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소설: 지긋지긋한 감정의 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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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487회 작성일소설 읽기 : 성인소설: 지긋지긋한 감정의 잔재
[무료소설] 지긋지긋한 감정의 잔재
소녀를 재워줘
04. 지긋지긋한 감정의 잔재
두 아웃사이더의 만남은 그렇게 사소한 일상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나미는 학교에서 자발적으로 혼자가 되길 원하는 아이였다. 귀에는 늘 이어폰을 꽂고 다녔고, 누가 말을 걸어도 어지간해서는 잘 답하지 않았다. 어릴 땐 그래도 꽤 활발했던 것 같은데, 가정의 불화가 시작되고 그녀는 모든 것이 귀찮고 재미없었으며, 지루하기만 했다.
태선 역시 언제 폐지되어도 이상할 게 없는 비인기 과목을 간신히 강의하면서, 그의 주변에는 다가오는 사람 하나 없었다. 존재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 학교에서 언제 사라져도 누구 하나 관심 갖지 않을, 그림자 같은 존재.
그러니 대화를 나눌 사람도, 마음을 나눌 사람도, 딱히 의지를 할 데도 없는 그들이 만나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고, 시간을 공유하고, 함께 식사를 한 것은 나름 특별한 일이었다.
그렇게 시나브로, 어느 순간부터 나미가 태선의 집에 드나드는 횟수와 시간이 늘어났다. 그는 종종 그녀의 공부를 봐주기도 했고 함께 고전 영화를 보기도 하며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눴다.
둘 다 그게 이상하게 불편하지 않았다. 그냥 서로 공기처럼 잘 맞는 거였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금방 흘러, 윤정의 결혼식 날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녀는 정말 결혼준비로 많이 바쁘긴 했던지, 그날 이후 태선의 집에 찾아온 적은 없었다.
“아저씨? 무슨 생각해요?”
달력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는 태선을 나미가 불렀다. 그는 그럼에도 아주 느리게, 소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너 내일 뭐해?”
“내일? 딱히…….”
“그럼 나랑 어디 좀 갈래?”
“어디요?”
“……그냥, 밥 먹으러.”
태선의 얼굴이 어쩐지 씁쓸해 보였다. 그래서 나미는 바로 눈치 채고 말았다. 바로 내일이 이 아저씨와 이혼한 전 처의 재혼식이라는 것을.
‘김윤정!!! 이딴 거 필요 없고 다신 오지 말라고!’
태선의 집에 처음 들어왔던 바로 그 날, 그는 바지만 걸친 맨 몸으로 갑자기 복도에 뛰쳐나오더니 앞서 걷는 여자를 향해 그런 말을 했다. 나미는 성인 남자가 그토록 절박하게 소리치는 걸 처음 봐서, 꽤 흥미 있게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럼 다음에 또 봐, 여보.’
‘오지 마! 제발 오지 마!’
제발 오지 말라던 남자의 말쯤은 가볍게 무시한 채 다음에 또 보자던 여자가, 그땐 좀 멋있어 보이기도 했던 것 같다. 남자에 비해 훨씬 가진 게 많아 보였던 그 아름다운 여자가 말이다.
그러나 태선을 알고 지내게 되면서 나미는 이제 그 여자가 썅 년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괜찮은 남자를, 자꾸만 괴롭히니까.
“……그래요. 가요.”
나미는 시원하게 답했다. 당신 같은 여자 없어도, 이 착한 아저씨 하나 정돈 내가 지킬 수 있다고. 나미는 그걸 꼭 말해주리라, 아니, 말을 전하지 못해도 보여줄 거라고 다짐했다.
그때, 삑삑삑삑, 현관 비밀 번호 맞추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릴 들은 태선의 낯빛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나미가 의아하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구, 올 사람 있어요?”
“……너 오늘은 지금 가야겠다, 나미야.”
“네?”
“미안. 내일 보자.”
“아저씨, 아저씨!”
나미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태선이 그녀를 현관으로 등 떠밀어 보냈다. 나미가 나가려면 현관문을 열어야 했기에, 태선은 이번에도 결국 윤정에게 문을 열어주고 말았다.
“안녕, 자기?”
문가에는 휘청 휘청 거리며 간신히 중심을 잡고 서 있는 윤정이 그에게 아는 체를 해왔다. 나미는 자신에게까지 확 끼쳐오는 술 냄새에 미간을 찌푸렸다. 태선은 윤정이 그녀를 못 보게 시선을 차단하고는 나미를 등 뒤로 돌려보냈다.
