별다른 인사도 없이, 수혁이의 집 앞에서 진수와 재훈이 녀석과 헤어졌다. 불도 켜지지 않은 어둑한 거리를 걸으려니 왠지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종종 걸음으로 집까지 걷는데 그때야 누나 생각이 났다. ‘아씨. 집에 들어왔으면 어쩌지?’ 아까 진수 녀석에게 가로막혀 확인하지 못했던 휴대폰을 바지주머니에서 꺼내 들었다. 슬라이드를 위로 스윽하고 올렸지만 별다른 메시지가 없다. 어라? 설마 아직도 술자리에 있는건가? 안좋은 느낌에 가던길을 멈춰서서 누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 여보세요?” -어. 누나 나 인호. 어.. 어뒤야? “어, 미안, 아직 술자리야.” - 아 정말? 시가.. 시간이..끅. 이.. 이런데? “어, 거의 끝.. 끝나가. 아직 안잤어?” -어, 끅. 자.. 잠이 잘 아.. 안와서 끅. 한참이 걸려서야 누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의식한다고 의식하는데, 계속해서 딸꾹질이 났다. 발음에 신경쓰면서 최대한 또박또박하게 얘기를 하려고 노력했다. 덕분인지 얘기를 나누는 동안 누나는 내가 지금 술에 잔득 취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것 같았다. 금방 들어간다는 말에 빨리 들어오라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누나의 목소리를 확인하니 이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분간이 되질 않았다. 어쨌든 눈으로 확인한건, 수혁이 녀석과 누나가 함께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그래서인지 조금 안심이 됐다. 나는 비틀거리며 집까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집에 도착하니 3시 30분정도 됐다. 씻기도 뭣하고 그냥 그대로 방에 뻗어 버렸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얼얼하지만 피곤이 몰려온다. 술주정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허공속에 애꿎은 누나의 이름을 몇 번 불러낸뒤에야 스르륵 눈이 감킨다. 누나가 나를 흔들어 깨우길래, 놀라서 잠에서 깼다. 머리가 지끈거려 누나를 보면서 인상을 구겼다. 그러자 누나가 나를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봤다. 괜히 술냄새라도 풍기면 곤란할 것 같아서 서둘러 누나로부터 거리를 두고 떨어져 앉았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누나가 내게 괜찮냐는 말을 건내왔다. 그냥 무성의하게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수혁이네 집에서 술을 먹고 온 사실을 누나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서 화장실로 가려고 일어서는데 누나가 내손을 잡아채고는 이것저것 물어온다. 당황해서 누나가 묻는 말에 건성건성 대답했다. 헌데 조금 이상한게, 누나와 얘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어제 그토록 늦게까지 술자리에 있다가 온 사람치곤 어딘가 ‘너무 멀쩡해’ 보인다는 점이었다. 누나는 분명 술이 약한 사람인데, 얼굴색은 그대로다. 신기해서 누나의 얼굴을 쳐다보니까 그제야 누나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저기 누나, 혹시... 어제.. 어디 다쳤어?” -어? 왜.. 왜? “아니... 아까부터 걸음걸이가.... 조금 이상한것 같아서...”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누나와 함께 학교로 가는데, 누나가 마치 어딘가 아픈 사람처럼 ‘절뚝’거리며 걷길래, 슬며시 누나를 보고 물었다. 그러자 누나의 표정이 조금 좋지 않은 듯 싶더니, 괜찮다는 말로 얼버무렸다. 몇 마디 더 거들까 하다가 그제까지 수혁이 녀석들에게 시달리고, 그것도 모자라 바로 어제는 새벽까지 직장에서 시달린 누나가 불쌍해 보여서, 입을 닫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어딘가 좀 아파 보이는 사람의 걸음걸이다. 조금 아슬아슬하다 싶은 시간에, 교실에 들어섰다. 가쁜 숨을 내쉬고 있는데, 내 자리 뒤에서 수혁이 녀석이 뭐가 좋은지 진수와 재훈이에게 둘러싸여 연신 싱글벙글하고 있는게 눈에 들어왔다. 