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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소설: 전처와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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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기 : 성인소설: 전처와 소녀

[무료소설] 전처와 소녀

소녀를 재워줘


05. 전처와 소녀


아주 잠깐 처음 보는 나미의 모습에 정신이 혼미했던 태선은 재빨리 정신을 차렸다. 그는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입으니까 꼭 딴 사람 같다, 너.”


“정말요? 괜찮단 소리죠? 다행이다. 그래도 신경 쓴 보람이 있네.”


“음……그래도 신발은 갈아 신어야 겠다.”


“…아….”


태선의 지적에 나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아무리 신발장을 뒤지고 또 뒤져도 자신의 형편에 이런 날 마땅히 신을만한 신발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래도 최대한 깔끔한 걸 신는다고 하긴 했는데, 태선이 그렇게 말하니 서운함이 밀려오려는 찰나.


“이거 한 번 신어볼래? 사이즈가 맞을지 모르겠네.”


태선이 들고 있던 쇼핑백에서 상자를 꺼내더니 나미 앞에 굽이 낮은 새 구두를 놓아주었다. 나미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이- 이게 뭐예요?”


“보면 몰라? 구두잖아.”


“누가 그걸 몰라요……정말 내 거예요?”


“그럼 설마 내가 신으려고 샀을까.”


태선이 작게 웃었다. 나미는 그의 웃는 얼굴을 끝까지 바라보지 못하고 서둘러 고개를 내렸다. 심장이 이상하리만치 두근거리는 게, 아무래도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나미는 숨까지 참으며 그가 내민 구두에 천천히 발을 넣었다. 작은 리본이 달린 검은 애나멜 구두는 마치 맞춤 제작한 것처럼 그녀의 발에 꼭 맞았다. 한 번도 누군가에게 이런 선물을 받아 본 적 없던 나미는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거 정말 내가 신어도 되는 거예요?”


“그렇대도. 내가 보기엔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넌 어때? 신발은 잘 맞니?”


“……발에 잘 맞아요. 제 마음에도 들고요. 감사합니다.”


“감사하긴 뭐. 여자 신발 처음 사봤는데, 나도 보람이 있네. 자, 그럼 갈까?”


태선이 마치 무도회장에 입장하듯 나미에게 팔을 내밀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는 이내 수줍게 그의 팔에 자신의 팔을 끼워 넣었다.


또각, 또각. 난생처음 신어보는 소녀의 구두에서 경쾌한 소리가 가볍게 울려 퍼졌다.


*


과연. 윤정이 예고했던 대로 결혼식은 무척이나 성대했다. 항상 그녀가 원했던 삶처럼 모든 것이 호화롭고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어울릴 수 없는 것은 태선과 나미, 둘 뿐이었다.

“아저씨, 숨 막히지 않아요?”


주위를 몇 번 둘러보던 나미가 태선의 귓가에 작게 소곤거렸다. 태선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우리 그냥 밥 먹지 말고 나가요.”


“정말 괜찮겠어? 그래도 여기 음식은 맛있을 텐데.”


“어차피 이런 기분으로 먹으면 체해요. 아저씨는 먹고 싶어요?”


“아니. 나도 어서 나가고 싶었어.”


둘은 눈을 마주치며 키득거렸다. 모처럼 타인과 마음이 통한 기분이었다. 태선은 부조를 한 뒤, 온 김에 윤정에게 눈도장 정도는 찍고 가자 싶어 일단 신부대기실로 향했다.


사람들 사이에 화사하게 웃으며 앉아 있는 윤정을 본 순간, 태선은 왠지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찬탄이 아니라, 질식에 가까운 기분이었다.


“……예쁘네. 축하한다.”


“와줘서 고마워, 태선 씨.”


순백의 드레스를 입고 있는 윤정의 모습은 말 그대로 한 떨기 꽃처럼 아름다웠다. 그녀가 지금 걸치고 있는 것들만 해도 수억 원대일 것이었다. 태선 자신은 죽었다 깨어나도 해줄 수 없는 현실을 윤정은 이 순간 아무렇지 않게 누리고 있었다. 그 사실이 못내 그의 입안을 텁텁하게 만들었다.


“안녕하세요.”


그 순간, 나미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며 인사를 건넸다. 윤정의 눈가가 미세하게 굳어졌지만, 태선은 그를 알아채지 못했다.


“아, 네. 태선 씨, 이 분은 누구?”


“……요즘 내가 친하게 지내는 이웃?”


“지금은 그렇지만, 미래엔 어떻게 될지 모르죠. 애인이나 와이프가 될지 어떻게 알아요?”


