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부 8장 치욕적인, 너무나 치욕적인 (2) 6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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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501회 작성일소설 읽기 : 타부 8장 치욕적인, 너무나 치욕적인 (2) 63화
“그러지 말고…… 잠깐이면 돼. 누가 잡아 먹을까봐 그래? 같이 잠시 바람이나 쏘이고 오자고. 빨리 타.”
윤정은 망설였다. 정우의 재촉이 이어졌다.
“헤헤. 여기서 이렇게 계속 나랑 같이 서 있는 것을 저 집 사람들이 보면 어쩌려고 그래? 그래도 괜찮아?”
그 말에 윤정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웃집의 창은 불빛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그것이 윤정을 서두르게 만들었다. 설마 무슨 일이 있을까 싶었다. 윤정은 정우가 문이 열린 조수석 쪽에 급히 올라탔다.
정우가 듣기 싫은 휘파람 소리를 내며 운전석으로 돌아가 앉았다. 놈이 거칠게 차를 몰자 윤정은 집에서 멀어지는 거리만큼 점차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윤정은 정우의 옆모습을 노려보며 물었다.
“대체 어디로 가는 거야?”
“딱히 정해 놓은 데는 없어. 그냥 이렇게 달리다가 분위기 괜찮은 곳이 보이면 거기서 잠시 있다가 돌아올 거야.”
더 이상 윤정의 질문을 미리 차단하려는 듯 정우는 시끄러운 메탈음악을 크게 틀어놓으며 차의 가속도를 높였다.
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디론가 한참을 차가 달렸지만 윤정은 불안한 기색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마음을 바꿔 먹은 것이었다. 여태껏 보아온 정우는 단순했다. 강하게 치면 그 힘만큼 강하게 맞받아치는 지극히 단순한 놈이라는 것을 윤정은 진즉부터 알고 있었다. 자꾸 놈을 자극하지 말고 잘 구슬리자는 것이었다.
윤정은 정우가 자신 앞에서 흘렸던 눈물을 잊지 않았다. 설사 그 눈물의 99%가 거짓이었다 하더라도 은숙의 집에서 자라면서 자신이 친아들이 아니라는 것에 대해 놈은 오랫동안 절망했을 터였고, 그래서 여태껏 삐뚤어진 삶을 살아온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윤정이 이런저런 생각으로 무거운 마음을 추스르고 있는데, 드디어 차는 인적이 드문 어느 호젓한 공원 같은 곳에 다다라서야 멈추었다. 그곳은 공원 같은 곳이 아니라 실제로 공원이었는데,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제법 아름답게 가꾸어 놓아 주변 풍경이나 분위기가 제법 근사했다.
정우가 공원의 구석진 곳으로 몰고 가 차를 세웠다. 윤정은 말없이 앞만 바라보았다. 은은한 가로등의 불빛이 아기자기한 화단에 다채롭게 피워있는 꽃들을 더욱 아름답게 부각시키고 있었다.
윤정은 꽃들을 넋을 잃고 쳐다보았다. 지금 자신의 처참한 기분을 잠시 망각할 정도로 화사한 꽃들을 바라보는 데에만 윤정은 한참이나 정신이 팔려 있었다.
한편 윤정과 마찬가지로 정우 또한 차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고 있었지만 신경은 다른 데에 골똘해 있는 상태였다. 정말이지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책상 위에 올려놓았던 보이스 레코더가 없어진 거였다.
그날 밤새도록 윤정과 온몸이 바스러질 정도로 격한 섹스를 여러 번 나누고 모텔에서 늘어지게 한숨 때리고 나와 집으로 돌아와 방으로 가보니 책상 위에 반드시 있어야 할 그 물건이 없어진 거였다.
처음에는 자신이 착각을 한 게 아닌가 싶어 여기저기 방안을 샅샅이 찾아보았지만 보이스 레코더는 눈에 띄지 않았다. 처음부터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는 것은 여러 번 기억을 되짚어 봐도 확실했기 때문에 다른 곳에 있을 리가 만무했다.
필시 집안 식구들의 소행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정우는 집에서 그나마 가장 스스럼없이 지내는 남주 누나에게 은밀히 물어보았었다.
