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부할 수 없는 제안 10장. 일상으로 (1) 14화
무료소설 거부할 수 없는 제안: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439회 작성일소설 읽기 : 거부할 수 없는 제안 10장. 일상으로 (1) 14화
산은 차로 30분 거리에 있다고 했지만 그것보다는 조금 더 걸렸다. 굳이 빨리 운전하지 않은 내 탓도 있었다.
그녀와 이렇게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쉬는 게 좋았다.
“다 왔어요. 내려요.”
유연이 차에서 내리며 모자를 눌러썼다. 챙이 조금 넓은 모자라 살짝만 고개를 숙여도 다른 사람들이 알아볼 것 같지는 않았다.
뭐, 신유연이 이런 산에 등산 오리라고 생각이나 하겠는가. 여기는 유명한 산도 아니었고 주말에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은 아니었다.
우리 둘이 오르기에는 아주 적합한 산이었다. 그다지 높지도 않고 유명하지도 않은 그런 산 말이다.
“배낭은 내 거 하나만 들고 갈게요. 물이랑 간식은 여기에 다 들어 있으니까.”
“알겠어요.”
“가요.”
산 입구에 있는 이정표에서부터 10분 정도의 거리는 평탄한 길이었다.
그녀와 나란히 발걸음을 맞추어 흙을 밟는 소리가 왠지 마음에 들었다.
“이렇게 흙을 밟을 때 나는 소리가 좋아요.”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도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등산 자체를 싫어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공기 좋죠?”
“네.”
하고 싶은 이야기도 많고 나누고 싶은 대화도 있었지만 언제나 일방적인 건, 하지 않는 것보다 못하다. 그녀에게 조금은 시간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우리는 말없이 꽤 한참을 걸었다. 평지를 지나쳐 숲 속으로 들어오니 한층 더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었다.
찌들어 있던 뇌가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정말 모처럼 만이었다.
“물 좀 마실까요?”
옆에서 보니 그녀가 조금 더워 보였다. 한여름으로 들어선 산은 온통 녹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우리 둘은 비교적 널찍한 바위에 걸터앉아 쉬어 가기로 했다. 등산로에서 약간은 벗어나 있는 곳이었다.
“마셔요.”
그녀가 내가 건넨 물을 마셨다. 물을 다 마신 그녀에게 내가 손을 내밀자 그녀가 다시 물병을 건네줬다.
그녀의 입이 닿았던 물병을 그대로 입을 대고 마셨다.
“그건 내가…… 입…….”
“병 있어요?”
“아뇨.”
“그런데 뭘 그렇게 걱정해요? 아~ 그럼 혹시 양치 안 해서 그래요?”
“아니거든요!”
살짝 흥분하는 모습도 왠지 인간적이었다.
“농담이에요. 진심. 화낼 때도 예쁘지만 그렇다고 너무 화내지 말아요.”
“왜 자꾸 나한테 장난쳐요.”
“친해지고 싶어서요.”
“이러면 친해질 것 같아요?”
“모르죠. 그렇지만 가만히 있으면 더 멀어질 거 같아요.”
그때 그녀의 발치 근처로 작은 뱀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뱀!”
“엄마~~!!”
뱀을 발견한 그녀와 내가 동시에 일어났고 그녀가 나에게 뛰어들다시피 달려드는 바람에 우리들은 순간 중심을 잃어버렸다.
뱀은 빠르게 지나쳐 갔지만 중심을 잃은 그녀가 뒤쪽으로 넘어지려 했다. 유연이 넘어질 거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재빨리 그녀의 허리를 떠받치며 몸을 틀어 내 몸 위로 올라오도록 방향을 바꿔 버렸다.
잠시 후 쿵하는 소리가 나며 우리 둘 모두 바닥으로 쓰러졌다. 다행히 그녀는 내 가슴팍 쪽으로 쓰러져 다치진 않은 것 같았다.
“아…… 으…… 유연 씨 괜찮아요? 어디 안 다쳤어? 아픈데 없어요?”
나는 그녀의 몸 여기저기를 살펴보았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는 모양이었다.