어제 일도 있고해서 -조금 미안한 마음이 있어- 교실문 바로옆에 바짝 붙어서 있는데, 재훈이 녀석이 나를 먼저 발견하고는 수혁이에게 무언가 신호를 보냈다. “여어~ 친구!! 어제는 잘 들어갔어?” -어? 어.. 어 뭐... 그.. 호탕하게 웃어보이던 수혁이 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며 말했다. 그 모습이 재미있어 보였는지 진수와 재훈이 녀석이 연신 낄낄대고 앉아있다. 낯부끄러워져서 수혁이에게 인사를 하는둥 마는둥 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시험 바로 전 주긴 한가 보다. 여기저기서 애들이 공부하느라 정신이 없다. 정작 나는 어제 마신 술 때문에 속이 니글거려 정신이 없다. 정신이 없는건 내 바로 뒤에 앉아있는 수혁이 녀석과 진수 녀석도 마찬가진거 같았다. 내가 책상에 엎드려 잠시 눈이라도 붙일라 치면, 어김없이 뒤에서 무슨 얘기인가를 나누며 자기들끼리 키득거렸다. TV에서 가끔 선전하는 숙취해소 음료라도 한 모금 들이킬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속이 이렇게 쓰리고 아픈데 왜 어른들은 ‘그딴게’ 좋다고 마셔대는지 도통 알 수 없다. 거의 매시간이 끝날 때마다 나는 화장실로 달려갔다. 몇 교신가가 끝나고 화장실에 갔다가, 다시 비틀거리면서 교실로 들어왔다. 정신이 어질하고 숨이 터억하니 막혀서 인상을 쓰며 내 자리로 걸어가는데, 진수 녀석과 재훈이 녀석이 스마트폰으로 무언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게 보였다. 그러든 말든 어차피 관심도 없어서 터벅터벅 자리로 걸어가는데, 볼펜을 입술에 꼬옥 물고 있던 수혁이 녀석이 -나를 보더니- 화들짝 놀라면서 진수 녀석의 손에 들린 스마트폰을 낚아챘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수혁이 녀석을 훔쳐보던 진수와 재훈이가, 곧이어 잔득 당황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봤다. 경직된 표정으로 세 녀석을 번갈아 가면서 살펴보고 있노라니, 한참동안 내 얼굴을 올려다보던 수혁이 녀석이 -겨우 안정을 찾은듯- 슬쩍 웃으면서 나에게 다가왔다. “친구! 내가 좋은거 보여줄까? 큭!” -야.. 야.. 임마 너 지금 무슨.. 수혁이가 스마트폰을 손에 들고 나에게 다가오자, 뒤에서 재훈이가 당황한 표정으로 일어섰다. 그러자 이번엔 진수 녀석이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재훈이를 막아섰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좀체 이해가 안되서 수혁이만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는데, 수혁이 녀석이 교실문을 빠져나가면서 나를 향해 -따라오라는듯- 손짓을 했다. 속이 울렁거리면서도 수혁이 녀석을 따라 하는 수 없이 교실을 빠져 나갔다. “큭. 인호야. 너 남자랑 여자랑 섹스하는거 본 적 있냐?” -뭐? 그.. 세.. 섹스? 교실을 빠져나와 후미진 어딘가로 나를 데려간 수혁이가, 낯간지러운 단어 하나를 토해냈다. 섹스라니. 그저 얼굴이 벌개져서는 고개를 아래로 내리 깔았다. 그런 내 모습에 키득대던 수혁이 녀석이 주위를 살피는 듯 하다가 나에게 아까 그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역시나. 없나 보네? 큭. 천연기념물이네. 큭. 그럼 친구로써 좋은걸 보여줘야지.~" -아.. 그.. 그러지 않아도 돼. “큭. 에이에이. 부끄러워하지 말고. 이거 꽤나 ‘레어’ 한 영상이야. 내 의중따윈 관심도 없는지, 수혁이는 자신의 손에 들린 스마트폰을 꾸욱꾸욱 누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만족한 얼굴로 나에게 다시 자신의 스마트폰을 들이댔다. [아.. 아.. 아파... 그.. 그만...] 머리가 아파서 한쪽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꾸욱 올려놓고 있는데, 머리 앞에 놓인 스마트폰에서 얄궂은 신음소리가 흘러 나왔다. 화들짝 놀라서 얼굴을 들어 올리는데, 수혁이 녀석도 깜짝 놀랐는지 볼륨 버튼을 정신없이 누르며 볼륨을 조정하는게 보였다.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신음소리’가 조금 잦아들었을때, 수혁이가 다시 나에게 스마트폰을 들이댔다. [아.. 