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제의 일기장 (쓰레기) 1화
무료소설 처제의 일기장: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71회 작성일소설 읽기 : 처제의 일기장 (쓰레기) 1화
처제 방의 문이 열렸다.
열려고 한 것은 아닌데 마음보다 손이 먼저였다. 아내와는 다른 향기가 상중의 코끝을 찔러대기 시작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문을 연 것만으로 처제의 단추를 푸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발 하나를 넣었을 때 창으로 들어오는 한줄기 햇살이 상중의 바지 재봉선에 닿았다. 발걸음이 멈춰졌다.
지치고 어두운 삶을 사는 사람, 상처가 많은 사람은 안다. 빛에 닿는 순간, 으레 느껴지는 따스함보다 먼저 엄습하는 것은, 데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라는 것을. 그러나 상중의 코 속으로 스며들고 있는 향기는 데였을 때의 통증마저도 잊게 할 만큼 달콤했다.
미니화분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꽃 같은 건 밥벌이에 밀려, 바라본지도 오래다. 화분들 사이 액자 속에서 환하게 웃는 처제 지연의 얼굴이 유독 상중의 눈에 들어왔다. 처제의 조막만 한 얼굴에 손을 대본다. 처제의 얼굴을 쓰다듬으려던 손길이 차갑고 매끄러운 유리에 의해 가로막힌다.
‘움켜쥐면 부서질까?’
자신에게 그럴만한 악력 같은 게 남아있지 않다는 것쯤은 잘 알지만, 도전해보고 싶다. 힘은 없어도 악만은 남았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 사람들은 이제 도전 같은 건 위험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강렬하게 움켜쥐어 조각나버린 파편들로 인해 피가 흘러넘친다 해도 상중은 한 번만이라도 새로운 것에 도전해보고 싶다. 중년이지만 그런 마음이 아직은 남아있었다. 중년이 되니 마음만 더 커진 건지도 모른다.
책들이 보인다. 유독 <로리타>, <보바리 부인>라는 제목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금기된 사랑. 파멸을 향해 달려가는 사랑. 누군가의 사랑이 누군가에겐 용납할 수 없는 죄악이라는 사실을 기록한 책들. 처제는 정말 이 책을 읽은 걸까?
일정한 높이의 책들 사이에 키가 맞지 않는 책이 하나 꽂혀있다. 상중의 손가락이 딱 들어가는 공간. 그가 거기에 손가락을 넣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볼이 붉은 소녀가 제 몸 만 한 하트를 안고 있는 그림이 표지에 그려져 있는 책. 그것은…
처제의 일기장.
심장이 두근거리다 못해 덜컥 내려앉는 기분마저 든다. 그러나 그는 이번에도 그것을 펼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일기장을 펼친다. 혹시라도 정갈한 글씨에 손때가 묻진 않을까 조심스럽게. 첫 페이지에는 무려 십년 전의 어린 지연이 있었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상중 부부가 처가에 인사를 갔던 날이었다.
―
2006년 7월 3일
야자를 마치고 집에 오니 언니와 형부가 있었다. 형부….
처음 언니와 함께 인사를 왔던 3개월 전이 떠올랐다. 그때 형부는 아빠가 주는 술을 붕어처럼 다 받아 마시고 결국 쓰러져 내 방으로 치워졌다. 그 모습은 영락없이 뒤집어진 붕어였다. 덕분에 난 오랜 만에 언니 방에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형부의 어디가 좋은지 언니에게 물었다. 언니는 그저 착하다고 대답했다.
나는 착한 사람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언니에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착한 게 아니라, 능력이 없으니 쭈그리고 사는 거 아냐? 언니는 어린 게 왜 이리 메말랐느냐고 타박했다. 나는 메마른 게 아니라, 세상을 잘 아는 거라고 쏘아붙였다. 스물아홉이나 먹고도 순진해 빠진 언니가 걱정이었다.
다음날 내 방에는 실례가 많았다는 내용의 메모가 놓여있었다. 형부의 글씨는 그래도 어른스러웠다. 그 메모들은 주방 냉장고에도, 아빠의 서재 문 앞에도 붙어있었다. 나는 붕어 같은 인간이 메모 하나 달랑 남겨 놓고 줄행랑을 친 것이라 생각하고 형부 욕을 하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엄마가 내 등짝을 후려쳤다. 새벽 일찍 떠나야 했던 형부는 엄마한테 정중하게 인사를 드리고 손수 적은 메모를 건네고 간 거였다. 형부는 그렇게 다시는 실수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보였다고 했다. 엄마는 형부가 생각이 깊고, 하는 짓도 이쁘다며 맘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거기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형부는 붕어가 아니라 조금 어른스러운 붕어였다.
그때가 벌써 3개월 전이다. 언니와 형부는 오늘 신혼여행에서 돌아왔다. 형부가 내 몫이라고 건넨 선물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외국 가수의 한정판 앨범이었다. 그걸 보고 나는 소리까지 질러댔다.