“얼른 가.”
“……네.”
“어머, 손님이 있었네? 이 구닥다리 같은 집구석에 나 말고 또 누가 올 사람이 있었어?”
“헛소리 하지 말고 들어올 거면 들어오고 말라면 말아.”
태선이 문을 닫으려 하자, 윤정이 그 사이를 재빨리 파고들었다. 아아. 또 였다. 두 남녀는 집안으로 사라졌고, 나미는 홀로 복도에 남겨진 것이다.
“……호구 아저씨.”
이 상황이 너무 짜증나서 욕설이 나오려 했지만, 태선은 자신이 그런 나쁜 말을 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이렇게 신경질 나는 와중에도 그를 생각해야 해?
쾅!!! 나미는 거칠게 문을 열고 조용한 집안으로 들어갔다.
#
윤정은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앞서 걷던 태선의 등허리를 껴안았다.
“으응, 여보, 보고 싶었어.”
“나 이사 가려고.”
“응? 갑자기?”
“네가 다신 찾아오지 못하게.”
이번엔 한 달이나 넘도록 잠잠하길래 정말 끝인 줄 알았다. 그래, 결혼한다고 했으니 이젠 다시 그러지 않겠지. 그 질기고 오랜 인연이 이렇게 끝인가 하고- 마음이 조금은 헛헛했던 것도 같다. 내일 윤정의 얼굴을 본다면, 이 정도 남아 있는 잔여물 같은 감정도 전부 사라지리라. 태선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결혼식 전 날 이렇게 또 찾아 올 줄 누가 알았을까.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네가 가긴 어딜 간다고.”
“김윤정!”
“태선아, 네가 나 없이 어떻게 산다고 그래.”
윤정은 고등학교 때처럼 태선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며 그의 등에 뺨을 문질렀다. 그녀를 떨치기 위해 자신의 허릴 감싼 손을 붙잡은 태선은 그 아련한 음성에 멈칫했다.
“……이거 놔.”
“아직도 화났어? 내가 널 버려서?”
“…하아….”
“그래서 이렇게 왔잖아. 응?”
그러나 윤정의 마지막 말에 그는 이성이 끊어지는 것 같았다.
“이렇게 왔다고? 내 몸만 취하러 오는 게 다시 온 거야?”
“……여보.”
“내가 왜 네 여보야! 지긋지긋하다며, 나란 놈이 아무 야망도 없고 비전도 없는 게 싫다며! 놔 달라고, 혼자 훨훨 날아가는데 발목 잡지 말라고! 그래서 하자는 대로 다 해줬잖아. 근데 너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어. 너야말로 나한테 어떻게 이래!”
“태선 씨.”
“진짜 이젠 내가 싫어. 가, 제발 가!”
태선은 미친 사람처럼 광분하며 날뛰었다. 그는 기어이 윤정을 문밖으로 야멸차게 내몰았다.
“두 번 다시 오지 마.”
쿵. 태선의 집 문이 완전히 닫혔다. 잠시 그 문을 바라보던 윤정은 이내 발길을 돌렸다. 또각, 또각.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제 집 문가에 귀를 대고 서 있던 나미는 숨 죽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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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정장을 꺼내 입은 태선은 아파트 입구에서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했다. 결심은 결심이고, 약속은 약속이니- 그는 오늘 꼭 윤정이 다른 남자에게 시집가는 모습을 보리라.
“하아, 괜히 같이 가자고 했나.”
그래도 호텔 뷔페면 맛있는 것도 많이 나올 테니, 나미에게 맛있는 밥 한 끼 정도는 먹이고 싶은 마음에 같이 가자고 했던 건데. 태선은 시간이 갈수록 아무래도 괜한 짓을 한 건 아닐까 싶어졌다.
“아저씨!”
“……! 어, 어. 왔네?”
그 순간, 태선은 제게 다가오는 나미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어설펐지만 화장도 했고, 검은 생머리는 컬을 넣었는지 구불거렸다. 청바지에 연한 핑크색 블라우스 차림이었지만 늘 교복 입은 것만 보다 이렇게 달라진 모습을 보니 그는 나미가 어색했고 낯설기만 했다.
“어때요? 저 괜찮아요?”
태선의 앞에 선 나미가 제 자리에서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아 보였다. 그러자 미미하게 풍겨오는 향수 냄새에, 태선은 그만 눈앞이 아찔해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