“많이 놀랐죠?”
눈물이 그렁그렁한 그녀를 보니 꽤 놀란 것 같았다.
“산에 오면 이렇게 날씨 좋은 날에는 가끔 뱀도 보이고 그래요. 너무 놀라지 말아요. 나도 놀랐네.”
몸을 일으키려는데 팔목 부위와 손에 시큰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그녀의 모습에 통증은 사라져 버렸다.
“괜……찮아요? 일어나 봐요.”
먼저 일어난 그녀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처음으로 그녀의 손을 잡아 봤다.
그것도 그녀가 먼저 내민, 그녀의 손을…….
이상하게 미친놈처럼 웃음이 나왔다. 그런 나를 그녀가 이상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왜 그래요. 너무 아파서 그래요? 손바닥에 피나요.”
참으려고 하는데 그럴수록 오히려 더 웃음이 터져 나왔다.
“괜찮…… 크윽…… 크흑…….”
너무 웃음을 참아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녀는 더욱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서 나라도 그럴 것 같다.
간신히 웃음을 참았다.
“머리 다쳐서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놀랐잖아요.”
그녀가 또다시 나를 향해 눈을 흘겼다.
“나 걱정해 주는 거예요?”
“아뇨!”
그렇다고 당황하긴…….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옷을 툭툭 터는데 팔목이 시큰했다. 살펴보니 손바닥 옆쪽이 긁혀서 조금 피가 나고 있었다.
그녀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고 물통을 가져와 흙이 묻은 내 손에 물을 부어 주었다.
“괜찮은데…….”
“가만히 있어요.”
그녀가 물을 뿌려 준 뒤 자신의 손수건으로 내 손바닥을 감아서 묶어 주었다.
“내려가서 약 발라요. 그만 내려가는 게 어때요?”
“발을 다친 건 아니니까 올라가요. 정상까지 얼마 멀지도 않은데.”
“정말 괜찮아요?”
“괜찮다니까요. 팔목이 시큰하긴 한데 며칠 잘 관리하면 괜찮을 거예요. 이거, 고마워요.”
내가 손수건을 그녀에게 내보이며 말했다.
“미, 안해요, 나 때문에.”
“나 걱정했구나~ 미안해하지 말아요. 유연 씨가 다쳤으면 훨씬 더 아팠을 거예요, 내가.”
“예?”
“이제 가요.”
“네…….”
이 어색한 분위기를 빨리 벗어나야 했다. 우리는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스치듯 지나가는 새소리와 이따금씩 부는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 어느덧 그녀와 나는 산에 오르는 이 행위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녀는 땀을 흘리며 힘들어 하는 기색도 보였지만 심호흡을 하기도 하고 하늘을 쳐다보기도 했다. 지나가는 나뭇잎들을 손바닥으로 쓸어 주기도 했다.
내가 본모습 중 가장 편안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정상에 올랐다.
“유연 씨 여기 와 봐요~~!”
내가 먼저 오르고 나서 그녀에게 다치지 않은 반대쪽 손을 건넸다. 잠시 주저하며 망설이던 그녀가 내 손을 잡고 정상으로 발을 내디뎠다.
아래로 탁 트인 경관이 시원한 바람과 함께 우리를 맞아 주었다. 잠시 그녀가 먼 곳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녀가…… 울었다.
“유연 씨…… 왜 그래요……?”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었지만 왠지 또 알 것 같기도 했다.
가끔 그럴 때가 있었다.
작은 무언가를 이루어 냈을 때 알 수 없이 찾아오는 눈물.
복잡한 마음으로 항상 억눌린 채 살았던 유연 씨가 이 아름다운 광경을 보면서 느꼈을 감정들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그저 가만히 서서 그녀의 눈물이 멈추기를 기다렸다.
“야호~!”
일부러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녀가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해 봐요~ 야~호~!!”
그녀가 손사래를 쳤다. 주위에 우리를 지켜보는 사람들은 없었다.
“해 봐요~ 지금 못하면 아마 죽을 때까지 못 할걸요? 이렇게 크게 소리 쳐 본 적 있어요? 없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해 봐요~ 나 말고는 아무도 없으니까.”