“누, 누나. 혹시 말이야…… 내 방에 들어갔다 나온 적 있어?”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담배냄새로 찌든 네 방에 왜 들어가니?”
조심스러운 정우의 질문에 가당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의 누나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하긴 남주 누나가 평소에도 웬만하면 자신의 방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을 정우 또한 잘 알고 있었기에 더 이상 그녀를 추궁할 수가 없었다.
“그럼 말이야. 누나가 다른 사람들한테 한 번 물어봐 줄래? 혹시 두 사람 중 누가 내 방에 들어온 적이 없었는지.”
엄마인 은숙은 그래도 좀 나은 편이었지만 아빠인 김종두와 거의 말을 섞지 않는 정우가 그들과 마주치기 싫어 누나에게 넌지시 부탁했다.
“도대체 뭣 때문에 그러는 건데?”
“아, 시발! 누군가 내 방에서 중요한 물건을 가지고 간 것 같아서 그래.”
그러자 남주가 정우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물었다.
“중요한 게 뭔데?”
정우는 짜증이 왈칵 일었다.
“……그런 게 있어. 내 생각인데, 두 사람 중 누가 내 방에 들어와서 그걸 가지고 간 게 분명해.”
남주 누나에게 부탁을 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아빠도 엄마도, 둘 다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 보이스 레코더 안에 들어있는 내용을 집안 식구들 중에서 누군가 들었다고 하더라도 정우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윤정이 문제였다. 결국 잃어버린 보이스 레코드는 며칠이 지나도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정우는 다른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정우는 묵묵히 정면으로 차창 밖을 응시하고 있는 윤정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가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무언가를 꺼냈다.
“자아~ 여기 있어.”
정우의 말에 그제야 말없이 앞만 주시하던 윤정이 고개를 돌렸다. 정우의 손바닥 위에 음성 녹음기가 놓여 있었다. 저 보잘 것 없는 것 때문에 아들 같은 정우에게 농락당했던 기억이 떠올라 윤정은 속이 문드러지는 기분이었다. 몹시 쓰라리고 비참한 심정을 애써 여미며 윤정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틀어봐.”
“후훗! 괜찮겠어? 꼰대랑 난잡하게 그 짓을 하면서 음탕하게 내뱉던 자신의 신음소리를 직접 다시 들어도 괜찮겠냐고?”
“괜찮아. 어서 틀어봐.”
물론 그것은 죽기보다 싫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정우를 믿지 못해서였다. 그런데 다시 한 번 녹음기를 재생해보라는 윤정의 말을 듣는 순간, 놈의 표정에서 당황한 기색이 빠르게 스치고 지나는 것을 그녀는 놓치지 않았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윤정은 정우를 다시 한 번 재촉했다.
“뭐하고 있어? 어서 틀어보라니까!”
“그러기 전에 내가 한 가지만 물어볼게. 만약 내가 이걸 주면 두 번 다시 나를 보지 않을 작정이었던 거지?”
윤정은 정우를 노려보았다. 평상시와 어울리지 않는 몹시 진지한 얼굴로 놈 또한 윤정의 얼굴을 뚫어지게 마주보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어떤 대답을 해 주어야 할까. 윤정은 잠시 고민했다.
물건은 아직 놈의 손아귀에 있었다. 어떤 대답이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변덕이 죽 끓는 듯 하는 이놈에게 만족스러운 대답이 될 수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을 하다가 윤정은 고개를 저었다. 이제는 이 짐승만도 못한 놈과 단호하게 끝내야 한다, 라는 생각에 윤정은 목소리에 힘을 주어 대답했다.
“그래. 그땐 네 협박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됐지만…… 지금 솔직한 심정으로는 네 역겨운 낯짝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치밀어 올라 못 견딜 지경이야. 그건 그렇고 그 물건 안의 내용을 내 귀로 직접 확인해야겠어. 여러 말 하지 말고 어서 틀어!”
당황하던 놈의 얼굴에 긴장하는 빛이 서렸다. 무언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냥 재생시키면 될 것을 놈은 한참이나 주저하고 있었다. 놈의 행동에 윤정은 초조했다.