나미가 방긋 웃으며 태선의 팔짱을 자연스레 꼈다. 그러나 그는 뿌리치지도 않고 웃으며 그녀의 이마에 살짝 꿀밤을 먹였다.


“요게. 툭하면 어른을 놀리려고.”


“아야. 헤헤.”


생각보다 더 친밀한 두 사람의 모습을 윤정은 무감하게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저 여자애, 어딘지 낯설지 않았다.


“아, 우리 구면 같은데. 맞나요?”


“어……네. 기억 못하실 줄 알았는데.”


“아직 학생 맞죠? 꽤 어려 보여서. 자기 능력 좋다. 이렇게 어리고 예쁜 친구랑 같이 다니고.”


윤정의 스스럼없는 ‘자기’라는 표현에 태선은 움찔했다. 그러나 그녀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근데 벌써부터 남자한테 매달려 살고 그러지 마요. 없어 보여.”

“…….”


“태선 씨도 그래, 순진한 어린 애 데리고 장난 그만 쳐. 보기 안 좋다. 나나 되니까 이해하지.”


웃음기서린 윤정의 말에 분위기는 완전히 싸해지고 말았다. 태선도, 나미도, 아무도 웃지 않았다.


“……이만 가볼게. 얼굴 봤으니 됐지, 뭐.”


“왜. 밥 먹고 가.”


윤정의 말에 대신 답하는 사람은 나미였다.


“아니에요, 갈 거예요. 신발이 새 거라 그런가. 발이 좀 아파요, 아저씨.”


“그래? 길이 덜 들어서 그렇겠지. 많이 아프면 뒤축을 구겨 신어.”


“에이, 아저씨가 사 준건데 어떻게 그래요. 그리고 그 정도는 아니야.”


“그럼 나 붙잡아. 부축해 줄게.”


“네.”


자신이 한 말 따위는 신경도 안 쓰는 듯, 오롯이 두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에 윤정은 완전히 없는 사람이었다. 태선이 자신 외에 다른 여자에게 저렇게까지 다정히 대해주는 걸 본 적 없던 윤정은 부케를 쥔 손이 새하얗게 질리도록 힘을 주었다. 거기다 저 반짝이는 구두까지도 그녀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고 있었다. 윤정은 자신도 모르게 눈에서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잘 살아. 우린 다시 보지 말자.”


“…….”


태선은 윤정을 향해 흘끔, 돌아보고는 나미와 함께 신부대기실을 나섰다. 윤정은 석고상처럼 그대로 굳어 한동안 미동도 않은 채 그가 나간 문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


“우리 좀 너무 유치했나?”


“원래 남녀 사이가 다 유치하고 그런 거죠, 뭐.”


나미의 조숙한 말투에 태선이 피식 웃었다.


“누가 보면 네가 어른인 줄 알겠다.”


“몰랐어요? 여자가 남자보다 정신연령이 훨씬 더 높은 거.”


“으이구, 아는 것도 많지. 이 똑똑한 아가씨야.”


두 사람이 티격태격 말을 주고받는 그때, 누군가 태선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여어, 홍태선이. 이게 얼마만이야?”


“……아, 석훈아.”


나미는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에 조용히 한 발 물러났다. 태선과 대학 동기인 석훈이 그를 몹시 반가워하는 한 편, 태선은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너 설마 윤정이 결혼식 온 거야?”


“……초대 받았거든, 걔한테.”


“와, 김윤정. 진짜 대단하다, 대단해. 자기 재혼식에 전 남편을 다 초대하고. 그리고 오란다고 오는 너도 대단하고.”


“오랜 친구기도 하니까. 너처럼.”


“어련하시겠냐. 아, 너 여전히 그 대학 강의 나가?”


“뭐, 그렇지.”


그 순간 나미는 보았다. 석훈이 태선을 안쓰럽게 바라보는 찰나의 시선을 말이다.


“안되겠다. 오늘은 좀 그렇고 나중에 연락할게. 내가 박 교수님이랑 자리 좀 만들어 볼게.”


“어? 네가?”


“그래. 너도 남들처럼 공부를 할 만큼 했는데 언제까지 강사만 할 거야. 슬슬 올라가야지.”


“…….”

“전화하면 꼭 받아라. 알았지?”


석훈은 태선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고는 일행의 부름에 저만치로 멀어져갔다. 나미는 어딘지 어두워진 것 같은 그의 표정을 살피며 슬며시 옷깃을 잡아당겼다.


“아저씨? 괜찮아요?”


“……그럼. 내가 안 괜찮을 게 뭐냐. 가자, 우리.”


태선은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나미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머릿속은 아무 생각도 없어 진공상태나 마찬가지였다.


‘박 교수… 박 교수라….’


조용히 되뇌던 태선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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