그녀는 잠시 갈등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이내 양손을 동그랗게 모으고 소리를 지르려다가 잠시 멈칫했다.
“……야호…….”
“더 크게 해 봐요!”
“야! 호~~!! 아~아아~~!!”
“잘하네~!”
목청껏 소리를 지르는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눈물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녀가 살짝 웃어 주었다.
뭔지 모르게 짠했다.
내가 이렇게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이었던가?
저 여자의 작은 웃음이, 나를 얼마만큼 기쁘게 해 줄 수 있는지를 깨닫는 순간이었다.
산을 내려오는 그녀의 표정이 한결 밝아 보였다. 열심히 움직인 터라 배가 고팠다.
“밥 먹고 안 갈래요?”
그녀가 싫다고 할까 봐 살짝 걱정했다.
“먹어요.”
그녀가 승낙했다. 때마침 내려오는 길에 삼계탕이라고 써진 커다란 간판이 보였다.
“괜찮죠?”
“네.”
가게로 들어갔고 그녀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방으로 안내를 부탁했다.
모자를 벗자 조금 땀에 젖은 그녀의 모습이 한결 자연스러워 보였다.
“왜 또 그렇게 봐요? 혹시 머리 떡졌어요?”
“푸흡…… 틀린 표현은 아닌데 왠지 유연 씨랑 좀 안 어울리는 표현이네요. 떡, 안 졌어요. 자연스럽고 예뻐요.”
“그쪽은…….”
“어?!”
“유! 지! 훈! 씨는, 아무한테나 보면 그냥 예쁘다고 하나 봐요?”
“대체로 그런 편이죠. 하지만 유연 씨한테 하는 것처럼 진심을 담지는 않아요. 그냥 인사치레지. 먹어요, 이제.”
젓가락질 하는데 팔목이 좀 시큰거렸다. 사실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왠지 좀 엄살이라는 게 부려 보고 싶었다. 물론 그녀의 반응이 궁금하기도 했다.
“아…….”
엉성한 젓가락질이 몇 번 빗나가자 그녀가 신경 쓰지 않는 척하면서 내 쪽으로 힐끔 바라봤다.
“어디…… 아파요?”
“아까 바닥을 짚을 때 팔목이 조금 접질렸나 봐요. 젓가락질하기가 조금 힘드네요.”
그녀는 잠시 고민하는 눈치였다. 나는 한술 더 떠 맨손으로 젓가락질을 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젓가락질은 더 엉망이 되었다.
내 꼴을 보던 그녀가 닭의 살점을 바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발라낸 고기들을 앞접시에 담아 수저와 함께 내 앞에 놓아준다.
“수저로 먹어요.”
“나 주는 거예요?”
유연이 쑥스러운 듯 내 시선을 피했다.
“어서, 먹기나 해요.”
“알았어요. 잘 먹을게요.
대학생 때부터 혼자 대도시로 나와 자취를 했다. 그 이전엔 어머니와 함께 살았지만 항상 바쁘셨기 때문에 혼자 밥 먹는 시간이 많았다. 그럴 때는 으레 텔레비전을 켜 놓거나 책을 보면서 밥을 먹었다. 그럼 조금은 외로움이 가셨다.
아플 때도 마찬가지였다. 혼자 차려먹지 않으면 누구도 챙겨 주는 사람이 없었다. 혼자라는 건 늘 그랬다.
그런 나였기에 아프다고 살을 발라 주는 그녀가 더 예뻐 보였다. 물론 나의 이런 속사정이야 그녀가 모르겠지만…….
“왜 안 먹어요?”
“잠시 옛날 생각이 좀 나서요…….”
“무슨…… 아니, 먹어요, 얼른.”
당황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식사를 마치고 계산을 하고 나니 그녀는 벌써 차 앞에 가서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조수석이 아닌 운전석 쪽이었다.
“설마 나 대신 운전하려고 여기 있는 거예요?”
“팔, 아프다면서요. 뭐, 또 운전하다가 나 때문에 다쳤다고 그런 말 듣기 싫으니까. 그냥 옆에 타요.”