아... 하.. 아...] [헉.. 헉. 헉...]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들어 스마트폰을 바라보는데,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마치 달리기라도 하는 듯 -추측컨대- 여자와 남자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헛기침을 하고 스마트폰을 살펴보는데, 점점 어떤 형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카메라가 움직이는건지, 아니면 ‘사람’이 움직이는건지, 어찌되었든 어떤 형체가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큭.. 어두워서 잘 안보이지? 그래도 조금 집중해서 보면, 잘 보일거야.” -그.. 그게... “큭. 이런거 처음보지? 이왕이면 조금 ‘선명한’ 걸 보여주고 싶었는데. 큭” 선명한지 어떤지, 솔직히 별다른 관심이 없다. 다만 어딘가 ‘고통스러워‘ 보이는 여자의 신음소리가 듣기 거북했다. ‘이... 이게.... 섹스야?’ 그러니까 나는, 섹스에 대한 막연한 환상이랄까? 뭐 그런게 있었다. 솔직히 누가 제대로 가르쳐 준 적도 없었고, 그 흔한 야동한번 제대로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수혁이 녀석이 보여준 ‘섹스’는, ‘찬란한 흥분‘ 보다는 어쩐지 당혹스럽고, ’고통‘ 스러운 느낌이 더 컸다. [아.. 아.. 아.. 아파....] [그.. 그런 소리 말아요. 윽... 그... 그.. 안에다.. 할게요..] [아.. 안돼!!] 한참을 그냥 묵묵히 동영상을 바라봤다. 고추가 발기한다거나 딱히 흥분되는 느낌이 없다. 그러자 남자와 여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쩐지 목소리가 조금 익숙한 느낌도 들었는데, 볼륨이 작은 탓에 그냥 ‘기분탓이려니’ 하고 넘겼다. 그보다 여자의 절륜한 신음소리가 자꾸 귀에 거슬린다. 특히 ‘아프다’ 라는 말이. 그냥 말없이 스마트폰을 바라보는데, 한참을 분주하게 움직이던 남자와 여자의 움직임이 어느순간 멈췄다. 컴컴해서 제대로 확인할 수 없지만, 확실히 그토록 격렬하게 움직이던 여자와 남자의 움직임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여자의 흐느끼는 소리와, 남자의 거친 숨소리만이 간간히 들리던 찰나에, 수혁이가 스마트폰을 내 눈앞에서 치워 버렸다. “어때? 생전 처음 섹스란걸 본 느낌이?” -뭐.. 그.. 그냥.. “큭. 에휴. ‘친구’. 넌 아직 멀었다. 멀었어. 큭..” 수혁이는 이해할 수 없는 웃음을 살짝 띄우면서 나로 하여금 고개를 돌렸다. 나는 나대로 왠지 모를 허탈감에 망연자실한 상태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고작.. 고작 이런게 섹스라니... 학교에서의 금요일이 모두 지나갔다. 수혁이 녀석이 보여준 ‘섹스’ 동영상 때문에, 가뜩이나 좋지 않은 기분이 더 좋지 않았다. 쉬는시간에 짬을 내서 누나에게 전화를 걸어볼까 하다가 몇 번이고 그만뒀다. 오늘은 어찌되었든 도서관에 갈 생각이었다. 수혁이 녀석이 가든 말든 상관없이. 헌데 내 마음을 알았는지, 수혁이 녀석들이 오늘은 도서관에 가지 않을 모양이다. 전화기로 누군가와 연신 통화를 주고 받던 진수가 수혁이 녀석에게 ‘누구누구 만날건데 같이 갈래?’ 라면서 무언가를 말하는 것 같더니, ‘재밌겠네’ 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잘됐다. 모처럼만에 누나하고 같이 집에 갈 수 있겠다. ‘제가 만족하면 그만둘게요’ 철길을 따라 도서관까지 가면서, 얼마전에 도서관에서 수혁이가 누나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제가 만족하면이라. 어제 술자리를 떠올리니, 내심 수혁이가 더 이상 누나를 ‘괴롭히지‘ 않게 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봤다. 아니 그러길 바래봤다. 도서관 자료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누나가 나를 웃으며 나를 반긴다. 그런데 어쩐지 평소와는 다르게 조금 힘이 없어보이는 웃음이다. 비어있는 테이블에 슬쩍 다가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김없이 누나가 마실것을 가져다 줬다. 슬쩍 웃어보였더니 누나도 나를 보고 웃어줬다. 책을 보면서 간간히 누나의 표정도 살폈다. 