“왜 그래? 뭘 망설이는 거야?”
그러자 할 수 없다는 듯 정우가 느린 손동작으로 재생버튼을 눌렀다. 윤정은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러나 한참 재생이 되어도 보이스 레코더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약간의 잡음소리만 들릴 뿐, 자신과 김 종두의 목소리는 일절 흘러나오지 않았다. 당황한 윤정은 정우를 쏘아보았다.
“……안에 내용 말이야……내가 지웠어.”
“뭐?”
깜짝 놀란 윤정은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었다. 아무리 제멋대로인 놈이라 하더라도 그곳에 자신의 목소리가 담긴 중요한 당사자를 배제하고 일방적으로 지워버렸다고 하니 윤정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도무지 놈이 무슨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이왕이면 확실하게 지우는 게 낫다 싶어서 내가 내 손으로 직접 다 삭제해 버렸다고! 그걸 갖고 있으면 내가 악용할 것만 같아서 마음 굳게 먹고 전부 다 지워버렸으니까 이젠 안심해도 돼.”
“이, 이런 지웠다고? 누구 맘대로 그걸 지워! 우선 당사자인 내가 그 물건이 맞는지 먼저 확인을 해야 할 거 아니야! 그렇잖아? 그리고 내가 네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을 것 같아? 분명히 네가 지운 거 맞아?”
“아, 시발! 진짜 지웠다니까! 그러니까 이제 걱정 안 해도 돼.”
“야!”
소리를 지르는 것과 동시에 윤정은 손을 힘차게 뻗어 정우의 손 위에 있는 음성 녹음기를 낚아챘다. 그런데 뜻밖이었다. 윤정이 낚아챈 게 아니었다. 처음부터 윤정이 그것을 수월하게 가지고 갈 수 있게끔 손바닥에 놈이 그저 올려놓은 것뿐이었다.
윤정은 음성 녹음기를 들고 이리저리 살폈다. 일전에 집에서 정우가 자신에게 협박을 하면서 살짝 보여준 그 물건이 맞는지 아닌지 정확하게 판단 할 수가 없었다.
그 물건이 맞는 것 같기도 했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윤정은 다시 한 번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이 물건이 그때 그 음성 녹음기인지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윤정은 그것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짜증이 일었다.
휴우~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안의 내용을 전부 다 지웠다는 놈의 양심을 믿는 수밖에 달리 어떤 방법이 없었다. 윤정은 음성 녹음기를 만지작거리다가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기 위해 조수석 쪽의 문을 열려고 천천히 손을 그쪽으로 뻗었다.
“뭐, 뭐해?”
정우가 당황한 목소리로 윤정에게 물었다. 윤정은 싸늘한 표정으로 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갈 거야.”
윤정의 매몰찬 대답에 정우가 부리나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이거 놔!”
“가긴 어딜 간다고 그래? 여긴 한적하고 으쓱한 곳이라 지금 이 늦은 시간엔 차도 안 다닌다고. 여기서 조금 더 있다가 같이 가.”
윤정은 더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일없어. 설사 내가 혼자 가다가 나쁜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너랑 같이 있는 지금보다 더 나쁘고 끔직한 일이 생기겠어? 아까도 말했다시피 이젠 두 번 다시 너를 볼 일이 없어. 너도 그런 줄 알아. 그리고 네 친구인 연수 엄마로서 간절히 부탁 하는데, 그때 그 일은 다 잊어. 정말이지 앞으로는 제발 나를 귀찮게 하지 마.”
마지막 말을 호소어린 목소리로 마무리 지으면서 윤정이 몸을 움직이려던 그때였다.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하고 자빠졌네.”
마치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나서 놈이 주머니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정말 어쩔 수 없는 놈이라고 생각하면서 윤정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놈이 부스럭거리더니 주머니 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윤정은 의아한 눈초리로 놈이 손에 쥔 물건을 바라보았다. 그것을 뚫어지게 바라본 윤정의 눈동자가 흠칫거리더니 마치 경직된 듯 얼어붙고 말았다. 정우가 손바닥에 쥔 것은 바로 나이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