언니는 이 앨범을 구하느라 하루를 날려 먹었다며 투덜거렸다. 형부는 자신도 고3 때 음악을 들으면서 스트레스를 풀곤 했다고 했다. 그래서 꼭 찾아서 선물해주고 싶었다고 했다.
그렇게 말하는 형부의 말투랑 목소리… 그리고 마음 씀씀이. 솔직히 조금 감동했다. 붕어라고 했던 것도 괜히 미안해진다. 그에게선 확실히 또래 남자에게는 느낄 수 없는 어른스러움이 느껴진다. 문제를 해결해 줄 능력은 좀 부족할지 몰라도, 마음만은 편하게 해줄 것 같은 믿음이 든다. 왠지 언니가 샘이 나기도 한다.
지금 난 형부가 사온 앨범을 듣고 있다.
인생은 두려운 거야. 두렵다고 포기하면 아무것도 못해.
가수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어쩐지 친절한 형부 목소리 같다.
―
상중은 지연의 일기장을 덮어 제자리에 놓았다. 웃음이 나왔다.
‘붕어란 말이지?’
지연이 갑작스레 상중 부부의 보금자리에 쳐들어온 것은 며칠 전이었다. 새로운 직장 때문에 신세를 좀 져야겠다며 무작정 들이닥친 것이었다. 십년 동안 둘만 있어 조용했던 집이 갑자기 복작거리는 것 같았다.
“너 직장 없잖아?”
상중의 아내 도연이 물었다. 지연은 프리랜서 디자이너였다.
“거래처가 이 근처야. 미팅이 많아. 당분간 신세 좀 질게.”
처제는 무작정 빈 방으로 들어가 짐을 풀었다. 아이가 생기면 쓰려고 줄곧 비워둔 방이었다.
무슨 우연인지 지연이 온 다음날 상중의 어머니가 왔다. 시어머니는 어김없이 며느리를 닦달했다. 십년 째 아이가 생기지 않고 있으니 시어미의 마음도 오죽하겠으나 시달리는 아내를 보면 상중의 마음은 무거워졌다.
해가 중천에 있을 때 방에서 기어 나온 사돈처녀를 보는 사돈어른으로서의 못마땅한 표정 역시 무어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매서웠다.
“부부 둘만 있어도 애가 생기지 않는 마당에… 쯧쯧….”
노골적으로 나가라는 투였다.
“그러니 젊은 제가 있어야죠, 사돈어른. 야릇한 긴장감이 있어야 애도 잘 생긴대요. 호호”
당돌한 사돈처녀와 매서운 사돈어른의 팽팽한 긴장감이 집안을 감돌았다. 그러나,
“사돈 어르신. 제가 인테리어 디자이너잖아요. 아이 잘 생기게 하는 디자인으로 확 꾸며보려고 온 거니까 저만 믿어보세요.”
지연은 이렇게 말을 덧붙이면서 냉랭했던 분위기를 바꾸었다.
상중은 쓰레기를 버리러 분리수거함으로 향했다. 그때 다급한 발소리가 뒤따라왔다. 지연이었다. 지연은 상중의 양손에 매달린 쓰레기봉투 중 하나를 빼앗듯이 낚아챘다.
“형부와 처제의 쓰레기 데이트, 좋은데요?”
“어감이 좀 그렇지 않아?”
지연의 말을 농담으로 생각한 상중이 웃으며 말했다.
“하긴 형부와 처제가 사랑하면 쓰레기죠.”
그 말을 하는 지연의 얼굴에 떠오른 그늘을 본 상중의 표정이 일순 굳어졌다.
“…….”
“지금 읽고 있는 소설 얘기예요.”
지연은 굳어져버린 상중의 얼굴을 보지 못한 듯 대답했다.
“들어가자.”
상중이 돌아서는 순간 지연이 상중의 손을 잡았다. 상중이 당황해서 지연을 쳐다보았다.
“에이, 데이트잖아요?”
지연은 콧노래까지 부르며 경쾌하게 손을 흔들었다.
“그 노래 맞지?”
10년 전 상중이 사다주었던 가수의 노래. 지연이 베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연의 손에 붙잡힌 상중의 한 손이 지연의 손동작에 맞춰 흔들렸다. 40대가 훌쩍 넘어 조금씩 생기를 잃어가고 있던 상중의 손이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20대 지연의 손에 이끌려 춤을 추고 있었다.
“맞아요. 흥얼거릴 줄 아는 노래가 이 노래밖에 없어요.”
힘을 완전히 빼고 지연에게 맡겨 두었던 상중의 손에 갑자기 힘이 들어가더니 지연의 팔을 뒤로 확 당겨버렸다. 그 바람에 지연이 뒷걸음질 치고 말았다.
“꺅!”
한 남자가 비틀거리며 다가와 지연과 부딪칠 뻔 한 걸 상중이 끌어당겨 품에 안아 겨우 피할 수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둘을 지나친 취객이 하는 말이 지연을 안은 상중의 등에 꽂혔다.
“불륜이구만. 칵 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