뭔가 근심이 서려 있는 표정을 하고선 가끔씩 자료실 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속으로 ‘오늘 수혁이 안와.. 걱정... 하지마.. 누나. 미안해’ 라는 말을 내뱉었다. 10시가 다되어 집으로 가는 동안에 누나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아침보단 아픈게 조금 덜한지 걸음걸이도 별로 어색해 보이지 않았다. 무슨 말인가를 하고 싶은데, 말주변이 없어서 그마저도 쉽지 않다. 결국 누나와 나는 집에 도착할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집에 들어와 가볍게 샤워를 하고 누나와 함께 마주하고 앉았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별다른 얘기가 없었다. 한동안을 그렇게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누나가 먼저 아슬아슬한 침묵을 깨고 들어왔다. “인호야. 지금부터 누나가 하는말 오해하지 말고 들어..” -어.. 뭐.. 뭔데? “그... 수혁이라는 애 있잖아... 정말... 정말 우리 인호 친구... 맞는거지?” 누나의 말에 나는 주춤했다. 친구라. 불현듯 수혁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동시에 누나의 입안 가득 자신의 고추를 들이밀고 있는 녀석의 모습도. 어떻게 말을 할까 고민을 하다가 누나의 얼굴을 보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지 뭐. 친구지.. 수혁이..” -그래... 친구... 다행이네. 누난 말이야. 사실, 중학교때부터 인호가 조금은 걱정스러웠어. 너 나름대로는 아픈 기억이겠지만, 중학교 때 안좋은 일도 있었고.. 사실, 누나는 내심 우리 인호가 영영 그렇게 친구한명 사귀어보지 못하는건 아닐까 하고... 걱정했었거든... 그런데... 그런데... “응...” 누나가 말을 잇지 못했다. 괜히 가슴이 저려왔다. 그냥 고개를 숙이고 누나가 할 말을 침묵속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수혁이라는 애가, 떡하니 나타나서 우리 인호더러 같은 반 친구라고 하는 말을 듣고는 정말이지,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정말이야. 그리고.. 그리고 있잖아. 지금 인호가 누나 앞에서, 그렇게 수혁이더러 친구가 맞다고 하는 말을 들으니까.... 정말.. 기분이 좋아....” 그렇게 얘기를 하고선 누나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덩달아 나까지 코끝이 시려왔다. 누나의 말대로 내가 지금 누나를 기쁘게 만들고 있는건지, 아니면 되도 않는 상처를 주고 있는건지 분간이 되질 않았다. 한동안 가만히 있다가, 불을끄고 누나와 나란히 누웠다. 어찌되었든 별다른 일이 없다면 주말동안은 평온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누나도 집에서 쉴 수 있고. 그렇게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 졌다. 하지만 방안을 매우는 휴대폰 벨소리와 함께, 누나가 내 눈치를 살피며 전화를 받았을땐, 직감적으로 안좋은 일이 또다시 벌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약속 토요일 아침이 밝았다. 간밤에 울린 전화에 대해 누나는 한마디도 해주지 않았다. 그냥 친구 전화라고 둘러대는게 어쩐지 조금 더 이상했다. 어쨌든 다음주부터 시험이다. 딱히 공부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나한테 조금이라도 쉴 수 있는 시간을 주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에 아침 일찍부터 짐을 챙겨서는 도서관으로 갈 준비를 마쳤다. 누나에게 다녀오겠다고 인사를 건내고 집을 나서려는데, 누나가 잔득 어두운 표정을 하고선 나의 손을 꼭 잡았다. “늦게까지 할거니?” -아. 글쎄. 요새 공부를 통 못해서, 아마 11시까지 하고 올것 같은데. 왜? “아.. 아니.. 그게.. 사실, 어제 친구한테 전화 왔었잖아? 밤늦게. 그게. 그. 내일 다른 친구 생일인데, 선물 고르는것좀 도와달라고 해서..” -누나 친구? 누구? “아. 그. 그 저기.. 아 맞다! 혜숙이! 혜숙이가 생일이라서.” -아 그래? 그럼 다녀오면 되지. 누나도 참. 뭐 그런걸 나한테 일일이 보고해? “아.. 아 그냥. 