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소설: 두 아웃사이더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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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524회 작성일소설 읽기 : 성인소설: 두 아웃사이더의 만남
[무료소설] 두 아웃사이더의 만남
소녀를 재워줘
03. 두 아웃사이더의 만남
다음 날 아침. 학교에 출근하기 위해 아파트를 나서는 태선의 시야로 우편함에 꽂힌 흰 봉투가 들어왔다. 그는 설마, 하는 생각으로 다가가 우편물을 낚아챘다.
역시나, 어젯밤 윤정이 주고 간 바로 그 청첩장이었다.
“아, 미친…….”
태선은 황당하면서도 어이없고, 짜증나는 얼굴로 전 처의 청첩장을 쳐다보았다. 사람을 엿 먹이는 방법도 가지가지라고 생각하며 확 구겨버리려던 그는 잠시 멈칫했다. 태선은 손에 들어온 청첩장을 보며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지 말고 당신도 다음 달에 내 결혼식에 오던가. 호텔 뷔페니까 식사 한 끼 하고 가. 아, 청첩장 있어야만 들어올 수 있긴 한데. 하나 줘?’
‘옷 깔끔하게 입고 와. 알았지? 거기 중요한 사람들 많이 온다. 그럼 난 갈게.’
“하……. 오라면 누가 못 갈 줄 알고. 웃기는 계집애.”
그는 마음을 바꿔 윤정의 청첩장을 재킷 안쪽에 고이 챙겨 넣었다. 전 남편이 자신의 재혼식장에 찾아와주길 이렇게 바란다니, 꼭 가주리라.
태선은 어금니를 꽉 깨문 채 전투적으로 걸어갔다. 아침부터 투지력이 최고치를 찍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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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선과 윤정은 고등학교 때부터 만난 사이였다. 서로 자라 수능도 치고 대학에 가고, 어른이 되는 과정을 전부 옆에서 보아 온 사이였던 것이다. 결혼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자만이었고, 그 자만은 오해를 낳았다.
윤정은 야망이 있었다. 성공해서 남부럽지 않은,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것이 그녀의 꿈이었다. 그러나 태선은 풀잎 같은 남자였다. 더 높은 곳으로 가지 않더라도 가진 것에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바로 그 다른 성향 때문에 싸움은 결혼 후에 본격적으로 시작 되었다.
오랜 친구이자 오랜 연인이었던 그들의 관계는 끝내 이혼 서류에 싸인을 하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아니, 태선은 분명 그렇게 끝인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두 달 전, 윤정이 그를 다시 찾아오면서부터 전부 이상하게 꼬이고 말았다.
그러니 어쩌면……그날 자신이 직접 가서 모든 것을 보고 제대로 인지를 하고 나면, 이 빌어먹을 관계를 영영 끝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10여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해보지 못했던 ‘거절’이란 것을, 그때는 정말 해볼 수 있을지도.
“태선 아저씨?”
그 순간 익숙하지만 낯선 음성이 태선의 발을 붙잡았다. 속으로 안 좋은 생각들만 계속 하고 있었기 때문인지 태선의 얼굴은 한껏 찌푸려진 채였다. 그 상태로 눈을 들어보니 어젯밤 그 소녀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 넌…….”
태선이 뭐라 아는 척을 하려는 그때, 나미의 검지가 그의 찌푸려진 미간을 슬쩍 눌러 펴주었다. 갑자기 다가온 여고생의 손길에 태선은 흠칫하고 말았다.
“아침부터 그렇게 인상 쓰고 있으면 주름 생겨요.”
“……고맙다, 내 주름 걱정이나 해주고. 학교 가니?”
“네. 아마?”
“아마? 벌써부터 땡땡이 치고 그러면 못 쓴다.”
“뭐야, 개꼰대 같아.”
“아마? 나도 꼰대 맞을 걸.”
“웩. 존나 싫어.”
그의 대답에 나미는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태선은 피식 웃고 말았다.
오늘 나미는 어제와 달리 교복 재킷까지 챙겨 입은 모양이었다. 태선의 시선이 어젯밤 라면 국물이 떨어진 곳을 흘끔거렸다. 그의 눈길을 느낀 나미가 갑자기 가슴을 쭉 내밀었다.
“그렇게 내 가슴이 보고 싶었어요?”
“다행이네, 얼룩 안 져서.”
“무슨 얼룩이요?”
“어제 라면 국물 흘렸잖아. 그게 은근히 자국이 남거든.”
“허, 참. 아저씨는 정말 호구 잡히기 딱 좋은 스타일이에요. 그거 알아요?”
두 사람은 나란히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어제 처음 만난 사이였는데도 이상하게 친근하고 편했다. 태선은 갑자기 얘기가 왜 그리로 튀는지 알 수 없었다.