“그래요, 그럼. 나도 유연 씨가 운전하는 차 한번 얻어 타 보죠.”
그녀는 꽤 운전에 능숙했다. 길도 잘 찾아 숙소까지 한 번에 도착했다.
“땀 많이 흘렸죠? 먼저 씻어요.”
“그럼…….”
그녀가 먼저 샤워하러 욕실로 들어갔다.
나도 땀에 찌든 옷을 벗어 버리고 다른 욕실로 들어선다.
팔목이 약간 부은 것 같았다. 그래 봐야 염좌일 테지만…….
씻고 샤워 가운을 걸친 후 거실로 나왔다. 냉장고에 있던 맥주를 하나 꺼내 들고 자연스럽게 소파에 앉았다. 때마침 그녀도 가운을 걸친 채 밖으로 나왔다.
“목마르죠? 난 맥주 마실 건데 한잔할래요? 아~ 술 잘 못한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물 줄게요. 아니, 여태까지 술도 안 배우고 뭐 했대?”
“해요! 술! 저도, 맥주 한 캔 정도는…… 먹을 수 있어요.”
“병인데, 알았어요. 뭘 그렇게 발끈할 것까지야.”
나는 맥주를 따서 그녀에게 한 잔을 따라 주었다.
“마셔요.”
그녀도 갈증이 났는지 반 컵 가까이를 쭉 들이켰다.
“목말랐나 봐요.”
“네.”
나도 한잔을 따라 마시고 보니 진한 향기와 더불어 조금 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맥주병을 보니 도수가 7도 가까이 되는 높은 도수의 맥주였다. 그냥 수입맥주라고 해서 비싼 거 아무거나 집어 온 거였다.
“이거 조금…… 다른 맥주보다는 된 센 거 같은데…… 안 그래요?”
“그래 봐야 맥주 아니에요? 소주는 몰라도 맥주 한 캔 정도는 마실 수 있어요. 맛있어요.”
“혹시 두 캔 먹으면 어떻게 돼요?”
“두 캔이요?”
그녀가 남은 맥주를 다 마셔 버린 뒤 잠시 생각에 잠겼다.
“글쎄요. 그렇게까지는 안 먹어 봐서 모르겠어요. 한 잔만 더 주세요.”
“저기…… 내가 봤을 땐 지금 충분한 것 같아요. 더 안 마시는 편이 좋겠어요.”
“왜요? 나 아직 멀쩡해요. 그 정도는 마실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녀가 직접 냉장고에서 맥주병을 꺼내 병뚜껑을 따려 했다.
“줘 봐요. 내가 해 줄게요.”
다행히 아직까지는 괜찮은 것 같았다.
***
“유연 씨, 괜찮아요? 이제 그만 마셔요. 취한 거 같아요.”
“안, 취했어요.”
“아닌데? 취했어요.”
“아니라니까, 왜! 자꾸~ 취했다고 그래요?”
“큭, 흐흐, 미안해요 난 취해 보여서.”
보통 맥주 한 캔이 주량이라던 그녀가 두 배 가까운 도수의 맥주를 벌써 세 잔이나 들이켰다. 단순히 산술적으로 계산해 봐도 이미 서너 배 가까운 양을 마신 그녀였다.
역시 술이라는 건 잠시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힘을 가진 것 같다. 그게 나쁜 쪽이 될 수도 있지만 유연 씨는 정반대였다.
그녀를 보고 있으니까 자꾸 웃음이 났다.
낮술에 취한 신유연.
볼이 발그레해진 신유연.
살짝 발음이 꼬인 신유연.
모두 다 귀여웠다.
“자꾸 웃지 마, 라요…….”
“알았어요. 안 웃을 테니까. 이제 그만 마셔요.”
“왜 자꾸 나한테 이래라저래라해요? 내 남편이에요? 보호자예요? 엄마냐고~?! 우리 엄마도, 남편……도, 아무~~ 말도…… 안 하는데, 당신이 왜 난리냐고…….”
“흠…… 나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