암튼, 이따가 집에와서 누나 없어도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엥? 또 늦는거야? “아니.. 아니 그.. 아마.. 많이 늦지는 않을거야.. 아마...” 아마라는 말에 어쩐지 확신이 느껴지지 않는다. 알았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누나도 참. 그런것까지 일일이 보고할 필요는 없는데. 도서관에 도착하니 8시쯤이었다. 자리표를 뽑고서는 자료실이 아닌 2층 열람실로 올라갔다. 공부에 관심이 없다지만, 이왕 공부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으면, 열람실이 나을 것 같아서였다. 오후 가까이 열람실 안에 붙어 있으려니, 내 또래 애들이 제법 열람실을 채우고 있었다. 시험이 발등에 떨어지면 좋든 싫든 공부를 하게 되는건 -비록 내가 도시에 살아본 적은 없지만- 여기같은 깡촌이나 도시나 별반 다를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 시간이 훨씬 지났건만 나는 별로 출출하지가 않다. 누나 생각에 괜시리 마음이 혼잡스러워져서 전화라도 한 통 넣어볼까 하는 생각에 휴게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보세요? 누나?” -어.. 어.. 인호야.. “별일없어?” -별일? 그런거 없는데? 요즘들어 누나에게 별일없냐고 묻는게 습관처럼 되어 버렸다. 누나는 잠깐 뜸을 들이는가 싶더니, 전화기 너머로 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누나와 평이한 대화들을 잠깐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나마 누나의 목소리를 들으니까 어쩐지 안정이 됐다. 사실 내가 누나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은, 혹시라도 수혁이 녀석들이 누나를 불러내는건 아닐까? 하는 ‘소소한’ 의구심의 발로였다. 하지만 누나의 목소리로 보건데, 별다른 일은 없나보다. 부디 ‘친구와의 약속’ 이 있는 이따 저녁까지 별다른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곧바로 열람실로 다시 들어가려는데, 목이 조금 칼칼해져서 자판기에서 이온음료 하나를 뽑아 캔뚜껑을 올려 땄다. 입에 대고 들이키려는데, 휴게실 쪽으로 내 또래 여자애 두명이 들어오고 있는게 보였다. 교복 바지를 얼마나 줄였는지 펑퍼짐한 엉덩이가 ‘민망할 정도로’ 부각되고 있었다. 민망해져서 눈도 마주칠 생각도 못하고 천천히 걸어가려는데, 머리를 마치 폭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파마를 한 여자 아이가 하는 말에 나는 그대로 멈춰설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기수혁이 소문 들었어?” -무슨? 여자애의 입에서 수혁이의 이름이 흘러나오자,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파마머리와 반대편에 서 있던 갈색 머리 여자애가 연신 무어라 떠들다가 휴게실 책상위에 터억 하고 앉는게 보였다. 목구멍 근처에 이온음료를 머금은 채로 잔득 긴장하고 있던 나는, 이온음료를 겨우 목구멍 뒤로 넘기며 -그리고 눈치를 살피면서- 슬쩍 여자애들의 근처 테이블에 가서 앉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파마와 갈색머리는 나를 의식하지 않고 얘기를 시작했다. "기수혁이면, 그... 잘생긴애.. 말하는건가?“ -그래, 우리랑 같은 학년. 꽤 유명하잖아. “근데 걔가 왜? 무슨 소문?” -기수혁이 요즘 진수랑 같이 다니나봐. “진수? 차진수? 싸움잘하는 애?. 의외다. 어울리질 안잖아 큭큭” -나도 얘기듣고 처음엔 어리둥절 했어. 그런데 중요한건 그게 아니야. 마치 무슨 중요한 얘기라도 할 것 처럼, 파마머리가 주위 눈치를 살폈다. 나는 음료수를 마시는 척 하며 파마머리와 갈색머리의 얘기에 계속해서 집중했다. “내 남친이도 싸움 잘하잖아? 그런데 알고 보니까 차진수랑 중학교때 친구더라고. 그런데 어제 간만에 애들끼리 만났나봐? 그런데 거기에 기수혁이도 나왔던 거지.” -네 남친 모이는거면, 그래도 이 동네에서 싸움좀 한다는 애들이 모였을텐데, 남자애들도 기수혁이 보고 조금 의외다 싶었겠다. “내 말이. 근데 거기 있던 누구도 암말 못했대, 생각해봐, 옆에 차진수가 딱 하니 붙어있는데 애들이 무슨 말을 하겠어? 암튼 중요한건 그게 아니고...” 파마머리는 버릇처럼 침을 삼키며, ‘중요한건 그게 아니라’는 말을 덧붙였다. 