“내가 뭘 어쨌는데 호구 잡히기 딱 좋은 스타일이라는 거야?”
“착하고, 우유부단하고, 섬세하고. 여우같은 여자들이 잡아먹기 아주 쉬운 타입인 거죠.”
“아……그런가.”
“그러니까 항상 조심해요. 여시들한테 물리지 않게.”
자기보다 열 살은 더 어린 소녀한테 이런 얘길 들으니 태선은 뭔가 우스웠다. 그리고 가진 것도 없는 제가 여자들한테 물려봤자 무슨 피해가 있겠는가.
“가진 것도 없는데 물려 봤자지. 그런 여자들은 가진 게 많은 남자한테 가기 마련이거든.”
“……아닌데. 가진 게 왜 없어요. 어제 그 아줌마 말 들어보니까 잘난 남자보다 그거 하나는 실한가 보던데.”
나미의 짓궂은 농담에 태선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어제부터 이 어린 여자애한테 원투 펀치를 몇 번이나 맞는 건지 모르겠다.
“야, 야. 너는 무슨……그……요즘 그러면 성희롱으로 잡혀가는 거 몰라?”
“가진 게 많다고 해줘도 난리.”
“야!”
“야, 아니고 나미라니까요. 내 이름 어제 알려줬잖아요, 홍태선 아저씨.”
나미는 한마디도 지는 법 없이 태선의 말에 꼬박꼬박 대꾸했다. 그러면서 둘은 같은 버스에 올라타 맨 뒷좌석에 나란히 앉았다. 소녀와 같은 버스를 타는 것에 태선이 물었다.
“그래, 그래. 반나미 학생. 너 영광고등학교 다니니?”
“네. 아저씨는 어디 가시는데요?”
“영광 대학교. 거기서 애들 가르치거든.”
“……설마, 교수?”
“애석하게도 아직 그건 아니고, 시간 강사 정도?”
“아, 어쩐지. 꼰대 같은 건 다 이유가 있었어.”
나미는 생각만으로 두통이 오는 것처럼 관자놀이를 짚고 고개를 흔들었다. 태선이 그런 그녀를 보고 또 웃고 말았다. 나미를 만난 후로 윤정의 청첩장을 보고 기분 나빴던 것이 어느 새 전부 사라져 있었다.
“자꾸 꼰대, 꼰대 거리는데 듣는 꼰대 기분 나쁘다?”
“와……진짜 핵 노잼인 거 알아요?”
“핵 노잼? 그게 뭔데.”
“그것도 몰라요? 핵만큼 재미가 없으시다구요. 나 이거 물어보는 사람 처음 봤어.”
나미가 완전 질렸다는 듯 말하자 태선은 심각한 얼굴을 했다.
“그거 큰일이네. 반나미 학생 웃는 거 보려면 내가 열심히 재밌어져야겠다.”
“……아저씨가 왜 나 웃는 걸 봐야 하는데요?”
“사람은 예쁜 걸 좋아하니까. 내가 그랬잖아, 너 웃는 거 참 예쁘다고.”
“……아, 뭐래. 짜증나.”
나미는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그녀의 귀 끝이 붉어져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래도 내 덕분에 학생 땡땡이는 막은 거 맞지? 이거 얼마나 다행인 일이냐.”
“아저씨, 땡땡이는 아무 때나 칠 수 있거든요?”
“물론 그렇지만, 적어도 아침 수업 한 두 개는 듣고 나갈 거 아니니. 그게 어디야.”
“하……. 누가 선생 아니랄까봐. 아저씨 친구 없죠?”
나미의 말에 태선은 뜨끔한 얼굴을 했다.
“……원래 어른들은 친구 별로 없어.”
“거짓말. 우리 엄마만 봐도 그건 아닌 거 같던데?”
“……넌 친구 많아서 좋겠다, 야.”
“사실 저도 없어요, 친구.”
나미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한창 또래 아이들과 같이 놀 나이인데 친구가 없다니. 태선이 이유를 물어보려는 찰나였다.
- 이번에 내리실 곳은 영광 고등학교, 영광 고등학교입니다. 다음 역은 영광 대학…….
나미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선은 그녀를 향해 따스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학교 잘 갔다 와. 괜히 친구들하고 싸우지 말고.”
“……아저씨나 잘 다녀오세요. 여우같은 여자들 조심하고. 특히 거기 조심.”
나미의 시선이 아래로 잠깐 떨어졌다 올라왔다. 태선이 스읍, 하며 일부러 험상궂은 표정을 지어도 나미는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소녀는 버스에서 내리기 전 잠깐 태선을 일별하고는, 문이 열리자 후다닥 뛰어 내렸다.
“넘어질라, 조심하지.”
그는 혼잣말을 하며 멀어지는 나미의 뒷모습을 바라봐 주었다.