글로 치면 ‘미괄식’의 화법이다. 쓰잘데기 없는 말을 붙여넣다가 정작 중요한 얘기는 맨 끝에 몰아넣으려는 듯 보였다. “술도 한잔씩 하다가, 갑자기 차진수가 애들한테 기수혁이 얘기를 꺼내더래. 그러니까 ‘요즘 기수혁이 이 새끼가 어떤 여자를 존나게 조지고 있다’ 뭐 이런 식으로. 그러니까 애들도 조금씩 흥미를 가지고 얘기를 들었나봐. 그도 그럴게 거기있는 애들도 차진수는 몰라도, 기수혁은 소문만 들었지 거의 처음만나는 애들이 많았거든. 어색하게 있다가 차진수가 대뜸 그런소리를 하니까 하나 둘 관심을 보인거지.” -그나저나, 여자를 조지다니? 하긴 기수혁이 소문도 별로 좋은건 없잖아? 이 근처에 얼굴좀 반반하다 싶은 애들은 여지없이 따먹는 걸로 유명하고. 뭐 솔직히 너도 한번... “걸레년아.. 아니거든? 큭큭.. 뭐 물론 술먹고 한번 대줄번 하긴 했지만..” 슬쩍 고개를 돌려 파마머리를 훔쳐보니까, 마치 무슨 자랑이라도 하는 듯 어깨를 들썩거리며 갈색머리를 쳐다보고 있다. 어쩐지 한숨이 몰려 나와 손에 들린 이온음료를 한모금 홀짝였다. “차진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기수혁이가 차진수한테 짜증을 내더래. 잔득 궁금해져서 내 남친이 막 이것저것 물어봤대. 그러니까 기수혁이도 포기했는지, 애들한테 하나둘 얘기를 꺼내더래. 근데 말야. 그게 조금 이상한게, 내가 알기론 기수혁이가 여태까지 따먹은 애들은 거의 다 내 또래 애들이거든? 근데 이번에 ‘섹스’를 한 여자는 말야... 기수혁이보다 나이가 많은가 그렇더라고. 그것도 아주많이.” -얼마나? 아줌마 만나고 다니는건가? “아니, 얘기 들어보니까 그 정도는 아니고, 기수혁이랑 차진수가 말을 아끼는것 같기는 한데 대충 스물 몇 살이라던가? 뭐 그렇다더라고.” -그럼 아줌마 맞네 뭐 낄낄 고작 스무살 남짓한 여성을 아줌마로 만들어버리는 파마머리와 갈색머리의 ‘개념’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그보다도 여자애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섹스’라는 단어에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면서도 여자애들이 말하고 있는 ‘스물 몇 살의 여자‘를 머릿속으로 떠올리자니 조금씩 불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암튼, 그러고 나서도 기수혁이가 어쩐지 말을 아끼는 게 짜증이 나서, 남친이가 이것저것 물어봤나봐. 그러니까 보다못한 차진수가 인상을 구기면서 ‘그만물어!! 새끼야’ 막 이렇게 얘기를 하고 나선거지. 분위기가 조금 심각해 졌나봐. 한참을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있다가 차진수 새끼가 갑자기 피식 웃으면서 그러더래. ‘야~ 근데 그년 스무살이 훨씬 넘었는데 아다였대!! 히히히’ 막 이러니까, 주위에 있는 애들이 막 웃더래.” -하여튼 남자새끼들은 다 똑같지. 히히. 그래서 그 스물몇살 아줌마도 결국 그 자리에 왔어? “아니. 근데 조금 짓궂은 애들이 기수혁이 말고 차진수한테 ‘그 아줌마, 우리도 좀 구경 시켜줘’ 이러니까 차진수가 그건 또 막아서더래. 근데 한다는 말이 ‘새끼들아, 나도 아직 못 먹어봤거든? 쳐 뒤질라고’ 뭐 이러더래. 히히. 그러면서도 열라 예쁘니까 기대들 해라 뭐 이런 식으로 말을 하더래.” -기대하긴 뭘 기대해? 하여튼 쪼다 새끼들. 자기들끼리 신나서 한동안 이야기를 주고 받던 파마머리와 갈색머리는, 슬리퍼를 질질 끌더니 휴게실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이미 진즉에 다 마셔버린 빈 음료수 캔을 손에 들고서 나는 말없이 손톱을 물어 뜯었다. 오후 4시쯤에 빌어먹을 공부가 되지 않아 짐을 싸서 1층 자료실로 내려갔다. 교과서를 가방속에 밀어넣고서는 책장에서 아무 책이나 하나 꺼내서 읽고 또 읽었다. 의미도 모를 단어들이 눈을 관통했다. 200여 페이지 정도하는 책을 2시간 정도 걸려서 모조리 다 읽어 버렸다. 무슨 내용인지, 심지어 내가 방금전 읽었던 책의 제목이 무엇인지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이제 자료실 문을 닫을 시간이라는 ‘낯선 사서’ 의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어서는 시간을 확인했다. 여섯시다. 주말에는 자료실이 조금 일찍 문을 닫는다는 사실을 깜박하고 있었다. 나는 사서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서 도서관을 빠져나왔다. ‘이제 어떻게 한다?’ 막상 도서관을 빠져 나오긴 했는데, 뭘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 나란 놈은 원래 세웠던 계획을 그대로 실행해야 직성이 풀리는 놈인지라, 원래 계획대로라면 11시까지 있었어야 할 도서관을 겨우 6시에 빠져나온 뒤에야 심리적으로 여간 불안한게 아니었다. 물론 그 불안함의 근원은 다른곳에 있었을런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일단 집으로 가기로 했다. 누나가 별다른 시간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친구들과의 약속이면 일고 여덟시 정도는 되어야 나가겠거니 생각했다. 집까지 걸어가면서 시간을 한번 확인하고 그대로 누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누나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전화를 끊고 다시 걸고, 전화를 끊고 다시 걸기를 두세번 더 반복했다. 그래도 여전히 수화기 너머에선 누나의 목소리가 들려오질 않았다. 괜히 불안해져서 조금 더 빨리 걷기로 했다. 집 근처에 도착했을때, 요즘들어 익숙한 어둠이 자욱히 내려앉기 시작했다. 땀 때문에 이마 여기저기에 머리카락이 붙어서 눌러앉아 있었다. 닦아낼 생각도 하지 않고 집으로 들어가려는데, 문을 열고 누군가가 빠져 나오는게 보였다. “누...!” 평소와 다름없는 단정한 스커트 차림의 누나를 향해 소리를 지르려다, 누나의 뒤를 따라서 하나둘씩 빠져 나오는 익숙한 얼굴들을 보고 입을 막았다. 본능적으로 몸을 숨키고는 우리집 대문쪽을 훔쳐보니, 수혁이 녀석이 자연스럽게 누나의 어깨에 손을 가져다 얹는게 보였다. 진수와 재훈이가 그 모습을 보고 키득대는가 싶더니, 기어이 옆에 서 있던 진수 녀석이 누나의 젖가슴에 손을 올리더니 주무르기 시작했다. 얼굴이 조금 상기된 듯 보이는 누나가 주위를 살피려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다. 자신의 어깨에 올려져있는 수혁이 녀석의 손을 억지로 풀어내고 나서야 누나와 녀석들은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누나는 계속해서 주위를 살폈다. 망부석처럼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던 나는 골목 모퉁이를 돌고 있는 녀석들과 누나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됐을 때쯤, 기어이 녀석들을 따라 발걸음을 땠다. 수혁이 녀석들은 누나를 가운데에 끼고 어디론가 한참을 걸었다. 녀석들과 거리를 두고 걷는 통에 대화가 들리지 않는게 흠이었지만, 나는 비오듯 땀을 흘리면서도 녀석들을 놓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얼마나 더 걸어가려는 걸까? 벌써 30분 동안을 걷고 또 걷고 있다. 어둠이 내려앉은 길거리를 누나와 수혁이 녀석들, 그리고 내가 말없이 걷고 있었다. 한참을 말없이 따라 걷고 있는데, 녀석들이 향하고 있는 쪽을 보니 어쩐지 슬금슬금 환한 불빛이 보이고 있었다. 숨이 가빠왔지만, 최대한 들키지 않도록 몸을 숙이고 정체모를 불빛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여~~ 차진수~~ 왔냐? 낄낄” 수혁이 녀석들과 누나가 불빛 속으로 들어가고 나서, 나도 조심조심 그쪽으로 다가갔다. 환한 불빛 속에서 누군가가 진수 녀석의 이름을 부르기에 슬쩍 바라보니, 딱 보기에도 불량해 보이는 남자 아이 하나가 -아마도 자신이 끌고왔을- 오토바이 옆에 기대서는 진수의 이름을 반갑게 부르고 있었다. 몸을 숨킨채 주위를 살펴보니, 여기는 다름아닌 ‘놀이터’였다. 이 마을에서 벌써 몇 년을 살았는데, 이런곳이 있는줄은 오늘 처음 알았다. 몸을 웅크리고 수혁이 녀석들과 누나가 성큼성큼 다가가는 곳을 바라보니, 반대편에는 그 불량해 보이는 아이 말고도 여러명의 아이들이 뭉쳐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일고 여덟명은 족히 되어 보였다. 집중을 하고 살펴보니 개중에 치마차림의 여자아이들도 더러 보였는데, 어쩐지 낯이 익었다. 미간을 찡그리고 자세를 슬쩍 고쳐 앉으며 바라보니, 아까 도서관에서 봤던 파마머리와 갈색머리가 실실 웃으며 서 있었다. 아이들의 머리 위로는 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 날리고 있었다. 나는 쉼호흡을 한번 하고 녀석들의 목소리가 조금 더 선명하게 들릴만한 곳까지 거리를 좁혀 움직였다. “많이 기다렸냐? 그건 그거고 누님한테 먼저 인사해라.” -아.. 아 이분이.. 그.. 오토바이 앞에 서 있던 녀석이 누나의 얼굴을 확인하는가 싶더니, 조금 상기된 표정으로 누나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파마머리의 여자애가 녀석의 허리춤을 툭툭 치는게 보였다. 아랑곳하지 않고 오토바이 녀석이 누나쪽으로 다가가려니까 누나가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는게 보였다. 오토바이 녀석의 뒤에서 연신 담배 연기를 뿜어내던 나머지 아이들도 -아마도 누나의 얼굴을 보고- 땅바닥에 담배를 비벼끄고는 슬금슬금 누나쪽으로 다가갔다. “우.. 우와.. 씨발.. 존나 예쁘다..” -하여튼 이새끼, 공부하고는 담쌓은 새끼. 낄낄. 이 분이 임마 저~기 도서관에서 일하시는 누님이야. “아.. 아 정말? 스물 몇 살이라고 해서, 존나 삭았겠거니 생각했는데.. 씨발 끝장난다.” 누나를 향해 쌍스러운 말을 뱉어내던 오토바이 녀석이 기어이 한발자국 더 누나에게 다가섰을때, 누나가 고개를 휙 돌리고 수혁이의 옆에 꼭 다가서는게 보였다. 그쯤되니 낄낄대고 서 있던 진수가 오토바이 녀석을 막아섰다. “넌 새끼야. 옆에 깔식이도 끼고 있는놈이 못하는 말이 없어? 그나저나 어디로 갈거냐?” -아... 일단 게임방 갔다가 술이나 한잔 할 생각인데. “새끼들, 하여튼 나이 쳐먹고 아직도 게임이냐? 후우. 알았다 알았어. 그나저나 담배하나 줘봐” 게임방이라. 근처에 게임방이 있던가? 나는 생각에 잠겨서는 하늘높이 담배연기를 뿜어대는 진수 녀석을 조심스럽게 살펴봤다. 그러면서도 수혁이 녀석의 곁에 꼼짝없이 붙어서 있는 누나의 모습이 어딘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녀석들이 기어이 게임방에 갈 생각인지 하나둘 오토바이 위에 올라타기 시작했다. 타이트한 치마 차림의 여자애들 두명이 각자 자신의 ‘남자친구’로 보이는 녀석들 바로 뒤에 하얀 허벅지를 내보이며 올라탔다. 서너대의 오토바이가 시끄럽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진수 녀석이 오토바이 녀석에게 다가가 무슨 얘긴가를 나눴다. 그러자 오토바이 녀석이 누나를 끈적한 눈으로 한번 훑는가 싶더니 나머지 아이들과 함께 놀이터를 빠져 나갔다. 그리고 휑하니 남겨진 수혁이 녀석들과 누나도 다시 발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역시.. 그만 집으로 가는게 좋겠어..” -예? 누나, 언제나 말하지만 큭. 누나는 선택지가 없어요. 흐흐. 그냥 따라와요.. “그래도... 하아..” 텅빈 놀이터에는 누나의 공허한 한숨만이 메아리 쳤다. 수혁이 녀석들을 따라서 10분정도 걸어가니 허름한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건물앞에는 오토바이 서너대가 나란히 놓여있었고, 누나의 어깨에 손을 올린 수혁이 녀석과 나머지 아이들도 천천히 허름한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한빛 피씨방’ 정말이지 생소한 건물들의 연속이다. 벌서 15년이 넘게 이 마을에서 살아왔건만, 한빛 피씨방이고 놀이터고 오늘 모조리 다 처음보는 것들이다. 그건 그거고, 수혁이 녀석들이 건물안에 들어간지 10여분쯤 지났을때, 나는 숨을 한번 몰아 내쉬고 피씨방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어서오세요!” -그.. 자.. 자리 하나 주세요.. “예?” 얘기만 들었지, 정작 피씨방에 와봤던 적이 없다. 어떤 시스템으로 운영되는지 몰라, 알반지 주인인지 모를 남자에게 기껏 내뱉은 말이 ‘자리 하나 주세요’ 였다. 그러자 나를 조금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던 피씨방 주인이 내게 슬며시 눈치를 준다. “회원이세요?” -아.. 아니요.. 가입.. 해야 하나요? “아.. 가입하시면 더 좋구요. 가입하실건가요?” -아.. 아니요. 그건 아니고. 그냥 게임하게 자리하나 ‘얻었으면‘ 좋겠는데.. “자리를 얻어요?” 그쯤되니 주인 녀석은 내가 신기해 보였는지, 슬쩍 키득대기 시작했다. 기분이 나빠져서 나도 모르게 미간에 주름을 새겨넣으려니까, 그제야 주인 녀석이 바구니 하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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